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66화 (266/463)

266화

“누가 이런 짓을…!”

마른 비는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다른 이들은 느끼지 못했지만, 대자연의 기에 민감한 마른 비는 말뚝의 용도를 대번에 눈치챘기 때문이다.

강소성 일대의 지기가 발원하는 곳.

육체에 신선한 피를 공급하는 심장을 찌른 것처럼, 쇠말뚝은 지기를 생성하는 지맥의 심장부를 관통하고 있었다.

스스스스―

절로 어깨를 움츠러들게 만드는 요사스러운 기운.

단순히 지기의 생성과 순환을 방해하는 수준이 아니다.

말뚝은 대기에 깃든 검은 기운을 빨아들였고, 그걸 지맥의 심장에 주입하고 있었다.

원래라면 대기를 떠돌다 정화될 검은 기운을 직접적으로 대지에 침투시키는 것이다.

그렇게 오염된 지기는 지맥을 타고 뻗어 나갔고, 강소성 곳곳에서 더욱 짙어진 요기를 재생성했다.

짐승들이 미쳐 날뛰던 원인이 이것이었다.

중요한 건 누가, 왜 이런 짓을 벌이냐는 거였다.

“오래전, 소림과 무당(武堂), 곤륜(崑崙)의 회합이 있었습니다.”

옥예린은 일행이 들을 수 있도록 목소리를 키웠다.

그녀는 소림 방장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회상하고 있었다.

“그건 무인들의 회합이 아니었어요. 각파에서 존경받는 불승과 선인, 도인들이 모였죠. 술법에 능한 모산파(茅山派)의 장로들까지 모인 그건 일종의 대책 회의였어요.”

옥예린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기에 민감한 자라면 누구나 느낄 법한 이상 징후.

그녀는 대기에 스민 칙칙한 기운을 느끼고 눈살을 찌푸렸다.

“그분들은 길게는 이십 년, 짧게는 십여 년 전부터 천기가 어그러지는 걸 느꼈다고 해요. 중원은 물론이고, 머나먼 서역과 동방의 소국, 북방 초원과 남방 밀림에 이르기까지 곳곳에서 조짐들이 포착되었다고 했죠.”

“조짐…이라고요?”

옥예린은 질문을 한 여규를 바라봤다.

“네. 징후라고 표현해도 되겠죠. 그건 매우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고, 앞으로도 나타날 거라고 했어요. 세상을 뒤덮는 질병과 멸종된 생물의 출현, 이상 기후와 천재지변, 왕조의 교체나 엄청난 규모의 전쟁……. 불가와 도가의 선각자들은 그들이 보고, 예견한 것들을 이야기했죠.”

“……멸종된 생물의 출현?”

마른 비와 여규는 동시에 서로를 돌아봤다.

마른 비의 소년기를 꽉 채웠던 숙적.

그들이 옥예린의 언급에서 검치호를 떠올린 건 필연이었다.

“그런 징후들은 한 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어요. 세상을 뒤덮을 엄청난 혼란……. 그분들이 예견한 게 맞다면 끔찍한 일이 벌어질 거예요. 그들은 그걸 막기 위해 모였던 거구요.”

규모가 너무 커서 얼른 와닿지 않는 이야기다.

잠자코 듣고 있던 철중구가 아리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다른 건 하나도 모르겠지만, 왕조의 교체라면 그럴듯하네. 그건 지금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잖아? 그걸 미리 예견했다고? 땡중과 호랑말코 도사들이 아예 사이비는 아니었구만.”

그들이 언급한 징후 중 하나를 목격해서일까?

마른 비는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조짐, 징후……. 그걸 현상이라고 보면, 혼란은 그로 인해 나타난 결과가 되는 거잖아? 그럼 원인은 뭐야?”

일시에 침묵이 흘렀다.

철중구는 모두의 놀라움을 짤막한 말로 대신했다.

“이 새끼 이거 또 이러네. 평소엔 겁나 멍청한 놈이 난데없이 핵심을 찌른단 말야?”

아쉽게도 옥예린은 마른 비의 궁금증을 해결해주지 못했다.

그건 정파 거두들의 회합에서도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옥예린은 그 자리에 참석했던 자들 중 한 사람의 ‘의견’은 말해줄 수 있었다.

“원인까진 알 수 없었다고 해요. 왜 그런 일들이 생기는 건지는. 다만… 한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죠. 앞으로 벌어질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균형을 맞추려는 자정 작용이자, 몸부림이라고.”

“……?”

갑자기 뜬구름 잡는 소리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일행은 옥예린의 말에 더욱 귀 기울이게 됐다.

“제가 제대로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분은 인간이 번성하는 만큼 자연은 쇠퇴한다는 말을 했대요. 지금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 인간의 힘이 만개한 시대라고. 하지만 세상을 유지하고 지탱해온 자연의 힘은 지금부터 급속히 쇠멸할 거라고. 그 과정에서 일어날 일들을 그렇게 표현한 게 아닐까 해요.”

이건 익숙한 이야기다.

마른 비는 과거의 기억을 훑었고, 매우 유사한 이야기를 들었던 걸 떠올릴 수 있었다.

산과 안개걸음이 성년식에서 돌아온 날.

처음 방문한 영묘에서 아버지와 할멈은 대기에 가득했던 자연기가 급격히 옅어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이대로 간다면 인간들은 오랜 세월에 걸쳐 터득한 놀라운 힘들을 잃어버리게 될 거라고.

그리고 그 원인은 번영을 위해 자연을 훼손한 인간들 때문이라고.

“그분은 앞으로 일어날 현상들을 두고 마땅한 응보라고 했대요. 누가 자신에게 칼을 겨누는 놈을 가만두겠냐며, 인간이 수천 년에 걸쳐 저지른 악업에 대한 징벌이라고도 했죠. 세상천지에 존재하는 것만으로 만물에 해를 끼치는 생물은 인간밖에 없다고요.”

철중구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게 뭔 소리야? 그럼 자연이 인간을 벌하기 위해서 이런 일을 벌인다는 거야 뭐야? 질병을 뿌리고, 지 몸을 뒤틀고, 인간끼리 싸움을 붙여서? 왜? 인간의 수라도 줄이시게? 그거 어떤 정신 나간 놈이 한 소리야?”

“글쎄요. 저도 잘 몰라요. 온전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란 건 확실하죠. 실제로 거기 모인 사람 중 누구도 동의하지 않았대요. 그 사람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떠들었는데, 이상 징후들은 현상인 동시에 원인이다, 그것들로 인해 더 큰 혼란이 초래될 거다, 앞으로 인세는 엄청난 격변을 겪을 거다… 그런 부정적 전망을 내놓았다고 해요.”

철중구는 코웃음을 쳤다.

“웃기지 말라 그래. 균형의 회복? 자정 작용? 차라리 신이라는 게 진짜로 있어서 그놈이 지랄을 떤다고 하는 게 믿기 편하겠다. 안 쫓겨났어? 헛소리 한 그놈?”

옥예린은 묘한 표정으로 말했다.

“음, 그게… 제 발로 떠날 때까지 누구도 그 사람을 쫓아낼 순 없었어요. 그분의 말을 믿진 않지만, 완전히 무시할 수도 없었고요. 왜냐하면 그 말을 한 사람이… 천기자 어르신이거든요.”

철중구는 화들짝 놀라며 소리 질렀다.

“천기자?! 그 오백 냥 늙은이?!”

“네. 그분은 회합의 참석자들이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성질을 내며 나가버렸는데, 그러면서도 당부의 말을 남겼어요. 인간이 천기의 흐름과, 인세에 닥칠 지각변동을 막을 순 없지만, 균열에서 피어날 독소들을 제거할 순 있다고.”

누가 복자 아니랄까 봐 끝까지 애매모호한 화법이었다.

옥예린은 일행에게 천기자가 남긴 말을 그대로 옮겼다.

‘원인이 현상을 낳았지만, 현상은 다시 원인이 되어 결과로 이어질 거다. 그 악순환은 끔찍한 혼돈을 낳겠지.’

‘혼란을 가중시키고 이용하는 잡것들이 나타날 거다. 전통적인 힘의 균형이 깨지고 피가 내를 이룰 것이야.’

‘허나 세상이 아무리 뒤집혀도 힘을 지닌 놈들은 살아남겠지. 무고한 약자들만 억울하게 휩쓸리고 죽어갈 거야.’

‘그래서 준비해야 한다. 혼돈에서 피어난 검은 꽃들을 제거하고, 검은 불길을 잠재울 힘을. 그리고 그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네놈들의 역할이 아냐.’

마지막 말 때문에 천기자는 결국 회의장에서 쫓겨났다.

사람들은 미친 늙은이가 노망이 들었다고 욕했지만, 침중함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모두가 아는 것이다.

천기자가 복자로서 얼마나 뛰어난 존재인지를.

그가 뱉은 말 중 빗나간 건 거의 없다는 것을.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것과 기형종의 출현을 보셨을 거예요. 천기자 어르신의 말은 하나씩 현실이 되어가고 있죠. 그래서 소림 방장께서 수천에 의뢰를 하신 거예요. 저는 지난 삼 년간 소림의 무승들과 저걸 제거하기 위해 중원의 산들을 누볐죠.”

옥예린의 눈길은 집채만 한 쇠말뚝에 닿아 있었다.

혼돈의 균열에서 피어나 세상을 어지럽히는 자들.

저건 천기자의 예언 속에 담긴 ‘잡것들’ 중 하나의 작품이 분명했다.

“저 말뚝은 대기에 함유된 검은 기운을 지맥에 주입해요. 짐승들이 이성을 잃고 미쳐 날뛰는 원인이죠. 주술의 힘도 가미되었는지 강화된 변종까지 만들어내요. 저걸 없애지 않는 한 이 사태는 해결되지 않을 겁니다.”

옥예린이 철창을 움켜쥐며 발을 내디딜 때였다.

기분 나쁜 목소리가 모두의 시선을 끌었다.

“그랬군. 그랬어. 어렵게 박은 말뚝을 뽑은 게 소림이었나? 그동안 본교를 끈질기게 쫓아다니며 훼방 놓은 게 네년이었단 말이지?”

사내는 기척도 없이 나타났다.

그는 마른 비가 해치운 곰 가죽 사내처럼 무언가를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짐승의 가죽이었다.

머리가 둘 달린 두더지.

두더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커다란 그것은 척 봐도 기형종이었다.

얼굴에 세 줄의 자묵을 새긴 사내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듣기 싫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년 때문에 수년을 준비한 본교의 의식이 엉망이 됐다! 필요한 소체는 확보했지만 힘이 충분히 깃들지 못했어! 이걸 어떻게 할 거냐!”

옥예린의 삼 년은 소기의 성과를 거둔 모양이었다.

누군가가 나타날 걸 예상한 걸까?

옥예린은 동요하지 않았고, 창으로 사내를 겨누며 말했다.

“저건 수인이라고 해요. 말뚝 주위엔 항상 저들이 있었죠. 소체라는 건 제물로 쓰이는 짐승을 뜻해요. 저들이 추구하는 생체를 만들기 위한 일부분이라는 뜻일 거예요.”

수인, 소체.

앞서 들었던 단어가 아닌가.

마른 비는 귀를 쫑긋 세우며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저들의 교리에 따르면 맑은 그릇을 지니고 태어난 인간, 청기라고 불리는 자들이 모종의 의식을 거쳐서 소체를 받아들여요. 그렇게 탄생한 생체가 저거죠. 인간과 짐승을 섞어놓은 듯한 괴인.”

청기라는 단어까지 나왔다.

마른 비는 옥예린에게 또 하나를 물었다.

“그럼 영매사란 건 뭐야?”

산양 가죽을 쓰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지팡이를 휘두르던 괴인이 그렇게 불리지 않았던가.

옥예린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벌써 만나봤냐는 표정을 지었다.

“그건 일종의 술사예요. 무공이 발전했듯 술법 분야에서도 굉장한 진보가 있었는데, 저들의 영매사는 고대의 주술을 구현하는 무격(巫覡)에 가깝죠. 짐승을 부리거나 청기와 소체를 연결하는 역할을 해요.”

옥예린은 지난 삼 년간 정체불명의 집단에 대해 깊게 파고든 모양이었다.

수인은 황당한 얼굴이 됐다가 곧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네년이 본교에 대해 어찌 그렇게 자세히….”

“야, 원시인. 넌 좀 닥쳐 봐.”

철중구는 수인의 말을 자르고 옥예린에게 물었다.

“옷도 더럽게 못 입는 저것들이 천기자 영감이 말한 놈들 중에 하나라고? 혼란을 부채질할 거라는? 그런 것치곤 너무 허약한 거 아니야? 나도 만나봤는데 꽥꽥거리기만 하고 오지게 약하던데?”

수인이 부들댔지만, 아무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철중구의 말처럼 여기 있는 자들을 위협하기에 그의 힘은 너무 약했기 때문이다.

“의태와 빙의라는 게 있어요. 그걸 통해 저들은 급격히 강해지죠. 그래도 수인 하나는 별 위협이 되지 못해요. 다양한 짐승의 특성을 지닌 수인 여럿이 모이면 모를까.”

“모여도 별거 없을 거 같은데……. 그래서 저들은 뭐 하는 집단이에요? 종교?”

여규의 질문에 옥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백수교(百獸敎)라는 신흥 종교 집단인데 인간과 짐승의 합일을 통해 자유를 얻는다나 뭐라나……. 저들의 궁극적인 목표가 무엇인지는 저도 잘 몰라요.”

“그냥 미친놈들이네요.”

아무도 지금의 상황을 심각하게 여기는 자는 없었다.

구경거리로 전락해버린 수인이 발작할 무렵, 옥예린이 입을 열었다.

“우스운 자들이죠. 하지만 저들이 끼치는 해악과 성장 속도를 감안하면 크게 놔둬선 안 되는 자들이에요. 그리고 수인의 계급까지는 별 게 없지만, 그 위는….”

쿠웅!

그때, 육중한 발소리가 울렸다.

마른 비 일행과 수천 사냥꾼들은 그 발자국에 엄청난 거력이 담겨 있다는 걸 깨닫고 표정을 굳혔다.

수인의 얼굴이 활짝 피고, 옥예린은 눈을 크게 떴다.

“이 힘……. 설마 수투사가?!”

휘이이익― 쿠웅!

그녀의 놀라움에 화답하듯 거인이 골짜기 위에서 뛰어내렸다.

마른 비가 올려다봐야 할 만큼 큰 키와 탄탄한 육체는 운남에 있는 산이 생각날 만큼 거대했다.

전신에서 줄기줄기 뿜어져 나오는 패력.

여섯 개의 송곳니를 지닌 멧돼지 가죽을 걸치고, 얼굴에 네 줄기의 자묵을 새긴 사내가 일행을 내려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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