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9화
* * *
“잡스런 기운이 너무 많은데?”
운태산으로 진입한 마른 비는 눈을 가늘게 뜨며 산 전체를 둘러봤다.
산 여기저기에서 꺼림칙하고 불길한 기운이 감지된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산의 기운을 내리누르며 정기를 갉아먹는 느낌이었다.
“케에엑―!”
고라니 한 마리가 뛰쳐나오며 일행에게 달려들었다.
한 방에 때려눕힌 마른 비는 고라니의 눈꺼풀을 억지로 열었다.
“눈이 새빨개. 평지에 있는 짐승들보다 훨씬 심한데?”
이쯤 되니 확신이 선다.
무엇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동물들이 이상 증세를 보이는 원인이 산 어딘가에 있다는 게.
여규가 주변을 경계하며 말했다.
“산동성(山東省)의 태산(泰山)을 제외하면 운태산은 중원 동부에 있는 산 중에 가장 깊고 험한 산이야. 운남의 애뢰산처럼 강소성의 지기(地氣)는 여기에서 발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여규는 마른 비를 돌아봤다.
“비아 너와 별비가 제대로 짚은 것 같아. 동물들이 미쳐 날뛰는 원인이 있다면 여기서 찾는 게 맞을 거야.”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이며 계획을 말했다.
“산이 깊고 험해. 하지만 우리에게 위협이 될 만한 짐승은 없을 거야. 네 방향으로 갈라져서 원인을 찾자. 하루 동안 훑을 수 있는 거리를 감안하면… 저기 보이는 봉우리에서 해가 질 때쯤 만나.”
여규가 봇짐에서 무언가를 주섬주섬 꺼내더니 마른 비와 철중구에게 건넸다.
“비아야, 직접 보는 건 처음이지? 점창에서 쓰는 효시야. 심상찮은 무언가를 발견하면 이걸 쏘아 올려. 폭죽과 소리가 함께 터지니까 낮이든 밤이든 발견하기 쉬울 거야.”
“제길. 산은 딱 질색인데…. 그냥 여기도 남궁 애들한테 맡기면 안 될까?”
마른 비와 여규가 빤히 쳐다보자 철중구는 툴툴대며 고개를 돌렸다.
“그냥 말이 그렇다고. 가자, 가. 우라질.”
“빨리 원인을 알아내야 사람들이 덜 다칠 거야. 조금만 고생하자, 중구.”
일행은 각자 정한 방향으로 흩어졌다.
* * *
“대체 이게 뭔 일이야?”
마웅은 호진과 휘하 엽사들을 대동한 채 며칠에 걸쳐 의뢰를 수행하고 복귀한 참이었다.
갑자기 인간을 공격하는 짐승들 때문에 하남성(河南城)은 난리가 났고, 수천의 엽사들은 신입부터 고참들까지 모조리 동원되어 사방으로 뛰어다녀야 했다.
마웅이 화가 난 건 주력이 되는 네 명의 엽장과 휘하 엽사들이 모조리 사라졌다는 점이었다.
의뢰를 맡아서 나갔다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도 알려주질 않으니 속이 터질 것 같았다.
“진 엽장이 손을 쓴 게 분명해요. 네 명의 엽장이 동시에 의뢰를 떠나다니, 처음 있는 일이 아닙니까. 근데 엽장만 쏙 빼놓고 내용도 알려주지 않는다? 대놓고 따돌리는 게 아닙니까!”
호진은 분한 얼굴로 씩씩댔다.
뭔지는 몰라도 굉장히 큰 의뢰가 들어온 게 분명했고, 실적을 쌓는 데 눈이 돌아간 놈들이 자질구레한 일은 다른 이들에게 떠넘긴 채 손을 합친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이건 도를 넘은 행동이다.
수천이 세간의 신뢰를 쌓을 수 있었던 건 의뢰의 성공 확률도 있지만, 민초들의 고충을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왔다는 점이 더 컸다.
그건 엽주가 다섯 명의 엽장들에게 유일하게 강조한 부분이기도 했다.
한데 근래 들어 마웅을 제외한 엽장들은 노골적으로 엽주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며, 민초들을 돕는 일보다는 굵직굵직하고 돈이 되는 의뢰에 몰두하고 있었다.
“개새끼들! 진청 그 새낀 그렇다 쳐도 나머지 셋은 그렇게 안 봤는데, 다 똑같은 놈들이었수!”
호진이 분개하며 허공에 주먹을 붕붕 휘두를 때였다.
너무나 청아해서 단번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호 엽사께서 욕을 하시다니. 드문 일이네요. 많이 서운하셨나 봐요.”
이십 대 후반쯤 되었을까?
새하얀 피부에 투명한 눈망울을 가진 여인이 장난기 어린 말투로 말했다.
고개를 돌린 호진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숙였다.
“여, 엽주님!”
중원 최고의 사냥꾼들이 모였다는 수천의 정점.
세인들은 물론이고 수천 소속의 엽사들조차 얼굴을 보기 힘들어서 신비로운 인물로 여겨지는 엽주는 서른도 되지 않은 여인이었다.
수천을 상징하는 덫과 활이 교차하는 문양을 왼쪽 가슴에 단 엽주가 배시시 웃었다.
“거참, 미리 기척 좀 내고 나타나면 안 됩니까? 항상 이렇게 갑자기 튀어나오니, 원. 삼 년 만이군요. 엽주.”
마웅도 반가운 얼굴로 포권을 올렸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나이임에도 마웅이 엽주를 대하는 태도는 정중하기만 했다.
팔 년이란 세월 동안 변함없는 사내.
수천의 엽주, 옥예린은 그런 마웅이 항상 믿음직스럽고 고마웠다.
“흠. 엽사들 사이에 재밌는 이야기가 떠돌던데요? 마 엽장님께서 밧줄을 잘 쓰신다고….”
“으아아아아! 난데없이 뭔…! 하지 마십쇼!”
마웅이 시뻘게진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옥예린은 선녀 같은 외모와 달리 장난꾸러기 같은 얼굴로 킥킥 댔다.
“부끄러워하실 필요 없어요. 저도 다 큰 성인인 걸요. 이해는 안 되지만, 서로 좋아서 그러시는 거라면 뭐…. 근데 언니가 좀 힘드실 것 같은….”
“아아아악! 더 말하면 나 죽어버릴 겁니다!”
마웅은 머리끝까지 벌게져서 얼굴이 곧 폭발할 것 같았다.
호진은 고개를 숙인 채 낄낄 댔고, 옥예린도 유쾌하게 웃었다.
한순간에 분위기를 바꿔버린 옥예린이 부드럽게 말했다.
“운남에서 많은 일이 있었나 봐요. 마 엽장님 같은 분이 의뢰에 실패를 하다니…. 오랜만에 할 이야기가 많지만, 일단은 저와 좀 나가야겠어요.”
“나가다니? 의뢰입니까?”
“네. 운태산에 갈 거예요.”
직감적으로 알겠다.
지금 엽주가 가려는 곳은 십중팔구 엽장들이 몰려간 곳이리라.
하지만 마웅은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손이 모자랍니다. 하남성 곳곳이 난리가 났어요. 지금은 우선 민초들을….”
옥예린은 손을 들더니 자신의 말을 먼저 들으라는 동작을 취했다.
“지난 삼 년간 중원의 명산들을 떠돌았어요.”
“아, 유람을 다녀온 겁니까?”
“의뢰예요.”
“의뢰… 라고요?”
엽장들이 엽주에게 불만을 가진 근본적인 이유.
그들은 옥예린이 수천의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팔자 좋게 외유나 다닌 걸로 알고 있다.
한데 그게 의뢰였다고?
대체 무슨 의뢰길래 삼 년이나 걸린단 말인가.
“이제 같이 움직여야 하니 마 엽장님께는 밝혀도 되겠죠. 표면화되진 않았지만, 몇 년 전부터 중원 곳곳에서 기이한 현상들이 나타났어요. 의뢰인께선 그것을 조짐이라고 하더군요.”
“조짐이요?”
“네. 저는 지난 삼 년간 중원의 산들을 돌며 무언가를 찾는 일을 했어요. 의뢰인은… 소림사 방장이셨고요.”
“소, 소림사 방장이라고요? 방장께서 수천에 의뢰를?!”
생각지도 못한 내용이다.
이게 사실이라면 엽주는 그간 누구보다 중한 일을 수행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잠시만요! 아무리 그래도 민초들을 두고 갈 순 없습니다. 요 며칠 의뢰를 수행하다 보니 상황이 굉장히 심각하다는걸….”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하남성은 곧 진정될 테니까.”
“진정…이라니. 엽주께서 지금 일의 규모를 짐작하기 어려워서….”
옥예린은 걱정 말라는 듯 빙긋 웃었다.
“제가 마지막에 다녀온 곳이 숭산(崇山)이었어요. 놀랍게도 소림사가 있는 숭산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졌고, 다행히 늦지 않게 해결할 수 있었죠. 일을 수습하자마자 소림은 무승들을 하산시켰어요. 소림의 모든 역량이 동원되었으니 하남은 곧 진정될 거예요.”
정도 무림의 역사 그 자체이자 절대적인 구심점.
원의 치세를 거치며 숨죽일 수밖에 없었지만, 천년소림(千年少林)은 여전히 두말할 필요 없는 정파의 하늘이다.
어지간한 일로는 꿈쩍도 않는 그들이 움직였다면 하남성이 진정되는 건 시간문제였다.
“마 엽장님께서 저와 동행해야 하는 이유가 또 있어요.”
“……?”
“마 엽장님의 보고서를 읽었어요. 운남에서 신비로운 청년을 만났다고 하셨죠.”
“아, 네. 비아라는 녀석인데….”
옥예린은 별빛 같은 눈동자를 빛내며 말했다.
“그분이 지금 운태산에 있어요.”
* * *
흩어져서 산을 수색하고 저녁에 모이길 반복한 게 며칠째일까.
마른 비는 멍하니 서서 바닥에 쓰러진 생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게… 뭐지?”
집채만 한 멧돼지를 때려눕힌 마른 비가 두 눈을 비볐다.
멧돼지… 아니, 이게 멧돼지가 맞나?
덩치나 전체적인 생김새는 멧돼지가 분명하다.
하지만 마른 비는 네 개의 송곳니를 가진 멧돼지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기형인가?”
야생에는 가끔 그런 것들이 출현한다.
원인은 알 수 없지만 보편적인 생김새나 정상적인 발육 과정을 벗어난 것들.
예컨대 발가락이나 다리의 숫자가 다르거나, 있어야 할 장기가 없거나, 비정상적으로 빠르게 노화되는 경우를 들 수 있다.
당연하게도 대부분의 기형 생물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신체의 결함으로 빠른 죽음을 맞는다.
하지만 매우 드물게 기존의 종보다 훨씬 뛰어난 적응력과 강력한 힘을 지니고 태어나는 경우가 있으니 운남 곡정의 쌍두사나 구향동굴의 사람거미가 그런 경우였다.
영물이나 마물로 분류되는 것들도 엄밀히 따지면 기형이나 마찬가지다.
정상적인 힘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것들.
생김새가 기존의 종과 동일할 뿐, 각성한 짐승들도 사실은 기형의 범주에 넣어야 한다.
아니, 아니다.
그 경우는 기형(畸形)이 아닌 기형(奇形)이 될 테니 그건 다르게 봐야겠지.
마른 비가 멧돼지의 기이한 모습을 보고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여규와 철중구도 혼란에 빠져 있었다.
“이게 무슨…?!”
팔이 셋 달린 원숭이.
일반적인 원숭이보다 훨씬 빠르게 나무를 오가던 녀석이 여규를 덮쳤다.
“이런 시벌! 내가 이래서 산이 싫댔는데! 산에 오니까 이런 징그러운 걸 보잖아!”
이빨이 삼중으로 겹친 승냥이를 두 동강 낸 철중구가 외쳤다.
“산 싫어! 산에는 이상한 게 산단 말이다!”
산의 문제가 아닐 텐데 철중구는 모든 걸 산의 탓으로 돌렸다.
‘세 명’이 당황한 것과 달리 ‘한 마리’는 상대적으로 태연했다.
별비에겐 발이 여섯 개건 눈이 열 개건 생김새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고, 그게 자신보다 강하냐 약하냐가 관심사일 뿐이었다.
별비를 어이없게 만드는 건 원래대로라면 감히 눈도 못 마주칠 생물들이 건방지게 덤벼든다는 점이었다.
하다하다 이제는 종달새마저 부리를 세우고 달려들자 별비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뭔…….〕
별비는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하늘 높이 날아다녀서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새들까지 알아서 달려드니 이건 만찬이나 다름없지 않나.
별비는 통통하게 살이 오른 놈들을, 맛있는 부위만 골라먹으며 나아갔다.
녀석이 움찔한 건 눈이 벌게진 다람쥐를 한 입에 삼켰을 때였다.
뼈까지 씹기 위해 턱에 힘을 준 순간, 불길한 소리가 울렸다.
철컥―! 피피핏!
입안에서 화끈한 통증이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