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5화
수천의 엽주와 다섯 명의 엽장.
마른 비가 아무리 강해졌어도 홀로 그들을 감당하는 건 어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분노한 마른 비의 기세는 그들만이 아니라 팔십에 육박하는 수천의 엽사들을 모조리 찍어 누르고 있었다.
숱한 전투를 거치며 발달한 야생의 살기는 그저 그런 무인들의 그것과는 격이 달랐고, 사냥꾼들은 거대한 맹수가 한 발 한 발 다가오는 환상을 보았다.
‘주, 죽는다…!’
진청은 마른 비의 등 뒤에서 압도적인 포식자의 그림자를 보았다.
백호도 엄청났지만, 그 주인은 더한 존재였다.
그가 죽음을 떠올릴 무렵, 전신을 옥죄던 살기가 헐거워졌다.
수천 엽사들의 앞에는 한 발을 내디딘 옥예린이 있었다.
“당신이 별비님의 친구군요. 잠깐 진정하고 제 말을 들어주세요.”
옥예린은 마른 비의 기세를 비켜내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힐 만큼 힘들어 보였지만, 그녀는 차분한 어조로 마른 비를 설득했다.
“저희가 잘못을 저지른 게 맞아요. 별비님께 사죄를 드렸고, 겨우 진정된 상황이랍니다. 일단 화를 가라앉히시고….”
간신히 야수 제어의 압박을 걷어낸 마웅도 외쳤다.
“이봐, 비아야! 나다! 내 말을 좀…!”
콰앙!
번갯불.
마른 비는 둘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았다.
그는 옥예린을 노려보고 있었는데, 그녀 외엔 아무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듯했다.
“온몸에 창을 꽂아놓고 사과라고? 장난해? 그럼 나도 너희의 뼈를 부숴놓고 사과할게.”
극속으로 기동하는 신형 뒤로 목소리가 따라왔다.
옥예린은 가까스로 마른 비의 움직임을 포착할 수 있었다.
짧게 끊어 치는 하단차기.
가벼워 보이지만 적중하는 순간 다리뼈가 작살날 게 분명했다.
옥예린은 이를 악물며 외쳤다.
“제게 창을…! 어서!”
“으아아아!”
맹각은 기합을 터뜨리며 몸을 짓누르는 야수 제어를 떨쳐 냈다.
그리고 자신이 들고 있던 창을 옥예린에게 던졌다.
쐐애액―!
손을 뻗은 옥예린이 철창을 손에 쥐었다.
그리고 건네받은 그대로 지면에 내리찍으며 좌측을 가로막았다.
쩌저저저정!
‘큭…! 오연타?!’
발차기가 네 번 나뉘는 건 봤다.
한데 다섯 번이라고?
더군다나 이 힘!
체중을 실어서 방어했음에도 몸 전체가 요동친다.
마른 비의 힘과 속도는 옥예린을 압도했고, 공격은 단타로 끝나지 않았다.
겨우 버텨낸 그녀가 눈을 들었을 때, 올빼미의 부리를 닮은 손이 사방에서 내리꽂히고 있었다.
쩌저저저정!
“으, 크윽…!”
뭘 어떻게 막았는지도 모르겠다.
옥예린은 양손으로 쥔 창대를 정신없이 움직이며, 감각만으로 올빼미 사냥을 받아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쓰러질 터.
그녀는 어쩔 수 없이 반격에 나섰다.
“합!”
굉장히 독특한 창술이다.
창대의 끝, 창날로 이어지는 부분을 한 손으로 쥐고, 다른 손은 창대의 중심을 받친다.
이미 거리를 내준 적에게 대응하기 위한 임기응변.
근접전을 위한 변형 창술이 마른 비의 진로를 막았다.
“음…!”
이건 보고 찌르는 게 아니다.
투로를 미리 선점한 예격(豫擊).
마치 생각을 읽은 듯한 반응이었다.
마른 비가 상체를 움직여 창날을 피했을 때, 훌쩍 물러난 옥예린이 창을 길게 잡았다.
“그만! 제발 머리 좀 식혀요!”
수조육창(獸爪六槍).
짐승의 발톱을 흉내 낸 여섯 가지 창술이 허공을 수놓았다.
전력의 차이를 실감했기에 옥예린은 온 힘을 다했고, 그건 마른 비라도 쉽게 받아낼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후퇴하지 않고 오히려 전진했다.
채채채챙!
날카롭게 세운 손끝이 철창의 날과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전상의 상아를 모방한 뼈창은 그 자체로 비할 데 없는 흉기였고, 엄밀한 투로를 따르는 수조육창과 달리 오직 감각으로 구현하는 기예였다.
“저, 저럴 수가…!”
손과 창이 부딪히는 걸 보고 수천의 사냥꾼들은 넋을 놓았다.
마른 비가 전투에 집중하자 엽사들을 옭아맸던 야수 제어가 풀렸지만, 누구도 끼어들지 못했다.
그들의 수준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공방이었고, 끼어들 실력을 지닌 엽장들도 다른 이유로 움직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가세하려는 엽장들 앞에는 검과 도를 빼든 두 사내가 있었다.
“우리도 간신히 참고 있는 거니까 경거망동하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움직이지 마라.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하면 토막을 쳐 버릴 라니까.”
여규와 철중구도 별비의 처참한 모습을 보고 분노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마른 비가 멈추지 않는다면 여기 있는 전원과 싸우다 죽을 각오를 하고 있었다.
“이, 이봐! 비아야! 나다, 마웅! 기억나지 않는 거냐?!”
도끼를 움켜쥔 마웅이 외쳤지만, 마른 비에게 닿지 않았다.
마른 비와 옥예린.
두 사람 다 소중한 터라 마웅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그는 싸움을 끝낼 수 있는 유일한 존재를 떠올리고 고개를 돌렸다.
“그래, 호랑이! 너라면 저걸…!”
싸움을 멈춰달라고 외치던 마웅은 흠칫했다.
별비에게서 잠자코 있으라는 눈짓을 받았기 때문이다.
“뭐야? 무슨…?”
마웅이 의아해할 때, 싸움은 절정으로 치닫고 있었다.
채채채챙! 쩌저정! 콰쾅!
구릿빛 육체가 섬전 같은 체술을 구현하고, 가느다란 철창이 종횡으로 움직이며 허공을 찢는다.
마른 비의 폭격은 지형을 뒤바꿀 정도였지만, 옥예린은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쓰러지지 않았다.
이를 악문 그녀는 맹수의 발톱을 흉내 낸 창으로 덮쳐오는 살의를 차단했다.
“저 사내는 그렇다 쳐도… 엽주님이 저렇게 강했나?”
수천의 엽사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들은 옥예린이 싸우는 걸 처음 봤다.
그녀의 사냥술이 뛰어나다는 것도 엽장들의 입을 통해 들었을 뿐 직접 목격한 자는 없었다.
우연한 기회에 확인하게 된 엽주의 실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놀란 건 그들만이 아니었다.
“저 사람이 수천의 엽주인가 봐. 엄청난데?”
“그러게. 사람들이 수천, 수천 떠드는 건 들었지만, 그래 봤자 사냥꾼 나부랭이일 거라고 여겼는데…… 의외군.”
싸움을 지켜본 여규와 철중구의 감상평이었다.
“솔직히… 우리보다 위겠어.”
여규의 말에 철중구가 콧방귀를 뀌었다.
“헹! 너보다 센 거겠지. 난 여자한테 절대 안 져.”
“웃기시네. 그놈의 허세는…. 비아와 저 정도의 접전을 벌이는 사람을 네가 이긴다고? 너 비아한테 몇 합만에 졌더라?”
울컥한 철중구가 발작하려 할 때, 싸움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으… 으윽!”
옥예린은 분투했지만, 실력 차는 명확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전세는 눈에 띄게 기울었고, 그녀의 창술이 헝클어지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오래 버텼네. 이만 죽어.”
마른 비가 끝을 확신했을 때였다.
하얀 바람이 난입하여 마른 비를 가로막았다.
“……?! 별비야! 왜?!”
옥예린은 중심을 잃고 휘청대고 있었다.
한 방이면 끝나는데, 왜 이러는 거지?
마른 비가 눈으로 답을 재촉하자, 별비가 차분히 의지를 전해왔다.
〔그만. 이 정도면 충분해. 이 인간의 말이 맞다. 난 사과를 받았고, 네가 왔을 때 상황은 끝나 있었어. 이유가 있어서 가만히 지켜봤는데, 이제 된 거 같다. 그만해도 돼.〕
마른 비가 혼란스런 표정을 짓고, 옥예린은 풀썩 주저앉아 숨을 골랐다.
“헉, 헉! 허억…!”
별비는 뒤를 힐끗 본 후 마른 비와 옥예린이 들을 수 있게 의지를 개방했다.
“당신, 짐승 맞아요?”
옥예린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그녀는 별비를 앞에 두고 마른 비와 나란히 서 있었는데, 언제 싸웠냐는 듯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절 위해서 지켜본 거라니……. 놀랍네요. 근데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별비는 모르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네 일행이 널 대하는 걸 봤다. 겉으론 존중을 표하지만, 상당수가 네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더군. 네 실력을 의심하는 놈들도 있고 말야. 저기 있는 재수 없는 놈은 아예 대놓고 개기지 않았나.〕
별비는 턱으로 진청을 가리켰다.
고개를 푹 수그린 그는 두려운 눈으로 이쪽을 힐끔거리고 있었다.
별비가 눈에 힘을 주며 이빨을 드러내자, 진청은 화들짝 놀라며 바닥으로 고개를 처박았다.
별비는 저 보라는 듯 못마땅한 표정을 짓더니 계속 말했다.
〔모름지기 우두머리는 강해야 한다. 네 성격으로 볼 때 제대로 실력을 보여준 적도 없겠지. 한 번쯤 이렇게 과시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봐라. 널 보는 눈들이 싹 달라졌잖아. 인간이든 짐승이든 똑같아. 이런 건 다를 게 없지.〕
야수다운 말이었다.
그리고 그건 실제로 효과적이었다.
옥예린 또한 자신을 보는 시선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고 있었으니까.
그녀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말했다.
“씁쓸하지만 부정할 순 없네요. 그런 부분까지 고려해주고 고마워요. 근데 저 죽을 뻔한 건 알죠? 그런 생각이면 좀 적당한 상대랑 붙여주지 그랬어요. 저기 도를 든 사내 같은. 우 소협은 너무 강하잖아요.”
볼을 부풀린 옥예린이 툴툴댔다.
철중구가 들었다면 난리가 났으리라.
마른 비는 머리를 긁적였고, 별비는 고개를 저었다.
〔이놈이 딱이다. 비아 이놈, 아까 눈 돌아간 거 봤지? 그 정도 살기는 뿜어줘야 애들이 쫄지. 이왕 하는 거 그런 상대와 붙어야 효과도 크지 않겠어?〕
이번엔 마른 비가 투덜댈 차례였다.
“야,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등판에 창은 줄줄이 꽂혀 있지, 피는 철철 흘리고 있지……. 무슨 꼬치구이도 아니고 말야. 옥예린이라고 했지? 당신이 싸움을 말려준 덕분에 별비가 더 다치지 않을 수 있었어. 정말 고마워.”
“아니에요. 저희 측이 잘못한걸요. 진심으로 사과드려요. 근데 별비 님, 진짜 호랑이 맞는 거죠? 말씀하는 것도 그렇고, 마음 씀씀이도 그렇고, 호호백발 할아버지가 둔갑하고 그런 거 아니죠?”
옥예린은 실없는 농담을 건네며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끌었다.
별비와 그랬듯이 오해가 풀리자 마른 비와 옥예린은 급격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둘은 비슷한 부분이 많았고, 서로가 좋은 사람이라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둘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별비의 상처를 돌볼 때, 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음…… 저기, 비아야?”
마웅이었다.
앞서 여러 차례 마른 비에게 말을 걸었지만, 무시당한 경험 때문에 그의 목소리엔 힘이 없었다.
“어?”
마른 비는 눈을 커다랗게 뜨며 목소리를 높였다.
“아저씨?! 오랜만이야! 여기 있었어?!”
“우라질. 일찍도 알아본다. 내가 이렇게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아닌데…….”
마웅은 묘한 안도감과 서운함에 얼굴을 찌그러뜨리며 투덜댔다.
마른 비 일행과 수천 사냥꾼들.
싸움으로 시작된 인연은 어느새 전혀 다른 관계로 발전하고 있었다.
그 중심엔 마른 비와 별비, 옥예린과 마웅이 있었다.
진심 어린 사과와 인사를 주고받은 양측은 부상자를 수습하고 전열을 재정비했다.
그리고 함께 나아가기 시작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마른 비와 옥예린이 운태산에 들어온 목적이 같았기 때문이다.
마른 비 일행이 닥치는 대로 산을 훑은 데 반해 옥예린은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었다.
지난 삼 년간 중원의 산들을 떠돌며 해온 일이었기 때문이다.
간헐적으로 나타나는 짐승들을 쓰러뜨리며 이틀을 전진했을 때, 그들은 산의 심처에서 이번 사태를 일으킨 원인을 발견할 수 있었다.
우우우웅―
소름 끼치는 요기(妖氣)가 안개처럼 자욱하게 깔린 곳.
빛이 들지 않는 음산한 골짜기에는 대체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싶은 크기의 쇠말뚝이 박혀 있었다.
“역시 이거였군요.”
불길한 기운이 감도는 칠흑색의 말뚝을 확인하자 옥예린의 안색이 어두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