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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74화 (274/463)

274화

“……뭐냐? 다 죽인 거냐?”

돌산이 숲처럼 펼쳐진 특이한 지형.

천하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절경이 새빨간 피로 물들어 있었다.

처참히 찢긴 늑대들의 사체 한복판에서, 매서운 눈은 미간을 찌푸렸다.

“크르릉….”

그래… 정신이 나가서 덤비는 놈들은 모조리 죽였다.

전상처럼 무리를 이루어 살아가고, 똑같이 식구에게 공격받았지만, 붉은 발톱의 대응은 전혀 달랐다.

녀석은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낸 동족을 적으로 규정했고, 가차 없이 물어 죽였다.

그건 약육강식의 철칙에 충실한 육식 동물과 풀을 뜯는 초식의 차이일 터였다.

“무서운 놈. 얄짤없구만.”

늑대들의 피로 시뻘겋게 물든 석림.

매서운 눈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붉은 발톱에 비해 상대적으로 온화한 흑랑도 단호한 건 마찬가지였다.

흑랑의 주둥이는 동족의 피로 흥건했고, 녀석은 그 피를 혀로 핥았다.

‘저건 이놈이랑 똑같네.’

아무리 이야기해도 고쳐지지 않는 습관.

매서운 눈은 후손들의 결단이 당연하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외톨이를 돌아봤다.

전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던 붉은 발톱과 흑랑이 외톨이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석림에 있을 적에도 무리에서 홀로 떨어져 지냈던 괴짜는 보는 둥 마는 둥이었다.

괜히 무안해진 매서운 눈이 외톨이를 발로 툭툭 쳤다.

“야야, 인사하잖아. 오랜만에 보는데 아는 척도 좀 하고 그래라.”

“크르르….”

자줏빛 늑대는 건드리지 말라는 듯 이빨을 드러냈다.

하여튼 희한한 놈이었다.

석림에 문제가 생기면 냅다 끼어들어서 도움을 주는 놈이 막상 동족들 앞에서는 쌀쌀맞게 군다.

이십 년 넘게 같이 지냈지만, 매서운 눈은 외톨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는 와족 식구들이 자신을 똑같은 시선으로 본다는 걸 알지 못했다.

“크흠, 그럼 이야기를 시작할까? 우리가 온 건 말이야….”

점창과의 공조를 위해 창산으로 향하다가 우연히 거악의 죽음을 목격한 너른 하늘과 달리, 우둔한 땅과 매서운 눈은 처음부터 전상과 붉은 발톱을 만나기 위해 청죽림을 나섰다.

붉은 발톱과 전상은 대망과 함께 각성한 야수들 중에서도 지능이 높은 편이었고, 이번 사태에 대해 아는 게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문제는 우둔한 땅이 전상과 한바탕 싸우고 친해진 반면, 매서운 눈은 붉은 발톱과의 친분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녀석은 고유의 이름을 지닌 만큼 매서운 눈보다 강했다.

매서운 눈은 외톨이가 중간에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이어주길 바랐으나, 사회성 떨어지고 눈치 없는 녀석은 뚱한 표정으로 먼 산만 바라보고 있었다.

‘저걸 그냥 콱…! 하여튼 이건 싸울 때 말고는 도움이 안 돼.’

그믐이 들었다면, ‘누가 할 소리를…. 똑같은 것들끼리 만난 게지.’하며 혀를 끌끌 찼으리라.

결국 매서운 눈은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는 이 순간까지도 별 기대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 발톱은 존재감에 걸맞은 뛰어난 통찰력을 보여주어 그를 놀라게 했다.

“크르르….”

이번 사태의 원인?

그걸 물으러 온 거냐?

의외군. 다른 인간이라면 몰라도 그대들은 눈치챘을 거라고 여겼는데.

“눈치를 채다니? 뭐를?”

정말 모르겠나?

검은 기운에 담긴 절규와 한(恨) 말이다.

“검은 기운에 담긴… 절규와 한?”

매서운 눈은 잠시 멍한 눈이 됐다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평생을 야생에서 살았고, 자연기를 다루어 온 그는 이해한 것이다.

붉은 발톱이 말하는 게 무엇인지를.

“크르릉.”

그래. 대기에 가득 찬, 불쾌하고 지독한 악취.

너희의 후각으론 맡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인간들의 도시에서 나는 냄새다.

맡지는 못해도 느낄 수는 있을 거다.

이건 엉망으로 훼손된 자연에서 전해지는 감각이 아니더냐.

잘리고 깎인 자연물들이 내지르는 비명과 고통…….

그 절규와 한이 대기에 스며들었다고 보는 게 옳을 거야.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기감을 끌어올리니 네가 말하는 게 느껴진다. 하지만 우린 그렇게 연결 짓지 못했어. 족장… 아니, 형님까지도.”

매서운 눈은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럼 뭐냐.

지금 이 현상이 인간 때문에 일어난 거라고?

그게 가능한 일인가?

“크르르….”

작은 벌레조차 고통을 느끼고, 밟으면 꿈틀한다.

기나긴 세월 동안 세상천지를 뒤집어놓고도 아무 반발이 없으리라 여겼다면 지독히도 안이한 거다.

만물의 영장이라 떠들면서 그걸 예측하지 못하다니…….

당연한 반응이 온 것이야.

오히려 늦은 감이 있지.

붉은 발톱은 자신이 물어 죽인 동족들을 둘러봤다.

태연한 척 하지만, 녀석의 눈빛에선 괴로움이 묻어났다.

“그르릉….”

물론 그게 전부는 아닐 수도 있다.

그건 그저 시발점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허나 이 사태를 불러왔고, 앞으로 찾아올 혼란을 부추기는 게 인간이라는 건 틀림없다.

악기에 잠식된 짐승들이 집요하게 인간을 노리는 걸 보면 아귀가 맞아.

너희는 이제부터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다.

각성한 영수가 바라보는 세계와 인간이란 이러한가.

매서운 눈으로서는 생각지도 못한, 충격적인 접근이었다.

안타까운 건 그 말을 부정할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르르릉….”

잠자코 있던 외톨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너희는 왜 공격받은 거냐.

그리고 석림의 늑대들 중 절반 이상은 제정신을 유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인가.

붉은 발톱은 정중한 태도로 질문에 답했다.

〔선조시여. 느끼고 계실 겁니다. 대기에 함유된 검은 기운은 우리가 다루는 대자연의 기운과 상극이란 것을. 곪고 비틀린 악기(惡氣)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정화시킬 수 있는 정기를 적대하는 것이겠지요.〕

정신을 잃은 짐승들이 각성수를 공격한 이유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대자연의 점지를 받은 영수는 정파의 선각자들조차 밝혀내지 못했던 비밀을 깨닫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짐승이 미쳐 날뛰는 건 아닙니다. 지능이 발현됐거나, 동족에 대한 우애가 깊거나, 대자연의 기운에 눈뜬 녀석들은 악기에 대한 저항력이 있더군요.〕

‘인간으로 치면… 상, 중, 하단전이 발달했다고 보면 되는 건가.’

악기에 휘둘리는 짐승이 있는 데 반해, 멀쩡한 짐승이 존재하는 이유였다.

또한 대부분의 인간이 온전한 이유이기도 했다.

매서운 눈은 별 기대를 하지 않았던 방문에서 엄청난 수확을 거뒀다는 걸 깨달았다.

“고맙다. 정말 큰 도움이 되었어. 그러면 혹시 해결할 방법도 있을까?”

붉은 발톱은 기대에 찬 눈을 가만히 바라봤다.

그리고 작게 고개를 저었다.

“크릉.”

그런 게 있을 리가.

그저 인내하고, 스스로를 지키며 살아남을 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방법이… 없다고?”

절망적인 말이었다.

그럼 인간을 공격하는 짐승들이 씨가 마를 때까지 전부 죽여야 하나?

호흡하는 것만으로도 역한 기운을 계속 들이마시면서?

천만다행인 건 그렇지는 않다는 점이었다.

붉은 발톱은 심각해진 매서운 눈에게 말했다.

해와 달이 자리를 바꾸고, 대기가 순환하는 것처럼 이 기운 역시 언젠가는 사그라들 것이다.

대자연은 그 놀라운 치유력으로 빠른 시일 안에 자신의 상처를 아물게 하겠지.

허나 기억하라.

곪아버린 상처에서 흘러나온 진물.

대자연의 피와 고름에 닿은 것들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것을.

장담컨대 그 독기에 가장 큰 피해를 입는 건 너희 인간들이 될 것이다.

예언에 가까운 말이었다.

사태의 원인은 파악했지만, 석림을 나서는 매서운 눈은 침중함을 감출 수 없었다.

‘상상도 못 했던 일들이 일어나고 있구나. 상황이 이 지경인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거냐, 비아야.’

매서운 눈은 연고 하나 없는 타지에서 헤매고 있을 마른 비가 걱정됐다.

* * *

“참으로 신묘하구려.”

침상에 엎드린 공지량이 말했다.

화통달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뭐가 말이오?”

“일전에 팔을 자를 때, 노사의 비방 덕을 톡톡히 보았소. 그때는 잠들었다가 깨어나니 처치가 끝나 있더군. 아무런 통증을 느끼지 못했소이다.”

“그러라고 만든 마비산이오.”

당연한 거 아니냐는 말투였다.

화통달은 끊겼던 발목의 신경을 되살리기 위해 추가적인 처치를 행하고 있었다.

“그때는 탕약을 마시고 기절했는데, 지금은 맨정신으로 깨어 있구려. 이런 것까지 가능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마취라고 하오. 통증이 동반되는 치료가 필요할 때, 얼마 동안 의식이나 감각을 잃게 하는 것이지. 그때는 워낙에 큰 수술이라 의식을 잃게 한 것이고, 지금은 발목만 건드리면 되니 부분적으로 감각만 마비시킨 것이오.”

“정말 대단하구려! 노사가 신의라 칭송받는 이유를 알 것 같소이다!”

고개를 돌린 공지량이 환한 얼굴로 감탄을 터뜨렸다.

과거에 저지른 악업 때문에 그를 계속 안 좋게 보는 것일까?

화통달은 그의 언행이 도통 진실 돼 보이지가 않았다.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묵묵히 치료에만 전념하는데도 공지량은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여쭙고 싶은 게 있소, 노사.”

“말씀하시오.”

“전에도 느꼈지만 이 마비산이라는 것, 내공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구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 거요?”

화통달은 별 게 다 궁금하다는 눈으로 공지량을 힐끗 봤다.

“무림인은 꼴도 보기 싫지만, 이런 수술이 필요한 건 무림인일 경우가 많지. 당장 응급 처치에 들어가야 하는데, 마취가 되지 않으면 얼마나 난감하겠소. 그래서 난 양금화에서 최대한 몸에 이로운 성분을 추출해 마비산을 만들었지.”

“허어…… 독성보다 약성이 월등히 강하다? 그래서 내공과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 것이구려!”

공지량은 진정으로 감탄했다는 표정이었다.

자신이 마비산의 효과를 톡톡히 보았으니 그럴 만도 했다.

그는 화통달을 한껏 추켜세우다가 피곤했는지 잠이 들었다.

몇 년간 침상 생활을 하며 극도로 쇠약해졌던 몸은 기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회복됐지만, 전쟁 전과 비교할 수는 없었다.

아니, 영영 그때의 기량을 되찾지는 못할 터였다.

그래서인지 공지량을 내려다보는 화통달의 얼굴에선 적개심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웬만해선 인간의 본성이 변치 않는다는 걸 잘 알았고, 한시도 경계를 풀지 않았다.

‘완전히 회복된다 해도 큰일을 꾸미기엔 무공이 받쳐주지 않는다.’

하루도 빠짐없이 공지량을 돌보며 면밀히 관찰한 결과였다.

각고의 노력을 다한다 해도 주력 검대 대주급의 무공 수위를 회복하는 게 한계이리라.

다리는 회복이 가능하지만, 한번 깨졌던 단전은 전과 같은 내공을 축적하는 게 불가능하니까.

전설상에서나 언급되는 영약을 구한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건 약초를 찾아 천하를 헤맨 자신도 구경조차 하지 못했다.

화통달은 공지량이 더 이상 허튼짓은 못할 거라는 심증을 굳혔다.

끼이익―

치료를 마친 노인은 잠든 공지량을 내버려둔 채 방을 나섰다.

그리고 숫자 백을 셀 법한 시간이 흘렀을 때.

“몽념.”

“예, 장문인.”

공지량의 목소리는 언제 잠들었냐는 듯 쌩쌩했다.

그의 부름에 새카만 흑의를 걸친 사내가 바닥에서 솟아났다.

“얼마나 모였나.”

“삼 할입니다. 운남을 떠난 자들, 현 점창의 체제에 적응한 자들, 전쟁에서 죽은 자들을 제했고, 장문인의 소집 명령을 거부한 놈들을 참했습니다. 그 뒤에 최종적으로 남은 숫자입니다.”

“삼 할이라… 나쁘지 않군.”

일을 도모하기에 차고도 넘치는 숫자였다.

전쟁을 겪고도 살아남은 응목대.

그들은 그야말로 정예 중의 정예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명령을 따랐다는 이유만으로 이토록 뛰어난 인력을 징계한 대장로들의 멍청함에, 공지량은 한숨을 쉬었다.

“멍청한 새끼들. 역시 점창은 내가 없으면 안 된다.”

공지량은 씨익 웃더니 품에서 쪽지를 꺼내 사내에게 건넸다.

“모든 인원을 이끌고 여기로 가라. 그리고 호르찰이 남긴 비밀창고를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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