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8화
“쿠어엉!”
“크르릉, 컹!”
“끽, 끼긱― 끽!”
곰, 늑대, 호랑이, 승냥이 등의 맹수부터 원숭이, 사슴, 다람쥐 같은 초식동물까지.
골짜기에는 운태산에 서식하는 야수들이 종을 가리지 않고 몰려 있었고, 그것들은 거침없이 골짜기 아래로 뛰어내렸다.
눈이 붉게 물든 야수들은 하나같이 미쳐서 날뛰었고, 엄청난 공격성을 드러내며 일행을 향해 달려들었다.
“하다하다 이제는 짐승 군단이랑 싸우는 거냐!”
수투사와 대치하던 철중구가 몸을 물려서 일행에게 합류했다.
오른쪽 어깨를 다친 그는 도를 왼손으로 옮겨 잡으며 외쳤다.
“뭐가 이렇게 많아? 징글징글하구만!”
그 말처럼, 짐승들은 골짜기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미친 듯이 달려드는 야수들은 실제적인 힘을 떠나, 공격받는 자들을 위축시키기에 충분했다.
“진형을 짜라! 그래 봤자 짐승이다! 주제를 모르는 것들에게 누가 사냥꾼인지를 알려주는 거다!”
철부를 움켜쥔 마웅이 목이 터져라 외쳤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군이 중원 최고의 엽사들이란 점이며, 이들은 짐승을 사냥하는 데 특화된 인간들이었다.
수천 사냥꾼들이 갈고 닦은 사냥술을 발휘하려는 찰나, 마른 비가 앞으로 나섰다.
“잠깐. 이게 전부가 아냐. 여긴 나와 별비가 맡을 테니 힘을 아껴.”
“……?!”
사냥꾼들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이었다.
둘의 힘을 과소평가하는 건 아니다.
누가 뭐래도 마른 비와 별비는 여기서 가장 강한 존재니까.
하지만 저 숫자를 둘만으로 감당하기엔…….
마른 비는 모두의 우려를 행동으로 불식시켰다.
『오오오오!』
전력을 다해 끌어올린 자연기를 모조리 언령에 실었다.
극성으로 펼친 야수 제어를 전투 함성에 버무리니, 쥐떼처럼 달려들던 야수들이 일시에 멈췄다.
그때, 두 발로 버티고 일어선 별비가 포효를 터뜨렸다.
“커허허허헝!”
미친것들이 감히 누구한테 덤비는 거냐!
뭘 처먹고 정신이 나간 건지는 몰라도 상대를 보고 덤비란 말이다!
한 끼 식사에 불과한 것들에게 공격을 받았던 별비는 불쾌한 기억이 떠올랐고, 그간의 분노를 일거에 쏟아냈다.
전투 함성과 야수 제어, 그리고 산중제왕의 포효!
삼중으로 중첩된 음파는 짐승들에게 걸린 정신 지배를 흔들기에 충분했다.
골짜기에 깔린 요기까지 일시적으로 걷어낸 그때, 마른 비가 외쳤다.
“규, 중구! 지금이야!”
짐승들이 멈추고, 수투사와 수령사는 뇌리를 흔든 음파에 휘청이고 있다.
지금 이 사태의 근원을 끊어내야 한다.
미리 언질을 받고 대기하던 여규와 철중구가 날아올랐다.
“하아앗!”
“크아아압!”
사일검 삼초식 사양무광.
적사자도 육초 사자포지.
새하얀 검기와 붉은 도기가 대지에 박힌 흑색 말뚝에 작렬했다.
꽈아아아앙!
특수 제작한 묵철에 수령사의 술력을 깃들인 말뚝.
그건 어지간한 충격에는 꿈쩍도 안 할 강도를 지니고 있었다.
허나 여규와 철중구의 연수합격은 강기에 버금가는 위력을 뿜어냈고, 둘의 공격이 작렬한 순간 말뚝은 사기그릇처럼 깨져버렸다.
쩌저저적― 쾅!
쇠말뚝이 깨지자 골짜기를 휘감은 기운이 요동쳤다.
말뚝으로 빨려들던 검은 기운이 흩어지기 시작했고, 오염된 지기가 뿜어내던 요기가 그쳤다.
사아아악―
안개가 걷히듯 골짜기가 서서히 밝아졌고, 붉어졌던 짐승들의 눈이 원래의 색을 찾았다.
정신을 차린 듯 주위를 둘러보던 짐승들이 화들짝 놀라며 사방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오래 지나지 않아 골짜기를 가득 메웠던 야수들은 전부 사라져 버렸다.
“허어…!”
경탄은 수천 엽사들의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그리고 경악 어린 신음은 수령사라는 노인의 것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마른 비를 보고 있었는데, 막힘없이 주절대던 아까와 달리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바, 방금 그 힘…! 그게 무엇이냐?! 불순하고도 불경하도다!”
마른 비가 검은 기운에 불쾌함을 느꼈듯 수령사 또한 마른 비의 자연기가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주술을 흩어버린 마른 비에게 커다란 위협을 느낀 게 분명했다.
“오… 오오! 수신이시여…! 이토록 불길한 기운이라니! 타락한 자, 신의 철퇴를 받을 지어다!”
노인은 머리 위로 지팡이를 쳐들었고, 흩어지던 검은 기운을 끌어 모았다.
그리고 마른 비를 향해 검을 휘두르듯 내리쳤다.
끼아아아―!
원령이 울부짖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기운이 쏟아졌다.
가만히 지켜보던 마른 비는 오른발을 높이 들었고, 힘차게 내리찍었다.
“합!”
대지에 꽂힌 오른발이 역, 뿌리 내리기를 시전했다.
수직으로 솟은 자연기는 마른 비를 지키는 방벽이나 다름없었고, 노인이 쏘아낸 검은 기운은 푸른 장막을 뚫지 못한 채 소멸했다.
“메에에에~! 샤아아아악!”
노인이 당황하자 그가 타고 있던 산양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마른 비에게도 든든한 벗이 있었으니, 백호의 우렁찬 포효가 이도 저도 아닌 생물을 덮쳤다.
“커허허헝!”
불알이 오그라든 산양은 감히 입도 벌리지 못하고 쭈그러들었다.
별비의 눈빛이 심신을 압박하자, 산양은 몸을 바짝 웅크린 채 뒷걸음질 쳤다.
“이, 이런…! 수호수가 겁을 집어먹다니?!”
노인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부르르 떨더니 산양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고 지팡이를 들어 올려서 검은 기운을 응집했다.
후아아악― 퍼억!
화풀이라도 하는 걸까?
노인은 지팡이로 산양의 머리를 후려쳤다.
산양은 얻어맞은 충격과 머리를 옥죄는 검은 기운에 괴로워하더니 앞발을 꺾었다.
기괴하게 울며 몸부림치던 짐승은 결국 축 늘어져서 숨이 끊어졌다.
산양을 죽인 노인은 마른 비를 노려보며 수투사에게 말했다.
“수신의 가호가 통하지 않다니……. 절대 살려두어서는 안 될 자로다! 수투사여! 전투를 준비하시게! 저것들을 여기서 죽여 없애겠소!”
그렇게 외친 노인은 이번엔 별비를 바라봤다.
“참으로 끔찍한 짐승이구나! 이토록 흉한 기운이라니…! 허나 그 탁월한 육체! 천하를 뒤져도 찾기 힘든 소체로다! 저것을 재료로 합일을 이루는 순간, 교주께선 인신의 반열에 오를 것이야!”
“……뭐라고?”
지금까진 뭐라고 떠들건 흘려들었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기가 힘들다.
얼핏 들어도 별비를 제물로 삼아 무언가를 하겠다는 뜻인 걸 눈치챘기 때문이다.
마른 비의 표정이 무섭게 굳었고, 자연기는 활활 타올랐다.
그가 발을 내딛는 순간, 노인이 지팡이를 번쩍 쳐들었다.
“교를 지키는 수호수들이여! 수신의 오른팔, 수령사의 명을 받들라!”
아까 덤빈 것들이 전부가 아니었나?
온갖 짐승의 울음이 골짜기를 뒤덮었다.
그리고 거기엔 일전의 야수들보다 월등히 강한 기운이 담겨 있었다.
“형제자매들도 수신의 부름을 들어라! 수의 영과 하나 됨을 허락하노니, 수신의 자녀들이여! 세상을 더럽히는 불결한 것들을 치워버려라!”
“끄오아아아!”
골짜기 위.
이번엔 짐승의 울음도, 인간의 목소리도 아닌 기괴한 음향이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건 이미 느껴본 적 있는 감각이었다.
‘빙의라고 했었나?’
곰 가죽을 걸친 사내가 짐승처럼 돌변했을 때의 느낌이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 위에서 울부짖는 건 강화된 기형 짐승들과 수인이라 불리는 자들이 틀림없었다.
“쿠아아아악!”
“컹, 크앙…!”
“끼루루룩!”
골짜기 위에서 먼저 쏟아진 건 수호수라고 불리는 야수들이었다.
그것들은 수령사에게 완전히 종속되었는지 말뚝이 제거됐음에도 원래대로 돌아오지 않았다.
시뻘겋게 번뜩이는 눈빛!
파도처럼 밀려오는 짐승의 물결에 대항한 건 수천 사냥꾼들이었다.
“이번엔 우리가 맡는다! 물러서라, 비아야!”
마웅은 자신의 사냥조를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몸을 뒤로 힘껏 꺾었다.
도끼를 쥔 팔뚝에 힘줄이 솟아오르고, 철부가 하늘을 날았다.
“우리야아압!”
비월부(飛月斧).
쾌속하게 회전하는 대부가 짐승들의 전열을 꺾었다.
도끼는 수십 마리 짐승들의 머리를 날려버리고, 곡선을 그리며 되돌아왔다.
마웅이 도끼를 회수할 때, 창무군의 목소리가 골짜기를 울렸다.
“강사망(剛絲罔)! 투척!”
파라라라락―!
별비를 묶었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그물이었다.
창무군이 이끄는 그물 사냥꾼들은 능숙한 솜씨로 넓은 범위에 걸쳐 그물을 펼쳤고, 걸려든 짐승들은 고통에 몸부림쳤다.
별비에게 던진 것처럼 튼튼하진 않지만, 강사망은 씨줄과 날줄이 촘촘히 엮인 칼날 그물이었다.
“당겨랏!”
촤아아악―!
창무군의 명을 받은 사냥꾼들이 줄을 당기자, 그물이 좁혀지며 안에 든 짐승들을 산 채로 썰어버렸다.
내공이 주입된 강사는 어지간한 육체 강도로는 버틸 수 없는 사신의 손아귀였다.
“서유화! 멀었나!”
마웅이 외치자 서유화가 응답했다.
“끝났어!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움직이지 마라!”
“꾸이아아악!”
그물만으로 막기엔 짐승들의 숫자가 너무 많았다.
야수들이 그물 사냥꾼들의 방어를 돌파했을 때, 땅에서 강침이 솟아올랐다.
퓨퓨퓨퓩―!
언제 이런 걸 설치했는가.
수천 사냥꾼들의 최전선에는 서유화의 사냥조가 깔아놓은 간이 덫이 즐비했고, 무작정 달려든 짐승들은 속절없이 목숨을 잃었다.
“대형 덫은 설치할 수가 없어! 발목만 잘라놓을 테니 그 다음은 너희가 알아서 해!”
스가가가각!
몇 줄을 덧대놓은 강사.
제대로만 설치하면 세 줄로 코끼리의 무게를 버틴다는 고가의 물건이다.
짐승의 발목 높이로 진형의 외곽을 빙 둘러놓은 강사는 달려드는 야수들의 발목을 잘랐고, 행동 불능이 된 수호수들이 원진을 형성한 일행의 앞에 나뒹굴었다.
“거창! 찔러라!”
푸푸푸푸푹!
맹각의 창 사냥꾼들은 살아서 날뛰는 짐승들의 숨통을 착실하게 끊었다.
숫자는 적지만 그들은 유기적으로 움직였고, 진형에 근접한 짐승들은 뭐에 당한지도 모른 채 창에 찔려 죽어갔다.
둥글게 밀집한 일행의 앞에 짐승의 사체가 두둑이 쌓였을 때였다.
“지금이야! 붙여!”
서유화의 명이 떨어지자 사냥꾼 한 명이 화섭자를 꺼내 들었다.
그걸 땅에 가져다 대자 기다렸다는 듯 불씨가 타올랐다.
“……기름?!”
기름은 또 언제 뿌려놨는가.
아니, 저런 걸 항시 들고 다닌다는 게 더 놀랍다.
여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불은 원진의 테두리를 둘렀고, 그 위에 엎어져 있던 짐승들을 집어삼켰다.
“쿠아아아악―!”
이성이 날아갔건 말건 발목 잘리고 불붙으면 끝이다.
백수교의 수호수들은 웬만한 부상쯤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들 괴수들이었지만, 함정 사냥꾼들의 덫에 걸리고, 창 사냥꾼들에게 사냥당하자 일행을 위한 방벽으로 전락해버렸다.
짐승들이 쌓이고, 그 위에 불이 붙으니 그건 화염의 장벽이나 다름없었다.
뒤에서 달려들던 짐승들은 더 이상 다가오지 못하고 주춤댔다.
“뭘 움찔대고 있냐. 이쪽으로 와야지.”
마웅의 목소리가 불의 벽 밖에 있는 짐승들의 주의를 끌었다.
가만히 보니 화염의 벽은 일행을 완전히 둘러싼 게 아니었다.
빠져나갈 곳을 남겨둔 것처럼 한쪽 방향이 작게 뚫려 있었다.
“커헝!”
“크롸라라!”
수호수들이 그쪽으로 몰려들자 마웅은 씩 웃었다.
“그래. 이쪽으로 와야지.”
마웅이 움직이자 그의 사냥조가 말없이 뒤를 따랐다.
운남에서 붉은 발톱을 마주했던 사냥꾼들이었다.
그때는 상식을 초월한 괴수 앞에서 손 하나 까딱하지 못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전원이 중병기를 손에 쥔 그들은 마웅을 따라 하나뿐인 입구를 틀어막았다.
“간다! 이것들아!”
콰아아아앙!
도끼, 장창, 대검, 쇠도리깨, 철추…!
마웅의 사냥조가 진격하자 좁은 입구로 몰려든 야수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곰이건 호랑이건 무조건 한 방씩이다.
힘 좋은 엽사들 중에서도 장사만을 모아놓은 그들은 거력을 바탕으로 거대 맹수를 전문적으로 사냥하는 자들이었다.
“오오…! 그냥 멍청이들인 줄 알았는데 좀 하네?”
웬만해선 남을 칭찬하지 않는 철중구조차 감탄을 흘릴 정도로 수천 엽사들의 실력은 대단했다.
급히 준비한 게 이 정도다.
제대로 사냥에 나선 그들의 손을 벗어난 사냥감은 없었다.
붉은 발톱과 별비를 만나기 전까지는.
마른 비 일행은 진심으로 감탄했지만, 아직 놀라기는 일렀다.
수천 정점의 사냥꾼은 아직 본 실력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퓨퓨퓨퓩―!
날카로운 쇠붙이가 경쾌하게 무언가를 꿰뚫는 음향.
일행이 눈을 돌렸을 때, 철창을 든 옥예린의 신형이 허공을 수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