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9화
“핫!”
표홀한 신법은 황홀하기만 했다.
여인은 한 자루 철창을 겨드랑이에 낀 채 공중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옥예린의 창이 움직일 때마다 짐승들의 정수리가 꿰뚫렸다.
그리고 두개골을 부술 때의 작은 반발력으로, 옥예린은 자신의 몸을 다시 허공에 띄웠다.
퓨퓨퓩― 퓨퓩!
그녀는 서유화가 만든 불의 벽 바깥에서 짐승들의 산을 홀로 누비고 있었다.
어떤 짐승도 그녀를 막지 못했다.
위협을 느낀 맹수들은 공중으로 뛰어올라 그녀를 잡으려 했지만, 다가가도 전에 허공에서 머리가 꿰뚫렸다.
옥예린은 창이 닿는 구형(球形)의 삼 장 거리를 완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하압!”
수조육창 오식 응조격(鷹爪擊).
하늘에서 내리꽂힌 매의 발톱이 지상의 사냥감들을 낚아챘다.
“얍!”
수조육창 육식 호조난무(虎爪亂舞).
팔방을 휩쓰는 범의 발톱이 돌풍을 일으켰다.
“허어…! 저 여자, 무지막지한데? 어째 비아 너랑 싸울 때보다 더 센 거 같다?”
“그러게.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거 같은데 빗나가는 법이 없어. 정확하게 정수리 한복판을 꿰뚫네.”
철중구와 여규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특히 사일검을 연마한 여규는 옥예린의 찌르기가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었다.
“땅에 발도 대지 않고 공중에서…!”
두 사람보다 더 놀란 건 수천의 엽사들이었다.
창을 주무기로 사용하는 맹각의 사냥조는 싸움 중이라는 것도 잊고 넋을 놓았다.
“공중살법. 엽주님만의 비기다.”
마웅도 도끼를 어깨에 걸친 채 옥예린을 구경하고 있었다.
“팔 년 전, 엽장들이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지. 빠르고 정확하다. 목표로 정한 사냥감이 전멸하기 전까지는 땅으로 내려오지 않아. 무슨 수를 써도 엽주님의 사냥 속도를 넘을 수 없었다.”
맹각도 한마디를 거들었다.
“속도만이 아냐. 엽주는 우리가 고전을 면치 못했던 악수까지 단숨에 잡아버렸지. 심지어 그건 하늘을 날아다니는 놈이었어. 마웅이 놈만 한 크기의 식인 박쥐를 허공에서 꿰어서 땅에 처박던 광경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창무군은 입맛을 다셨다.
“쩝. 이제는 넘어섰을 거라 생각했는데……. 엽주가 그간 놀고 있던 게 아니었을 줄이야. 이래서는 엽주 자리를 넘겨줘도 못 받겠는데?”
옥예린은 말 그대로 학살을 벌이고 있었다.
마웅의 사냥조가 때려잡는 숫자보다 옥예린 혼자 사냥하는 짐승의 숫자가 많을 정도였다.
이대로라면 어렵지 않게 짐승들을 막아내겠구나 싶을 때,
꽈앙―!
거체가 대지를 박찼다.
엽사들이 눈을 돌렸을 때, 거구의 사내는 이미 옥예린에게 육박하고 있었다.
“수투사?!”
옥예린은 등 뒤에서 다가오는 적을 감지했고, 몸을 뒤틀며 반전했다.
“합!”
그녀가 손을 놀리자, 철창으로 구현한 범의 발톱이 허공을 난자했다.
틈을 찾을 수 없는 창격의 소나기.
옥예린의 요격이 정교하고 엄밀한데 반해 수투사의 대응은 너무나 단순했다.
“흐읍!”
두툼한 팔뚝이 얼굴과 목을 가린다.
그는 철갑 같은 육체로 쏟아지는 창날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피가 튀고, 살점이 뜯겼지만 수투사는 전진했다.
“뭐 저런 무식한 놈이…!”
철중구가 눈을 크게 뜨는 순간, 비명이 터졌다.
꽈앙―!
“아악…!”
수투사는 자신의 덩치의 사분의 일밖에 안 되는 옥예린을 몸으로 들이받았다.
한 마리 비조처럼 날아다니던 옥예린이 맥없이 튕겨 나갔고, 골짜기의 벽을 향해 쏘아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마른 비가 다급히 외쳤다.
“별비야!”
“크항!”
맡겨 둬라!
옥예린이 벽에 부딪히기 직전, 쏜살같이 솟구친 별비가 그녀를 낚아챘다.
그리고 입에 문 옥예린을 자신의 등 뒤로 던졌다.
“쿨럭…!”
별비의 등에 안착한 그녀가 핏물을 토하며 숨을 고를 때,
쿠웅!
수투사가 땅에 착지했다.
발밑에 있던 수호수들이 으깨지며 비명을 질렀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후우욱…!”
창격에 당해 엉망이 된 몰골.
척 봐도 수투사의 상태는 옥예린보다 심각했다.
하지만 적에겐 상식을 뒤집는 치유사가 있었으니, 수령사가 지팡이를 흔들자 수투사의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몸으로 때우는 무지막지한 놈에, 그걸 다시 회복시키는 늙은이……. 할배 손은 약손이냐? 시벌, 짜증 나는 조합이구만.”
철중구가 다친 어깨를 주무르며 말했다.
옥예린의 공세가 그치자 수호수들이 다시 밀려오고 있었다.
그리고 골짜기 위에서도 함성이 들렸다.
“카아아!”
“크워어어어!”
설상가상으로 빙의를 마친 수인들까지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화된 짐승들과 기형종, 그 뒤를 따르는 수인들의 울부짖음이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마른 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전황을 살폈다.
‘개개인의 힘은 이쪽이 우위야. 하지만 숫자의 차이가…….’
가장 큰 문제는 기세로 위압하고, 수십 마리를 쓰러뜨려도 적들이 물러서질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라면 체력이 고갈되는 순간, 엄청난 피해를 입을 것이다.
무언가 수를 내야 할 시점이었다.
“사냥이든 싸움이든 전쟁이든 결국은 똑같아. 머리를 쳐야 해.”
마른 비는 일행에게만 들리도록 나지막이 말했다.
그리고 수호수들의 한복판에 서 있는 수투사를 턱짓했다.
“저건 내가 맡을게.”
그러자 철중구가 어깨를 휘돌리며 나섰다.
“그럼 저 뼈다귀 영감탱이는 내가 죽여 놓지.”
하지만 그를 제지하는 손길이 있었다.
“중구 넌 다쳤잖아. 쉬어. 이번엔 내가 갈게.”
항상 일행의 뒤를 받치던 여규가 나서자 철중구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으엉? 꼬맹이, 가능하겠냐? 널 무시하는 건 아닌데 이런 건 무공만 세다고 되는 게 아냐. 넌 아무래도 경험이….”
여규는 피식 웃으며 철중구의 말을 잘랐다.
“싸움 경험이야 네가 나보다 많겠지만, 대단위 전투 경험은 내가 위일걸?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철중구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여규는 마른 비의 옆에 섰다.
“비아야, 네가 수투사를 몰아붙이면 수령사의 눈길이 그리로 향할 거야. 그때 내가 들어갈게.”
“응, 나도 그게 좋을 것 같아.”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일 때, 생각지도 못한 사람이 나섰다.
“소협, 길을 열어주겠소.”
그물 사냥꾼들을 이끄는 창무군이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고 싶은 눈치였고, 무언가 계획이 있는 듯했다.
마른 비가 눈빛으로 수락하자, 창무군은 네 명의 엽사들을 데리고 앞으로 나섰다.
“저놈에게 가는 길의 양옆을 치운다.”
그물 사냥꾼들은 불벽의 입구에서 싸우는 마웅의 사냥조를 뛰어넘었다.
그리고 허공에서 투망을 펼쳤다.
“차아압!”
이인일조.
두 개의 초대형 그물이 좌우로 펼쳐졌다.
개인용 그물과 달리 엄청나게 큰 그것은 달랑 두 명이서 저런 걸 다루는 게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거대했다.
파라라락―!
그물이 모포처럼 짐승들을 덮자, 투망의 끈을 쥔 두 명이 교차하며 뒤쪽으로 내달렸다.
그물은 안에 든 것들을 움켜쥐듯 조였지만, 그들만으로 몸부림치는 짐승들을 끝장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엽장!”
투망술의 대미를 장식한 건 창무군이었다.
투망꾼들이 교차하며 달리는 바람에 끈이 열십자로 포개진 두 곳.
창무군은 좌우의 교차지점을 양손으로 움켜쥐었고, 실타래를 감듯 자신의 팔뚝에 끈을 휘감았다.
“우오오오!”
내공을 끌어올리자 창무군의 팔뚝에 힘줄이 솟아올랐다.
“끼… 끼아아악!”
“쿠워어어어!”
점점 조여드는 투망.
강사로 짠 칼날 그물이 그 안에 든 짐승들의 피부를 파고들었다.
“으아아아아!”
창무군이 고함을 지르며 팔을 크게 잡아당긴 순간!
푸화하학―!
그물이 완전히 좁혀지며 피분수를 뿜어 올렸다.
두 개의 초대형 강사망은 수투사에게 향하는 길에 있는 수호수들을 육편 조각으로 만들어버렸다.
“와, 대단한데? 고마워!”
마른 비는 자연기가 깃든 눈빛을 번쩍이며 대기 중이었다.
“다녀올게.”
콰앙―!
와족 비전의 돌진기.
번갯불이 두 번 터지자, 마른 비는 휑한 대지를 가로질러 수투사의 코앞에 도달해 있었다.
“힘에 자신이 있는 것 같던데, 덤벼.”
번갯불의 추진력을 등에 업은 정권.
마른 비의 바위 부수기에 맞서 수투사도 오른 주먹을 내질렀다.
꽈앙―!
힘과 힘이 맞붙는 순간이다.
철중구의 방어를 깨부순 수투사지만, 마른 비의 힘을 감당할 순 없었다.
“으… 우오오!”
주먹뼈가 산산조각 난 수투사가 짐승 같은 울음을 토했다.
“아직 안 끝났어.”
휘아아악―!
중선오격.
한 줄기 바람이 거인의 중심선을 훑는 순간, 다섯 번의 발차기가 작렬했다.
“커, 커어어어….”
낭심을 움켜쥔 수투사가 무릎을 꿇었다.
마지막 족격이 인중에 꽂힌 그는 얼굴의 절반 정도가 함몰돼 버렸다.
“저, 저럴 수가! 안 돼! 무한한 회생이 수신의 종의 육신에…!”
숨이 끊긴 뒤엔 되살릴 수 없다.
수령사는 다급히 술언을 외웠고, 검은 기운이 수투사를 감쌌다.
그러자 앞으로 기울던 거인이 우뚝 멈췄다.
“좋아! 형제여, 수의 영과 하나 됨을 허락하니…!”
수령사는 곧바로 빙의까지 시전했다.
허옇게 뒤집혔던 수투사의 눈이 번뜩이고, 새빨간 광기가 들어찼다.
“오… 우오오오!”
상식을 뒤엎는 광경이었다.
다섯 군데의 급소가 작살났던 수투사는 몸을 일으키는 걸 넘어 전보다 더 큰 기운을 뿜어냈다.
슈르륵―
수투사와 수인의 차이점이 여기서 드러났다.
같은 빙의지만, 수투사는 단순히 짐승의 영이 깃들었던 수인과 달랐다.
상체에 뒤집어쓰고 있던 멧돼지의 가죽이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대며 피부에 밀착했다.
그건 마치 쩍 벌린 아가리에 얼굴을 내놓고 있던 수투사가 멧돼지에 먹혀버린 듯한 형상이었다.
반인반수.
지금의 수투사를 형용하기에 그보다 적절한 표현은 없을 것 같았다.
“꾸오오오!”
콰앙―!
“큭…!”
어깨를 이용한 몸통박치기가 날아들고, 마른 비의 몸이 붕 떠올랐다.
모습만 기괴하게 바뀐 게 아니었다.
마른 비에게 의아함을 안겨주었던 부분.
수투사는 확실히 자신이 지닌 힘 이상을 발휘하고 있었다.
두두두두―!
저돌맹진.
수투사는 멧돼지처럼 네 발로 마른 비에게 돌진해왔다.
거대한 바윗돌이 굴러오는 것 같은 광경은 심장이 오그라들 만큼 엄청났지만, 마른 비는 위축되지 않았다.
“까불지 마!”
밀릴 것 같으냐.
산 허물기.
바위곰 고유의 견격은 힘으로 모든 걸 깨부수기 위한 기예다.
마른 비도 자연기를 잔뜩 실은 어깨를 마주 내밀었다.
꽈아아앙!
거력과 거력이 충돌할 때, 점창의 검도 표적을 노리고 있었다.
파파팟!
비천십이표.
창산의 하늘을 가르는 경공은 짐승들 따위가 잡을 수 없는 속도로 적진을 휘저었다.
불벽을 뛰어넘은 여규는 그대로 수호수들의 머리를 밟으며 전진했고, 수투사에게 정신이 팔린 수령사에게 접근하는 데 성공했다.
‘조금만 더…!’
여규가 사일검을 준비할 때, 수령사의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그의 얼굴을 본 순간, 여규는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웃어?!’
뱀가죽을 목에 두른 노인의 입가엔 미소가 그어져 있었다.
“하찮고도 가소롭구나.”
수령사가 뼈 지팡이를 번쩍 들자, 빼곡히 들어찬 수호수들 틈에서 무언가가 솟아올랐다.
“크와아악!”
‘수인?!’
골짜기에서 뛰어내린 수인들이 어느새 수령사를 둘러싸고 있었다.
노인은 자신이 노려질 걸 예상했고, 만반의 준비를 해둔 게 틀림없었다.
여규가 이를 깨물며 선공에 나서려는 순간, 목소리가 울렸다.
“검을 든 소협을 지원하라! 비창(飛槍)! 투척!”
창무군이 마른 비를 지원했듯 맹각도 여규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가 이끄는 창 사냥꾼들은 불벽 위로 높이 뛰어올랐고, 허공에서 철창을 집어던졌다.
창날 쪽에 무게 중심을 둔 비창 십여 자루가 사선으로 내리꽂혔다.
퍼퍼퍼퍼퍽!
“크악!”
“퀘아악!”
철창에 꿰여 뒤로 날아가는 수인들.
여규는 장애물이 걷힌 공간을 가로질렀다.
“잡았어.”
사일검 일초식 일수초현이 수령사의 어깨를 꿰뚫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