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화
“이들인가?”
수투사라는 자의 음성은 덩치에 어울리게 우렁찼다.
두더지 가죽을 걸친 수인은 앞서 무시당한 걸 일러바치듯 목소리를 높였다.
“맞습니다! 수투사 님! 가운데 있는 저년이 소림의 땡중들과 의식을 방해한 것이었습니다! 형제자매들을 죽인 것도 전부 그놈들의 짓입니다!”
수투사는 고요한 눈길로 마른 비 일행을 훑었다.
팔십에 달하는 인원 앞에서도 그는 위축된 것 같지 않았다.
‘많이 쳐줘도 엽장이란 사람들과 비슷한 수준이야. 규나 중구보다는 확실히 약하다.’
마른 비는 사내의 여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개인의 무력도, 숫자도 저들에게 절망적일 만큼 열세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른 비는 옥예린이 긴장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만만치 않군.”
수투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가 뭐라고 말을 더하려는 순간, 철중구가 나섰다.
“재밌는 게 나왔네?”
그는 특유의 건들거리는 걸음으로 수투사를 향해 걸어갔다.
그리고 그의 앞에 서서 도를 어깨에 얹은 채 그를 올려다봤다.
“존나 크네. 이렇게 큰 새끼는 처음이구만.”
말이 끝나는 순간이었다.
철중구는 번개처럼 다가서며 도를 휘둘렀다.
“카아압!”
이 사태를 일으킨 원흉.
그렇다면 시간을 끌 이유가 무엇인가.
붉은빛을 머금은 도는 수투사를 두 쪽 낼 것 같았다.
그때, 너무 고요해서 온화하게까지 보이던 수투사의 눈이 번쩍였다.
“어?!”
마른 비는 외마디 소리를 토했다.
급격히 끓어오르는 상대의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중구! 조심해!”
다행히 마른 비의 외침은 늦지 않았고, 철중구는 기겁하며 도를 회수해서 몸을 가로막았다.
쩌어어엉―!
바윗돌 같은 주먹이 몸체를 때리자, 철중구의 몸이 붕 떠올랐다.
돌팔매처럼 날아오른 그는 허공을 가로질러서 뒤쪽 나무에 처박혔다.
꽈아아앙! 푸스스―
흔들리는 거목과, 떨어지는 잎사귀.
철중구는 나무의 줄기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져 땅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 이게 뭔… 쿨럭!”
막았음에도 이런 충격이라니?
얻어맞고 하늘로 떠오른 건 마른 비와 싸웠을 때 이후 두 번째였다.
“카아악~ 퉤!”
피 섞인 침을 뱉은 철중구가 도를 겨누며 외쳤다.
“힘을 숨긴 거냐! 덩치에 안 맞게 치졸한 새끼구만!”
수투사라는 사내는 자신의 주먹과 철중구를 번갈아보고 있었다.
‘힘을 숨겨? 아냐, 저건…!’
마른 비는 눈을 가늘게 뜨고 사내를 살폈다.
거한은 무언가를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마른 비가 보기에 그는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대충 이 정도인가.”
이상한 일이었다.
철중구를 한 방에 날려버릴 정도라면 강하다는 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한데 그런 강자가 자신의 힘을 정확히 알지 못한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른 비가 사내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며 고민에 빠졌을 때, 철중구가 움직였다.
“대충 이 정도인가는 얼어 죽을? 덩치만 큰 쭉정이인 줄 알고 방심했다. 이번엔 다를 거야.”
그 말처럼, 철중구는 신중했다.
본능적으로 깨달은 것이다.
사내가 만만치 않은 존재라는걸.
“카아압!”
철중구의 도에서 붉은 도기가 치솟았다.
백원 의원에서 탁기를 빼내고 기공을 다루는 법을 배운 이후, 그의 내공은 한층 정심해져 있었다.
절정의 문턱을 넘보는 도객.
철중구의 한 수는 수천 엽사들의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뒈져라, 자식아!”
부아아악―!
사자포지가 내리꽂히자, 도명(刀鳴)이 골짜기를 울렸다.
확연히 상승한 경지.
허나 강맹한 기운이 엄습해 오는데도 수투사는 느긋하기만 했다.
그는 쇠몽둥이 같은 팔뚝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렸다.
“막고.”
콰아아아앙!
“때린다.”
퍼어어억―!
철중구는 빙그르르 회전하며 아까 날아간 거리만큼 튕겨져 나갔다.
“주, 중구!”
여규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그 순간, 땅에 떨어졌던 철중구가 벌떡 일어났다.
“뭐 이런 웃기지도 않는 새끼가…!”
그는 욕을 뱉다 말고 한쪽 무릎이 꺾이며 주저앉았다.
어깨를 다친 듯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웠지만 그는 웃고 있었다.
“이거 뭐 하는 놈인지 모르겠네. 야, 덩치! 너 혹시 바보냐?”
밀린 건 철중구가 아니었나?
일행은 수투사의 상태를 확인한 뒤에야 그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수 있었다.
철중구는 어깨를 맞고 나가떨어졌지만, 맞는 순간 몸을 빼며 충격을 흘렸다.
반면 공격을 정직하게 받아낸 수투사는 팔이 삼 분의 일쯤 잘려서 덜렁거리고 있었다.
커다란 덩치만큼이나 피의 양도 엄청났고, 그대로 두면 위험한 상태에 이르리라는 건 자명했다.
“내 도를 맨몸으로 받아낸 건 대단하다만, 승부는 끝난 것 같은데? 뭐 이런 무식한 놈이 다 있어? 너 싸울 줄 모르냐?”
마른 비의 예상이 맞았다.
수투사라는 사내는 괴력을 지니고도 그 힘을 활용할 줄 모르는 것 같았다.
저자도 일전에 쓰러뜨린 수인처럼 실제 지닌 힘보다 더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허나 다룰 줄 모르니 무슨 의미가 있을까.
철중구가 혀를 끌끌 찰 때, 수투사가 중얼댔다.
“안 되겠어. 아직은 내가 너무 미숙하군. 오늘은 노형제의 도움을 좀 받아야겠소.”
저게 무슨 말이지?
도움? 노형제?
마른 비 일행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수투사의 말에 화답하는 음성이 골짜기 위에서 들렸다.
“그러게 내 말하지 않았나. 아직은 힘들 거라고.”
“메에에에―!”
사람의 말과 짐승의 울음이 들리고, 무언가가 골짜기로 훌쩍 뛰어내렸다.
검은 털로 뒤덮인 생물은 굉장한 덩치의 산양이었는데, 등에는 뼈 지팡이를 든 노인이 타고 있었다.
“샤아아악!”
그 소리를 들으니 확신이 들었다.
저건 산양을 닮은 무엇일 뿐, 산양이 아니라는걸.
짐승은 마른 비 일행을 보며 이빨을 드러냈는데, 그 안에서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혀가 꿈틀거렸다.
산양의 몸에 뱀의 혀를 지니고, 산양과 뱀의 소리를 동시에 토해내는 생물.
정체를 짐작하기 힘든 기괴한 짐승이었다.
“이놈들, 보통이 아니야. 힘을 다루는 데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어려울 걸세.”
“그렇군. 노형제의 말이 맞았소. 고집을 부린 점, 사과하오.”
수천의 엽사들은 물론이고 마른 비 일행까지도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몰라서 둘의 대화를 가만히 듣고 있었다.
노인은 그 모습이 재미있는지 클클거리며 웃었고,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수의 영이 함께하리니, 무한한 회생이 수신(獸神)의 종의 육신에 깃들지라.”
스아아악―
눈치로 보아 저건 술언이 틀림없다.
노인이 말을 마치자, 뭐라 표현하기 힘든 불쾌한 기운이 수투사의 머리 위를 맴돌았다.
눈으로 식별 가능할 정도로 검게 응집된 기운은 사내의 상처 부위로 빨려들었고, 잘려서 덜렁대던 팔뚝을 치유했다.
콸콸 흘러내리던 피가 잦아들자 수투사는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상태를 확인했다.
“볼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정말 신기하단 말이지. 고맙소, 형제.”
사람들이 경악에 휩싸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특히 수투사의 팔을 잘랐던 철중구는 어찌나 놀랐는지 입만 뻐끔대고 있었다.
“뭐… 미친…! 규야, 나 지금 꿈속이냐?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침착함을 유지하고 있는 건 마른비와 옥예린뿐이었다.
옥예린은 노인을 본 적이 있었고, 마른 비는 저것과 유사한 주술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잎의 노래가 구사했던 치유의 술.
활용하는 기운이 다를 뿐, 노인이 펼친 건 잎의 노래의 술법과 흡사했다.
“수령사(獸靈師)…….”
옥예린이 노인을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수령사라니? 그건 또 뭔데? 저 노인을 말하는 거야?”
마른 비가 묻자 옥예린은 작게 속삭였다.
“수투사와 수령사……. 수인과 영매사가 진화한 존재라고 보면 돼요. 저도 산서성(山西省) 오태산(五台山)에서 딱 한 번 만나봤어요. 수인과 영매사는 별거 아니지만, 저들은 달라요.”
와족으로 치면 전사와 술사의 개념일까?
수령사라는 노인은 뱀 가죽을 목과 어깨에 두르고, 얼굴에 네 줄의 자묵을 새기고 있었다.
수인이 세 줄, 영매사가 두 줄로 상하관계였던 것과 달리 수투사와 수령사는 동급의 존재인 모양이었다.
“신흥 종교 집단이라고 했죠? 저들은 완비되지 않은 조직이에요. 아직 힘을 키우는 단계에 있죠. 다행히 저 수투사는 이제 막 힘을 얻은 것 같아서 쉽게 처치할 수 있을 거라고 여겼는데….”
거기까지 말한 옥예린은 노인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녀는 좋지 않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입술을 깨물었다.
“다른 산의 말뚝은 수인들이 지키고 있던 데 반해, 오태산에는 수투사가 있었어요. 그는 저 사내와 달리 완성된 존재였죠. 저와 동행했던 십팔나한(十八羅漢) 둘이 고전할 정도로. 하지만 숫자의 우위로 쓰러뜨렸을 때, 저 노인이 나타났어요.”
옥예린은 침을 삼키고 그날의 일을 들려주었다.
“저자가 술법을 펼친 순간, 중상을 입고 쓰러졌던 수투사가 벌떡 일어났어요. 그리고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달려들었죠. 결과는… 십팔나한 두 명의 패배였어요.”
마른 비는 눈을 끔벅댔지만, 옆에서 듣던 여규는 온몸이 굳었다.
십팔나한이 어떤 존재인가.
소림을 대표하는 열여덟 명의 절정 무인들.
백팔나한(百八羅漢)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열여덟 명을 추린 그들은 소림의 수호신이라는 사대금강(四大金剛) 다음으로 유명한 무승이었다.
한데 홀로 십팔나한의 두 명을 꺾었다고?
이게 사실이라면 중원이 떠들썩해질 일이었다.
그저 미친놈들의 집단이라고 치부했던 백수교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다 떠들었나?”
옥예린의 말을 끊은 건 노인이었다.
그는 기분 나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태산에서 만난 적이 있었지. 반갑네, 엽주. 다시 볼 날을 고대하고 있었다네.”
‘날 알아?!’
옥예린의 눈이 커졌다.
얼굴은 당연히 기억하겠지만, 노인이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소림 방장의 의뢰를 수락한 이후, 옥예린은 수천의 인물을 대동하지 않은 채 소림의 무승들과 움직였다.
호들갑을 떨었던 두더지 수인과 달리 수령사는 자신을 방해한 자들이 소림과 수천의 엽주라는 걸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말은…….
‘설마…?!’
옥예린이 고개를 번쩍 들었을 때, 노인은 끌끌 거리며 웃었다.
“눈치채는 게 너무 늦지 않나?”
수투사가 침착했던 이유.
노인이 적진 한복판에 내려서고도 여유를 부릴 수 있었던 까닭.
마른 비 일행과 수천의 사냥꾼들은 골짜기 위로 드리워진 검은 그림자를 목도했다.
하나둘 늘어나기 시작한 숫자는 어느덧 기백을 헤아리고 있었다.
“고생해서 설치한 말뚝이 모조리 뽑혔지. 힘을 쓴 건 소림이지만, 위치를 찾은 건 너의 짓이라는 걸 알고 있다. 네년 때문에 얼마나 차질이 빚어졌는지 아나! 창자를 뽑아서 씹어 먹어도 모자랄 년 같으니라고!”
차분한 말투는 가장된 모습일 뿐이었다.
본색을 드러낸 노인은 괴이한 행색만큼이나 더러운 말을 쏟아냈다.
이 골짜기는 말뚝을 노리는 자들을 잡기 위해 백수교에서 준비한 함정이었고, 노인은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외쳤다.
“본교의 신성한 의식을 방해한 놈들이다! 소체를 없애던 사냥꾼 놈들까지 걸려들었으니 일망타진하기 딱 좋은 상황이구나! 모조리 죽여라!”
노인이 명령하자 짐승의 울부짖음이 골짜기를 메웠고, 어둠이 쏟아져 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