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나,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다니…!”
“잘못 건드렸어…. 무림인이다….”
“미친… 그러니까 그냥 보내자고 했잖아! 느낌이 안 좋다고! 우, 우린 다 죽었다….”
추레한 행색의 사내들이 헛바람을 집어삼켰다.
퀭하게 파인 눈과 쑥 들어간 볼.
피죽도 못 먹은 듯 삐쩍 곯은 그들은 뼈 위에 살가죽만 걸쳐놓은 모습이었다.
예닐곱 명의 사내들은 철중구의 서슬에 움츠러들더니 곧바로 넙죽 엎드렸다.
“죄송합니다! 하늘을 몰라뵙고!”
“사, 살려 주십시오! 너무 배가 고파서 그만…!”
그들은 파리처럼 두 손을 싹싹 빌며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철중구는 도를 움켜쥐고 그들에게 걸어갔다.
“다짜고짜 화살을 날린 새끼들이 그게 할 소리냐?”
자신들이 무공을 익히지 않은 범인이었다면 그대로 화살에 꿰뚫려 죽었으리라.
아무리 먹고 살기 힘들어도 이런 짓을 하는 놈들은 봐주면 안 된다.
철중구가 눈을 부라리자 마른 비와 여규가 그를 말렸다.
“중구, 저들의 행색을 봐. 굶어죽기 직전이야.”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지만, 우린 멀쩡하잖아. 이번만 넘어가자.”
철중구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우리를 죽이려고 한 놈들을 봐주자고? 진심으로? 야, 이 물렁한 놈들아! 우리가 무인이 아니었으면 그대로 몰살이었어! 이런 새끼들은 봐주면 안 돼!”
철중구는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탕탕 쳤다.
여규가 납작 엎드린 사내들에게 재빨리 다가가서 말했다.
“당신들. 지금 우리가 당신들을 해쳐도 할 말 없는 거 알죠?”
깡마른 사내들은 감히 대꾸도 못 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여규는 품에서 은자 하나를 꺼내더니 그들에게 건넸다.
“이거면 당분간 연명할 수 있을 거예요. 아무리 먹고살기 힘들어도 다신 그러지 마요. 약속할 수 있죠?”
사내들은 감격한 표정으로 울먹였다.
“세상에 이런 분이…! 가, 감사합니다!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저희도 원래부터 이랬던 건 아닙니다! 처자식이 굶어죽기 직전이라… 크흑!”
“약속하겠습니다, 대협!”
여규는 울먹이는 사내들을 다독인 후 좋게 타이르며 돌려보냈다.
철중구는 속 터지는 얼굴로 여규가 하는 걸 지켜보다가 말했다.
“누가 정파 아니랄까 봐…. 의도는 좋아. 어떤 마음인지도 충분히 알겠어. 근데 규야. 그리고 비아야. 너희 새겨들어라. 내 장담하는데 방금 그 행동, 분명히 후회할 거다.”
철중구의 말은 얼마 못 가서 현실이 되었다.
관도를 따라 이동하던 일행은 먼 곳에서 들려온 희미한 비명에 걸음을 멈췄다.
마른 비와 여규는 깜짝 놀란 얼굴로 서로를 돌아봤고, 철중구는 ‘말은 그렇게 했어도 이러지 않길 바랐는데.’라고 중얼대며 한숨을 쉬었다.
쐐애애액―!
마른 비와 여규가 달려간 곳에선 참상이 벌어지고 있었다.
아까 돈까지 쥐여서 놓아주었던 사내들이 홀로 떨어진 민가를 습격한 것이다.
그들은 네 명의 일가족 중 아비와 아들은 죽이고, 어미와 딸은 범하려 하고 있었다.
가족이 먹기 위해 끓이던, 건더기랄 것도 없는 멀건 죽을 연신 들이키면서.
즐거운 듯 킬킬대는 그들은 살아 움직이는 역겨운 시체 같았다.
“어… 어엇?!”
사내들 중 한 명이 마른 비와 여규를 보고 기겁하며 외쳤다.
“저, 저놈들…! 아니, 대… 대협들께서 여긴 어떻게…!”
“이… 짐승만도 못한 개새끼들이!”
여규가 그토록 분노한 건 오랜만이었다.
마른 비 또한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참지 못하고 사내들에게 달려들었다.
“컥!”
“아악! 사, 살려…!”
마른 비와 여규의 손속은 단호했다.
사내들은 뭐에 맞았는지도 모르고 순식간에 절명했다.
“어떻게 인간의 탈을 쓰고 이런 짓을….”
마른 비와 여규는 망연자실한 표정이었다.
자신들이 철중구의 말대로 사내들을 단죄했다면 이런 참상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살아남은 어미와 딸은 반쯤 정신이 나간 채 초점 풀린 눈으로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후우… 거봐. 이렇다니까…….”
철중구는 터벅터벅 걸어와서 넋이 나간 마른 비와 여규의 어깨를 두드려줬다.
“내가 중원의 한복판에서 니들보다 몇 년은 더 살았잖아. 니들은 이런 거 못 봤겠지만, 삶의 조건이 열악한 곳에서 이런 일은 비일비재해.”
철중구의 시선이 죽어 나자빠진 사내들에게 향했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어린 친구들에게로 돌아왔다.
“너넨 잘못한 거 없다. 선의를 이용하고, 남을 해치는 놈들이 문제인 거지. 크게 보면 세상을 바꾸는 건 나 같이 현실에 찌든 놈보다 너희 같은 놈들일 거야. 그래도 이건 꼭 기억해라. 선의를 베풀 대상은 신중히 구분해야 한다는 거. 근본이 글러먹은 놈들은 무슨 짓을 해도 안 바뀌어.”
직접 겪고 보니 절절히 와 닿는 이야기였다.
마른 비와 여규는 새삼스런 눈으로 철중구를 바라봤다.
그가 연상이라는 걸 상기하게 된 순간이었다.
일행은 죽임을 당한 부자를 수습하고, 사내들에게 줬던 돈을 모녀에게 쥐어주었다.
그리고 둘을 가까운 시가지의 관청까지 데려다줬다.
그 정도가 마른 비 일행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계속 가자.”
아침까지만 해도 순탄했던 여행이 꿈만 같았다.
주원장의 세력권을 넘자마자, 마치 ‘여기까지가 나의 손길이 미치는 곳이다.’라는 걸 드러내듯 민초들의 생활상은 급변했다.
무법지대나 다름없는 그곳엔 칼 든 자들이 횡행했고,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착취하여 배를 불렸다.
살인, 강간, 방화, 약탈이 만연한 그곳은 질서를 유지하는 관부와 치안을 담당할 군대가 없으면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마른 비 일행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도적떼와 마주쳤고, 유린당하는 약자들을 구하기 위해 분투했다.
하지만 그들이 구해준 이들도 일행이 떠나면 자신보다 약한 이들을 해치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기 때문에.
원과 주원장 사이에 생긴 힘의 공백 지대는 인간에서 짐승으로 추락한 자들이 몸부림치는 생존의 장이었다.
“이 정도의 참상은 나도 처음이야. 끔찍하구만…….”
철중구조차 맥이 풀려서 읊조릴 정도로 상황은 심각했다.
누구도 타인을 돌보지 않는 그곳에서 마른 비 일행은 사람들을 돕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처절한 무력감을 맛봐야만 했다.
“그 할머니는 이런 곳으로 돌아가야 하는 거야?”
마른 비는 백원 의원에서 손을 잡아줬던 노파를 떠올렸다.
여긴 바위를 부수고 강을 날아서 건너는 무림인들의 세계가 아니었다.
천하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일반 백성들의 세상.
같은 시공간이되 전혀 다른 삶이 펼쳐진 그곳은 마른 비가 상상해본 적 없는 처절한 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력해…….”
화마가 휩쓸고 간 작은 마을.
도적떼가 들이닥친 게 분명한 그곳엔 반쯤 타다 만 아이의 시체가 있었다.
마른 비는 그 주검을 안아 들며, 힘없는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철중구는 물론이고, 오랜 시간을 함께한 여규조차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악경 아저씨는 이런 광경을 얼마나 본 걸까…….”
핍박받는 민족을 위해 검을 들었지만, 중원 제일을 논하는 무력으로도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자신조차 이럴진대 그가 느껴야 했을 무력감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스무 살이 된 마른 비는 시커먼 재만 가득한 강소성의 이름 없는 마을에서 천하와 인간에 대해 생각했다.
“……계속 가자. 일단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누군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이들이 죽어 나자빠지던 말던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냐고 물을지 모른다.
하지만 마른 비에겐 타인을 도울 수 있는 힘이 있었고, 괴로워하는 이들을 두고 볼 수 없었다.
악행을 저지르는 자들을 무수히 목격했지만, 그럼에도 마른 비는 대부분의 인간은 선하다는 믿음을 잃지 않았다.
사람에겐 타인을 불쌍히 여기고, 돕고 싶어하는 선한 마음이 있다는 점도.
“그래. 비아야. 할 수 있는 일을 하자. 힘이 닿는 데까지.”
여규가 마른 비의 옆에 서며 말했다.
“나름 거친 환경에서 컸다고 생각했는데… 장사의 뒷골목은 낙원이었어.”
자신도 모르는 새 마른 비에게 감화라도 된 걸까?
평생 자신과 지인들만을 신경 쓰고 살아온 철중구도 여행을 거치며 변화하고 있었다.
일행은 천천히 북상하며 강소성을 가로질렀다.
그리고 눈에 들어오는 이들을 돕기 위해 애썼다.
풍찬노숙이 일상인 고된 시간이었지만, 그건 예상외로 충실한 시간이었다.
마른 비는 사람들을 도우며 마음을 채웠고, 이동하는 내내 그간 쌓은 전투 경험들을 되새기고 정리했다.
시간이 흐르자 백호를 데리고 다니는 일행이 선행을 베푼다는 소문이 강남 일대로 번져나갔다.
“호오… 실로 보기 드문 상이로군. 잠깐 이리로 와 보게. 젊은이.”
강소성 북동쪽 끝, 험하기로 유명한 운태산(雲台山)에 가까워졌을 때였다.
마른 비 일행은 거적때기 위에 올라앉아서 범상치 않은 기운을 풍기는 노인을 마주쳤다.
조짐
《그때는 몰랐다. 아니, 알 수 없었다.
격하게 흔들리는 통 안에 갇힌 생쥐가 자신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파악할 수 있을까?
중심을 잡기 위해, 정신을 잃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할 뿐이다.
전력을 다해 시대를 살아냈지만, 나는 휩쓸리지 않기 위해 발버둥 쳤을 뿐이었다.
인간의 힘이 정점에 달한 시대.
대자연의 정기가 급속도로 쇠퇴한 시점.
공교롭게도 문명의 번성과 자연의 쇠락이 맞물린 것은 그저 우연의 일치일까?
성검(聖劍)의 필담은 서방을 뒤덮은 검은 죽음을 전해주었다.
귀궁(鬼弓)의 회고는 동방에서 벌어진 개벽의 좌절을 알려주었다.
중원은 대의를 가장한 홍무제(洪武帝)의 야욕에 휩쓸렸으며, 북벽(北壁)과 영살(影殺)이 북쪽에서 벌어진 기담을 증언했다.
수왕(獸王)의 식구들이 남쪽에서 피어난 검은 불씨를 잠재우고, 수라(修羅)가 부유하는 망령들을 참할 때, 나는 그저 살아남는 데 급급하여 중원을 떠돌았을 뿐이다.
관측자라는 허망한 명성은 내게 과분하다.
그 시절의 나는 내 식구들도 건사하지 못하는 못난 가장이자, 통 안에서 속절없이 굴러다니는 생쥐였을 따름이다.
미숙한 안목으로 사람을 알아보지 못한 죄, 이 숨이 다할 때까지 두고두고 갚으리니.
신념을 이고 하늘을 향해 손을 뻗어, 검게 물든 태양을 끌어내릴 것이다.
감당할 수 없는 열기에 휩싸여 추락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던 혼란의 시대.
그 틈새에 피어난 흑화(黑花)들을 좀 더 일찍 알아챘더라면 많은 것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인간과 자연의 흥망성쇠를, 시대의 전환점을 읽어낼 안목이 그 시절에 있었다면, 흑화(黑火)가 타오르기 전에 잠재울 수 있지 않았을까?
때늦은 안타까움과 철 지난 후회에 두서없는 글을 끄적여 본다.》
혼세록 소회 편
삭월 월주 백강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