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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70화 (270/463)

270화

피윳―!

날붙이가 골육을 관통하는 소리.

소리만 들었을 땐 적중한 게 틀림없다.

하지만 여규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손끝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이 인간의 몸을 뚫을 때와 미묘하게 달랐기 때문이다.

“시아아악―!”

느낌이 맞았다.

무언가가 검을 대신 맞았고, 제 몸을 비틀어 아슬아슬하게 궤도를 비껴냈다.

수령사 대신 사일검에 관통당한 건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낸 뱀이었다.

‘저건 수령사가 목에 두르고 있던?! 가죽이 아니었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저건 빈 껍질에 불과한 가죽이었다.

하지만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뱀은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없는 기사(奇事)에 당황했지만, 여규는 금세 평정을 찾았다.

직접 경험하는 건 처음이지만, 이와 유사한 현상을 책에서 읽었기 때문이다.

‘분명해. 환술(幻術)이야!’

신이 아닌 이상, 숨이 끊어진 생물을 부활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건 말로만 듣던 환술이 틀림없었다.

‘세상에…! 이게 가짜라고?’

눈앞에서 꿈틀대는 뱀이 환영이라는 걸 어찌 믿을 수 있을까.

방금 전까지 가죽에 불과했던 뱀은 검에 관통당한 꼬리에서 피까지 흘리고 있었다.

“샤아악!”

수령사의 목을 휘감은 뱀이 아가리를 벌리며 여규를 위협했다.

‘……뱀이 사라지지 않아. 환술에 제대로 걸린 건가.’

여규는 미간을 찌푸리며 어릴 적 서책에서 읽은 내용을 떠올렸다.

‘인간의 뇌는 놀랍고도 놀라워서 때때로 실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낸다. 타인에겐 허상에 불과할 뿐이지만, 환술에 걸린 자에겐 눈앞에 펼쳐지는 환영이 현실이나 마찬가지다.’

환술에 대한 기록은 그렇게 시작했다.

무림 초창기, 얼음 창고에 갇힌 수인이 자신이 얼어 죽을 때까지의 과정을 남긴 기록은 술사들에게 크나큰 영감을 주었다.

그는 손발이 마비되는 과정부터 동상의 증상, 심박이 정지되는 순간까지를 필사적으로 기록했다.

자신이 느끼는 두려움, 고통스러운 심정과 가족에게 전하는 유언까지 땅에 적어두었는데, 그가 죽어간 과정은 혹한에 노출된 인간이 겪는 증상과 완전히 일치했다.

기가 막힌 건 수인이 갇힌 곳은 얼음 창고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조금 서늘할 뿐 인간이 동사할 온도가 아니었지만, 그곳이 얼음 창고라고 믿은 수인은 죽음의 공포 속에서 얼어 죽었다.

무림에서 인간의 뇌를 속이는 환술에 대한 연구가 시작된 순간이었다.

환상을 불러일으켜 뇌를 감쪽같이 속이는 술법.

환영을 실제라고 믿게 하고, 그로써 타격을 주는 기예.

극에 이른 환술사는 가상의 생물을 창조하고,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환경을 조성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했다.

“샤아악!”

여규가 잠시 기억을 더듬는 사이, 뱀은 네 마리로 늘어나 있었다.

‘빌어먹을! 그새…!’

환영이 뚜렷해지거나 늘어나는 건 환술에 더 깊이 빠졌다는 뜻이다.

뱀의 숫자가 늘어나고, 수령사의 모습이 사라진 걸로 보아 환술은 점점 심화되고 있었다.

“키아아악!”

실존하는 수호수와 수인들도 주위를 둘러쌌다.

현실과 환영의 혼재.

처음 환술을 맞닥뜨린 여규는 제자리에 선 채 갈피를 잡지 못했다.

“저 멍청이가 가만히 서서 뭘 하는 거야!”

불의 벽 안에서 여규를 지켜보던 철중구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완벽한 기회를 잡고 검을 찔렀는데, 여규는 코앞에 있는 수령사를 맞추지 못했다.

아니, 맞추긴 맞췄는데 적중의 순간 궤도를 바꿔서 엉뚱한 뱀 껍데기를 찔러버렸다.

점창의 제자라는 놈이 저런 실수를 하다니 어이가 없지만, 아직 풋내기니 그럴 수 있다 치자.

철중구를 황당하게 만든 건 검 한 번만 휘두르면 죽일 수 있는 수령사를 멀뚱히 보고만 있다는 점이었다.

수령사는 땀에 젖은 이마를 훔치며 뒷걸음질 쳤고, 점점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그리고 사방에서 짐승과 수인이 몰려들고 있었다.

상황을 모르는 철중구가 복장이 터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저 띨띨이 같은 새끼가 기세 좋게 나서더니 적진 한복판에서 명상을 하고 자빠졌네!”

그 말처럼 여규는 제자리에 선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철중구가 불의 벽을 뛰어넘으려는 순간, 그가 눈을 떴다.

‘이것… 고등 환술은 아니야.’

고작 눈속임하는 뱀 몇 마리 만들어내고, 자신의 모습을 지우는 정도다.

그리고 뱀은 위협을 할 뿐 그 외의 어떤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기적에 가까운 일을 행했던 주술과 달리, 수령사의 환술은 경지가 낮은 게 분명했다.

자신에게 실제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건 수호수와 수인뿐이었다.

‘그렇다면…!’

한 번에 모조리 치워버린다.

이 정도 수준의 환술이라면 힘으로 날려버리는 게 어렵지 않을 터.

짐승의 노린내와 수인의 숨소리가 사위를 덮었을 때 여규의 손이 움직였고, 그의 검은 빛의 화살이 되었다.

‘광전섬막(光箭閃膜)!’

사일검 전방위 수비식, 광전섬막.

와족과의 전쟁이 끝나고 여휘가 창산에 머무를 동안 창안한 그것은 여규 부자의 합작품이었다.

섬세하고 정교한 찌르기가 일품인 사일검은 공격력은 걸출한 대신 방어에 있어 허술함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았다.

분광검을 극성까지 익히고 사일검을 만든 여휘는 수비에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으나, 사일검 하나만을 파고든 여규는 전쟁에서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야 했다.

원승이 없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으리라.

단점을 알았으니 남은 건 보완뿐이었다.

‘다 대 일. 절체절명의 상황에 쓸 만한 방어 초식을 만들자꾸나.’

여휘가 방향을 제시했고, 발상은 여규가 떠올렸다.

‘검막의 진화형으로 가면 어떨까요, 아버지?’

검막처럼 모든 방위를 차단하되 사일검의 공격력을 그대로 살린다.

극속의 찌르기를 전방위에 찔러 넣는 그것은 방어와 반격을 동시에 행하는 필살의 기예였다.

“다 죽어버려.”

쾌애애애액―!

빛이 일어나고, 무한에 가까운 검의 화살이 공간을 잠식한다.

공격에 특화된 사일검을 한 단계 진화시킨 그것은 그야말로 필살초란 말이 아깝지 않은 궁극의 기예였다.

“카아아아악!”

“꾸어…!”

여규를 그물처럼 뒤덮고 달려들던 적들이 모조리 꿰뚫렸다.

틈을 찾기 힘들 만큼 정밀한 찌르기는 관통을 넘어 적들을 아예 분쇄해버렸고, 자욱한 핏물과 갈가리 찢긴 육편이 골짜기에 흩날렸다.

후두두둑―!

여규의 주변으로 원형의 공터가 형성되고, 그 위로 피의 비가 내렸다.

광전섬막은 구파의 무공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살기 짙은 검술이었다.

“허?! 저, 저 새끼…! 완전 미친놈이네?”

철중구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찬사이리라.

항상 묵묵히 일행의 뒤를 받쳐왔던 여규다.

그는 이 한 수로 자신이 칠룡과 사호에 못지않은 검사라는 것을, 마른 비와 어깨를 나란히 할 자격이 있는 남자라는 걸 증명했다.

“후, 후오오…!”

이성이 날아간 수인들조차 주춤댈 정도로 엄청난 광경이었다.

광전섬막의 범위 끝자락엔 아슬아슬하게 검권을 벗어난 수령사가 파들파들 떨고 있었다.

“제길. 놓쳤나…….”

필살의 기예인 만큼 후유증도 컸다.

한 수에 모든 걸 쏟아낸 여규는 더 이상 서 있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는 눈꺼풀을 껌뻑이며 서서히 주저앉았다.

“쳐… 쳐라아!”

간신히 정신을 추스른 수령사가 발작하듯 외쳤다.

이런 놈은 더 크기 전에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한다!

주춤대던 수인들이 움직일 때, 목소리가 들렸다.

“별비야!”

꽈광― 쾅!

이게 정녕 인간의 육체가 맞부딪히며 낼 수 있는 소리란 말인가.

엄청난 충돌음이 난무하는 저편, 마른 비의 외침이 전장을 갈랐다.

“크항!”

〔알겠다! 간다, 가!〕

마른 비는 수투사와 싸우면서도 여규의 기척을 놓치지 않았고, 그에게 위기가 닥치자 지체 없이 별비를 불렀다.

수천의 주인을 태운 하얀 바람이 당도하자 수령사가 어깨를 움찔댔다.

“이분을 부탁해요, 별비 님.”

별비의 등에서 내린 옥예린이 수령사에게 철창을 겨누며 말했다.

“카항?!”

〔이런, 시발. 또?!〕

별비가 고개를 홱 돌리며 옥예린을 째려봤지만, 그녀는 별비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탈진하는 바람에 기어갈 힘도 남지 않은 여규가 데굴데굴 굴러서 별비에게 다가왔다.

“별비야. 업어줘.”

별비는 기가 차다는 눈으로 여규를 내려다봤다.

〔뭐 이런 광서우만도 못한……. 내가 인간 구조대냐? 지들이 싸우다 자빠졌으면서 왜 나한테 구해달래?〕

아까부터 여기저기 불려 다닌 별비가 구시렁댔다.

하지만 녀석은 말과 달리 잽싸게 여규를 등에 태웠다.

“오태산에서 끝맺지 못한 관계, 여기서 정리하죠.”

옥예린은 창을 휘두르며 날아올랐고, 전열을 정비한 수령사도 반격에 나섰다.

“건방진 계집이! 네깟 것이 신의 사자를 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여규가 수십에 이르는 수호수와 수인을 몰살시켰지만, 병력은 아직도 징그러울 정도로 많았다.

수령사는 수호수를 뒤로 물린 채, 수인 중에서도 정예들만을 엄선해 옥예린에 맞섰다.

검은 술법이 안개처럼 깔리고, 울부짖는 괴인들이 쇄도한다.

숫자에 밀린 옥예린은 적들을 죽이면서도 전진하지 못했다.

하지만 백수교 쪽도 그녀를 쓰러뜨릴 결정적인 강자가 없었으니, 수령사가 수투사를 찾은 건 필연적 수순이었다.

꽈아아앙!

골짜기를 뒤흔드는 굉음.

모두의 시선이 향한 곳엔 걸레짝처럼 너덜너덜해진 수투사가 있었다.

“크, 커어억….”

오른팔이 날아가고 왼팔이 뒤틀린 그는 더 이상 짐승처럼 네 발로 걷지 못했다.

너무나 큰 충격은 인간의 육체에 덧씌운 짐승의 영을 날려버렸고, 수투사는 빙의가 풀린 채 비척댔다.

‘비, 빙의가 풀려?!’

수령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죽으면 죽었지, 얻어맞았다고 풀릴 주술이 아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스으윽―

탄탄한 육체 위로 흐르는 푸른빛.

철탑처럼 허리를 세운 이족의 청년은 오연한 눈길로 수투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불길한 기운…! 저것이 수신의 주술을 날려버린 건가? 저, 저자는 대체…?!’

신성하다 여겨온 백수교 술법의 근간을 뒤흔드는 사내.

수령사가 마른 비를 천적으로 인식한 순간이며, 와족과 백수교의 악연이 시작된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노인을 경악하게 만든 건 마른 비만이 아니었다.

“당신들의 슬픔을 느껴요. 사악한 힘에 의해 의지를 잃고 꼭두각시로 전락해 버렸군요. 당신들의 분노가, 두려움이, 속박에서 벗어나고픈 의지가 전해진답니다.”

옥예린은 싸우다 말고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자 별비가 다급해져서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야, 인간! 뭐 하는 거냐!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어… 어?! 옆에, 옆에…! 이런 씨부럴!〕

철중구에게 제대로 배웠는지, 별비는 인간의 육두문자를 기막히게 구사하며 옥예린에게 달려드는 수인들을 처치했다.

그녀는 수령사에게 지배당해 괴물로 전락해버린 수호수들과 눈을 맞췄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어요. 스스로 이겨내야 해요. 뇌리를 침습한 검은 기운을 찾고, 각인된 명령을 걷어내요. 당신들처럼 강한 존재라면 할 수 있답니다. 자기 자신을 믿어요.”

“꾸, 꾸오오….”

믿기 힘든 일이었다.

미쳐 날뛰던 짐승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옥예린의 음성은 금수들을 다독였고, 그것들을 북돋았다.

절반에 가까운 수호수들의 눈이 원래의 색을 찾았고, 정신 지배에서 벗어났다.

누구도 시키지 않았지만 야수들은 자신을 억압했던 원수에게 일제히 몸을 돌렸다.

켜켜이 쌓인 한을 풀어낼 시간이었다.

“이, 이게 무슨…!”

“크와아아앙!”

백수교의 술법을 이겨낸 수호수들이 수령사에게 달려들었다.

하늘이 내린 초월적 능력.

옥예린의 선천적 초능과 수령사의 후천적인 술법이 맞붙은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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