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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73화 (273/463)

273화

“그러고 보니…!”

초록은 눈을 가늘게 뜨고 늑대들을 살폈다.

기감을 끌어 올리니 검고 축축하며 불쾌한 기운이 늑대들을 감싸고 있는 게 느껴졌다.

또한 그 기운은 무척이나 불길했다.

“저게 뭐죠?”

자연기는 절대로 아니다.

음습하고 비틀린 원한 덩어리가 짐승들에게 엉겨 붙은 느낌.

척 봐도 자연기와는 상극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늑대들의 눈이 충혈된 것처럼 붉은 것도, 기이할 정도의 공격성을 드러내는 것도, 굉장한 힘과 속도를 발휘하는 것도 저것과 관련이 있는 듯했다.

“알 수 없어. 다만 지금 일어나는 일들이 저것 때문이라는 건 확실해 보이는구나.”

이번에 초록의 물음에 대꾸한 건 노을이었다.

그녀의 표정에선 숨길 수 없는 근심이 묻어났다.

“몇 년 전, 괴후의 예처럼 악수들이 출현하는 건 가끔 있는 일이야. 하지만 이렇게 동시다발적으로 출몰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 각성하지 않은 짐승들이 갑자기 기를 다루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이고.”

듣고 있던 어스름이 설명을 덧붙였다.

“저 검은 기운에 잠식된 놈들은 굉장한 공격성을 드러내는데, 인간을 집요하게 노리는 것 같다. 확실하게 숨통을 끊지 않으면 금세 회복해서 달려들곤 하지. 회의를 거듭한 끝에 이건 성년식 중인 아이들이 감당할 수 없는 사태라고 결론지었다.”

안 그래도 강한 운남의 야수들이 기를 활용하게 되니 보통 골치 아픈 게 아니었다.

영역을 넘어 소수부족의 마을을 습격하는 통에 전투가 가능한 와족의 전사들이 전부 동원되었고, 운남 각지로 파견되었다.

마른 비와 노을이 복귀한 해에 새로이 성년식을 떠난 아이들 중에서도 피해자가 속출하자, 와족은 특단의 결단을 내렸다.

‘수백 년간 한 번도 중단된 적 없었던 성년식이 연달아 두 번씩이나….’

점창과의 전쟁 때문에 중단된 것과 이번 사태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인재(人災)와 자연재해의 차이라고나 할까.

운남 전역이 맹수들 때문에 난리를 겪는 상황.

노을은 야수 제어에 짓눌리고도 도망치지 않는 늑대들을 보며 혀를 찼다.

“죽일 수밖에 없겠어. 칼바람.”

“삐이이익―!”

새하얀 깃털의 거조가 내리꽂혔다.

노을은 결과를 보지도 않고 등을 돌렸다.

“다음 지점으로 이동해요. 아이들이 더 목숨을 잃기 전에 서두르죠.”

대리고성의 동문.

관의 다급한 지원 요청을 받고 창산에서 내려온 조광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무슨 난리란 말이냐…!”

대리의 동쪽 관도는 운남 최대의 도시인 곤명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곤명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 사천에 진입할 수 있다.

그 말은 이 길이 운남을 찾은 외지인들이 대리에 들기 위해 이용하는 주행로(主行路)라는 뜻이었다.

토착민들도 애용하는 동쪽 관도는 오 년 전, 마른 비가 설검대에게 쫓기며 가로질렀던 평야 위에 나 있었다.

“푸륵, 푸르륵! 머어어어―!”

바로 그 관도를 우람한 덩치의 들소 떼가 휩쓸고 있었다.

눈이 벌게진 소들은 눈앞에 있는 인간을 닥치는 대로 들이받았다.

“호검대! 전원 평야로 나가라! 방진을 짜고 짐승들을 저지해!”

대리로 들어오기 위해 관도를 걷던 사람들이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입는 상황.

호검대주 조광은 성벽 위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외쳤다.

스파팟―

검을 뽑아든 점창의 정예들이 화살처럼 튀어 나갔다.

팔십 명의 검사들은 이 열로 넓게 늘어섰고, 산사태처럼 밀려오는 들소 떼와 정면충돌했다.

쐐액― 쾌애액― 스팟!

한 명도 다치지 않았다.

뿔을 치켜든 소 떼가 파도라면, 호검대는 방파제였다.

거센 물결을 잠재우는 방파제처럼 호검대는 백오십 마리가 넘는 들소들을 모조리 베어 버렸다.

소들의 몸에선 검은 기운이 스멀거렸지만, 제대로 된 무인들 앞에선 하루살이에 불과할 뿐이었다.

콰앙! 두두두두―

허나 하루살이라도 그 숫자가 상식을 초월하면 기가 질리는 법이다.

숲의 끝자락이 무너져 내리고, 방금 것은 맛보기에 불과했다는 듯 새카만 후속타가 밀려왔다.

지평선을 뒤덮고 달려오는 들소 떼는 팔십의 숫자로 어찌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후, 후퇴하라! 사람들을 옆구리에 껴! 성안으로 대피한다!”

조광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치자, 호검대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걸음이 느린 일반인들을 한두 명씩 옆구리에 끼고 대리고성으로 피신했다.

끼이이익― 쿵!

마지막 한 명이 진입하자 성문이 굳게 닫혔다.

허나 들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성벽과 성문으로 돌진했다.

쿠쿠쿵! 쿠쿵―! 꽈광!

“이, 이게 대체…….”

성벽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조광은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최소 수백 마리는 되지 않을까?

소들은 머리가 깨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성벽을 들이받았다.

왜 이런 이상한 일이 벌어지는 거지?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조광이 이마를 짚으며 골머리를 앓을 때, 성벽을 수비하는 병사가 입을 벌렸다.

“어… 어?”

단지 느낌일 뿐인가?

발밑에서 전해지는 진동이 점점 커진다.

대포의 직격에도 버텨낼 성벽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런…….”

이 정도로 성벽이 무너질 리는 없다.

허나 이대로 놔둔다면 상당히 파손될 거란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아마 마지막 한 마리가 쓰러질 때까지 성문과 성벽을 들이받으리라.

조광은 침중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붉은색. 효시를 올려라. 전령은 지금 즉시 달려가서 대장로님께 내 말을 전해. 봉검대와 운검대의 파견을 요청한다고. 그들이 오는 대로… 이것들을 전부 베어 버린다.”

병사들의 웅성거림만큼이나 조광의 심정도 복잡하기만 했다.

“쿠워어어어!”

대리에 인접한 호수, 이해.

분노에 찬 울음은 이해 부근 늪지대의 악몽이라는 거악의 포효였다.

수년간 늪지대의 제왕으로 군림해 온 악어는 동족들을 입에 물고 있었다.

으지직―!

턱에 힘을 줄 때마다 서너 마리의 악어들이 산산조각 났다.

그의 몸통엔 수십 마리의 악어들이 개미떼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크와아악!”

과연 각성한 맹수의 힘은 압도적이었다.

거악은 몸통에 자연기를 둘러쳐서 자신을 물어뜯는 동족의 이빨을 차단했다.

녀석은 서두르지 않았고, 주제도 모르고 미쳐 날뛰는 것들을 착실하게 죽여 나갔다.

으직―!

그때,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자연기를 다루지 못하는 것들은 몇 마리가 달려들어도 상대가 안 되어야 정상이다.

한데 이 통증은 뭐란 말인가.

거악은 고개를 돌렸고, 외피에 이빨을 박아 넣은 녀석을 발견했다.

콰직! 으득!

한 놈만이 아니었다.

검은 기운에 휩싸인 악어들 중 외피를 뚫는 것들이 늘어났고, 거악은 위기를 느꼈다.

“쿠워어어―!”

녀석은 거칠게 몸을 흔들어서 악어들을 털어낸 후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속도로 사냥을 시작했다.

콰직, 우득― 우지직―!

수십 마리의 악어가 사체로 변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쿠우―, 후우욱―.”

동족을 몰살시킨 거악이 거친 숨을 몰아쉴 때였다.

촤아아악―!

늪의 물살을 가르며 튀어나온 무언가.

습격자는 입을 쩍 벌렸고, 방심한 거악의 몸통을 물었다.

콰지직!

“쿠워어억…!”

단번에 뚫린 외피.

거악이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녀석의 몸통을 문 건 코뿔소만 한 크기의 하마였다.

“……?!”

거악의 눈동자에 떠오른 건 불가해(不可解)였다.

본디 하마란 악어의 천적이다.

허나 각성한 자신에겐 상대가 될 수 없었고, 오래전 몰살에 가까운 피해를 입은 후 저 멀리 늪의 외곽에서 겨우 연명하고 있을 터였다.

한데 여기까지 쳐들어와?

그리고 이 힘은 뭐란 말이냐?

의문은 길지만, 행동은 즉각적이었다.

거악은 고통을 참으며 몸을 꺾었고, 자연기를 집중한 턱을 놀렸다.

콰지지직―!

하마는 크게 베어 문 사과처럼 몸통이 잘렸고, 즉사했다.

“크우우우….”

거악은 고통에 신음했지만, 상처를 돌볼 여유도 없었다.

어느새 다가와 사방을 에워싼 적들.

늪의 수면 위로 눈이 붉게 물든 하마 떼가 득시글거리는 걸 본 순간, 거악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카오오오―!”

거수들의 싸움에 지진이 난 것처럼 늪이 요동쳤다.

“이, 이게…….”

충격에 휩싸인 너른 하늘은 발을 떼지 못했다.

드넓은 늪지대를 메운 짐승의 사체들.

수달, 물뱀, 악어거북, 물소 등 수많은 동물이 죽은 채 둥둥 떠 있었다.

운남의 무더운 기후 탓에 벌써 악취를 풍기기 시작했지만, 부패 정도로 보아 죽은 지는 얼마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상흔으로 볼 때 짐승들은 하나의 개체에게 몰살당했다.

“거악 이놈….”

물소를 한입에 으스러뜨릴 수 있는 건 그놈밖에 없다.

제 식욕을 채울 정도만 사냥하며 조용히 지내던 녀석이 왜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인가.

너른 하늘은 깃털 날리기를 발동했고, 물 위에 뜬 사체들을 밟으며 늪의 중앙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보고야 말았다.

몸통이 갈기갈기 찢긴 채 죽은 거악의 사체를.

“이럴 수가…! 어떤 놈이 나타났길래 거악이….”

너른 하늘은 당연히 새롭게 출현한 각성수(覺醒獸)가 거악을 죽였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걸 금세 깨달았다.

거악을 중심으로 둥둥 떠다니는 짐승들.

수백에 육박하는 악어와 하마의 사체에서 거악의 공격흔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설마 이놈… 이 많은 숫자와 홀로 싸우다가…!”

이해에 오기 전까진 상상할 수도 없었던 일이다.

그리고 이건 와족의 예상을 한참이나 웃도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의미했다.

“짐승들이… 인간만 공격하는 게 아니었나?”

너른 하늘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뿌오오오―!”

전상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랑스러운 상아(象牙)만큼이나 아끼고 사랑하는 식구들.

평온한 오수를 즐기던 그들이 갑자기 미쳐 날뛰고 있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식구들의 공격 대상은 자신이었다.

“빠오오!”

왜 이러는 거냐! 정신 차려!

콰콰쾅―!

전상은 앞발을 굴러서 지진이나 다름없는 진동을 일으켰다.

땅이 요동치고, 중심을 잃은 코끼리들이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녀석들은 벌떡 일어나서 전상에게 돌진해왔다.

쿠우웅―!

“빠우…?!”

음…?! 이 힘은 뭐지?

이들이 언제 이렇게 강해졌단 말이냐!

식구들의 몸에서 스멀대는 검은 기운.

전상은 비정상적인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손쓸 방법이 없었다.

인간과의 전쟁 이후, 단련을 거듭한 자신은 엄청나게 강해졌다.

식구들의 힘이 상승했지만, 섣불리 건드렸다간 즉사하고 말 것이다.

동족을 끔찍하게 아끼는 전상은 도저히 공격할 수 없었다.

두두두두―!

무언가가 다가오는 소리.

전상은 고개를 돌렸고, 육중한 물체 두 개가 코끼리 무리에 부딪치는 걸 볼 수 있었다.

“으아아아!”

“뿌오오―!”

곰이라고 해도 믿을 인간, 우둔한 땅.

전상에 버금가는 덩치를 지닌 전대 우두머리, 긴 코.

둘은 달려오던 그대로 코끼리 무리를 들이받았고, 둘의 거력을 버티지 못한 짐승들이 우르르 나가 떨어졌다.

“전상, 나랑 간다!”

본격적으로 전투에 돌입하지 않은 우둔한 땅의 말투는 여전히 뚝뚝 끊겼다.

그는 어눌한 말로 전상을 설득했다.

“이러는 이유, 모른다! 너, 식구 공격 못 한다! 그러니까 일단, 간다! 그리고 이유, 찾는다!”

더듬거리지만 뜻을 이해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전상은 수긍했고, 힘차게 울음을 토했다.

“뿌오오오, 뿌오!”

기다려라! 반드시 너희를 원래대로 돌릴 방법을 찾아올 테니!

‘정신이 남아 있는’ 자들은 나를 따르라!

“응?”

뭐라고? 정신이 남아 있는?

우둔한 땅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전상의 뒤쪽.

야생곡 한편엔 눈빛이 붉어지지도, 공격을 받지도 않은 코끼리 무리가 있었다.

‘멀쩡해?! 각성한 것도 아닌데 어떻게….’

“바오오오~!”

하나부터 열까지 이해할 수 없는 일투성이였다.

전상의 명령이 떨어지자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 코끼리들이 지축을 울리며 따라붙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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