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8화
“도움이 필요 없다고? 한 명이라도 더 있어야 더 넓은 지역을 돌아볼 텐데?”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희만으로 충분합니다.”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이었다.
마른 비의 인상도 서서히 굳어졌다.
“별로 좋은 생각은 아닌 것 같은데. 왜지? 납득할 수 있게 설명해주겠어?”
둘 사이에 묘한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남궁결의 속내를 가장 빨리 눈치챈 건 철중구였다.
“왜? 백성들을 도운 공을 독차지하고 싶어서?”
정곡을 찔린 걸까?
남궁결은 움찔하더니 차가운 어조로 대꾸했다.
“과연 사파다운 생각이로군. 본가를 어찌 보고 그런 망발을….”
“그럼 우리를 보내려는 이유가 뭔데? 손 하나가 모자란 판국에 도움을 거절할 이유가 그거 말고 또 있나? 뒤늦게 합류하는데 오왕의 눈에는 들고 싶고, 그러자니 다른 문파들과 차별되는 뭔가가 있어야겠고…. 요컨대 생색내기용 선물이잖아. 내 말이 틀려?”
남궁결은 지독한 모욕이라도 받은 것처럼 부들부들 떨었다.
“철중구라 했나? 사호에 들었다더니 눈에 뵈는 게 없나 보구나. 감히 본가를 능멸하다니. 우리가 백성들의 안전을 담보로 공이나 탐하는 소인배로 보이는가?”
“어. 지금 상황은 충분히 그래. 다른 이유가 있으면 말해봐. 내 생각이 틀렸다면 정중히 사과하지.”
철중구는 확신하는 얼굴로 말했다.
남궁결의 눈빛이 스산하게 가라앉고, 검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에게서 뭉클거리는 투기가 흘러나오자 주변에 산개해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달려왔다.
그들은 별비를 보고 움찔했으나, 남궁결이 홀로 대치 중인 걸 깨닫고 거세게 외쳤다.
“멈춰라! 이것들이 감히 소공자님께…!”
“비겁한 놈들! 한 명을 상대로 넷이서…!”
“오왕의 비호를 받는다더니 막무가내로구나! 감히 남궁가의 적손을 핍박하다니!”
남궁세가의 무인들도 마른 비 일행의 정체를 눈치챈 모양이었다.
좋지 않은 방향으로 오해가 쌓이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싼 창궁검대가 살기등등한 기세를 뿜어냈다.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그들을 멈춰 세운 건 마른 비였다.
“그만.”
투기도, 살기도 아니다.
그저 오롯한 존재감으로 마주쳐 갈 뿐이다.
자연기를 머금은 눈빛이 지나칠 때마다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움찔대며 멈췄다.
장내를 한 바퀴 돌아본 마른 비가 남궁결에게 말했다.
“당신들이 오기 전부터 우린 사람들을 돕고 있었어. 무슨 생각인지는 몰라도 당신이 우리에게 가라 마라 할 권한은 없는 거야. 손을 합친다면 효율적이겠지만, 그게 싫다면 따로 움직이면 돼.”
“소협. 우리가 온 이상 소협의 일행까지 수고를 할 필요는….”
“그만. 들으면 들을수록 중구의 말에 신빙성만 더해지네. 서로 불필요한 대화는 하지 말자. 이 시간에도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어. 우린 따로 움직일 테니까 당신들도 알아서 해.”
말을 마친 마른 비는 인사도 없이 등을 돌렸다.
뜻대로 흐르지 않는 상황에 남궁결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마른 비의 말대로 그가 일행의 거취를 강제할 권한은 없었기 때문이다.
덩그러니 남겨진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멀어지는 마른 비 일행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웃기는 놈이네. 지가 뭔데 가라 마라야?”
철중구는 투덜댔고, 여규는 한숨을 쉬었다.
“후우… 구 선배님에 이어 남궁 공자까지…. 자꾸 너희에게 정파에 대한 편견만 심어주게 되네.”
“봤지, 규야? 내가 정파 놈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이거다. 머리에 똥만 찬 새끼들이 지들이 특별한 줄 알아요. 정파가 아닌 이들을 대할 때 한 단계 내려보는 습성이 있다니까? 이래라저래라, 니들은 어떻다… 지들이 세상의 기준이여, 아주.”
“끄응…….”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다고 하고 싶지만, 최근 겪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 모양이라 반박할 수가 없다.
여규는 머리를 벅벅 긁더니 마른 비에게 물었다.
“그래서 이제 어떡할 거야, 비아야? 다시 흩어져서 사람들을 도와?”
남궁세가의 무인들과 떨어진 후부터 마른 비는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결정한 듯 고개를 들었다.
“아까 그 사람들, 숫자도 많고 강해.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확실히 이 주변은 걱정할 필요가 없겠어.”
“그러면?”
마른 비는 눈을 들어 저 멀리 웅장하게 자리 잡은 산을 바라봤다.
“별비와 의논해봤는데 저 산에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아. 진득하게 흘러나오는 기운…. 일대의 동물들에게 영향을 끼친 게 있다면 분명 저기 있을 거야.”
마른 비는 일행에게 말했다.
“여긴 저들에게 맡기고 우린 산을 돌아보자. 가서 이 사태의 원인을 찾는 거야.”
* * *
“겨우 찾았군.”
진청은 언덕에서 마른 비 일행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별비의 후각과 청각 범위를 감안하여 상당한 거리를 두었기에 마른 비 일행은 작은 점으로 보였다.
진청은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일행을 좌우로 스치듯 왔다 갔다 하며 시야에 담았다.
표적이 시선을 느끼는 걸 방지하기 위한 조치였다.
사냥을 할 때처럼 기운을 완전히 죽여서 마른 비 일행은 진청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대머리의 말이 사실이었나? 저런 범이 있다니…….”
진청의 옆에 선 여인이 침음을 흘렸다.
백사의 외피를 넓게 펴서 가슴 부위에 두른 여인은 진청에게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지니고 있었다.
그들의 좌우에 선 사내들도 마찬가지였다.
각각 독수리와 범의 가죽을 몸통에 두른 그들은 진청과 같은 방식으로 별비를 탐색했고, 곧 나지막이 감탄을 터뜨렸다.
“믿을 수가 없군. 저 백호… 정말 기를 다룬다.”
독수리 가죽을 두른 사내, 창무군이 말했다.
범 가죽을 걸친 사내도 자신의 상체를 내려다보며 중얼댔다.
“대흑산(大黑山)에서 잡은 이놈이 초라해 보이는군.”
여진의 영토까지 가서 잡아 온 대흑산의 산군은 맹각의 일생을 통틀어 가장 자랑스러운 사냥감이었다.
일반적인 범의 세 배에 달하는 몸집과 함정을 알아챌 정도로 영리한 두뇌는 짐승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녀석을 사냥하는 데 성공해서 중원 최고의 범 사냥꾼이란 칭호를 얻었거늘.
위풍당당하게 버티고 선 별비를 보는 순간, 맹각은 몸에 두른 대호의 가죽이 부끄러워졌다.
“저건 내가 잡는다.”
맹각이 힘주어 선언하자, 진청이 검지를 까딱대며 말했다.
“순서를 지켜야지? 사냥 순서는 내가 먼저다.”
맹각은 눈만 힐끗 돌려서 진청을 바라봤다.
“네가 가능하겠나? 관상용 수달이나 포획하던 실력으로는 어려울 텐데?”
노골적인 도발에, 진청은 쌍심지를 켜고 맹각을 노려봤다.
“표적의 근처라 소란을 피우지 못하는 게 널 살린 줄 알아라, 맹각.”
두 남자가 서로를 노려봤다.
범의 가죽을 두른 맹각에 비해 진청은 붉은색을 띠는 희귀한 돌고래 가죽을 착용하고 있었는데, 둘의 성향이 극명하게 드러나는 지점이었다.
수천을 대표하는 다섯 명의 엽장 중 유일한 여성인 서유화가 둘의 대치를 말렸다.
“그만해. 만날 때마다 으르렁거리는 거, 지겹지도 않냐? 진청, 네가 우리를 불러 모은 거니까 순서는 당연히 네가 먼저다. 그보다 궁금한 게 있는데, 저거 주인이 있는 짐승이잖아? 정말 사냥해도 되는 거야?”
서유화의 의문은 타당했다.
수천의 사냥꾼들이 지켜야 하는 규율 중 가장 중요한 두 가지는 ‘사람을 해치면 안 된다.’는 것과 ‘주인이 있는 짐승은 손대지 않는다.’였기 때문이다.
직접 확인한 결과, 백호는 세간의 소문처럼 이족의 청년을 따라다니는 게 확실했다.
맹각과 창무군도 뒤늦게 그 부분이 걸렸는지 침묵했다.
하지만 진청은 비릿하게 웃었다.
“주인이 있다라……. 저 백호가 말인가? 난 그런 말을 듣지 못했는데?”
세 엽장의 얼굴이 동시에 굳었다.
그들이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진청이 선수를 쳤다.
“저 범은 야투에서부터 시작하여 꽤 많은 인간을 해쳤더군. 죽은 자의 소속이 어디고, 앞뒤 사정이 어떤지는 중요치 않아. ‘짐승이 인간을 해쳤다.’는 사실이 중요할 뿐. 그리고 우리는 의뢰를 받았다. 의뢰자의 정체는 철저한 기밀……. 자, 문제될 게 있나?”
“…….”
세 명의 엽장이 침묵을 지키자, 진청은 지그시 웃었다.
“마가 놈이 실패한 붉은 늑대 포획 의뢰……. 거기 참여했던 엽사들의 증언 중엔 무지막지한 백호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지. 저런 게 또 있을 것 같나? 마가 놈이 운남에서 마주친 게 바로 저거란 말이다!”
진청은 이보다 좋은 기회가 어디 있냐는 얼굴이었다.
“우리가 저걸 잡는다면 마가 놈은 확실히 제칠 수 있지. 자, 솔직해지자구. 다들 차기 엽주 자리를 노리고 있지 않나. 저런 사냥감은 평생을 가도 만나기 힘들어. 너희만 동의한다면, 피곤한 신경전을 벌일 것 없이 저걸 잡는 자가 차기 엽주가 되는 거다.”
‘저걸 사냥하는 것도, 당가와 줄을 대는 것도 내가 되겠지만 말이야.’
진청은 ‘차기 엽주’라는 단어에 힘을 주며 말했다.
고민에 잠겨 있던 세 명의 눈이 빛났다.
하지만 노골적인 진청과 달리 다른 세 명은 아직 망설임이 묻어났다.
“엽주가 정식으로 물러난 게 아닌데 벌써 그걸 입에 담기에는….”
독수리 가죽을 두른 창무군이 중얼댔고,
“동감이다. 아직은 시기상조야. 동급으로 취급되어온 우리 사이의 서열을 가리는 데 만족하기로 하지.”
호피를 걸친 맹각도 창무군의 말에 동의를 표했다.
반면 서유화는 백사 가죽을 쓰다듬으며 조금 다른 의견을 내놨다.
“나도 이르다는 생각은 드는데……. 저걸 잡고 나면 달라질지도. 사실 엽주의 사냥술을 본 건 팔 년 전이 마지막이잖아? 그때는 모두가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엽주는 그 이후 사냥에 나선 적이 없어. 우린 항상 일선에서 뛰었고 말야. 여전히 우리보다 뛰어날까?”
진청은 답답하다는 듯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한심한 놈들! 당연히 이제는 우리 실력이 위다. 엽주가 지난 팔 년간 뭘 했지? 사냥은커녕 한가하게 외유나 다니며 놀고먹지 않았나! 그 희한한 교감 능력만 빼면 더 이상 우리보다 나은 게 없단 말이다. 지금의 수천은 우리가 만든 거다. 너희도 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잖아? 솔직해지라고!”
엽장들은 고민에 빠졌다.
수천의 현실과 중원 최고의 사냥꾼으로 불리고 싶다는 욕망, 엽주에 대한 의리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양새였다.
진청은 그들의 갈등에 쐐기를 박았다.
“의뢰 내용은 일차적으로는 백호에 대한 탐색, ‘가능하면’ 사냥까지를 말했지만, 당연히 우리는 저걸 잡을 거다. 의뢰금? 수천의 분타 하나를 세우고도 남을 금액이야. 심지어 표적은 평생을 가도 만나기 힘든 사냥감이지. 지긋지긋한 서열 정리를 하기에 더없이 좋은 기회가 아니냔 말이다! 계속 병신처럼 꾸물댈 거면 당장 꺼져버려.”
진청의 도발에 셋은 마음을 정했다.
그들이 생각해도 지금의 엽주는 유명무실한 존재였고, 이 기회에 서열을 가려 놓는다면 언젠가 그자가 엽주의 자리를 물려받으면 되는 문제였으니까.
“좋아. 해보자.”
“그럼 방식은? 다중 수렵?”
“당연하다. 이렇게 된 이상 순서 따윈 없어. 각자의 방식대로 사냥을 준비해서 최후에 숨통을 끊는 자가 사냥감을 갖는 거다.”
“다중 수렵이라니……. 팔 년 만이구만. 동시에 칼을 꽂았다면 기여도가 큰 쪽으로?”
“그래. 팔 년 전 엽주 자리를 놓고 다퉜을 때와 규칙은 동일하다.”
중원 최고의 사냥꾼이라 불리는 자들 중 네 명이 별비를 사냥감으로 정했다.
그들의 뇌리에선 누가 최고인지를 가리는 게 중요할 뿐 별비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였다.
운태산으로 향하는 마른 비 일행의 뒤로 수천 사냥꾼 사개 조 팔십여 명이 은밀히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