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71화 (271/463)

271화

“어떻게 이런 일이…!”

수령사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빙의가 깨진 것도 충격인데, 이제는 미물들에게 걸어놓은 주술까지 풀려버렸다.

야수를 강화하고, 진화시키며, 뜻대로 다루는 백수교 고유의 술법은 수신의 점지를 받은 대수령사께서 창안한 힘이다.

끝을 모르는 인간의 탐욕은 인간을 제외한 만물의 분노를 샀고, 수세기에 걸쳐 축적된 대자연의 한(恨)은 고름이 터지듯 사해에 깃들었다.

천하 각지에서 발견되는 이상 징후는 그 자체로 현상이자 원인이며, 또한 계시였다.

시대의 비틀림 속에 잉태된 힘.

수령사는 백수교가 획득한 힘이 신의 은총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저 불경한 기운은 뭐란 말이냐! 본교의 주술을 제압하다니…!’

있을 수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일이다.

곪아버린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태어난 자들.

백수와 합일이 가능한 신의 자녀들은 야수의 힘과 인간의 지력을 바탕으로 부패한 세계를 뒤엎을 성전(聖戰)의 첨병이었다.

한데 하늘의 선택을 받은 전사가 쓰러졌다.

그리고 교의 수호수들이 적으로 돌아섰다.

금수란 신의 자녀들이 힘을 얻기 위한 재료에 불과할 텐데, 정신지배에서 벗어난 야수들은 백수교를 부정하듯 필사적으로 달려들었다.

“웃기지 마라!”

평생토록 믿어온 신앙이 훼손된 자, 결사적일 수밖에 없다.

수령사는 악에 받친 고함을 지르며 남은 술력을 모조리 퍼부었다.

“수신의 선택을 받은 형제자매들이여! 불결한 것들에게 신의 철퇴를…!”

술언이 발동되고, 수인들이 검붉은 기운에 휩싸였다.

수령사는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원정지기(元精之氣)까지 강제로 격발시켰고, 수인들은 승리를 위한 일회용 도구가 되어 미쳐 날뛰었다.

“교를 지키는 수호수들이여! 간악한 요녀의 속삭임에 흔들리지 마라! 수신의 가호가 함께하리니, 적들을 물어뜯어라!”

옥예린에 의해 정신지배가 풀린 야수들과 수령사의 편에 선 짐승들이 맞붙었다.

누구도 찾지 않는 운태산의 골짜기가 수인들의 괴성과 금수들의 울음으로 진동했다.

수령사가 병력의 우위를 바탕으로 최후의 결전에 나설 때, 지금껏 웅크리고 있던 수천의 엽사들이 움직였다.

“수투사인지 뭔지 하는 덩치가 쓰러졌다! 남은 건 짐승과 짐승 흉내를 내는 머저리들뿐이야!”

“마웅의 거수 사냥조가 앞장선다! 창잡이들이 뒤를 받치고, 투망꾼과 함정 사냥꾼은 좌우에서 달려드는 짐승들을 사냥하라!”

마웅을 필두로 엽장들이 나섰다.

그중엔 마지못해 뒤를 따른 듯한 진청의 모습도 보였다.

“어이, 대머리 형씨! 나랑 손 한번 맞추는 거 어때?”

원진 안에는 부상당한 철중구도 있었다.

그가 어깨를 돌리며 마웅의 옆에 섰다.

“좋지! 엽주님이 계신 곳까지 단번에 돌파할걸세. 엽주님과 합류한 다음에 수령사라는 늙은이의 목만 따면 이길 수 있어!”

중병기를 든 마웅의 사냥조가 불의 벽을 허물었다.

옥예린과 수령사가 대치한 곳까지의 일점 돌파.

시작은 마웅과 철중구였다.

“우리야압!”

“카아압!”

참웅부가 짐승들을 쪼개고, 적사자도가 수인들을 가른다.

패력이 장기인 두 남자의 합격은 길을 열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콰아아앙―!

백수교의 전열이 허물어지자, 짐승 사냥꾼들이 피의 돌파를 시작했다.

새카맣게 몰린 백수교의 병력이 바다가 갈라지듯 무너져 내렸다.

수령사는 이 상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왜냐…?! 원정지기까지 끌어낸 수인이 이토록 허무하게…!”

“짐승이니까요.”

답은 옥예린이 주었다.

수령사가 그게 무슨 소리냐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인간의 몸에 깃든 짐승의 영. 육체만 인간일 뿐 움직임은 완전히 짐승과 같더군요. 그럼 우리를 이길 수 없습니다. 우리는 사냥꾼이니까요.”

요컨대 상성의 문제였다.

동일한 힘을 지닌 무인이 상대였다면, 수천 사냥꾼들은 절대로 이런 활약을 선보일 수 없었으리라.

허나 수인은 강화된 짐승과 다를 바 없었고, 수천 사냥꾼들은 짐승을 죽이는 데 있어서는 중원에서 가장 뛰어난 전문가들이었다.

“우리 입장에선 이렇게 편한 상대가 없죠. 힘과 속도는 야수보다 월등하지만, 어떻게 움직일지 훤히 보이거든요. 급소만 바꿔서 찌르면 돼요. 몸은 인간이니까.”

상황을 이해한 수령사가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여전히 병력은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때, 수령사를 절망에 빠뜨릴 소리가 들렸다.

꽈아아앙―!

골짜기를 뒤흔드는 광범위 진각.

소리의 정체는 마른 비의 오른발이었다.

우득― 우드득―!

강대한 자연기가 수인들을 압살한다.

상공에 응집한 자연기를 진각과 함께 내리꽂으니, 그건 허공에서 휘둘러진 거대한 망치와 같았다.

마른 비에게 달려들던 오장 범위의 수인들이 영문도 모른 채 땅으로 처박혔다.

으지직―!

벌레를 밟듯 오른발을 짓이기자 수인들의 몸이 뭉개졌다.

무형의 자연기를 체외에서 자유자재로 구현하는 경지.

철중구와 여규가 그렇듯이 마른 비도 백원 의원에서 탁기를 뽑아낸 후 더욱 강해져 있었다.

“수, 수투사여…!”

이번 공격 범위에는 전투 불능이 된 수투사도 포함돼 있었다.

땅에 엎어졌던 그는 자연기의 세례를 받았고, 다른 수인들과 함께 숨이 끊어졌다.

‘엄청나지만, 저놈도 인간이다. 언젠가는 힘이 다할 터. 계속해서 숫자로 밀어붙이면 결국에는…!’

수령사의 얄팍한 기대는 곧바로 산산조각 났다.

이대로는 끝이 없겠다고 생각한 마른 비가 옥예린을 돌아봤고, 제안을 건넸기 때문이다.

“당신, 아까 그거 나랑 같이해볼래?”

“그거라뇨? 어떤….”

마른 비는 대답 대신 자연기를 끌어올렸고, 행동으로 보여줬다.

『멈춰.』

“키악…?”

야수 제어가 깃든 언령이 수호수들을 위압하자, 눈이 벌게져서 달려들던 짐승들이 주춤댔다.

마른 비의 의도를 파악한 옥예린이 곧바로 가세했다.

“제 말이 들리나요? 당신들은 조종당하고 있어요. 속박에서 벗어나야 해요.”

마른 비의 언령도 좀 더 부드럽게 변화했다.

『정신들 차려. 검은 기운을 느끼고, 저항하는 거야. 할 수 있어. 우리가 도울게.』

마른 비의 야수 친화와 옥예린의 초능이 한데 어우러지며 짐승들을 다독였다.

그건 심혼에 각인된 수령사의 주술을 뿌리 채 흔들 정도로 강력하고도 매혹적인 속삭임이었다.

“끄… 꾸어엉….”

수호수들의 눈이 하얗게 변했다가 붉어지기를 반복했다.

앞으로 전진했다가 멈추고, 이빨을 드러냈다가 감추는 등 짐승들은 내부에서 극심한 혼란을 겪는 모양새였다.

‘조금만 더…!’

마른 비와 옥예린의 이마에선 땀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짐승들에게 걸린 술법을 깨기 위해 그들은 뇌력을 아낌없이 개방했고, 자연기와 내공까지 모조리 때려 부었다.

파아앗―!

마침내 둘은 해내고야 말았다.

수호수들의 눈에서 명멸하던 붉은빛이 완전히 걷히고, 몸의 경련이 멈췄다.

“크르르릉….”

정신지배에서 벗어난 야수들은 머리를 몇 번 털더니 방향을 바꿔 수령사와 수인을 노려봤다.

수령사의 마지막 승부수였던 숫자의 우위마저 뒤집힌 순간이었다.

“크와아앙!”

수인과 수호수의 파도를 가르는 수천 사냥꾼들.

전장 전체에 뒤엉켜 있던 수호수들이 주변의 수인을 공격하기 시작하자 엄청난 혼란이 일었다.

주목할 만한 건 마른 비와 옥예린이 있는 일대였다.

야수들은 기력을 소진한 둘을 호위하듯 몰려들었고, 그들의 안전이 확보되자 수령사가 서 있는 방향을 향해 돌진하기 시작했다.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수령사가 지휘하던 것보다 훨씬 일사불란한 움직임이었다.

“이럴 수가…!”

마른 비와 옥예린의 한 수로 전황은 완전히 뒤집혔다.

전장 전체에서 수인들이 죽어 나자빠지고 있었다.

이 골짜기엔 백수교가 강소성에서 수년에 걸쳐 만들어낸 병력이 전부 투입되었고, 이들의 몰살은 강소성에서 백수교의 힘이 뿌리 뽑힌다는 걸 의미했다.

끔찍한 손실이지만, 수령사의 경악은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어느 순간부터 노인의 눈은 옥예린에게 고정돼 있었다.

그는 피곤한 표정으로 주저앉아 있는 마른 비와 옥예린을 번갈아 보았다.

‘둘의 짐승을 다루는 방식이 다르다! 저자는 술법을 기반으로 내공을 버무린 거야. 활용하는 기운이 다를 뿐, 저건 본교의 주술과도 흡사해. 하지만 이쪽은…!’

옥예린도 내공을 운용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녀에게선 술법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이 내린 자질.

애초에 이런 쪽의 능력을 타고난 존재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수령사는 전율할 수밖에 없었다.

‘왜 진작 떠올리지 못했지? 저년, 아니, 저분은…!’

교주께서 오매불망 찾아 헤매던 존재.

백수교가 완전해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조각.

수년간 천하를 뒤져도 찾아내지 못했던 그릇을 여기서 발견하다니!

심지어 적으로 만난 상황에서 말이다.

수령사는 무슨 수를 쓰든 옥예린을 취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목숨을 걱정해야 할 판이었다.

수인들의 진형이 무너지고 있었고, 일점 돌파에 성공한 수천의 엽사들이 옥예린과 합류했다.

청년 한 명을 등에 업은 채 홀로 옥예린을 지키던 백호가 한숨 돌리는 것도 보였다.

이족의 청년은 저 멀리서 쉬고 있었지만, 그가 힘을 회복하고 일어서는 순간 도주는 영영 불가능해질 터였다.

‘도망칠 수 있는 건 지금뿐인데… 이대로 갈 순 없다! 어떻게든 저 여인을 취할 방법이…….’

그때, 수령사는 보았다.

옥예린의 뒤에 서서 이쪽을 바라보는 남자를.

그는 환히 웃는 자들 가운데서 홀로 침중한 기색이었다.

갈피를 잡을 수 없는 혼란과 초조함.

그리고 노인은 저자를 잘 알고 있었다.

“……!”

눈빛이 교환되고, 짧은 전음이 오갔다.

사내는 눈을 찢어져라 부릅떴지만, 곧 입술을 깨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일이 벌어진 건 한순간이었다.

퍼어억!

홀가분한 얼굴로 웃고 있던 옥예린이 의식을 잃었다.

그녀의 목덜미를 가격한 남자는 누가 반응할 틈도 없이 옥예린을 낚아채서 몸을 날렸다.

짐승과 수인들의 머리 위를 가로지른 남자가 수령사의 옆에 착지했다.

“지, 진청?!”

“뭐냐? 이게 무슨…?”

“저 새끼가 미쳤나! 진청, 뭐 하는 짓이냐!”

엽장들이 경악하며 고함을 질렀다.

분노한 별비가 날아오르려는 찰나, 진청은 옥예린의 목에 검을 가져다 댔다.

“움직이지 마라! 한 명이라도 움직이면 이년의 목을 그어버릴 테니까!”

상상할 수도 없었던 상황에 모두가 당황할 때, 수령사는 껄껄 웃었다.

“잘했네! 잘했어! 수천을 접수하기 위해 심어놓은 안배가 이렇게 쓰일 줄이야! 교에서 그토록 찾아 헤맨 존재가 수천의 엽주였을 거라고 상상이나 했겠나!”

진청은 얼굴은 기묘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그는 기꺼워하는 수령사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오면… 제 처우는….”

“걱정 말게! 수천을 접수하는 데 실패하고, 여기 있는 병력을 전부 잃어도 이년, 아니, 이분만 확보할 수 있다면 곱절의 공을 세우는 것이야! 원래 약속했던 것보다 훨씬 높은 지위와 재물이 주어질 걸세!”

진청은 그제야 만족한 듯 얼굴을 폈다.

둘의 대화에서 상황을 짐작한 수천의 인물들이 노기를 드러냈지만, 어찌할 방법이 없었다.

진청의 검은 여전히 옥예린의 목에 닿아 있었으니까.

“철수하지. 수인들이 시간을 끌어줄 것이야.”

수령사가 가까이 있는 수인의 목에 올라타며 말했다.

진청은 검을 흔들며 따라오지 말라는 동작을 취했고, 수령사와 함께 전장을 이탈하여 달리기 시작했다.

“별비야! 쫓아가!”

겨우 몸을 일으킨 마른 비가 외쳤다.

지금 수인의 벽을 뛰어넘어 저들을 쫓을 수 있는 자는 한정돼 있었고, 누가 가든 별비보다 나을 순 없었다.

우선 별비를 보내고, 기력을 회복한 후 따라가면 된다.

앞뒤 상황은 알 수 없지만, 마른 비는 옥예린이 납치되는 걸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크헝!”

별비가 땅을 박차며 날아오르고, 모두의 시선이 수령사와 진청에게 몰렸을 때였다.

푸욱―.

기력을 소진한 채 홀로 짐승들 사이에 서 있던 마른 비.

소리 없이 다가온 검이 그의 심장을 찔렀다.

새카만 복면 위, 희열로 번들거리는 눈이 웃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