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1화
퍼어억!
육중한 타격음.
일반적인 곰의 덩치에 두 배에 달하는 흑곰이 혀를 빼물고 쓰러졌다.
마른 비는 엎어져서 경련하는 곰의 눈꺼풀을 열었다.
‘눈자위가 핏빛에 가까워.’
짐작대로 산의 심처로 진입할수록 짐승들은 점점 흉포해졌다.
눈자위로 드러나는 붉은빛의 정도 또한 짙어진다.
짐승들의 정신을 헝클어놓은 무언가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증거였다.
마른 비는 곰의 앞발을 어루만지고, 몸통을 꾹꾹 눌렀다.
‘어? 이건 짐작 못 했는데?’
근육의 발달 정도와 세기.
흑곰의 몸은 마치 단련을 거듭한 인간처럼 단단하게 부풀어 있었다.
짐승이 수련을 할 리는 없으니 이건 지금 일어나는 기현상과 연관이 있다고 봐야 한다.
실제로 산 깊숙이 들어갈수록 짐승들이 날뛰는 정도는 심해졌고, 발휘하는 힘도 강해졌다.
“케아악!”
갑자기 등 뒤에서 달려든 무언가!
마른 비는 반전하여 습격자의 목을 붙잡고 그대로 꺾었다.
우드득!
목이 부러진 건 늑대로 보일 만큼 몸집이 부푼 여우였다.
눕혀놓고 꼼꼼히 살피니 여우는 눈 한쪽에 눈동자가 두 개씩 있는 기형종이었다.
‘그래… 이제 알겠어.’
산에 진입한 뒤 쓰러뜨린 동물이 몇 마리나 될까?
백? 이백?
지칠 줄 모르고 달려드는 짐승들을 때려눕히며 확인한 건 두 가지였다.
첫째는 정신이 침식된 정도가 심할수록 강해지며, 기형으로 변한 놈들은 더욱 그렇다는 점.
둘째는 공격 대상을 가린다는 점이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선 어떨지 모르지만, 자신이 모습을 드러내면 짐승들은 철천지원수라도 만난 것처럼 달려들었다.
오직 자신만을 노리며.
그건 마치 짐승들이 협공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몸에 달라붙는 것처럼 찐득하고 눅눅한 기운……. 비틀리고 썩어버린 원한 덩어리가 대기에 스며든 것 같아. 이게 짐승들을 미치게 만든 건 확실한데……. 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거지?’
답을 구할 곳 없는 질문이었다.
직접 확인할 수밖에.
마른 비가 몸을 일으켰을 때, 지금까지와는 다른 무언가가 그의 감각을 건드렸다.
사아아악―
“어?”
이건 무차별적이고 광범위하게 대기를 짓누르는 기운과는 달랐다.
방향을 지시하고, 특정 대상에게 직접적으로 속삭이는 듯한….
인위적!
그래, 그 표현이 딱 맞겠다.
방금 느낀 건 인위적인 기의 흐름이었다.
결은 다르지만, 마치 와족의 언령이나 중원 무인들의 전음처럼 의지를 전파하는 듯했다.
“키아아아!”
“꾸어엉!”
“쿠라라락!
사방에서 짐승의 울부짖음이 들린 건 그때였다.
파사사삭!
인상을 찡그리는 순간, 숲을 헤친 수 마리의 짐승이 마른 비를 덮쳤다.
“멈추라고 해도 들을 리 없겠지?”
마른 비는 당황하지 않았다.
짐승들이 강화되었다지만, 그래 봤자 운남의 평범한 야수들보다 조금 더 강한 정도다.
애초에 중원과 운남의 야수들 사이엔 비교 불가능할 정도로 엄청난 힘의 격차가 존재했다.
퍼버버벅!
가뿐히 몸을 움직이자 서너 종의 짐승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지금까지는 지나친 경로에서 만난 야수가 덤벼들었다면, 이건 의도적으로 자신을 노린 술수다.
누군가 짐승들을 움직여 공격을 명한 것이다.
하지만 그건 적의 치명적인 실수였다.
정체 모를 적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기를 읽어내는 감각만큼은 누구에게도 밀릴 생각이 없으니까.
“찾았어. 그쪽이구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른 비의 신형은 전진했다.
그가 번갯불의 최대 사정거리에서 모습을 드러낸 순간, 기의 파장이 흔들렸다.
적은 당황하고 있었다.
“안 놓친다!”
콰앙!
연, 번갯불.
순간이동에 가까운 기동은 잔상도 잡기 힘들었다.
세 번에 걸친 이동 끝에 마른 비는 적의 모습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뭐야, 저건?’
기괴하다.
거리를 벌리려는 듯 등을 돌린 사내는 산양의 가죽을 덮어쓰고 뼈로 만든 지팡이를 들고 있었다.
얼굴의 중앙을 가로지르는 두 줄기 선.
임시적으로 그리는 와족의 전투화장과 달리, 살에다 먹물을 넣어 지워지지 않게 각인한 그것은 자묵(刺墨)이었다.
죄인에게 주던 형벌의 하나라고 들었는데 범죄자인 건가?
마른 비는 그렇지 않다고 여겼다.
저건 형벌이라기보다는 소속이나 계급을 나타내는 일종의 문양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당신, 뭐야?”
많은 의미가 함축된 질문이었다.
왜 이런 산속에 있는 거냐?
그 요상한 차림은 뭐지?
짐승들이 날뛰는 기현상에 관여하고 있나?
왜 날 공격한 거지?
질문을 받은 사내는 대꾸하지 않고 지팡이를 들어 올리더니 괴상한 소리를 질렀다.
“호오오오~!”
단순한 외침이 아니다.
사내의 음성엔 아까 느꼈던 기운이 담겨 있었고, 외침이 터지자마자 마른 비 근처의 수풀이 들썩댔다.
“크와아앙~!”
어지간한 범에 비견할 몸집을 지닌 승냥이.
치아 구조가 이중으로 된 기형종이었다.
야수를 부른 사내는 이제 넌 죽었다는 듯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마른 비는 주둥이를 쩍 벌리고 달려드는 야수를 보지도 않고 후려쳤다.
주먹 한 방에 턱이 박살 난 승냥이는 뛰쳐나온 속도보다 빠르게 땅을 나뒹굴었다.
“훠, 훠어…?!”
산양 가죽을 뒤집어 쓴 사내는 기절할 듯한 표정을 지었다.
어지간한 범을 일격에 물어 죽이는 수호수(守護獸)가 한 방에 박살났기 때문이다.
마른 비는 사내가 놀라건 말건 기다려주지 않고 물었다.
“괴상한 소리 내지 말고 인간 말로 대답해. 당신, 뭐야?”
마른 비는 일부러 두 눈에 자연기를 담았다.
사내의 주변엔 대기에 들어찬 불길한 기운이 밀집돼 있었지만, 푸르게 빛나는 마른 비의 안광은 그것들을 가볍게 헤쳤다.
마른 비의 눈빛을 받은 괴인은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떨었다.
“후오오…! 의…식……. 정…화……. 합일… 개벽…….”
“뭐라고?”
사내는 눈을 부릅뜨며 지팡이를 들더니 마른 비를 가리켰다.
“불순…! 불결…! 타라악~!”
저놈이 지금 뭐라고 떠드는 건가?
정체를 말하랬더니 알아듣지 못할 소리나 늘어놓고 있다.
한시라도 빨리 이 현상을 해결해야 사람들이 덜 다치는데, 겨우 잡은 실마리께서 이렇게 나오시겠다?
이럴 땐 철중구가 알려준 특효약이 있었다.
미친 척하는 놈은 미치기 직전까지 두들겨 패면 기적적으로 제정신이 돌아오더라는.
마른 비는 사내에게 맑은 정신을 찾아주기로 했다.
“당신, 이리 와봐.”
괴인에게 성큼성큼 다가설 때였다.
사방에서 풀숲을 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른 비가 주변을 둘러보는데, 전면에서 월등히 빠른 움직임이 느껴졌다.
다시 앞으로 고개를 돌리니 어느새 나타난 근육질의 사내가 괴인의 옆에 서 있었다.
‘꽤 빠른데?’
마른 비의 이채로운 눈길을 받으며, 사내가 입을 열었다.
“요 며칠 야수들을 쓰러뜨리며 다가오던 게 너였군.”
다행이다.
이놈마저 ‘후오~!’ 거리면 골치 아플 뻔했는데 다행히 인간의 말을 구사한다.
마른 비는 산양을 뒤집어쓴 괴인에게 얻지 못했던 답을 그에게 얻기로 했다.
“당신들, 뭐 하는 사람들이야?”
인간의 말을 할 뿐 근육질의 사내도 이상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는 산양 괴인처럼 상반신에 곰의 거죽을 덮어썼는데, 곰의 아가리에 해당하는 부분에 얼굴을 내놓고 있었다.
그리고 그는 산양 괴인보다 한 줄이 더 많은 세 줄의 자묵을 얼굴에 지니고 있었다.
“소체(小體)를 해치고, 영매사(靈媒師)를 해하려 한 놈이다. 없애라.”
어떻게 된 게 질문에 제대로 대꾸하는 놈이 하나도 없다.
마른 비가 슬슬 인내심의 한계를 느낄 때, 아까 풀숲을 헤치며 다가오던 것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 이 사람들은 정상이네?’
산양과 곰의 가죽을 뒤집어쓴 괴인들과 달리 지금 달려드는 여섯 명의 사내들은 상반신을 탈의했을 뿐 맨몸이었다.
코와 광대를 가로지르는 한 줄기 선을 통해 그들과 한편이라는 걸 알 수 있을 뿐이었다.
“후오오오~!”
아니다. 잘못 생각했다.
이자들도 이상하다.
근육질의 사내들은 산양 괴인과 같은 함성을 지르며 다짜고짜 공격해왔다.
“왜 동물도, 인간도 다 이상한 거야, 여긴?”
마른 비는 지그시 인상을 쓰며 느긋하게 투덜댔다.
하지만 움직임은 결코 느긋하지 않았으니 번개처럼 뻗어나간 권각이 적들을 요격했다.
쇄골, 복부, 명치, 인중, 관자놀이…!
한 명당 한 방씩이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급소를 가격하자 여섯 명의 사내들은 맞은 부위를 움켜쥐고 무너져 내렸다.
“후, 후오… 훅…!”
신음할 때조차 계속 저런 식이다.
이쯤 되면 일부러 저러는 게 아닌 것 같은데…….
‘말을 못 하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짐승들이 알 수 없는 기운에 잠식된 것처럼 이들도 어떤 영향을 받은 건 아닐지…….
자세히 보니 짐승들만큼은 아니지만, 여섯 명의 사내들도 눈자위가 빨간 걸 확인할 수 있었다.
“호오… 합일을 이루기 전이라지만, 청기(淸器)들을 이토록 간단히 제압하다니……. 너, 무인이었군.”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소체니, 영매사니, 청기니…….
여규가 있었다면 짐작을 했을 텐데.
마른 비는 그 단어들을 꼭 기억했다가 여규에게 말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때 마른 비를 살피던 곰 가죽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잠깐…. 너에게서 대단히 불쾌한 기운이 감지된다. 그러고 보니 아까 몸을 놀릴 때도 그랬어. 육신에 깃들었던 푸른 기운……. 그건 중원 무인들의 내공이 아냐. 너, 뭐 하는 놈이냐?”
누가 누구에게 불쾌하단 소릴 하는 건지.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 놈에게 이쪽의 정체를 말해줄 이유가 없었다.
마른 비가 유일하게 대화가 가능할 것 같은 사내에게 힘으로라도 답을 들으려는 순간이었다.
“저놈에 대해 알아야겠어. 영매사. 의태를 준비하게.”
산양 괴인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지팡이를 번쩍 쳐들었다.
“후오오오오!”
괴인의 외침이 터지자 대기에 깃든 검은 기운이 청기라 불린 사내들에게 밀집되기 시작했다.
고통에 신음하던 자들이 눈을 번쩍 뜨고, 각성이라도 한 것처럼 벌떡 일어섰다.
“후와아아아!”
“뭐, 뭐야, 이게?”
비상식적인 일들의 연속이다.
타격은 급소에 제대로 꽂혔고, 고통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당분간 움직일 수도 없어야 정상이었다.
한데 멀쩡하게 일어서?
마른 비가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움찔한 사이, 여섯 명의 사내들이 광인처럼 달려들었다.
“후와악!”
힘도, 속도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다.
훨씬 짙어진 붉은색의 눈자위를 번뜩이며 사내들은 미친 듯이 팔다리를 휘둘렀다.
공격을 피하는 마른 비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일어선 게 문제가 아냐. 이 움직임은…!’
중원의 무인이라면 그저 무질서한 동작으로 치부했으리라.
하지만 운남의 야생에서 무수한 야수들을 관찰했던 마른 비는 알 수 있었다.
여우, 곰, 원숭이, 호랑이, 뱀…….
청기라는 사내들의 움직임은 짐승의 동작을 모방한 게 틀림없었다.
아니, 모방을 넘어 해당 짐승이 인간의 몸에 깃들기라도 한 것처럼 쏙 빼닮아 있다.
이들은 마치 순응, 적응, 터득으로 이어지는 와족의 생존술 중 순응 단계를 건너뛰고 곧바로 적응 단계에 이른 것만 같았다.
“의태를 한 청기들은 월등히 강해지지. 하지만 너, 그 정도에 곤란을 겪을 수준은 아닌 것 같은데?”
팔짱을 낀 곰 가죽 사내가 고개를 쳐들며 말했다.
위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는 시선.
마른 비는 그 모습이 진심으로 불쾌했다.
아니, 저자의 존재 자체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어. 진짜 짜증 난다.”
후아아악―!
마른 비의 두 주먹에 대자연의 기운이 깃들었다.
“정체. 그리고 목적. 말하지 않으면 말할 때까지 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