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화
‘이건 못 잡는다…!’
검을 쥔 진청의 손은 부르르 떨리고 있었다.
수천의 엽장에 오른 후 희귀동물 포획 같은 돈이 되는 의뢰에 치중해온 건 사실이다.
허나 이름이 알려지기 전까지는 맹수들도 자주 사냥했었고, 그중에는 굉장히 강한 것들도 있었다.
‘차원이 다르다…!’
하지만 어떤 것도 눈앞에 있는 백호와는 비교가 불가능했다.
세상 누구보다 짐승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했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건 ‘평범한’ 동물일 뿐이었다.
또한 중원에서 영수니 악수니 떠드는 것들은 그저 ‘조금 강한’ 짐승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진청은 한 번도 이런 괴물이 존재할 거라고는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어떻게든 여길 벗어나야 해!’
든든한 지지 기반이었던 휘하 엽사들이 전멸한 이상, 수천을 손에 넣는 건 요원한 일이 됐다.
저 짐승을 자신이 사냥할 수 있다면 또 모를까.
허나 그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교에서 오랜 기간 공들인 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버렸으니 문책을 받겠지만, 여기서 짐승에게 찢겨 죽는 것보다는 나을 터.
진청이 부들부들 떨며 도망갈 방법을 궁리할 때, 목소리가 들렸다.
“정신 차려라! 사냥이든 싸움이든 겁먹는 순간 끝장이야! 내공을 끌어올리고 공포를 떨쳐내!”
맹각이었다.
“한동안 쉬운 사냥만 하다 보니 기본을 잊은 거냐?! 자세 잡고 진형을 짜! 엄청난 놈이지만, 부상을 입었다! 잡을 수 있어!”
창무군도 엽사들을 독려했다.
“뭘 멍하게 있는 거야? 다음 덫을 준비해! 한 방 더 적중시키면 죽일 수 있다! 서둘러!”
서유화도 암벽 위에 있는 자신의 사냥조에게 외쳤다.
‘……뭐야? 싸우겠다고? 이 머저리들이 힘의 차이를 못 느꼈나?’
진청은 아연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빈말이 아니다.
맹각을 위시한 세 명의 엽장들은 진심으로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다.
‘이길 자신이 있는 건가?’
아니다. 저 표정!
이놈들도 힘든 싸움이라는 걸 안다.
벼락틀이 적중해서 겨우 저울추가 맞춰졌지만, 잘해봐야 공멸이라는 것을.
‘그럼 왜?’
진청은 엽사들을 돌아보는 엽장들의 눈길에서 그들의 의중을 읽을 수 있었다.
‘하! 설마? 이런 멍청한…!’
세 명의 엽장이 도주를 고려하지 않는 이유.
바로 휘하 엽사들 때문이었다.
백호가 다리를 다친 이상 전처럼 움직이진 못하겠지만, 등을 돌리고 약한 모습을 보이는 순간 달려들 게 뻔하다.
맹수의 습성이란 그러하니까.
그리고 방금 전의 속도로 볼 때 다리 하나를 다쳤다고 해도 벗어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운이 좋다면 엽장 한둘은 살 수 있을지 몰라도 나머진 싸워보지도 못하고 몰살할 터.
맹각을 비롯한 엽장들은 빠르게 상황을 판단했고, 미리 맞추기라도 한 듯 기운을 일으키며 별비의 기세에 저항했다.
그러자 그들의 독려에 힘입은 오십여 명의 엽사들도 이를 악물고 무기를 움켜쥐기 시작했다.
도망갈 궁리를 하는 건 진청 하나뿐이었다.
‘마가 놈을 비롯해서 다른 사냥조들이 겁대가리를 상실한 놈들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전부 이렇게 멍청하다니…!’
자신이라면 휘하 엽사들을 돌진시키고 도망쳤을 거다.
전우애니 동료애니 떠들지만, 결국 자신이 살아야 의미가 있는 게 아닌가.
교에 입교한 것도, 사냥술과 무공을 연마한 것도, 지령을 받고 수천에 들어온 것도, 돈이 되는 의뢰에 몰두한 것도 결국은 모두 자신을 위해서였다.
진청에게 세상 모든 건 자신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
‘잘됐군. 이놈들이 시간을 끌면 난 도망칠 수 있다!’
동료들이 목숨을 건 결사항전을 준비할 때, 진청은 슬그머니 발을 뒤로 물렸다.
“크르르… 크아아앙!”
별비는 머리끝까지 분노가 차올랐다.
이토록 피를 흘린 게 얼마 만인가.
아니, 그 이전에 가만히 있는 자신을 누군가가 건드린 건 칼이빨 이후 처음 있는 일이다.
대체 왜?
하나같이 처음 보는 인간들인데 왜 날 공격하는 거지?
적들을 훑어본 별비는 깨달았다.
몸에 걸친 짐승의 가죽들.
이들은 무척이나 숙련된 사냥꾼이었다.
그런 놈들이 자신을 공격할 이유가 달리 어디 있겠나.
이놈들은 자신을 사냥감으로 여긴 거였다.
그걸 깨닫는 순간, 별비는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
“크아앙! 으르르릉…!”
승산?
몸만 멀쩡했다면 전부 쓸어버리고도 남는다.
허나 예상치 못한 함정에 큰 부상을 입었고, 놈들은 기세로 찍어 눌러도 물러나지 않고 있었다.
이게 인간을 상대하기 어려운 이유다.
짐승이라면 도망치거나 공포에 얼어붙었을 테고, 그때부턴 일방적인 사냥이 시작되니까.
하지만 적들은 오히려 전의를 불태우고 있었고, 그 뜻은 이제부터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리란 걸 의미했다.
“크허어헝!”
나라고 물러날 것 같으냐.
좋다. 한번 끝까지 가보자.
여기서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네놈들을 모조리 찢어줄 테니.
별비가 선공을 위해 몸을 잔뜩 움츠린 순간이었다.
“잠깐! 전부 멈춰! 이게 무슨 일이냐?!”
일촉즉발의 상황에 풀숲을 헤치고 튀어나온 누군가가 양측을 뜯어말렸다.
별비와 엽사들 사이에 주저 없이 뛰어든 사내는 손을 들어서 양측을 진정시켰다.
철부를 든 대머리 사내.
마웅이었다.
“너희들, 멈춰! 뭔가 오해가 있는 모양인데, 이건 야생의 맹수가 아냐! 주인이 있는 짐승이란 말이다!”
마웅은 결사항전의 태세를 갖춘 사냥꾼들에게 외쳤다.
그리고 별비를 돌아봤다.
“나 기억하지? 운남 석림에서 마주쳤던 사냥꾼이다! 비아가 나와 내 동료들을 살려줬었지! 너 비아의 그… 뭐라고 하더라? 반려수? 아무튼 친구 아니냐!”
별비의 눈에선 새파란 불꽃이 이글거렸다.
꿀꺽 침을 삼킨 마웅이 천천히 말했다.
“진정해. 제발 진정해다오. 이들은 내 동료들이다. 아마 오해를 해서 너를 공격한 모양이야. 내가 책임지고 이들을 물리마.”
“크아아아앙!”
웃기지 마라.
가만히 있는 나를 이 지경까지 몰아붙여 놓고 이제 와서 그만하자고?
눈에 익은 얼굴이 나타나 잠시 멈췄을 뿐, 별비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자신이 죽든 적들이 죽든 끝을 볼 작정이었다.
“크르르르…….”
비켜라.
계속 막는다면 너부터 죽여 버릴 테니.
말을 알아듣진 못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별비의 의사를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점점 흉포해지는 별비의 기세 앞에서, 마웅은 식은땀을 줄줄 흘렸다.
그는 싸울 의사가 없다는 걸 내비치기 위해 손에 들고 있던 도끼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부탁이다. 진정해. 네가 강한 건 알지만, 부상이 심각하잖아. 지금이라면 너도, 이들도 무사하지 못한다.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다오.”
마웅이 간절하게 별비를 말릴 때, 꼴도 보기 싫은 놈이 끼어들었다.
“오해 같은 건 없었다, 마웅. 우린 그놈에게 주인이 있다는 걸 알고 왔어. 그 괴물이 인간을 해치는 바람에 의뢰가 들어왔고, 우린 악수 토벌을 나온 것이다.”
진청이었다.
도망가려던 그는 마웅과 그를 따라온 이십 명의 사냥꾼들을 보고 마음을 바꾸었다.
마웅이 이끄는 엽사들은 정면 대결에 특화된 사냥조였고, 맹각의 창 사냥꾼들과 창무군의 그물 사냥꾼들, 서유화의 함정 사냥꾼들이 힘을 합치면 저 괴물을 잡기에 충분한 전력이란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나서며 별비에게 검을 겨눴다.
“주인이 있더라도 인간을 해치는 짐승이고, 의뢰가 들어왔다면 토벌이 가능하지. 저건 죽여 없애야 하는 악수다. 저놈 때문에 내 사냥조도 전멸했어! 너도 당장 이쪽에 합류해라. 힘을 합쳐서 저걸 잡는 거다!”
여기서 발을 빼면 수천에서의 생활도 끝이다.
하지만 잡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며, 진청은 자연스럽게 이 토벌의 지휘자 행세를 할 생각이었다.
별비에게 희생당한 자신의 사냥조를 내세워서라도.
그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가 걸린 건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단 한 명을 제외하고는.
“틀려요. 그 백호는 악수가 아닙니다. 행적을 되짚어보면 마땅히 싸워야 하는 순간에만 발톱을 드러냈다는 걸 알 수 있지요. 먼저 인간을 해친 적은 없습니다.”
마음을 가라앉히는 청아한 목소리.
옥예린이 모습을 드러내자, 수천의 사냥꾼들은 깜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다.
“여, 엽주님!”
삼 년 만에 나타난 그녀 앞에서 엽장들은 안절부절못했다.
따지고 보면 여기까지 온 건 차기 엽주 자리를 놓고 경쟁하기 위해서이지 않나.
엽주의 긴 외유를 못마땅하게 여기면서도 아직은 그녀에 대한 존경과 의리를 완전히 정리하지 못한 터라 엽장들의 표정은 복잡했다.
한 명만 빼고는.
“이게 누구신가? 수천의 일은 나 몰라라 하고 밖으로만 나도는 엽주 아니시오? 귀한 분께서 어인 일로 여기까지 오신 게요?”
진청은 대놓고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옥예린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백호에 대한 의뢰는 일차적으로 탐색만을 요구했지요. ‘가능하면’ 사냥하라는 문구가 붙어 있었고요. 하지만 주인이 있고, 악수가 아닌 짐승은 수천의 의뢰 대상에 포함되지 않습니다. 엽사들께선 검을 물리세요.”
어떠한 위압이나 위협도 찾아볼 수 없는 부드러운 말투였다.
하지만 거기엔 권위가 깃들어 있었고, 그건 옥예린이라는 사람이 지닌 인간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리고 누가 뭐래도 그녀는 아직까지 명실상부한 수천의 우두머리였다.
엽사들이 주춤대며 물러설 때, 진청이 발작적으로 외쳤다.
“뭘 슬금슬금 물러나고 있나! 이 멍청한 놈들아! 엽주가 그동안 수천을 위해 뭘 했단 말이냐! 이 계집은 우리에게 명을 내릴 자격이 없다! 삼 년 동안 처 놀다 와서 다 된 사냥에 재나 뿌리려 들다니! 네 이년! 죽고 싶지 않으면 비켜라!”
명백히 선을 넘은 언행이었다.
마웅이 눈에 불길을 담고 진청을 노려봤다.
“진청 너 이 새끼.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감히 엽주께 그따위 태도라니. 한 번 더 개소릴 지껄이면 내가 널 때려죽이겠다. 그리고 엽주께서 삼 년간 자릴 비우신 건 소림 방장의 의뢰 때문이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니란 말이다!”
“의뢰? 의뢰라니?”
“소림사 방장께서 엽주께 의뢰를 넣었다고?”
분위기가 뒤집히는 건 한순간이었다.
마웅의 성격상 거짓말을 할 리도 없거니와 아무리 급해도 소림사 방장을 끌어들여 농간을 부릴 리는 없기 때문이다.
“무,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릴…!”
이미 갈 데까지 간 상황.
진청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자, 이견의 여지가 있나? 여기까지 듣고서도 사냥을 계속하겠다고 한다면 나와 먼저 싸워야 할 거다. 누가 봐도 우리 측이 잘못한 상황에서 계속 내 친구의 친구를 핍박한다면 난 그걸 막을 의무가 있으니까.”
마웅이 내려놓았던 도끼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상황을 지켜보던 마웅의 사냥조도 수천의 엽사들을 가로질러 마웅의 옆에 섰다.
“우리도 마찬가지유. 그 꼬맹이 덕에 우리가 여태 살아 있는 건데 이렇게라도 갚아야지. 동료들과 싸우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너 이 풋내기 새끼들! 그렇게 얘기해도 비웃더니! 형들이 얘기했냐, 안 했냐? 붉은 늑대랑 백호 앞에 서면 오줌을 지릴 거라고!”
싸움은 멈출 듯했다.
진청을 제외하면, 다들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모두가 간과한 게 있었으니 바로 별비였다.
영문도 모르고 공격을 받은 데다 몸과 마음에 상처를 입은 별비는 멈출 생각이 없었다.
마웅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 건 의외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상황까지 몰렸던 사실이 없어지진 않으니까.
“크하아아앙!”
까불지 마라!
누구 마음대로 멈춘단 말이냐!
별비의 진노가 폭발하자 잠시 마음을 놓았던 인간들이 한순간에 얼어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