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56화 (256/463)

256화

“…이족의 사내. …흰 호랑이. …강하다. ……탐색에 그쳐도 되지만 가능하면 사냥? 하! ‘가능하면’이라니? 감히 수천을 뭐로 보고.”

서신의 내용을 되뇌던 진청의 눈썹이 꿈틀했다.

“……운남?”

그러고 보니 어디서 많이 들었던 내용이 아닌가.

‘그 붉은 늑대와 흰 호랑이를 네놈들이 봤어야 해! 니들이 그 앞에서 숨이라도 제대로 쉴 수 있을 것 같냐?!’

마웅과 함께 운남을 다녀왔던 엽사 중 한 명이 광분하며 토해낸 말이었다.

‘의뢰에 실패하고 늘어놓는 시답지 않은 변명이라고 여겼는데…….’

진청은 서신에 적힌 의뢰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녹수대주 당건휘. 당건휘라면 분명… 당가주의 직계렷다? 방계인 당문휘에 가려져 있지만, 혈통을 중시하는 가문이니만큼 차기 가주가 될 가능성은 농후하다.’

이런 자가 왜 이런 의뢰를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기회였다.

튼튼한 연줄을 만들.

게다가 과거 사천제일이라 칭송받던 세가답게 의뢰금은 상상을 초월했다.

‘심지어 마가 놈이 실패했던 의뢰와 관련이 있는 건이로군.’

붉은 늑대 포획에 관한 이야기 중에 등장했던 짐승.

마웅과 함께했던 엽사들은 붉은 늑대와 흰 호랑이가 엄청나다고 입을 모았었다.

‘그럼 이걸 성공하면 마가 놈보다 내가 한 수 위라는 게 증명되는 건가?’

절대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바로 움직이려던 진청이 멈칫했다.

‘……강하다?’

녹수대주씩이나 되는 자가 ‘강하다.’는 표현을 쓰며 신신당부했다.

진청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여겼다.

‘판을 짜고 안전하게 가야겠군.’

고개를 든 진청이 서신을 건넨 접수원에게 외쳤다.

“너! 마웅을 제외한 세 명의 엽장을 소집해라! 큰 건이 있어서 내가 보잔다고 전해!”

“저 새끼는 언제쯤 인간이 되려나?”

방을 나온 마웅은 짓씹듯 내뱉었다.

호방한 성격만큼이나 그도 인내라는 단어와 친한 편은 아니었다.

꼴 보기 싫어도 한식구니 칼부림을 피하기 위해 애써 참을 뿐.

진청에게 목을 잡혔던 호진은 씩씩대며 쌍욕을 토했고, 마웅은 그걸 들으며 감정을 가라앉혔다.

“엽장! 저런 소릴 듣고도 나갈 겁니까? 저 새끼뿐만 아니라 다들 엽장을 비웃을 거예요. 어느 줄에 설지 눈치를 보고 있는 엽사들도 전부 엽장을 배제할 거란 말입니다!”

마웅이 진청에게 한 말은 진심인 모양이었다.

그는 호진의 어깨를 감싸며 껄껄 웃었다.

“신경 안 쓴다고 하지 않았냐. 자리다툼 같은 건 하고 싶은 놈들이나 실컷 하라지. 현 엽주와 너희가 마음에 들어서 수천에 있는 거지, 인원이 물갈이되면 머무를 생각 없다.”

“수천을… 나갈 생각인 겁니까?”

“아직 구체적인 계획 같은 건 없어. 엽주가 무사히 자리를 물려주면 그때 생각해 보지 뭐.”

“음… 여길 나가는 건 생각해본 적도 없는데……. 근데 엽장, 그 엽주님 문제 말입니다….”

호진이 머뭇거리며 무언가를 이야기하려 했지만, 마웅은 그의 등짝을 짝 소리 나게 후려쳤다.

“이럴 시간 없다! 지금도 계속해서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잖아! 일단 나가자! 나중에 얘기해!”

마웅은 호진이 입을 열 틈도 주지 않은 채 질질 끌고 나갔다.

* * *

“상(相)이라고? 영감, 복자(卜者)요?”

철중구는 별 희한한 꼴을 다 본다는 투였다.

최근 지나온 강소성의 북부는 살아남는 것도 쉽지 않은 전쟁터였다.

당장 끼니를 해결할 음식이 없어서 죽고 죽이는 판에 복채를 받고 점복을 봐주는 복자라니?

엄청난 괴리감에 실소가 나왔다.

도적떼가 횡행하는 길 한복판에 저런 노인 혼자 자리를 깔았다?

필시 함정이거나 도적 따위가 어찌할 수 없는 고수임이 분명했다.

‘조심해.’

일행이 눈빛으로 의사를 교환할 때였다.

노인은 천연덕스럽게 웃었다.

“클클. 경계할 것 없네. 그저 천기를 엿보며 세상을 떠도는 늙은이일 뿐이니까.”

“그럼 진짜 복자라는 거요?”

철중구가 의심스러운 어조로 묻자, 노인은 짧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자랑스럽게 답했다.

“복자뿐이겠는가. 역술가, 관상가, 점술가……. 뭐든 할 수 있고, 뭐든 될 수 있지. 난 만능이거든. 거기 서 있지만 말고 이리 와 보게, 젊은이들.”

“만능? 하! 분위기가 묘해서 산통 좀 흔드나 싶었더니……. 이 영감, 사기꾼이구만? 볼 것도 없다, 비아야. 가자.”

노인은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허나 다가갈 이유는 없다.

뛰어난 복자를 만나는 건 기연이라고 할 만큼 흥분되는 일이지만, 노인은 전혀 그래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점술, 역술, 사주, 관상…….

무엇이 됐든 하나만 파고들어도 끝을 보기 어려운 분야들이다.

한데 전부 가능하다고?

철중구는 대화를 섞을 필요도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마른 비는 이미 노인의 앞에 앉아 있었다.

“아…! 호기심 천국, 저 새끼…….”

철중구의 한탄을 뒤로 하고, 마른 비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노인에게 물었다.

“복자라고? 규에게 들은 적 있어. 할아버지가 말로만 듣던 그거구나! 정말 뭐든 가능해?”

“클클. 그럼. 당연하지.”

“오~! 대단한데? 그럼 궁금한 거 막 물어봐도 돼? 근데 이럴 땐 보통 뭘 물어보지? 음… 아까 상이라고 했나? 내 생김새가 드물다고?”

노인은 마른 비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다가 말했다.

“그래. 눈이 맑고 코가 우뚝하며 입술은 적당하지. 짙은 피부와 새카만 눈썹…. 꼬맹이 너, 한족이 아니구나?”

철중구는 기가 찬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푸핫! 어이, 영감. 코흘리개 꼬마도 비아가 한족이 아니란 건 알겠다. 맑고, 우뚝하며, 적당? 그런 말은 나도 하겠네. 그래가지고 밥 먹고 살겠어?”

“클클. 날 믿지 못하는 모양인데, 그럼 실력발휘를 해볼까?”

철중구의 비웃음에 노인은 천천히 입을 뗐다.

“어디 보자… 검은 눈동자 위에 새겨진 테. 그건 심대한 역경이나 숙적을 의미한다. 벌써 하나가 있군. 길쭉한 테는 사건이 아니라 대상을 뜻하지. 그리고 이 모양… 이건 사람이 아니야. 짐승? 짐승과 싸운 거냐?”

“어…?!”

마른 비와 여규가 동시에 외마디 소릴 질렀다.

숙적이라 할 만한 짐승.

검치호 말고 무엇이 있겠는가?

둘의 눈이 휘둥그레지건 말건 노인은 마른 비를 주의 깊게 들여다봤다.

“눈동자에 아직 테가 들어찰 공간이 넉넉하다. 네 간난신고(艱難辛苦)는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단 뜻이야. 눈동자의 경계선은 운명을 둘러싼 울타리를 의미하지. 이토록 뚜렷한 테두리는 나조차도 처음 본다. 굉장한 존재가 너를 지켜왔군. 아니, 존재‘들’인가?”

“…….”

순간 마른 비는 은빛 여우와 아버지를 비롯한 와족의 어른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광대의 말간 윤기는 인복을 뜻한다. 콧날의 광택은 사람들 속에서 빛나는 너의 존재감이며, 코끝이 윤택한 정도는 사람들을 잇는 자로서 네가 얼마만큼의 역할을 하게 될지를 보여주지.”

노인은 숨 한 번 흐트러뜨리지 않고 말했다.

“이 정도의 윤택함은 보기 드물어. 색을 가리지 않는 친화력……. 너는 가교이자 그릇이다. 본래라면 절대로 만날 수 없는 자들이 너를 통해 이어지고, 너로 인해 한데 머무르리라. 여기 있는 두 녀석이 그리된 것처럼.”

저잣거리 사기꾼 같은 경박한 말투는 온데간데없다.

어느새 노인은 눈을 뗄 수 없는 존재감으로 일행을 숨죽이게 만들었다.

“눈동자는 더없이 맑으나 투과되는 빛이 영롱함을 잠식한다. 네 자신의 문제가 아닌 외부의 시련……. 가슴을 찢는 회한과 천지를 울릴 비통함이 너의 심장을 옥죄리라. 허나 결코 하늘이 준 천성을 저버리지 말지니. 지금까지 그랬듯 오롯한 믿음으로 네 안의 기둥을 붙들어라.”

예언? 또는 경고?

마지막은 조언에 가깝다.

노인은 풀어놓은 이야기를 곱씹을 틈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말을 쏟아냈다.

“지독한 역마살(驛馬煞). 그건 보통 액운을 의미하나 너의 경우는 다르다. 경험하지 못한 것, 모르는 것… 새롭고 신기한 것에 대한 탐심이 너를 일신하리라. 너는 걷는 자며, 또한 아우르는 자다. 때가 도래할 때까지 스스로를 키워라.”

들으면 들을수록 제법 그럴 듯하다.

복자들 특유의 알 듯 모를 듯한 화법은 사기꾼이라고 비웃었던 철중구조차 침을 삼키며 다가오게 만들었다.

“이, 이봐, 영감. 그런 건 안 하쇼?”

“……?”

“그 왜… 있잖아. 천문이나 이름 풀이나 점괘 같은 거.”

복자들을 제법 보았던 모양이다.

철중구는 잔뜩 기대한 얼굴로 노인을 바라봤다.

여규도 마찬가지.

왕의 운명을 예언하여 역사 속에 이름을 남긴 복자가 있을 정도로 불가와 도가의 철학이 가미된 복술(卜術)은 누구에게나 관심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노인은 혀를 끌끌 찼다.

“역술이니 사주니 점성술이니 하는 건 꺼낼 필요도 없다. 예컨대 자미두수(紫微斗數) 같은 건 더럽게 재미없고 복잡하기만 해. 인간의 몸이 곧 소우주며, 그 안에 음양과 오행의 이치가 모두 담겨 있는데 뭣 하러 귀찮은 짓을 할까. 얼굴과 눈을 통해 길흉화복과 생애의 모든 게 드러나니, 통달한 복자는 관상만으로도 충분하다.”

일행이 잠시 멍하게 있는 사이, 노인은 주섬주섬 자리를 접고 일어섰다.

“어… 어? 영감, 나는? 나랑 이놈은 안 봐주쇼?”

노인은 여규와 철중구를 힐끗 보더니 툭 뱉었다.

“궁금하면 오백 냥.”

“오, 오백? 너무 비싼….”

“은전으로다가.”

“으, 은전 오백 냥?! 당신, 미친 것 아뇨?”

철중구가 울컥하며 항의했다.

“아니, 왜 비아만 공짜로 봐주고 우리는 안 봐주는데?!”

“거야 이놈을 보러 온 거니까.”

“……비아를 보러 왔다고?”

“천제(天帝)의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흑운이 번지기 시작했다. 인간이 뿜어낸 독소가 시대를 비틀고 천하를 잠식할 것이야. 응당한 인과응보지만……. 스스로를 지킬 힘도 없이 휘말릴 자들은 어찌한단 말인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뜬구름 같은 소리다.

노인은 떠날 채비를 마친 뒤에 마른 비를 바라봤다.

“놈들은 시대의 균열에서 잉태됐다. 너희가 그렇듯이. 지난한 싸움이 될 것이야. 허나 대항을 멈춰선 안 돼. 네가 첫 번째 조각이다. 때가 무르익기 전에 네가 성장을 마쳐야 해.”

노인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눈빛을 남긴 채 떠났다.

철중구는 무척이나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며 마른 비를 바라봤다.

“쳇. 좋겠다. 너만 잔뜩 듣고. 저 영감, 왠지 느낌이 사짜 같진 않은데…….”

철중구가 부러워했지만, 마른 비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대체 뭔 소릴 하는 거야? 복자란 건 원래 다 저래? 하나도 못 알아듣겠네. 저 할아버지 이상해.”

여규는 팔짱을 낀 채 무언가를 고민하고 있었다.

“언젠가 들은 것 같은데……. 터무니없는 금액을 요구하는 복자…….”

철중구는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점 봐주기 싫어서 그냥 한 소리겠지. 은자 오백 냥이라니. 누가 그 돈을 내고….”

“……오백 냥?”

눈썹을 찡그리고 있던 여규가 눈을 크게 떴다.

“으, 은자 오백 냥! 맞아! 항상 그 돈을 요구하는 복자가 있댔어! 기껏 금액을 맞춰줘도, 복채 낸 사람 말은 듣지도 않고 제 할 말만 하다가 떠나버리는 괴짜!”

여규는 노인이 떠난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처, 천기자! 아까 그 노인, 천기자(天機子) 감택이야!”

“뭣이?! 감택?!”

천기자 감택.

천문, 지리, 역법, 풍수에 통달하여 하늘의 뜻을 엿본다는 희대의 천재다.

연이 닿지 않는 사람은 억만금을 주어도 만날 수 없다는 그는 중원 칠대 기인의 한 사람이자 이 시대 최고의 복자였다.

“……방금 그 노인이 천기자라고? 천기자면 카안의 초청도 거절한 사람 아냐?”

철중구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이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는 마른 비를 바라봤다.

“천기자가 널 왜 찾아와? 아까 분명히 널 보러왔다고 했어! 비아, 너 이 새끼… 솔직히 말해! 너 뭐 하는 놈이야? 운남에 있다가 나온 거 맞아?”

천기자의 명성이 어떻건, 감택에 대한 마른 비의 평은 변함이 없었다.

“몰라. 나도 처음 봤는데, 뭘. 감택이건 감귤이건 이상한 할아버지야.”

일행이 관도 한복판에서 놀라움을 다스릴 때였다.

“사, 사람 살려…! 나 좀 살려 주시오!”

온몸에 피칠갑을 한 사내가 당장이라도 거꾸러질 듯 달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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