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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55화 (255/463)

255화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총단에 들어온 의뢰를 분류하는 방.

서신 더미에 파묻힌 접수원을 보며, 마웅은 질겁했다.

접수원의 얼굴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인 서신은 중원 전역에서 날아든 의뢰서였다.

사냥, 토벌, 수집.

수천에 들어오는 의뢰는 그 세 종류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중 절대다수는 고기나 약재, 모피 따위를 얻기 위한 짐승 사냥이었고, 가끔 인간을 해치는 맹수나 악수의 토벌 의뢰가 들어온다.

아주 드물게 관상이나 소장, 수집을 위해 희귀 동물이나 특정 짐승의 신체 부위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건 몇 년 전 운남의 붉은 늑대를 납치해 달라는 의뢰가 마지막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 이후로 자신은 그런 큰돈을 만질 수 있는 의뢰에서 제외돼 버린 것이지만.

‘그 꼬마는 잘 지내고 있으려나?’

마웅은 잠시 운남에서 만났던 인상적인 꼬마를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회상을 털어냈다.

지금은 잡념에 빠질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마 엽장. 저도 이런 경우는 처음 봅니다. 의뢰의 칠 할이 토벌이에요.”

총단으로 날아오는 의뢰를 십 년 가까이 분류해온 사내는 당황한 표정이었다.

기껏해야 열 개 중 두세 개에 지나지 않던 토벌 의뢰가 폭주하고 있었다.

“갑자기 짐승에게 습격당한 사례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어요. 맹수는 그렇다 치고, 인간을 보면 겁먹고 숨어버리는 초식동물까지 발톱과 이빨을 세우며 달려들었답니다. 한두 개면 특이한 경우이겠거니 할 텐데, 이건 너무 많아요.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건지….”

마웅도 서신을 읽고 있었다.

그의 옆에 서 있는 호진은 마른 비를 만났을 때와 같이 흰 담비 가죽을 상체에 두르고 있었다.

그는 마웅의 옆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붉은 발톱의 새끼를 납치하는 데 실패한 후, 마웅은 수천 역사상 최초로 의뢰에 실패한 엽장이라는 오명을 안게 됐다.

그건 수천의 얼굴에 똥칠을 한 거나 다름없었고, 마웅은 숱한 조롱의 대상이 됐다.

“네놈들이 그 붉은 늑대를 봤어야 해! 마 엽장의 탓이 아니란 말이다! 그건 네놈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괴물이야!”

함께 작전에 가담했던 사냥꾼들은 마웅을 옹호했지만, 아무도 믿지 않았다.

“상상할 수도 없어? 왜? 늑대가 발톱으로 강기라도 날리냐?”

“어? 어떻게 알았지? 그 붉은 늑대는 발톱에 기를 응집하는….”

“푸, 푸아하하하하!”

마웅만이 아니었다.

함께 운남으로 향했던 엽사들은 모두 비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이것들, 말하는 것 봐라! 변명도 참 구차하다. 짐승이 기를 사용한다고? 왜, 이왕이면 사람처럼 작전도 짜고, 말도 한다고 하지?”

“진짜란 말이다! 유인 작전을 눈치채고 곧바로 반전해서 우리를 쫓아왔어! 운남에서 만난 토착 부족의 청년과는 실제 대화도….”

“카하하하하하!”

‘대화’라는 표현이 나오자 사냥꾼들은 웃겨 죽겠다는 듯 배를 잡고 낄낄댔다.

그리고 한심하다는 눈초리로 마웅 일행을 하나하나 훑었다.

“이런, 빌어먹을! 그 붉은 늑대와 흰 호랑이를 네놈들이 봤어야 해! 니들이 그 앞에서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냐?”

“씨팔! 자꾸 그따위로 쳐다볼래? 눈깔을 확 파버릴라! 엽장! 억울하지도 않소? 뭐라고 해명을…!”

마웅과 함께 했던 사냥꾼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마웅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우두커니 서 있는 건 이런 반응을 예상했기 때문이란 것을.

‘틀렸어. 이놈들은 무슨 말을 해도 믿지 않는다.’

자신들이 짐승에 대해 빠삭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더 그렇다.

하긴 자신들도 붉은 늑대를 보지 못했다면 이놈들과 똑같은 반응이었겠지.

그날 이후로 마웅과 함께했던 사냥꾼들을 입을 다물었다.

‘엽장의 지위만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 의뢰에 실패한 후로 마 엽장은 투명인간 취급이야. 중요한 의뢰들의 경우엔 맡는 건 고사하고 열람도 하지 못하니…. 특히 진 엽장, 그 인간은 아예 노골적으로…!’

호진은 마웅이 무시를 당하는 게 자신의 일처럼 가슴 아팠다.

그가 보았을 때 수천을 대표하는 엽장들 중 가장 사내답고 출중한 실력을 지닌 게 마웅이었기 때문이다.

그를 따르는 사냥꾼들이 가장 많다는 게 그 증거였다.

의뢰 실패라는 치명적인 오점을 남긴 뒤엔 옛말이 돼버렸지만.

“이건… 심상치 않군.”

호진의 마음이 심란하건 말건 마웅은 서신을 읽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갑자기 짐승들이 흉포해진 것도 이상하지만, 여기 적힌 목격담들…. 묘사해놓은 걸 보면 한 번도 본 적 없는 짐승들이야. 뿔이 세 개에 이중으로 된 치아 구조라니….”

“뿔이 세 개에… 이중 치아 구조라구요? 그런 짐승이 있습니까?”

호진이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웅이 답했다.

“없지. 적어도 우리가 아는 한에서는. 심지어 그 밖의 외형은 사슴과 똑같다고 적혀 있다.”

“……장난질 아닙니까? 일반 백성들의 동체시력으로 코앞에서 움직이는 짐승을 잡아내긴 어려우니까요. 그걸 목격한 게 밤이라면 더욱….”

“한두 개가 아니야. 비슷한 목격담이 여러 지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접수됐다. 문제는 이런 괴이한 짐승들이 여럿이라는 점이야. 안 그래도 전쟁이니 뭐니 정신없는데 이런 흉흉한 일까지 겹치다니….”

마웅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하더니 호진의 어깨를 툭 쳤다.

“가자.”

“네? 어디를 말입니까?”

“잡으러 가야지. 백성들을 해친다잖냐. 게다가 정식 의뢰다.”

“엽장. 우리에게 할당된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지금 뭘 해도 욕먹기 딱 좋은 상황인데 미확인 생물을 잡으려다가 실패라도 하면….”

마웅은 피식 웃더니 철부로 머리를 긁으며 말했다.

마른 비에게 무기가 박살난 후에 새로 제작한 도끼인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알아보기 더 좋은 상황 아니냐. 한번 의뢰에 실패한 이상 또 실패해도 달라질 건 없겠지. 차기 엽주 자리를 신경 쓰느라 실적에 목숨 건 놈들이 이런 걸 잡으려고 움직이겠냐? 확실한 거나 주워 먹으려 들겠지.”

“그럼 엽장도 굳이 그런 걸 잡으려고 움직일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아직 위험도도 확인되지 않은 생물들이고, 일반 엽사들한테 할당될 일일 텐데 굳이….”

“왜? 너도 경력에 금 갈까 봐 신경 쓰이냐?”

호진이 발끈하며 대꾸했다.

“저 하루이틀 봅니까? 그걸 말이라고….”

“그럼 왜? 망설일 이유가 뭐야?”

“우라질. 엽장 때문에 그런 거 아닙니까? 안 그래도 진 엽장이 기회만 잡으면 깐족대는데 엽장이 궂은일을 도맡아서 처리하는 게 자존심 상해서 그럽니다! 그리고 그간 쌓은 경력과 평판 다 날아가고 꼴랑 몸뚱이 하나 남았는데 다치기라도 하면 어쩝니까? 형수님 생각도 해야죠.”

마웅은 껄껄 웃더니 호진의 등판을 팡팡 쳤다.

“내 걱정 해주는 거냐? 걱정 마라, 인마. 총단에 처박혀서 눈칫밥 먹는 것보다는 돌아다니는 게 훨씬 나아. 그리고 뭐가 튀어나오든 무슨 상관이냐. 운남에서 본 붉은 늑대보다 더하려고? 백성들이 피해를 입는다잖아. 군말 말고 나가자.”

마웅이 호진을 끌고 나가려는 참이었다.

방문이 열리며 하얀 피부를 지닌 차가운 인상의 사내가 들어섰다.

그는 마웅을 보더니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어. 이게 누구야. 밧줄남 아닌가?”

마웅의 눈썹이 순간 꿈틀했으나 그는 인상을 풀고 차분히 답했다.

“오랜만이군, 진청. 의뢰를 마치고 돌아온 거냐?”

진청이라 불린 사내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래. 누구와 달리 비싼 의뢰가 자꾸 들어와서 말이야. 광동성까지 내려가서 푸른 털의 수달을 잡아온 참이지.”

진청은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했다.

자랑을 동반한 조롱이었다.

“고생했군. 한몫 단단히 챙기겠네. 축하한다. 그럼 난 의뢰가 있어서 이만.”

마웅은 방을 나서려 했지만 진청의 말 때문에 멈출 수밖에 없었다.

“의뢰? 무슨 의뢰? 너한테 떨어지는 의뢰가 있나?”

“괴상한 짐승들이 백성들을 해친다더군. 토벌 의뢰를 다녀올 생각이다.”

진청은 고개를 젖히고 거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토벌? 괴상한 짐승이라고? 유명한 맹수나 악수도 아니고? 크하하! 천하의 마웅이 어쩌다가 그런 잡일이나 맡게 된 거냐? 이거 원, 불쌍해서!”

꾹 참고 있던 호진이 이마에 핏줄을 세우며 끼어들었다.

“진 엽장. 꼭 그렇게 깐족대야 직성이 풀립니까? 붉은 늑대 건이 마 엽장에게 할당됐을 때부터 그러더니 아직까지….”

슈아악―!

“컥…!”

진청은 가만있지 않았다.

그는 예고도 없이 손을 뻗어 호진의 목을 움켜쥐었다.

“깐족? 풀립니까? 그게 엽장에게 쓸 만한 말투냐? 어디서 배워 먹었길래 위아래도 모르고 싸가지 없이! 그리고 일개 엽사 따위가 엽장끼리 이야기하는데 어딜 감히 끼어들어? 죽고 싶은 거냐?”

콰악.

진청은 호진의 목을 쥔 손에 힘을 더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솥뚜껑 같은 손이 그의 팔목을 붙잡았기 때문이다.

진청을 제지한 마웅은 덩치만큼이나 묵직한 음성으로 그에게 경고했다.

“누가 내 식구한테 손대라고 했나? 그리고 엽장과 엽사는 사냥에서 지휘권이 어디에 있느냐를 가르는 기준일 뿐 지위의 고하를 따지는 게 아닐 텐데? 손에 힘 빼라. 팔목을 부숴버리기 전에.”

꾸우욱―

오기가 치민 진청은 얼굴이 붉어질 만큼 손에 힘을 주었으나 마웅을 당할 순 없었다.

그는 더 창피를 당하기 전에 손을 풀 수밖에 없었다.

“미련하게 힘만 센 대머리 새끼가…! 까불지 마라, 마웅! 네 입장을 모르나 본데 넌 더 이상 예전의 위치가 아니야! 같은 엽장이라도 넌 내 아래란 말이다! 계속 주제를 모르고 나대면 그 알량한 지위마저 날려버리는 수가 있어!”

마웅은 서늘한 눈으로 진청을 노려봤다.

“지위니 위치니 하는 것 따위 신경 쓴 적 없다. 사냥꾼으로서의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을 뿐. 굳이 따진다면 내 위에는 엽주님만이 있겠지. 그러니 착각하지 마라. 자꾸 신경 건들면 나야말로 확 다 엎어버리는 수가 있어.”

마른 비를 만났을 때도 이미 거대 문파 대주급의 무력을 지녔던 마웅이다.

붉은 발톱과 별비, 마른 비에게 충격을 받고 수련을 거듭한 마웅은 그때보다 한 차원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

그러나 진청 또한 차기 엽주를 노리는 남자인 만큼 만만치 않았고, 수천 오대 엽장 중 두 명이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투기에 접수원들과 호진만 힘겨워했다.

“쓸데없는 신경전이군. 난 간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지위니 위치니 관심 없으니 너희 넷이서 그러고 놀아.”

마웅은 진청이 노리건 말건 등을 돌리고 방을 빠져나왔다.

“으아아아! 씨팔!”

분을 참지 못한 진청의 고함이 메아리쳤다.

“지, 진 엽장님. 이것….”

“뭐냐!”

눈치 없는 접수원을 혼쭐내려던 진청은 우뚝 멈췄다.

접수원의 파르르 떨리는 손에는 의뢰가 담긴 서신이 들려있었는데, 겉면에 유명한 가문의 문양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사천당가?”

호기심으로 화를 억누른 진청이 서신을 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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