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2화
“큭…!”
마른 비는 복부를 비집고 나온 검날을 움켜쥐었다.
불에 덴 듯 화끈한 작열감이 온몸으로 번진다.
날카로운 쇠붙이가 연약한 장기를 후벼 파는 감각.
전신이 차갑게 식을 만큼 차디찬 통증이 뒤를 이었다.
“심장을 노렸는데 복부라니? 힘도 다 빠진 놈이 이걸 피해? 큭큭, 역시 내가 제대로 봤어. 넌 최고로 맛있는 놈이다.”
복면 부위가 불룩하게 솟더니 좌에서 우로 이동했다.
아마 혀로 입술을 핥는 것이리라.
뱀을 떠올리게 만드는 차가운 눈.
주원장의 처소를 나와서 만났던 놈이었다.
“난 한번 찍은 사냥감은 놓치지 않아. 복귀해야 할 시점이 다가와서 초조했는데, 별 희한한 같은 것들이 기회를 만들어주는군. 킥킥, 어때? 사냥당하는 소감이?”
자신의 정체를 숨길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마른 비를 잡았다고 확신한 것이리라.
광기로 번들거리는 눈이 곡선을 그렸다.
“하아아~! 인내 끝에 찾아오는 이 열락이란…! 자, 발버둥 쳐라. 좌절과 절망에 찬 표정으로 날 더 즐겁게….”
키득거리던 표금산의 웃음이 뚝 그쳤다.
고개를 돌린 마른 비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푸른 화염을 담은 눈빛.
그건 삶을 포기한 자의 눈이 아니었다.
“……불쾌하군. 기분이 더러워. 그건 내가 원하는 표정이 아니란 말이다!”
표금산은 힘을 주어 검을 비틀었다.
내부 장기가 찢기는 감촉이 손에 전해졌다.
소스라칠 고통이 헛된 희망을 날려버리리라.
하지만 마른 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
꽉 깨문 어금니와 이글거리는 눈.
분명 사냥꾼은 자신일 텐데, 맹수에게 목덜미를 물린 듯한 착각이 든다.
도리어 검을 꽂아 넣은 표금산의 눈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 이놈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다.
이놈은 숨이 끊어질 때까지 포기하지 않는다.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사람을 죽였지만, 표금산은 마른 비 같은 인간을 본 적이 없었다.
‘당장 죽여야 한다!’
이유는 알 수 없다.
그저 시간을 끌면 안 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 뿐이다.
지금 당장 죽이지 않으면 거꾸로 먹혀버리고 말 거라는 두려움.
표금산은 마른 비의 복부를 갈라버리기 위해 검을 그었다.
아니, 그으려고 했다.
꽈아악―.
‘안 움직여?!’
탈진한 상태에서 검이 배를 관통했다.
고통을 주기 위해 검을 비튼 바람에 내부 장기가 상했을 터다.
한데 아직도 이런 힘이 남아 있다고?
당황한 표금산이 검에 힘을 더하려는 찰나, 마른 비가 움직였다.
뻐어억―!
뒤로 젖힌 후두부가 표금산의 얼굴을 강타했다.
쩌엉!
등 뒤로 내리친 손날이 검을 분질렀다.
챙강!
앞으로 삐져나온 검날을 힘주어 부러뜨린 마른 비가 이를 악물며 반전했다.
“컥…!”
세 개의 동작은 미리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단숨에 이루어졌고, 그제야 표금산의 비명이 터져 나왔다.
슈우욱―
기술을 쓸 힘도, 시간도 없다.
마른 비는 등을 돌리며 오른손에 든 검 조각을 그대로 찔렀다.
“헛…! 까불지 마라!”
불의의 일격을 당했지만, 이 상황에서 진다면 사람이 아니다.
부러진 검 조각으로 타격을 줄 수 있는 거리는 뻔하며, 이게 놈의 마지막 발악일 거다.
표금산이 보법을 펼쳐 거리를 벌리려는 순간이었다.
우드드득.
“크, 크아악!”
어마어마한 통증이 표금산의 입을 강제로 열었다.
발가락.
마른 비는 최후의 힘을 검을 든 오른손이 아니라 왼발에 집중했다.
그리고 후퇴하려는 표금산의 오른발을 짓밟았다.
약식 진각이나 다름없는 발 구름.
표금산의 오른쪽 발가락이 형체도 없이 으스러졌다.
“카아아아!”
과연 마른 비를 죽이겠다 호언장담할 정도로 표금산은 만만한 인간이 아니었다.
그는 날아가려는 정신을 붙잡으며 토막 난 검을 휘둘렀고, 마른 비의 왼쪽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푸우욱.
마른 비의 공격도 적중했다.
오른손에 든 검편을 표금산의 배에 찔러 넣은 것이다.
둘은 비틀대며 물러섰고, 동시에 털썩 주저앉았다.
“후욱, 후욱….”
기적 같은 반격에 성공했지만, 최후의 힘을 짜낸 마른 비의 눈은 급격히 꺼져가고 있었다.
무엇보다 상처가 너무 심각했다.
반면 의기양양한 사냥꾼에서 동등한 위치로 굴러떨어진 표금산은 자존심에 깊은 상처를 입고 포효했다.
“이 새끼… 감히, 가암히! 죽인다! 반드시 죽여 버린다!”
표금산은 배를 움켜쥐고 일어섰다.
둘 다 복부에 꽂힌 검 조각은 뽑지 않았다.
그걸 뽑는 순간 출혈을 감당할 수 없다는 걸 아는 것이다.
비척대며 일어선 표금산이 벌게진 눈으로 마른 비를 노려볼 때였다.
“커허허허헝!”
골짜기 저편에서 굉음이 울렸다.
수령사를 쫓아갔던 별비의 포효가 틀림없었다.
그건 적을 짓누르기 위한 위압도, 옥예린을 되찾았다는 낭보도 아니었다.
초조함과 불안함이 담긴 울음.
그리고 점점 가까워지는 걸로 보아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게 분명했다.
“큭…! 설마?!”
가장 먼저 별비의 의도를 눈치챈 건 표금산이었다.
솜털까지 곤두세우는 무지막지한 살기.
백호는 분명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살기는 일절 새어나가지 않았는데, 어떻게…?!”
지금 그런 걸 고민할 때가 아니다.
당장 결정을 내려야 했다.
눈앞에 있는 마른 비를 죽일지, 살기 위해 몸을 뺄지를.
“……덤벼.”
결정을 부추긴 건 마른 비였다.
가물가물한 눈.
엎드리다시피 한 자세.
그는 다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표금산을 도발했다.
‘뭐 이런 놈이….’
믿기지 않는 일이지만, 표금산은 반송장이나 다름없는 마른 비를 쉽게 죽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빌어먹을! 씨바아아알!”
울화를 토해낸 표금산이 등을 돌렸다.
그리고 기가 질린 눈으로 마른 비를 일별한 후 몸을 날렸다.
“커허엉…!”
표금산이 사라지자마자, 난장판이나 다름없는 전장의 끝자락에 별비가 당도했다.
수천 엽사들의 의문에 찬 눈을 뒤로한 채, 별비는 수인과 짐승들이 엉켜 있는 전장 위로 날아올랐다.
“별비?! 왜 돌아온 거야?”
엽사들 틈에서 쉬고 있던 여규가 물었지만, 별비는 눈길도 주지 않았다.
전장을 역주행한 녀석은 마른 비가 있는 곳에 내리꽂혔다.
꽈아아앙―!
무질서하게 흩어져 있던 짐승들이 튕겨 나갔지만, 별비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녀석은 충격을 받은 듯 부들부들 떨더니, 죽은 듯이 엎어져 있는 마른 비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혀로 핥아도, 말을 걸어도 그는 대꾸하지 않았다.
“크와아아앙!”
점점 멀어지는 더러운 기운.
눈이 뒤집힌 별비가 날아오르려는 순간이었다.
“……별비야….”
“카항?!”
살아 있었나!
별비는 우뚝 멈췄고, 마른 비를 살폈다.
꺼질 듯 말 듯 엄엄한 기색.
안절부절못하던 별비는 마른 비의 얼굴 앞에서 주둥이를 벌렸다.
오래전, 독림에서 중독된 마른 비에게 자연기를 불어넣었던 그때처럼.
유형화된 푸른 기운이 흘러나와 마른 비에게 전해졌다.
허나 독기만 몰아내면 됐던 그때와 달리 지금은 상처가 너무도 위중했다.
별비는 기운을 전하자마자 마른 비를 물어 올렸고, 두리번거리다가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피투성이가 된 마른 비를 보고 기겁하는 여규와 철중구.
옥예린을 구하기 위한 추격대를 구성하는 수천의 엽사들.
거의 정리되어 가는 전장.
그 모든 것을 뒤로한 채로.
* * *
파사사삭―!
다급하게 숲을 헤치는 소리.
직접 사냥한 게 분명한 짐승의 가죽을 걸친 소녀였다.
열다섯? 아니, 열여섯 살쯤 되었을까?
나이를 감안하면 상당한 속도지만, 아직 무르익지 않았다.
발이 땅을 딛는 위치와 몸의 균형만 개선하면 훨씬 더 빨라지리라.
소녀는 정신없이 달리면서도 연신 뒤를 힐끗거렸는데, 무언가에 쫓기고 있는 듯했다.
“커어어엉!”
추격자의 정체는 거대한 늑대였다.
표범만 한 덩치를 지닌 녀석은 놀랍게도 나무에서 나무를 타고 이동했고, 소녀의 등을 노리며 내리꽂혔다.
절체절명의 순간, 소녀가 반격에 나섰다.
“얍!”
땅을 짚은 손.
곧게 뻗은 다리가 하늘을 향해 치솟는다.
하늘을 거니는 비조를 거꾸러뜨리기 위해 고안된 발차기.
비격 날짐승 떨구기가 늑대의 턱에 적중했다.
“커헝…!”
역시 아직은 미숙하다.
공격은 깔끔하게 들어갔지만, 결정적인 힘이 부족했다.
늑대는 고개가 밀려 올라간 상황에서도 눈을 아래로 번뜩였고, 앞발을 휘둘렀다.
“아악…!”
소녀는 발톱에 어깨를 긁혔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와족의 후예.
타고난 전투본능은 지금 후퇴해선 안 된다고 외쳤고, 소녀는 그 경고에 충실히 응답했다.
후우웅―
바위곰 주력 기예, 산 허물기.
가녀린 어깨가 전진하며 막 착지에 성공한 늑대의 몸통을 들이받았다.
뻐어어억―!
‘안 돼! 약해…!’
남자들처럼 뻥뻥 날려버릴 수 있으면 좋으련만.
소녀보다 세 배는 큰 늑대는 땅을 긁으며 밀려나는 게 전부였다.
야생의 살기를 담은 눈동자가 재차 이어질 공격을 예고했다.
『힘으로 맞서면 안 돼. 기동력을 살려서 측면으로 돌아. 예리한 일격을 급소에 꽂아 넣는 거야.』
‘언령?!’
이런 깊은 산중에서 언령이라니?
와족의 어른인가?
그럼 왜 모습을 보이지 않지?
눈빛이 흔들렸던 소녀는 금세 깨달았다.
지금이 성년식 중이라는 걸.
모든 건 스스로 해결해야 한다는 것을.
“크아아앙!”
검은 기운에 휩싸인 늑대가 시뻘건 눈을 희번덕댔다.
아가리를 벌리고 달려드는 야수는 평범한 짐승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빨랐다.
스르륵―
부드럽게 흐르는 구름 걷기가 늑대의 공격을 흘렸다.
우측으로 휘돈 몸체.
소녀의 자세가 낮아졌다.
“야압―!”
언령은 예격을 말했다.
그렇다면 이거다.
좁게 모은 손끝, 올빼미 사냥이 늑대의 목젖을 낚아챘다.
“커헝…!”
목을 관통당하고 목젖까지 뜯긴 늑대가 달려들던 방향 그대로 엎어졌다.
늑대는 일어나려고 꿈틀댔지만 실패했고, 결국 축 늘어져서 숨이 끊어졌다.
“헉, 허억…!”
위기를 극복한 소녀가 숨을 가쁘게 몰아쉬었다.
하지만 얼굴에 기쁨이 떠오른 것도 잠시, 그녀는 숲을 헤치고 나타난 십여 마리의 늑대 앞에서 얼어붙어 버렸다.
“크르르릉….”
‘이건 못 이겨. 죽는다…!’
소녀의 얼굴에 절망이 깃들 때, 어깨에 손 하나가 얹어졌다.
“잘했어.”
곧게 뻗은 콧대와 총기가 깃든 눈.
붉은빛의 탐스런 입술을 지닌 여인이었다.
피부는 햇볕에 그을렸지만, 소녀에게는 그녀의 얼굴이 눈부시기만 했다.
“노을 언니!”
어느덧 완연한 여인이 된 저녁노을이었다.
그녀는 대견하다는 듯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앞으로 나섰다.
“언니가 아니다. 족장님이라고 부르도록.”
훤칠한 키에 탄탄한 어깨를 지닌 사내였다.
날카로운 눈빛의 사내는 소녀를 지나쳐 노을의 뒤에 섰다.
얼굴을 확인한 소녀가 인상을 찌푸렸다.
“어스름 아저씨?”
새벽 어스름은 뒤를 힐끗 보더니 마찬가지로 인상을 구기며 말했다.
“반응이 왜 그래? 족장님을 보고선 환하게 웃더니?”
소녀는 입을 삐죽대며 대꾸했다.
“아저씬 병맛이니까요.”
병맛?
별로라는 뜻인가?
요즘 애들이 쓰는 말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것투성이이다.
점창파와 교류를 시작한 뒤로 더 그렇다.
어스름은 이번 사태가 진정되고 나면 언어의 사용에 있어 주의를 주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성년식 중인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올해로 열여섯이 된 ‘초록 잎’의 의문은 타당했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 어스름이 늑대들을 훑으며 말했다.
“비상사태거든. 난데없이 운남 전역에서 악수들이 쏟아져 나와 사람들을 해치고 있다. 현역에서 물러나 쉬고 계시던 전대 족장님까지 팔을 걷고 나섰어. 사태가 꽤 심각하다.”
초록은 예쁜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전대 족장님께서요? 그럼 엄청 심각한 거 아니에요?”
어스름은 직접 경험하지 않았냐는 얼굴로 늑대들을 턱짓했다.
“이놈들… 원래라면 네 실력으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놈들이다. 방금 쓰러진 놈은 우두머리니 논외로 치더라도 하나하나가 월등히 강해졌어. 보이니? 저 검은 기운.”
“검은 기운…?”
어스름은 눈살을 좁히며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래. 이것들… 죄다 기를 운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