253화
“개방 놈들은 원래 저렇게 안하무인이냐?!”
철중구가 버럭 역정을 내며 여규에게 물었다.
기부를 했다는 뿌듯함과 다시 여행을 시작한다는 설렘이 웬 거지 한 놈 때문에 엉망진창이 돼버렸다.
철중구는 뒤를 돌아보며 욕설을 뱉었다.
“개방의 방도가 다 저렇진 않아. 저 사람이 특이한 걸 거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여규도 언짢음을 숨기지 못 했다.
철중구는 웃기지 말라는 듯 외쳤다.
“저놈만 그런 거라고? 저놈 저거 면전에다 대고 개소리하는 게 몸에 배 있었어! 평소에도 저러고 다닐 거다! 개방의 분위기가 원래 저러니 그걸 보고 배웠다는 게 더 설득력 있어 보이는데? 같은 정파라고 편들지 말고 객관적으로 보라고!”
개인의 행실을 전적으로 조직의 탓으로 돌리는 게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분이 풀리지 않을 만큼 불쾌함이 차올랐다.
흥분한 철중구에게, 여규는 손바닥을 펴서 일단 자신의 말을 들어보라는 동작을 취했다.
“저 사람이 특이한 거라고 생각한 데는 이유가 있어. 매듭 못 봤지? 칠결(七結)이었어.”
“칠결? 그게 뭐?”
“장로라는 뜻이야. 저 나이에 장로까지 오르는 자는 극히 드물어. 그리고 완고해 보이는 외모……. 개방 최연소 장로라는 정의개(正義丐) 구칠이 분명해.”
철중구는 눈을 홉뜨며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정의개? 악이라면 지옥 끝까지 따라가 박멸한다는, 정의 구현에 미친 거지 말이냐? 저게 그놈이라고?”
“응. 나도 아까는 떠올리지 못했는데 방금 생각이 났어. 개방의 총순찰(總巡察)이자 용두방주(龍頭幇主)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는다는 남자. 차기 방주에 오를 후개(後丐)의 강력한 후견인. 아까 그 사람, 개방에서 가장 유명한 정의개가 분명해.”
구칠은 현재 개방의 인물 중 인구에 가장 많이 회자되는 남자였다.
별호처럼 악을 끔찍하게 미워하며, 불의와는 절대 타협하지 않는 의(義)의 표상이었다.
그래서인지 철중구의 표정은 뭐라 설명하기 힘들 만큼 기이했다.
저자가 진짜 구칠이고, 세간의 소문이 맞다면, 아까 보인 태도는 마른 비를 악인으로 의심하고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중구는 들어봤겠고 비아를 위해 설명을 하자면, 구칠을 유명하게 만든 일화가 몇 가지 있어. 그중 최근의 일을 꼽자면 상납금에 대한 설전과 육정마(肉情魔) 추격전을 들 수 있는데….”
무림 문파들이 해당 지역의 상인들로부터 거둬들이는 상납금은 기부라는 명목으로 오랫동안 자행된 관행이었다.
좀 더 노골적인지 아닌지의 차이만 있을 뿐, 상납금은 정사를 막론하고 거대 문파라면 받지 않는 곳을 찾기가 힘들었다.
몇 년 전, 구칠은 정파 회합에서 바로 그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하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는 정파요. 때가 어느 땐데 아직도 그런 걸 받는단 말입니까? 원에게 착취당하는 민초들에게 베풀진 못할망정 상납금이라니! 그게 보호비 운운하며 돈을 갈취하는 사파의 쓰레기들과 다를 게 무엇이란 말이요?’
당연히 반발이 터져 나왔다.
그건 엄연한 자발적 기부다, 그조차 받지 않으면 문파의 운영은 어떻게 하느냐, 우리가 아니면 그들은 파락호나 사파에게 시달릴 것이다, 현실을 모르고 이상만 논하는 게 구걸로 연명하는 걸개답다….
구칠은 비난에도 수그러들지 않았고, 걸쭉한 욕설을 토해내며 그 자리에 있는 모두와 맞섰다.
‘씨팔! 지금 누구 앞에서 씨알도 안 먹힐 소리를 늘어놓는 거야? 당신들, 토지는 물론이고 알짜배기 사업을 몇 개씩이나 갖고 있잖아? 매달 당신들 손에 들어오는 액수까지 읊어줄까?’
‘입에 풀칠하기도 힘든 민초들의 돈까지 뜯어야만 직성이 풀리겠냐? 상납금 없이 문파 운영이 힘들 정도라면 당장 현판 내려, 이 개새끼들아!’
구칠은 오대세가의 가주와 구파일방의 장문인에게까지 삿대질하며 막말을 퍼부었다.
자신들의 수장이 모욕을 당했다 여긴 수행원들이 칼을 뽑는 사태로까지 번졌고, 회합은 거기서 깨졌다.
회합에 참여한 문파들은 씩씩대며 돌아갔지만, 세간의 민심은 구칠의 손을 들어주었다.
불만이 있어도 티를 내지 못했던 백성들이 구칠의 편을 들었고, 정도의 문파들은 예상치 못한 거센 반발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명분을 무엇보다 중시하는 그들에게 그건 비상사태나 다름없었고, 여론에 밀려 실제로 상납금을 줄이거나 폐지하는 문파들이 나타나자 구칠의 이름은 중원을 달궜다.
그가 꼴 보기 싫더라도 누구도 그에게 대놓고 항의할 수 없었던 이유였다.
“와… 그건 대단한데? 뚝심 있는 사람이네?”
“응. 더 유명한 사건도 있어. 구칠이 청해성 쪽에 있는 개방의 분타를 순찰하던 때였는데….”
청해성은 마교가 있는 신강과 인접해 있기에 마교의 인물들이 심심치 않게 출몰하는 지역이다.
구칠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게 된 것은 색마로 유명한 육정마(肉情魔) 파융을 추살한 사건 때문이었다.
분타를 순시하기 위해 이동 중이던 구칠은 신강을 넘어 청해에 들어와서 강간을 일삼던 파융을 마주쳤고, 납치한 여인을 범하려던 그와 일장 격돌한다.
문제는 파융이 마교의 상위 서열을 차지할 정도의 강자라는 점이었다.
파융을 따르는 수하들과 구칠의 수행원들이 싸운 끝에 둘을 제외한 전원이 목숨을 잃었고, 구칠도 작지 않은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파융은 눈이 뒤집혀서 달려드는 구칠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느꼈고, 신강으로 달아났다.
구칠은 곧바로 지원 요청을 넣었으나 청해성의 분타주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까딱하면 마교와의 전면전으로 번질 수 있는 상황이니 여인을 구한 것으로 만족하고 그쯤에서 상황을 정리하자는 게 분타주의 의견이었다.
하지만 구칠은 대로하며 청해성의 경계를 넘었다.
그리고 신강으로 들어가 홀로 파융을 쫓았다.
사십여 일에 걸친 추격전 끝에 구칠은 마교의 본단이 있다고 알려진 천산의 턱밑까지 다다랐고, 끝끝내 타구봉(打狗棒)으로 파융의 머리를 부수는 데 성공했다.
그가 놈의 수급을 들고 돌아와 여인의 앞에 내려놓았을 때, 중원의 협사들은 구칠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열광했다.
“마교가 구칠을 가만히 놔뒀던 건 파융이 교에서 쫓겨난 상황이었기 때문이란 게 뒤늦게 밝혀졌어. 파융이 일반 백성을 상대로 더러운 짓을 하는 바람에 팔 하나가 잘리고 쫓겨난 거였다더라. 마교의 상황은 알 수 없지만, 그들도 그런 건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인가 봐.”
얼마나 급했으면 천산으로 되돌아 갈 생각을 했을까.
구칠이 파융의 처지를 알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설령 알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천산까지 홀로 추격할 배짱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구칠이 유명해진 데는 충분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눈썹을 찌푸리고 듣던 철중구가 말했다.
“나는 원래 개방을 싫어해. 사지 멀쩡한 놈들이 제힘으로 돈 벌 생각은 않고 구걸이나 하고 말이야. 그놈들은 애초에 글러 먹은 것들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구칠은 나도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어. 근데… 듣던 것과 달리 상당히 별로인데?”
철중구는 실망했다는 표정이었다.
여규는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 구 장로님은 정파의 후기지수들 사이에서 선망의 대상이거든. 근데 아까 그 태도는… 정말 별로였어.”
거기까지 말한 여규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아…! 어쩌면 그것 때문일지도….”
“그것? 뭐 말이냐?”
“구 장로님이 마교를 끔찍하게 증오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 원래 구 장로님은 신강 출신이었는데 개방에 들어가기 전에 가족이 마교도에게 몰살당했다고 해. 그래서 마교도라면 치를 떤다고 하는데……. 사실 그건 정파인들에게는 딱히 흠이 될 게 없거든.”
정파든 사파든 중원의 무인들이 마교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건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이야기였다.
어쩌다가 마른 비 덕분에 소교주나 사영과 인연이 닿았지만, 여규나 철중구도 원래는 마교도라면 근원적인 거부감이 있었으니까.
사실 그건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자신들에게는 마른 비가 소중한 친구지만, 마른 비를 모르는 구칠이 마교의 인물들과 연이 닿은 그를 경계하는 건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아냐. 그래도 추측만 가지고 그따위로 사람을 대하는 건 잘못된 거야. 구칠이 정의의 화신일지라도 난 그놈이 싫다.”
철중구는 딱 잘라 말했다.
여규도 고개를 끄덕였지만, 복잡한 표정이었다.
구칠의 행동 자체는 비난 받아 마땅하더라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반응이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들도 대립하는 집단 간에 날을 세우는 건 흔한 일인데, 수백 년간 목숨을 걸고 싸워온 적인 데다 가족의 원수나 다름없는 자들과 연관이 있다면 경계하는 게 당연하리라.
물론 심증만 가지고 그렇게 대하는 건 분명 잘못된 것이었지만.
“흠… 그런 사정이 있었구나.”
여규의 설명을 들은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사연이 있다면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근데 뭔가 좀….’
첫 만남이 어긋나서일까?
이상하게도 마른 비는 구칠에겐 정이 가지 않았다.
여규의 말대로라면 겉으로 드러나는 태도가 어떻든 좋은 느낌이 들어야 정상인데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들었다.
‘다짜고짜 몰아붙여서 그런가? 아니라고 했는데도 적을 대하듯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자연기가 전해주는 감각은 믿을 만하지만, 결국 그것도 하나의 느낌일 뿐이다.
자신 역시 불완전한 사람이고, 불쾌함이 크다면 좋아질 수 없는 건 당연한 이치니까.
“신경 쓰지 말자. 다시 마주칠 일 없겠지 뭐.”
개방의 실체를 모르는 마른 비와 달리 여규와 철중구는 굳은 표정을 풀지 못했다.
“이놈 이거 태평한 거 봐라. 그렇게 간단히 생각하면 안 돼, 인마.”
“맞아. 개방의 촉각에 걸린 이상 방심하면 안 돼, 비아야. 파융의 예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구 장로님은 집요하기로 유명해. 아마 혐의가 풀릴 때까지 계속 쫓아다닐걸?”
개방이나 하오문과 엮인 사람치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사람이 없다는 건 세 살배기 아이도 아는 일이다.
여규와 철중구가 우려를 표했지만, 마른 비는 태연하기만 했다.
“내가 잘못한 건 없잖아. 앞으로도 그릇된 일은 하지 않을 거고. 그럼 걱정할 게 뭐가 있겠어. 만약 부당한 대우를 받는다면 그때 가서 대응하면 돼. 정당하지 못한 대접을 참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허어… 참. 이놈은 당당한 건지, 태평한 건지….”
말이야 바른 말이지만 세상 일이 어디 마음대로 흘러가던가.
그렇다고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닌 것도 사실이다.
철중구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말했다.
“에라, 모르겠다. 그래, 네 말대로 신경 끄자. 짜증나게 하면 개방이고 뭐고 들이받지 뭐. 협검 형님 말씀대로 우리 셋에 별비가 더해지면 누가 오든 대가리 쪼개는 건 어렵지 않으니까.”
철중구는 머리 아프게 고민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일단 지켜볼 수밖에 없는 건 여규도 마찬가지였다.
둘은 마른 비의 뒤를 따라나섰고, 고우를 벗어나 북상하기 시작했다.
여행은 예상외로 순조로웠다.
간간히 은밀한 눈길들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지만 주의를 끄는 행동은 없었고, 일행은 발길 가는 대로 이동하며 간만의 여유를 맛봤다.
강소성 일대는 전란 중인 것치고는 생각보다 치안이 안정되어 있었다.
물자는 부족하지만 도적이나 마적 떼가 출몰하는 지역은 드물었고, 잘 훈련된 정병들이 지역을 안정시켰다.
상황이 급변한 건 주원장의 세력권을 넘으면서부터였다.
쐐애애액―!
정비가 되지 않아 엉망진창인 관도를 걸을 때였다.
난데없이 쏟아진 화살 세례에 일행은 전투태세를 갖췄다.
“어떤 새끼들이야? 죽고 싶냐?!”
철중구의 고함과 함께 화살을 쳐낸 마른 비 일행이 일단의 무리를 노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