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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64화 (264/463)

264화

“진정해요.”

당장이라도 피바람이 불 것 같은 상황에서 앞으로 나선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수천의 엽주.

옥예린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별비를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새파란 안광을 폭사하는 별비에게 손을 뻗었다.

“굉장히 화가 나 있군요. 느껴져요. 당신의 분노, 증오 그리고 상처가…….”

두려움이 없는 걸까?

그녀는 한 점의 머뭇거림도 없이 다가가 이빨을 드러낸 별비를 감싸 안았다.

그 담대함에, 지켜보던 이들이 입을 쩍 벌렸다.

“많이 억울하죠? 이유도 모른 채 다짜고짜 공격을 받았으니. 당신 같은 분에겐 더욱 생소한 경험이겠죠. 누구라도 참기 힘들 거예요. 더군다나 이렇게 큰 부상까지……. 정말 미안해요.”

별비는 난생처음 느끼는 감정에 당황했다.

우선 자신에게 이런 말투를 쓰는 인간을 본 적이 없으며, 마른 비와 그의 식구들을 제외하면 이토록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인간은 처음이었다.

아니, 와족의 구성원조차 너른 하늘과 그믐, 노을을 제외하면 자신 앞에서 은은한 두려움을 내비쳤었다.

별비를 더욱 혼란에 빠뜨리는 건 옥예린이 주는 포근한 느낌 때문이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자신을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것 같았다.

감정과 생각을 공유하고, 가슴에 쌓인 울화를 보듬는 감각에 별비의 화가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요. 기분 풀어요. 싸우면 서로 다칠 뿐이에요. 당신도, 이들도 이런 곳에서 끝날 인연이 아니랍니다. 무조건 우리가 잘못했어요. 엽장님들, 그렇죠?”

넋을 놓고 있던 엽장들이 흠칫하며 정신을 차렸다.

맹각, 창무군, 서유화는 저도 모르게 부동자세를 취했고, 별비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 그렇습니다! 저희의 불찰입니다. 실적을 올리고 싶다는 욕심에 눈이 멀어서 그만……. 부디 용서해주시길.”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할지……. 백아나 백풍이라고 불린다던데……. 백 공, 저희가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아니, 잠깐만. 이거 알아듣는 거 맞죠?”

우스운 광경이었다.

짐승을 사냥하는 걸로 일생을 영위해온 자들이, 짐승을 사냥감으로만 취급해온 자들이 별비에게 예를 다해 사죄하고 있었다.

옥예린이 아니었다면 무슨 짓을 하든 별비는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감싸 안은 그녀의 손길에 별비의 화는 서서히 가라앉았고, 고개를 숙인 인간들이 진심이란 걸 깨달았다.

비록 커다란 잘못을 저질렀지만, 자연기는 그들이 꽤 괜찮은 인간이란 걸 알려주고 있었다.

머리가 차가워지니 자신을 위해 나선 마웅의 일행이 눈에 들어왔고, 마른 비에게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별비는 웅크리고 있던 자세를 풀고 사냥꾼들을 오연하게 내려다봤다.

〔……이 암컷과 머리에 털 없는 수컷 덕분에 목숨 구한 줄 알아라. 성질대로라면 니들은 여기서 다 죽었어.〕

나지막이 으르렁댄 별비는 이빨과 발톱을 감췄다.

옥예린은 방긋 웃더니 별비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고마워요. 부탁을 들어줘서. 제 식구들을 살려준 은혜, 잊지 않아요. 두고두고 갚을게요.”

지금까지는 인간의 말을 알아듣는 별비의 모습에 사냥꾼들이 놀랐다면, 이번엔 별비가 놀랄 차례였다.

별비는 옥예린을 물끄러미 보다가 툭 뱉었다.

〔너 설마… 이게 들리냐?〕

옥예린은 빙그레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물론이죠. 처음부터 들렸어요. 당신이 화를 낼 때부터.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생각까지도.”

별비는 인간처럼 눈을 부릅뜨며 놀라워했다.

사영 말고도 의사가 통하는 인간이 또 있다니?

하지만 마른 비나 사영과는 다른 경로로 의지가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별비의 의문은 옥예린이 풀어주었다.

“저에겐 조금 특이한 능력이 있어요. 어릴 때부터 그랬죠. 다른 이들의 생각과 감정이 느껴져요. 언어로 전해지는 게 아니라 설명하기는 힘든데… 그냥 저절로 들린 달까?”

그건 그림자에 녹아드는 사영의 능력처럼 하늘이 내린 또 하나의 초능이었다.

수천의 엽사들이 실체를 알지 못해 교감이라고 부르는 능력.

정확히는 ‘공감’이라고 불러야 할 그것은 인간을 넘어 짐승에 이르기까지, 나 이외의 존재와 감정을 공유하는 능력이었다.

야생의 짐승들이 그녀 앞에서 무장해제 되는 이유이며, 놀라운 사냥술과 더불어 수천의 엽사들이 그녀를 경외하는 원인이었다.

‘중단전. 엽주의 능력은 아마도 마음의 밭이라는 중단전으로부터 비롯된 거겠지.’

마웅은 옥예린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오랜 기간 지켜보며 내린 결론이었다.

불가사의하다고 여겨지는 독특한 능력들은 과거 무림사를 뒤져보면 종종 발견할 수 있다.

해당 인물이 몸담은 집단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특정 개인만이 지닌 초월적 능력들.

그건 후천적인 노력으로는 얻을 수 없는 선천적 자질이었다.

그런 면에서 와족의 야수 제어는 초능의 범주에 넣긴 어려웠다.

수백 년에 걸친 야생에의 적응 과정에서 얻게 된 산물이었으니까.

와족의 구성원들이 깨우치기에 용이한 소질과 환경을 타고날 뿐 야수 제어는 요령을 알고 훈련을 거듭하면 터득할 수 있는 비술이었다.

다만 마른 비의 야수 친화는 어쩌면 초능의 영역에 발을 걸친 것일지도 몰랐다.

지금껏 야수 제어의 새로운 경지라고만 여겨왔는데, 그것 역시 선천적 자질과 관련된 것일지도.

마른 비조차 자신이 지닌 능력의 근원을 정확히 알지 못하니 이는 좀 더 두고 볼 문제였다.

〔놀랍군. 세상은 정말 넓어. 비아를 따라 중원으로 나오길 잘했다.〕

별비는 대화가 가능한 인간을 만나자 기꺼운 모양이었다.

옥예린은 별비가 만난 인간 중에서 손에 꼽을 정도로 맑은 기운을 지니고 있었고, 굉장한 호감을 주는 사람이었다.

마른 비를 만나지 못하고, 그녀가 야수 제어를 구사했다면 연이 이어졌어도 좋겠다고 느낄 정도로.

별비의 마음을 느꼈는지 옥예린도 즐거워했다.

“저도 그래요. 당신을 만나서 정말 기뻐요. 짐승들의 마음을 느끼지만, 대화가 가능한 경우는 없었거든요. 인간 수준의 지능을 지닌 영수도 몇 번 만나봤는데 당신처럼 직접적으로 의지를 전하지는 못하더라고요.”

〔당연하다. 이건 자연기를 활용할 줄 알아야 하는 건 물론이고, 굉장히 섬세한 조율이 필요하거든. 붉은 꼰대에게 배울 때 멍청하다고 욕도 많이 먹었지…….〕

별비와 옥예린이 통성명을 하고, 한참 즐겁게 대화를 나눌 때였다.

옆에서 분을 참지 못한 자가 끼어들었다.

“이게… 이게 무슨 짓거리냐……. 잡아 죽여야 할 사냥감을 앞에 놓고 노닥거리다니…! 짐승과 대화를 한다고?! 웃기지도 않는 소리! 모두가 속고 있는 것이다! 저년이 우릴 농락하는 것이야!”

진청이었다.

별비를 사냥하고, 그걸 지휘한 공로를 가로채려던 그는 뜻대로 되지 않자 이성이 날아가기 직전이었다.

이대로 수천에 남아봤자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최악의 경우 이번 사태에 대한 책임을 질지도 몰랐다.

마웅이 고리눈을 뜨고 노려보고 있으며, 느낌상 엽주는 자신의 농간을 눈치챈 것 같다.

그는 짐승과의 화해라는, 상상하지도 못한 상황을 맞이해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자 미칠 것 같았다.

“명색이 중원 최고의 사냥꾼이라는 놈들이 짐승에게 허리를 굽히고 사죄를 해? 다들 제정신이냐?! 내 수하들이 저 괴물에게 죽은 걸 보고도…! 너흰 동료애나 의리도 없나?!”

대답은 옥예린이 해주었다.

그녀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싸늘한 눈으로 진청을 바라봤다.

“그 입으로 전우애와 의리를 말한 겁니까? 다른 분들은 몰라도 전 똑똑히 봤습니다. 모두가 항전을 준비할 때, 진 엽장님께선 도망치려고 발을 물리더군요.”

그걸 봤단 말인가?!

모두가 험악한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진청은 생각지도 못한 지적에 허둥댔다.

“오, 오해다! 그건 그저…!”

“제가 모를 것 같습니까? 당신이 의뢰의 보상을 독차지할 생각으로 이번 일을 준비했다는 것을요. 혼자서는 힘들 것 같으니 다른 엽장님들을 끌어들이고, 마 엽장님을 따돌리는 치졸한 짓까지 벌였죠. 아직도 할 말이 있나요?”

옥예린은 부드럽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진청에게 서슬 퍼런 질책과 추궁을 퍼부었고, 그가 변명할 틈도 주지 않고 단호히 말했다.

“필요에 의해 직위를 나누었을 뿐, 전 한 번도 여러분의 위에 있다고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번 일에 대해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겠어요. 당신의 방금 전 언행에 대해서도. 이번 일이 마무리되면 따로 이야기하도록 하지요.”

이번 일?

백호에 대한 사냥 건을 중지시키기 위해 온 게 아니었단 말인가?

모두가 궁금한 얼굴로 옥예린을 볼 때, 인기척이 났다.

그리고 겨우 마음을 놓았던 수천의 엽사들은 또 한번 경악할 만한 경험을 해야만 했다.

수풀을 헤치고 나타난 세 명의 사내.

그중 가운데 있는 이족의 청년 때문이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마른 비는 괴인들을 쓰러뜨린 후 흩어져 있던 여규와 철중구를 찾았다.

그사이 그들도 습격을 받았지만, 마른 비의 예상대로 어렵지 않게 정리했다.

마지막으로 별비를 찾아왔는데, 일행은 충격적인 광경을 마주해야 했다.

피를 줄줄 흘리고 있는 별비와, 그를 둘러싼 수십 명의 사냥꾼.

별비의 몸에 꽂힌 스무 개의 철창을 보는 순간, 마른 비는 눈이 돌아갔다.

“이 새끼들이… 별비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화아아아악!

폭발하듯 타오른 자연기가 사위를 뒤덮었다.

마른 비는 심장이 터질 듯한 분노를 느꼈고, 자연기를 극성으로 끌어올리며 발을 내디뎠다.

쿠웅!

그의 발걸음에는 그간 터득한 무의 정수가 녹아 있었고, 진각이나 다름없는 발자국이 지면을 뒤흔들었다.

“당장 별비에게서 떨어져. 다 죽여 버리기 전에.”

무지막지한 살의가 피어올랐다.

마른 비는 진심으로 눈앞에 있는 것들의 몰살을 떠올렸고, 그 의지는 그대로 자연기에 실려 수천의 엽사들을 짓눌렀다.

『꿇어.』

마른 비가 언령을 발동하자, 칠십에 달하는 사냥꾼들이 일시에 주저앉았다.

“크으윽!”

“이, 이게 무슨…!”

어마어마한 광경이었다.

수는 적지만, 어지간한 대문파의 주력 검대에 준하는 정예들이 부들부들 떨며 무릎을 꿇었다.

전신을 짓누르는 무형의 압인기(壓人氣)는 항거 불가능한 거력이자 거스를 수 없는 명령이니, 수천의 사냥꾼들은 두려운 눈으로 약관에 불과한 청년을 우러러봤다.

분노를 드러낸 마른 비의 눈에서 새파란 불꽃이 이글거렸다.

“너희가 지휘자겠네.”

야수 제어를 버티고 서 있는 여섯 명.

엽주와 다섯 명의 엽장들이었다.

‘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게 뭐지? 무공은 절대 아냐! 주술? 술법? 뭐가 됐든 이런 건 듣도 보도 못했다!’

‘저, 저자가 백호의 주인인가?!’

별비를 공격했던 네 명의 엽장들은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못한 채 부르르 떨었다.

그들이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반면, 옥예린과 마웅은 얼굴을 딱딱하게 굳힌 정도로 야수 제어를 견뎌내고 있었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전력 차.

마른 비는 검지로 그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부터 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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