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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62화 (262/463)

262화

철중구가 마른 비에게 지대한 영향을 받았듯, 마른 비 또한 알게 모르게 철중구의 일면을 닮아가고 있었다.

마른 비와 여규의 성향이 흡사한 것과 달리 철중구는 둘과는 아예 다른 존재였다.

하지만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그들은 서로를 닮아 갔다.

그건 그들이 추구하는 삶의 자세와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비슷하기 때문이며, 서로를 인정하고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 마른 비의 입에선 자신도 모르게 철중구의 말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말할 때까지 팬다고? 흐흐, 어디 한번 해보….”

콰아아앙!

일격.

파리 떼처럼 귀찮게 앵앵대는 청기들을 마른 비는 돌개바람 한 방에 정리해버렸다.

생사를 신경 쓰지 않고 단호하게 내친 일격에 여섯 명의 사내가 허물어졌다.

마른 비는 곰 가죽 사내를 향해 곧바로 신형을 날렸다.

“헛?! 자, 잠까…!”

오만하게 마른 비를 내려다보던 사내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팔짱을 꼈던 손을 풀고 팔을 교차해 막아보지만, 마른 비의 공격은 애초에 그가 감당할 수 없는 해일이었다.

뻐어어어억!

단숨에 팔을 부러뜨린 바위 부수기가 사내의 복부에 깊숙이 꽂혔다.

물어야 하는 게 있으니 힘을 조절했지만, 그 한 방만으로 사내는 실신 직전이었다.

“커… 허…! 이, 이런 힘이…! 영매사, 이건… 의태로는 안 돼! 내, 내게 어서 빙의(憑依)를…!”

곰 가죽 사내는 날아가려는 의식을 부여잡고 간신히 말했다.

“후오오오~!”

산양 가죽 괴인은 지팡이를 공중에서 크게 돌리며 외쳤다.

마른 비는 이제 그 외침이 지겨웠고, 동작은 보기도 싫었다.

“당신도 그만해.”

빠아악!

“후옥…!”

휘돌려 찬 뒤꿈치에 산양 사내의 몸통이 바스러졌다.

“어?!”

마른 비가 깜짝 놀란 건 그의 육체가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지금껏 싸운 자들과 달리 산양 괴인의 몸은 무를 전혀 수련하지 않은 일반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몸통이 움푹 파인 그는 짤막한 신음을 남긴 채 그대로 절명했다.

“크아아아아!”

산양 괴인은 그래도 목적은 달성하고 죽었다.

곰 가죽 사내가 부탁한 ‘빙의’라는 것이 성공했기 때문이다.

팔이 부러지고, 척추가 접힐 듯이 몸을 꺾었던 곰 가죽 사내는 언제 다쳤냐는 듯이 벌떡 일어나서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저 사람은 원래 눈이 하얬는데?’

영매사나 청기라고 불린 자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모두 짐승들처럼 눈자위가 붉었다.

유일하게 멀쩡한 게 곰 가죽 사내였다.

마른 비가 그렇듯이 그도 불길한 기운의 영향을 받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지금, 괴성을 지르고 있는 그의 눈은 피처럼 붉었다.

“끄아아아아! 죽인다! 감히 수투사(獸鬪士)께서 하사하신 병력을…! 수인(獸人)의 명예를 걸고 너만은 반드시 죽인다!”

수인?

의태에 이어 또 하나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가 나왔다.

그리고 사내의 모습은 그가 왜 수인이라고 불리는지를 단박에 알게 해주었다.

“크으… 크… 크어어엉!”

사내는 곰을 연상케 하는 자세를 취했고, 곰처럼 울부짖었다.

놀라운 건 그가 뿜어내는 힘이었다.

느껴지는 내공은 대단치 않은데, 지닌 것 이상의 힘을 발휘한다.

사내가 크게 휘두른 주먹을 막았을 때, 마른 비의 몸이 덜컥 밀렸다.

“어?”

이것 봐라?

이건 정말 예상을 뛰어넘는다.

자연기가 읽어낸 감각을 토대로 적의 역량을 가늠했고, 방어하기에 충분한 힘을 주입했다.

그런데 밀린다고?

마른 비는 붕 떠올랐다가 대여섯 걸음 떨어진 곳에 착지할 수 있었다.

“크르르… 크와앙!”

사내는 아예 이성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곰처럼 양팔 양다리로 엎드린 그는 입을 벌리며 곰의 울음을 토해냈다.

“당신, 안 아퍼?”

복부는 그렇다 치자.

사내는 아까 바위 부수기를 막으며 양팔이 부러졌다.

한데 멀쩡히 주먹을 날리는 것도 모자라 팔로 버티고 선다고?

빙의인지 뭔지가 힘을 끌어올린다고 쳐도 부러진 팔까지 도로 붙였을 린 없다.

저건 통증을 느끼지 못하거나, 아니면….

‘모종의 방법으로 뼈를 고정시킨 건가?’

그게 아니면 멀쩡히 팔을 쓰는 걸 이해할 방법이 없다.

자연기를 집중해서 살피자 사내의 몸을 뒤덮은 검은 기운이 감지됐다.

“크와아앙!”

몸을 움츠렸던 사내는 양팔을 크게 벌리며, 마른 비를 향해 뛰었다.

그 모습은 사냥감을 잡기 위해 곰이 달려드는 것과 흡사했다.

‘실험해 보자.’

마른 비는 마주 전진했고, 사내의 인식 한계를 뛰어넘는 속도로 그의 품에 파고들었다.

눈부신 발차기 연격.

솔잎털기가 주먹을 휘두르는 사내의 팔다리 관절을 두드렸다.

빠바바바박!

발끝에 전해진 느낌!

분명히 관절이 절단 났다.

하지만 마른 비를 지나쳐서 땅에 처박힌 사내는 잠시 꿈틀대더니 벌떡 일어섰다.

으드드득!

마른 비는 그의 움직임과,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미세한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확실하다.

사내의 몸을 얇은 막처럼 감싼 기운이 부러진 뼈를 압박하여 강제로 제 위치에 잡아두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게 확실했다.

“이런 건 또 처음 보네. 무공은 아니고… 주술 계통인가?”

지닌 힘 이상을 발휘하는 것도 몸을 감싼 기운과 관련이 있으리라.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게 주술이건 뭐건 뒤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성이 날아간 상황에서 몸을 저렇게 막 굴리다간 저 상태가 풀리는 순간, 죽거나 폐인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목숨을 일회용 도구로 활용하는 비술.

깊은 산속에서 마주친 정체불명의 집단에게 마른 비는 진한 분노를 느꼈다.

“크… 크어어어!”

침까지 질질 흘리던 사내는 저돌적으로 땅을 박찼다.

마른 비는 생포하려던 마음을 버리고 그의 머리를 향해 뒤꿈치를 내리꽂았다.

콰앙!

두개골이 박살 난 사내는 달려들던 모습 그대로 풀썩 엎어졌다.

돌처럼 단단해진 육체와 뿜어내는 힘으로 볼 때 어지간한 무인이라면 찜 쪄 먹었겠지만, 마른 비를 위협하기에는 힘의 격차가 너무도 컸다.

사내는 머리가 박살 난 상황에서도 한동안 일어나려고 꿈틀대다가 결국엔 축 늘어졌다.

“규가 알려준 무림 세력에 이런 자들은 없었어. 어디서 튀어나온 거지?”

전부 죽어버렸으니 답을 얻을 수 없었다.

마른 비는 고개를 들어 일행이 헤매고 있을 지역을 바라봤다.

‘이런 자들이 수십 명 있다면 모를까, 이 정도 수준이면 규나 중구에게도 위협이 될 순 없어.’

정확한 판단이었다.

고통도 느끼지 못하고, 어딜 부숴도 계속 일어나니 생포하는 게 불가능할 뿐, 죽이는 건 어렵지 않았다.

여규나 철중구도 중원 어디에 내놔도 손꼽힐 무인들이었으니까.

걸리는 게 있다면 이자가 남긴 말이었다.

‘수투사라고 했나? 말하는 걸 보면 이자를 부리는 상위의 존재 같은데…….’

그런 자라면 조금 위험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자에게 닿아야만 기현상에 대한 실마리를 얻을 수 있다는 건 확실했다.

마른 비는 저녁이 되길 기다릴 것 없이 지금 당장 일행과 합류해야겠다고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헉, 허억…!”

거의 다 왔다.

이 구간만 지나면 준비한 사냥터에 이를 수 있다.

수천의 사냥꾼들은 침까지 질질 흘려가며 젖 먹던 힘을 다해 뛰고 있었다.

촤촤차악―!

솜털을 곤두서게 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거대한 날붙이 여러 개가 육신을 난자하는 듯한 음향.

저게 무엇인지는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여, 여… 엽자아앙!”

다 큰 사내가 울먹이는 목소리.

너무나 큰 공포에 집어 삼켜졌기 때문이다.

하얀 사신이 휘두른 발톱은 일말의 자비도 없이 사내를 해체했다.

“뛰어! 멈추지 마! 뒤도 돌아보지 마라! 그냥 죽어라 달렷!”

맹각은 혹시나 고개를 돌릴 자들을 염려해 그렇게 외쳤다.

뿌리칠 수 없는 악몽이 턱밑까지 다가왔고, 수천 최고의 정예들이 손도 못 쓴 채 도살당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 때, 기다려 마지않던 목소리가 들렸다.

“다 왔어! 여기다!”

언제 이런 지형을 발견했는가.

서유화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장벽처럼 눈앞을 가로막은 돌산이 보였다.

그 사이에는 사람이 겨우 지날 만한 소로가 뚫려 있었다.

“진입해! 얼른 들어오란 말이야!”

먼저 소로에 진입한 서유화가 목에 핏대를 세우며 외쳤다.

“먼저들 들어가라! 우리가 막고 있을 테니!”

맹각은 창무군, 진청과 함께 시간을 벌 요량으로 반전했다.

그리고 그는 그대로 굳었다.

‘없어?!’

없다.

방금 전까지 뒤를 쫓아오던 괴수가 보이지 않는다.

맹각이 백호의 위치를 찾고 있을 때, 등 뒤에서 소름 끼치는 숨소리가 들렸다.

“크르르…….”

‘빌어먹을! 어느새…!’

온몸이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뒤를 돌아보는 순간 갈가리 찢기리라는걸.

맹각이 죽음을 떠올릴 때, 그를 구원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거나 먹어라! 이 괴물 새끼야!”

후아아아악―!

좌우에서 엄습하는 파공음!

암벽 위에 설치해놓은 서유화의 함정이 발동됐다.

거대한 바위를 통째로 깎아 만든 창이 밧줄에 매달린 채 별비를 노렸다.

“크아앙!”

하지만 통할 리 없었다.

별비는 좌우에서 떨어지는 석창을 앞발 한번 휘두르는 걸로 분쇄해버렸다.

그 틈을 노련한 엽장들이 놓칠 리 없었고, 맹각과 창무군, 진청은 반전하며 별비의 급소를 노렸다.

“카압! 뒈져랏!”

경혼철창(驚魂鐵槍), 흑응수(黑鷹手), 사두절검(蛇頭切劍).

지금의 엽장들을 있게 한 최강의 절기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은 한 명 한 명이 거대 문파의 대주급에 비견되는 실력자였고, 짐승을 죽이는 데 있어서는 비교할 자가 없는 사냥꾼들이었다.

소로에 진입했던 서유화도 뛰쳐나오며 사슬낫을 휘두르니, 별비는 그대로 사냥당할 것 같았다.

“커허헝!”

엽사들이 경악한 건 별비의 대응 때문이었다.

목을 노린 맹각의 창을 이빨로 낚아채고, 창무군의 장법을 두툼한 어깨로 받아낸다.

진청의 검을 앞발로 후려치고, 서유화의 낫을 고개를 숙여 피하더니 남은 앞발로 낫에 연결된 사슬을 끊어버렸다.

그건 마치 절정에 이른 무인이 하수들의 합공을 파훼하는 것 같았다.

네 명의 연수합격을 홀로 받아낸 별비는 잠시의 틈도 주지 않고 울부짖었다.

“커허허헝!”

울음에 실린 충격파.

바짝 근접해 있던 엽장들은 별비의 포효에 그대로 노출됐다.

무형의 망치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엽장들은 사방으로 튕겨 나가 나뒹굴었다.

“커, 커헉…!”

맹각은 벌떡 일어섰으나 곧 휘청거리며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고막이 찢어졌는지 그의 귀에선 피가 줄줄 흘러나오고 있었다.

“지금이다! 끊엇!”

땅을 뒹굴던 서유화가 앙칼지게 외쳤다.

그녀의 외침에 호응하듯 신속한 움직임이 일었고, 암벽 위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우르르릉―!

벼락틀.

서유화의 사냥조가 준비한 회심의 덫이었다.

엽장들의 합공을 받아낸 데 이어 자연기를 실은 포효까지 쏟아낸 터라 별비는 찰나의 틈을 드러냈고, 그 위로 엄청난 중량의 바위들이 쏟아져 내렸다.

함정 사냥꾼 서유화.

규격 외의 맹수들을 잡기 위해 고안된 벼락틀은 서유화의 개량을 거치며 독보적인 영역에 도달해 있었고, 제대로만 적중하면 삼 층 높이의 전각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별비가 바위에 파묻힌 걸 보고 서유화는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윽…! 아파……. 현 엽주에 이어 수천은 다음 대에도 여성을 주인으로 받들게 되겠군. 다들 인정하지? 저 괴물을 잡은 건 나야.”

가까이 있던 엽장들이 고막이 터진 데 반해 멀리에서 별비를 공격했던 서유화는 상태가 양호해 보였다.

그녀가 배시시 웃으며 일어날 무렵, 무덤처럼 쌓인 바위들이 들썩댔다.

“……어?”

우르르르―

말도 안 된다.

이건 정말 말도 안 됐다.

적중시키는 게 불가능해서 그렇지, 깔리기만 한다면 천하제일인이라도 버틸 수 없으리라 자신했던 함정이다.

저 중량은 애초에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가 아니었다.

‘아, 저건 인간이….’

규격을 뛰어넘는 맹수가 무인처럼 내공을 사용한다면?

저게 내공인지 어떤지는 알 수 없지만, 확실한 건 백호는 기운을 자유자재로 다루었다.

절정의 무인처럼 기운을 운용하는 맹수.

애초에 존재하리라 상정한 적 없는 사냥감이었다.

“크르르….”

백호는 겹겹이 쌓인 바위들을 등으로 밀어 올리며 몸을 일으켰다.

몸통의 뼈 몇 개가 부러진 것 같고, 어깨 한쪽이 빠진 듯 덜렁대지만, 세 개의 다리만으로 몸을 지탱했다.

푸른 염화처럼 타오르는 맹수의 안광이 흩날리는 먼지 속에서 살벌하게 빛났다.

“크아아아앙!”

산 전체를 찍어 누르는 포효.

별비와 눈이 마주친 사냥꾼들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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