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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57화 (257/463)

257화

“괜찮아? 무슨 일이야, 아저씨?”

마른 비가 달려나가 사내를 부축했다.

그는 피로 물든 옷만큼이나 극심한 공포에 젖어 있었다.

“지, 짐승…!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아이, 내 아이들을 구해주시오!”

사내는 무인이 아님에도 체구가 상당히 좋은 편이었으며, 힘깨나 쓴단 소릴 들을 것 같았다.

마른 비는 그의 몸 곳곳에서 둔탁한 이빨 자국과 발톱, 부리 등에 할퀸 흔적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어디야, 아저씨? 방향을 말해!”

마른 비는 반쯤 정신이 나간 사내를 들쳐 멨다.

그리고 그가 가리키는 곳을 향해 달렸다.

저 멀리 있는 민가에서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컹! 컹컹―!”

“꼬꼬댁― 꼬꼬!”

“꾸익―! 꿀!”

그야말로 난장판이다.

개와 닭, 돼지 등 집에서 키우는 동물들이 극심한 흥분 증세를 보이고 있었다.

눈자위가 빨갛게 물든 짐승들은 두려움과 공격성을 동시에 드러내며 사납게 짖어댔다.

짐승들은 성인 키의 두 배쯤 되는 나무를 올려다보고 있었고, 그 위에는 오누이로 보이는 아이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었다.

『왜들 이래? 정신 차려!』

마른 비는 곧바로 야수 제어를 담은 언령을 내질렀다.

보이지 않는 손에 짓눌리듯 움츠러들었던 짐승들이 마른 비를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놀라운 건 겁을 먹었으면서도 여전히 공격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었다.

“크… 르르르….”

‘물러나지 않아?!’

정녕 기가 막힐 일이었다.

야수 제어는 운남의 강대한 맹수들조차 고개를 처박고 뒷걸음질 치게 만든다.

한데 고작 개나 닭, 돼지 따위가 이걸 견딘다고?

마른 비는 야수 제어의 수준을 더욱 끌어올렸다.

“꼬오옥… 꼭….”

“꾸익… 꾸….”

마찬가지다.

고통에 찬 울음을 흘리면서도 짐승들은 안간힘을 쓰며 버텼다.

마치 물러서는 순간 더욱 무서운 존재가 자신을 해칠 거라고 믿는 듯했다.

세뇌에 가까운 정신 착란.

어린 시절, 마른 비는 이것과 비슷한 증세에 시달리는 동물들을 본 적이 있었다.

‘원숭이 무리를 조종하던 야수… 괴후!’

지금 눈앞에 있는 짐승들의 상태는 괴후에게 정신 지배를 받던 원숭이들과 흡사했다.

두려움에 휩싸여 난폭해지는 것도 그렇고, 눈이 빨개지는 것도 그렇다.

야수 제어가 제 위력을 내지 못하는 걸로 보아 괴후 때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인 게 분명했다.

‘무언가가 이놈들을 조종하는 건가?’

마른 비는 기감을 끌어올려 주위를 살폈지만, 걸리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잠시 다른 데 한눈을 판 사이, 동물들은 더욱 격렬하게 몸부림쳤다.

“커허허헝!”

별비가 은신을 풀고 뛰쳐나와 동물들을 휩쓸었다.

아마도 그것들이 제정신을 차리지 못할 거라고 판단한 듯했다.

여규와 철중구가 뛰어올라 아이들을 구출했고, 마른 비는 피투성이가 된 사내를 부축했다.

“아저씨. 어떻게 된 일이야? 집에서 키우던 동물들 같던데. 언제부터 저렇게 된 거야?”

사내는 아이들이 무사히 땅에 안착한 걸 보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그는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이며 마른 비의 물음에 답했다.

“모르겠소. 나도 영문을 모르겠어…. 갑자기 동물들이 미쳐 날뛰기 시작했소. 개는 쇠로 된 목줄을 끊었고, 돼지와 닭은 우리를 부수고 뛰쳐나왔지. 그러더니 곧장 식구들에게 달려드는 게 아니겠소. 몇 마리는 몽둥이로 때려죽였지만, 너무 사납고 숫자가 많았어…….”

사내는 그제야 무언가가 생각난 듯 나무 밑으로 헐레벌떡 달려갔다.

거기엔 엉망이 된 시신이 있었다.

“여, 여보… 여보! 아, 아아…!”

짐승들에게 뜯긴 시체는 사내의 부인이자 아이들의 어미였다.

정황으로 보아 아이들을 나무 위로 밀어 올리느라 본인은 피하지 못한 듯했다.

사내는 필사적으로 저항하다가 힘이 부치는 걸 깨닫고 도움을 청하러 온 것이었다.

“이런…….”

마른 비도 슬픈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넋 놓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별비가 위험을 알려왔기 때문이다.

〔여기만이 아니야. 사방팔방에서 잡스런 기운이 감지된다. 이 일대의 짐승들 대부분이 정신을 놓은 것 같아. 두려움과 굉장한 공격성이 느껴져. 인간들이 다칠 거다. 구할 생각이면 당장 움직여야 해.〕

별비의 말에 마른 비는 퍼뜩 정신을 차렸고, 사내에게 사정을 설명한 후 집을 나섰다.

여규와 철중구도 뒤를 따라 나왔다.

“흩어지자.”

마른 비는 자신을 바라보는 일행에게 그렇게 말했다.

“짐승들이 사람을 해치고 있어. 산에서 내려온 것 같은 맹수들의 기척도 있지만, 그건 많지 않아. 대부분이 들판을 헤매거나 집에서 키우던 동물들이야.”

마른 비는 손가락으로 방향을 짚어서 여규와 철중구에게 가야 할 곳을 일러주었다.

“봐서 알겠지만 사나울 뿐 제압하는 건 어렵지 않아. 보이는 대로 처치해서 이차 피해를 방지하고 사람들을 구하자. 해가 지면 여기서 만나.”

“난데없이 이게 무슨…! 알겠다. 일단 그렇게 하자.”

별비를 포함한 넷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달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돌보지 않는 지역에서 마른 비 일행의 존재는 구원이었고, 유일한 희망이었다.

“고, 고맙습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옆 마을도 난리가 났습니다! 염치없지만 거기도 도와주시면…!”

이제는 도적이 문제가 아니었다.

손바닥만 한 참새부터 수백 마리의 쥐떼, 집에서 키우던 개와 야생에서 살아가던 들고양이, 심지어는 산에서 내려온 멧돼지와 범에 이르기까지, 눈에 들어오는 모든 짐승이 인간을 해치고 있었다.

퍼어억―!

“히히히힝…!”

사람을 뒷발로 걷어차고 이빨로 물어뜯던 짐말이 마른 비의 주먹을 맞고 쓰러졌다.

벌게진 눈으로 꿈틀대는 말을 내려다보는 마른 비의 표정은 착잡하기만 했다.

‘특정 종에 국한된 현상이 아니야. 짐승들이 동시다발적으로 미쳐 날뛰고 있어.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어떤 존재가 이토록 광범위한 정신지배를 펼칠 수 있단 말인가.

마른 비가 아는 한 특정 개체가 이런 짓을 지속적으로 벌이는 건 불가능했다.

차라리 이건 하나의 현상이나 조짐이라고 보는 게 옳았다.

마른 비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민할 때, 별비는 저 멀리서 앞발을 휘두르고 있었다.

“크허헝!”

별비에게 얻어맞은 멧돼지는 머리가 뜯겨나가며 그대로 절명했다.

별비는 신선한 살코기를 한입 가득 베어 물고 다른 곳으로 떠나려 했다.

“히, 히이익…!”

멧돼지에게 받힐 뻔했던 남자는 안도할 틈도 없이 장대한 범의 출현에 오줌을 지렸다.

하지만 짐승 같지 않은 따뜻한 눈동자와 흰 털을 보는 순간 벌떡 일어서며 환호했다.

“배, 백호…?! 최근 백성들을 구해준다는…! 오오, 신령님! 감사합니다!”

대체 무슨 소문이 퍼지고 있는 걸까?

별비는 ‘이건 뭔 참신한 헛소리야?’라는 표정을 짓더니 훌쩍 떠나버렸다.

목숨을 구한 사내는 별비의 등에 대고 연신 절을 올리며 ‘오오~ 신령님!’이라고 중얼거렸다.

‘손이 부족해.’

눈길이 닿지 않는 곳에서 여규와 철중구도 분투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방에서 벌어진 짐승들의 습격을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고, 조력자가 절실했다.

마른 비가 다음 지역으로 움직이려 할 때였다.

“……어?”

급속도로 늘어나는 기척.

짐승이 아닌 인간, 그것도 정련된 내공의 흔적이었다.

소속을 알 수 없는 무인들이 당도하여 짐승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생쥐 한 마리 남기지 말고 쓸어버려라! 짐승들을 죽이고 백성들을 구한다! 오왕에게 들고 갈 선물이니 각별히 신경 쓰도록!”

푸른 무복을 입은 사내였다.

이십 대 초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훤칠한 외모에 강철도 두 동강 낼 것 같은 보검을 들고 있었다.

그의 지휘하에 수십 명의 무인들이 넓은 범위를 수색하며 짐승들을 모조리 도륙했다.

곧 마른 비 앞에 당도한 그는 ‘이건 뭐지?’라는 얼굴로 물었다.

“……이족? 상당한 무를 수련한 것 같은데… 자넨 뭔가?”

사내는 마른 비 근처에 널브러진 짐승들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보다 먼저 백성들을 도운 자가 있었나? 기특하군. 민초들을 대신해 고마움을 표하지.”

간단히 포권한 그는 마른 비에게 말했다.

“이제 우리가 당도했으니 가 봐도 될 것이야. 수고했네.”

나쁜 느낌은 아닌데 왠지 제멋대로인 사내다.

마른 비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철중구와 여규가 당도했다.

“비아야! 갑자기 무인들의 기척이 느껴져서 달려왔다!”

“음? 누구셔, 이분은?”

사내의 옷을 유심히 살피던 여규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푸른옷에 창천을 꿰뚫는 검의 문양…! 남궁세가(南宮世家)?”

정파를 대표하는 오대세가 중에서도 최강의 가문이라 칭송받는 곳.

바로 안휘의 남궁세가다.

절대의 검공으로 이름 높은 그곳은 과거 천하제일검을 배출한 적도 있을 정도로 뛰어난 명문이었다.

마른 비에게 가도 된다고 말했던 사내는 일행을 둘러봤다.

‘이족의 사내에 척 봐도 사파로 보이는 자. 그리고 명문 정파의 기질을 지닌 청년.’

사내는 비로소 무언가를 깨달은 표정이었다.

‘왜 바로 알아채지 못했지? 이 조합은…!’

그때, 날렵한 무언가가 날아오더니 마른 비의 뒤에 섰다.

슬쩍 쳐다보는 것만으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그것은 상상해본 적도 없을 정도로 거대한 백호였다.

사내는 확신할 수 있었다.

“……꼭 한번 보고 싶었는데 이런 곳에서 마주치다니. 요즘 강남에 명성이 자자한 일행이셨군요. 혹시 결례를 저질렀다면 용서하시길. 남궁가의 차남, 남궁결이 인사드리오.”

자신을 남궁결이라 소개한 사내는 두 손을 모아 앞으로 내밀었다.

명성은 대우를 달라지게 하는가.

아까 마른 비의 정체를 모를 때보다 훨씬 정중해진 포권이었다.

일행은 몰랐지만, 최근 마른 비의 이름은 말 그대로 강남을 떨쳐 울리고 있었다.

“오왕의 진영을 나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소. 한데 아직 이 부근에 있었을 줄이야. 당신들만으로 백성들을 돕고 있던 것이오?”

남궁결의 물음에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규가 마주 포권하며 질문을 건넸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점창의 여규입니다. 혹시 남궁가도 오왕 님의 진영에 합류하는 건가요?”

여규 또한 마른 비의 동료로 최근 이름이 알려지고 있었다.

구파의 제자를 만난 게 반가운지 남궁결은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렇소. 미력하나마 몽골 오랑캐를 몰아내는 일에 힘을 보탤 생각이지요. 북벌에 참여하기 위해 본가의 창궁검대(蒼穹劍隊)를 이끌고 왔소.”

창궁검대라면 구파의 하나인 화산파(華山派) 매화검수(梅花劍手)들에 비견되는 최정예 검사들이다.

점창의 봉검대처럼 남궁가를 대표하는 최고의 무인들.

남궁가는 주원장에게 적극 협력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돌아가는 상황을 여쭈어도 될까요? 저희가 최근에 정보를 접하지 못해서….”

“그래서 아직 이곳에 머무르고 계신 거였군요. 오왕이 장사성을 무너뜨렸습니다.”

“아… 결국!”

마른 비 일행이 백성들을 돕는 사이 주원장은 강남을 평정했다.

서달과 상우춘, 강무재가 응천부로 복귀했고, 전란에 허덕이던 지역들이 빠르게 안정되어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도 곧 주원장의 병사들이 파견되어 혼란을 수습할 터였다.

마른 비 일행이 다행이란 표정을 짓는 걸 보고, 남궁결은 계속해서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장사성은 사치와 향락에 빠져 예전의 힘을 잃은 상황이었지요. 하지만 생각보다 오랜 시일이 걸린 까닭은 엄청난 무인 하나가 튀어나왔기 때문이라더군요.”

“엄청난 무인이요?”

“네. 갑주도 걸치지 않은 채 전장에 뛰어들어서 오왕의 진영을 종횡무진 휘저었다고 합니다. 무시무시한 투기를 뿜어내며 싸우는 모습이 마치 아수라가 강림한 것 같다고…. 저 서달 장군조차 그자 때문에 진격이 가로막혀서 애를 먹었다더군요.”

“대단한 사람인가 보네요.”

“네. 장사성의 목이 잘리자 홀연히 사라져 버렸는데 오왕의 진영에선 아직도 그를 찾고 있는 듯합니다.”

남궁결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돌아보다가 말을 이었다.

“짐승들의 이상 증세… 직접 보니 상황이 더 심각하군요. 이것만이 아닙니다. 들리는 소문으론 기괴한 일들이 천하 각지에서 일어나고 있어요.”

“기괴한 일들이라면…?”

“짐승들이 미쳐 날뛰고, 이야기책에서나 볼 수 있던 귀물들의 목격담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심지어 망자들이 무덤을 열고 뛰쳐나와 배회한단 소문까지 있죠. 세간에 떠도는 소문이니 과장된 부분이 있겠지만, 최소한 짐승에 대한 이야기는 사실인 것 같군요.”

남궁결은 검을 고쳐 잡더니 일행에게 포권을 취했다.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저는 민초들을 도와야 하는 관계로 이만….”

“우리도 도와줄게. 넷뿐이지만 분명 도움이 될 거야.”

마른 비가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하지만 당연히 반길 줄 알았던 남궁결은 의외의 반응을 보였다.

그는 얼굴을 굳히더니 단호히 말했다.

“아뇨. 그건 거절하겠습니다. 본가가 당도한 이상 여긴 우리가 수습합니다. 소협께선 가던 길을 마저 가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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