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75화 (275/463)

275화

북벌

《앞날을 내다볼 능력을 지닌 선각자.

시대를 논할 안목이 있는 식자(識者).

지나간 시대를 정리하는 사가(史家).

무릇 시대의 변천과 흥망성쇠를 분석하는 관점이란 다양할 수밖에 없으며, 바라본 시점에 따라 상이한 결과가 나오기 마련이다.

허나 이론(異論)이 없을 만큼 확고한 역사적 사건도 존재한다.

정체된 시간을 흐르게 하고, 쇠락한 사회에 활기를 불어넣으며, 명징한 전환점을 제공한 사건.

백 년간 이어진 원(元)의 치세가 끝나고 명(明)이 들어선 것은 오혈(汚血)로 가득 찬 혈관에 신선한 피가 흐르기 시작한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기나긴 인내 끝에 강남을 넘은 주원장은 마침내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혔으니.

사사로운 감정은 제쳐두고, 나는 25만 대군이 북진을 시작할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중략)…….

정사(正史)는 그를 새로운 시대를 연 위대한 황제로 기억할지 모르나, 나는 다른 평가를 내리고자 한다.

천기의 어지러움이 극에 달한 때, 그의 북벌이 몰고 온 파장은 천하 각지에 심대한……. 허나 그 뒷수습은 전부……(중략).

……이는 결코 그의 변심과 잔인무도함에 의거한 악담이 아님을 밝히며, 천하 정세를 관측하는 자로서의 소견임을 강조하고 싶다.》

혼세록 정세 편

「주원장, 북벌」

삭월 월주 백강 저

뱃속에 펄펄 끓는 물을 들이부은 감각.

오장육부가 열상(熱傷)을 입은 것처럼 뜨겁다.

입이 쩍 벌어지는 통증이 가라앉았던 의식을 깨웠다.

“윽…!”

마른 비는 복부를 움켜쥔 채 눈을 떴다.

“……어떻게 된 거지?”

개인용 침상이 놓인 간이 천막.

출입구로 쓰는 차일(遮日) 사이로 햇살이 비치고, 맑은 공기가 콧속으로 스민다.

마른 비는 통증을 억누르며 깊이 숨을 들이켰다.

〔일어났냐?〕

뇌리로 직접 전해지는 의지다.

차일 너머로 새하얀 털이 보이는가 싶더니 푸른 눈 한 쌍이 안쪽을 들여다봤다.

천막이 좁은 통에 바깥에서 대기하던 별비였다.

“어떻게 된 거야?”

〔어떻게 되긴 뭘 어떻게 돼. 죽을 뻔했지.〕

막 깨어나서인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다.

마른 비는 별비의 말을 듣고서야 기절하기 전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맞아. 나, 칼에 맞았었지…….”

마른 비는 점차 선명해지는 기억을 되새기며 중얼댔다.

별비는 속이 터진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면박을 줬다.

〔맞다 뿐이냐? 아예 관통을 해서 칼이 건너편으로 삐져나왔었다. 심지어 널 찌른 그놈, 칼을 비틀기까지 했지? 검이 장기를 죄다 긁어놔서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별비는 치가 떨린다는 듯 몸을 부들댔다.

푸른 눈에 짙은 분노가 차올랐다.

〔기운은 숨겨도 내 코를 속일 순 없지. 분명 예전에 맡아본 냄새였어. 널 찌른 그 새끼, 주원장인지 뭔지 하는 인간의 진영에 있던 놈이지?〕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얼굴은 가렸지만, 그런 더러운 기운이 또 있을 리 없지. 제 입으로도 말했어. 아저씨를 보고 나올 때 마주쳤던 놈이 확실해.”

마른 비가 배에 감긴 붕대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탈진한 상태였다고 해도 네가 기습을 허용하다니. 강하냐, 그놈?〕

별비가 인간에 대해 먼저 묻는 건 정말 드문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여태껏 마른 비가 이토록 큰 부상을 입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른 비를 제압할 정도의 강자라면 뚜렷이 기억에 남을 텐데, 서달과 상우춘, 사영 정도를 제외하면 딱히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마른 비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정면으로 붙으면 안 질 거야. 규나 중구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강한 정도?”

〔그런데 그렇게 다쳤다고?〕

“처음 봤을 때부터 느꼈지만, 기회를 보다가 약점을 파고드는 데 익숙한 놈 같아. 칼을 맞을 때까지 다가오는 것도 몰랐어.”

〔살수. 뭐 그런 거냐?〕

“아냐. 사냥꾼이야. 인간을 사냥하는 데 특화된 사냥꾼.”

잠시 침묵이 흘렀다.

마른 비와 별비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이 빚은 반드시 갚아준다.’

다음에 마주치면 절대 놓치지 않으리라.

놈은 자신의 숨통을 끊지 못한 걸 땅을 치고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건 그렇고, 여긴 어디야? 누가 날 치료한 거지?”

마른 비는 끙, 하는 신음을 내며 침상에 걸터앉았다.

원래는 일어날 생각이었지만 그건 아직 무리였다.

차일 밖에서 웅크려 앉은 별비가 마른 비와 눈을 맞췄다.

〔어디겠냐. 저번에 왔던 그 의원이지. 여기가 아니면 널 살릴 수 없을 것 같더라.〕

별비는 기절한 마른 비를 입에 문 채 남쪽으로 달렸다.

운태산에 들어가기 전까지 백성들을 도우며 천천히 북상했던 탓에 실제 움직인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게 천운이었다.

그마저도 평범한 사람에겐 엄청난 거리지만, 전력으로 내달린 별비는 마른 비의 숨이 끊어지기 전에 화수연에게 닿을 수 있었다.

〔그 인간 암컷, 정말 대단하더군. 솔직히 널 잃는 줄 알았다. 출혈도 출혈이지만, 한눈에 봐도 내부 장기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거든. 이게 마지막인가 싶었는데, 끊어진 장기까지 이어놓더라. 제 아비와 둘이 달라붙어서 하루 동안 널 치료했다. 인간의 기술이란 정말이지 놀라워.〕

별비의 어조에선 숨길 수 없는 경탄이 묻어났다.

보지 않아도 별비가 얼마나 전전긍긍하며 마음을 졸였을지 짐작이 갔다.

“네가 또 날 살렸네. 걱정 돼서 계속 막사 밖을 지킨 거지? 고마워, 별비야.”

마른 비가 환히 웃자, 별비는 쑥쓰러운 듯 고개를 돌렸다.

〔커, 커흠. 고맙기는 개뿔. 벗겨먹을 놈이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별비는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배 안 고프냐? 규가 매 끼니마다 와서 허여멀건 물 같은 걸 네 입에 흘려 넣긴 했는데, 그런 걸 먹고 힘이 나겠냔 말이지.〕

“규? 아! 그러고 보니 규랑 중구는?!”

〔널 살리느라 버리고 왔는데, 용케 여기까지 찾아왔더군. 처음엔 울고불고 난리도 아니었어. 그러다가 네가 안정된 뒤로는 지들끼리 단련하고 있어. 심심한 모양이더군.〕

“단련? 나 꽤 오래 잤나 봐?”

고개를 갸웃거리던 별비가 대꾸했다.

〔글쎄……. 얼마나 됐더라? 해랑 달이 뜨고 진 게…… 한 삼십 번?〕

“뭐?!”

마른 비는 깜짝 놀라서 소리를 질렀다가 배를 움켜쥐고 끙끙댔다.

콰차차창! 쩌정! 쾅!

별비의 등에 업힌 마른 비는 백원 의원 밖으로 나갔다.

저 멀리서 굉장한 충돌음이 들렸다.

진검을 든 여규와 철중구가 싸우고 있었다.

“하앗!”

사일검의 찌르기가 쇄도하고,

“크아합!”

적사자도의 참격이 그어졌다.

여규와 철중구의 대련은 실전을 방불케 할 만큼 살벌했다.

“와, 진짜로 하네?”

마른 비는 별비의 등에서 눈을 반짝반짝 빛냈다.

속도와 정교함, 그리고 패력.

두 사람의 전투 방식은 완전히 달랐다.

그리고 별비의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누워 있는 한 달 동안 뻔질나게 싸운 모양이었다.

서로의 수는 물론이고 작은 습관까지 낱낱이 읽고 있었으니까.

그때, 철중구가 힘으로 여규의 자세를 무너뜨렸다.

“카하하! 이걸로 79전 40승 39패다, 자식아!”

붉은 도기가 직도참격의 기세로 쏟아졌다.

주춤했던 여규는 불균형한 자세 그대로 반격에 나섰고, 그의 검이 날카로운 예격을 뿜었다.

“누구 마음대로 끝이래?!”

키아아앙―!

검 끝이 도의 칼날 부분을 기가 막히게 찔렀다.

점이나 다름없는 면적을 정확히 노리는 검술은 그야말로 신기였다.

힘은 철중구가 위였지만, 여규는 힘이 제대로 담기기도 전에 도의 기세를 흩어버렸다.

하지만 일흔아홉 번의 싸움을 치른 철중구는 이런 상황을 예견했는지 곧바로 빙그르르 회전했다.

“이게 진짜다, 자식아! 회전~ 회오리…!”

“어? 비아야! 일어났어?”

“으엉? 비아가 깼다고?!”

정체 모를 기술을 쓰려던 철중구가 우뚝 멈췄다.

그의 고개가 마른 비쪽으로 돌아간 순간이었다.

빠아악―!

정확하게 턱에 꽂힌 발차기.

철중구의 몸이 기울어지며 눈이 급격히 흐려졌다.

“이… 런 더러운 새끼가….”

쿠웅!

“실전으로 하자며? 누가 멈추래? 40승은 내꺼다, 인마.”

여규가 땅에 엎어진 철중구를 보며 키득댔다.

“비아야!”

그는 실신한 철중구를 내버려둔 채 마른 비에게 달려왔다.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멍청하게 칼을 왜 맞아, 칼을! 자리 털고 일어나면 나랑 대련해! 다시는 칼 안 맞게 해줄 테니까!”

이제야 안심이 된 여규는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었다.

“마비산이라고 해.”

마른 비를 얼싸안고 훌쩍이던 여규가 말했다.

자신이 정말 한 달간 누워 있었냐는 마른 비의 질문에 대한 답이었다.

“마비산?”

“응. 널 한 달간 재운 약이야. 네 상태가 너무 심각했거든. 통증도 통증이지만, 잘못 움직였다가는 겨우 치료한 장기가 덧날 수 있다더라. 그래서 마비산이라는 걸 써서 널 강제로 재웠어.”

어쩐지 이상하다 했다.

아무리 치명상을 입었다고 해도 한 달을 내리 자는 게 말이 되는가.

적어도 경이적인 회복력을 지닌 마른 비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화통달 어르신이 제조한 비방이래. 이로운 성분을 썼다니까 몸에 해롭진 않을 거야. 신기하지? 내공과 부딪치지 않고 흡수되는 게. 엄청 비싼 거야. 수연이가 신경을 많이 썼어.”

탁기를 제거해서 자연기를 정심하게 만들어준 것만으로도 고마운데, 이제는 구명지은까지 입었다.

사람 사이의 인연이란 이처럼 예측할 수 없는 것이다.

어린 시절, 운남의 산속에서 시작된 화가와의 인연이 더욱 공고해지고 있었다.

마른 비는 고마움을 전하기 위해 화수연의 위치를 물었으나 여규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누워 있는 동안 떠났어. 오왕님의 진영으로.”

“아저씨한테? 거길 왜…… 아!”

화인걸은 주원장의 거듭된 요청과 외부 세력의 위협을 뿌리칠 방편으로 북벌에 참가하겠다는 의사를 내비쳤었다.

진작 떠날 채비를 갖췄으나 마른 비가 갑자기 들이닥치는 통에 짐을 풀었던 그들은 마른 비의 상세가 안정되자마자 남쪽으로 떠났다.

어쩐지 백원 의원의 규모가 확 줄었다 싶었는데, 주요 인사들이 주원장의 진영에 가담했기 때문이었다.

“천하에 이름을 날리는 세력들이 전부 강남으로 집결하고 있어. 운태산에 가기 전에 만났던 남궁세가 기억하지? 그들도 응천부에 들어갔더라. 다들 원이 무너지는 게 현실로 다가온다는 걸 깨달은 거겠지. 이런 추세라면 머지않아 북벌이 시작될 거야.”

북벌.

한족이라면 듣기만 해도 가슴이 뛰는 이야기였다.

백 년간 이어진 원의 치세가 정말로 끝날 것인가.

마른 비 일행이 강소성 북부에서 백성들을 돕는 사이, 천하의 이목은 강소성 남부에 쏠려 있었다.

마른 비가 누워 있는 동안, 여규는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 위해 나름대로 정보를 수집한 모양이었다.

“그리고 비아야. 엽주님의 상황…… 궁금하지?”

“아, 맞다! 어떻게 됐어? 별비가 날 쫓아오는 바람에…!”

옥예린을 납치한 진청과 수령사.

마른 비는 낭보를 기대했지만, 여규의 표정은 어두웠다.

“놓쳤어. 별비가 뒤를 쫓았다면 잡을 수도 있었겠지만, 그랬다면 네가 죽었겠지. 수천이 모든 힘을 투입해서 찾고는 있는데 백수교라는 자들, 만만치 않은가 봐.”

마른 비는 깊은 탄식을 흘렸다.

딱 봐도 제정신이 아닌 놈들인데, 그들의 손아귀에 붙잡혔으니 옥예린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내가 칼을 맞지 않았다면….”

무의미한 가정이었다.

그리고 옥예린의 납치는 절대로 마른 비의 탓이 될 수 없었다.

잘 알지만, 화가 나고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네가 깨어난 걸 마 엽장님께 알릴게. 널 무척이나 걱정하셨어. 지금은 그분이 실질적인 수장의 역할을 하고 계신다더라. 수천의 힘이 대단하니 찾을 수 있을 거야.”

꼭 그래야 했다.

마른 비는 큰 호감을 느꼈던 옥예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몸이 낫는다면 얼마든지 그녀를 찾는 데 힘을 보탤 용의가 있었다.

“아, 그리고 참.”

여규는 무언가가 생각났는지 손바닥을 마주쳤다.

표정으로 보아 이번에 들려줄 내용은 희소식인 모양이었다.

“악 대협, 기억하지? 오왕님의 서신을 받고 떠났던.”

“응. 당연하지. 그 아저씨를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여규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말했다.

“지금 산동성(山東省)이 난리야. 그분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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