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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76화 (276/463)

276화

“산동성? 거기가 어딘데?”

마른 비의 질문에 여규는 북쪽을 가리켰다.

“강소성의 경계만 넘으면 산동성이야. 우리가 있던 운태산에서 조금만 올라가면 돼.”

“그래? 별로 멀지는 않네? 아저씨가 거기서 뭘 하는데?”

여규는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카안에게 가는 진상품 마차를 털었어. 원 황실에 대놓고 선전 포고를 한 거지.”

일 년에 한 번, 각 성을 관할하는 총독들은 카안에게 진상품을 올린다.

진귀한 물품이 망라된 그것은 충성심을 측정하는 척도나 다름없었고, 총독들은 점점 과열되는 경쟁에 시달려야 했다.

더 귀한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수십 대의 마차 중 한 대만 빼돌려도 작은 도시 하나가 한 달간 먹을 식량과 맞바꿀 수 있다고 하니, 수많은 이들이 탈취 계획을 세웠다.

허나 누구도 실행에 옮긴 자는 없었다.

뒷감당이 안 되는 건 둘째치고, 당장 마차를 호위하는 병력이 너무나 막강했기 때문이다.

산동성을 관할하는 총독이 카안에게 보내는 진상품.

그 행렬 앞에 좌창우검(左槍右劍)을 든 사내가 나타났다.

왼손에 쥔 단창과 오른손에 든 검.

당금 천하에서 무기를 쥐고 살아가는 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남자였다.

협검은 진상품을 호위하는 병력을 홀로 쓸어버렸고, 겨우 살아남은 병사들이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사라져 버렸다.

돈으로 환산하기도 힘든 보화가 실린 수십 대의 마차와 함께.

“……그리고 십삼 일 후, 산동성 전역에 식량이 풀렸어. 그게 어디서 나온 건지는 뻔했지. 산동성의 총독은 화병에 쓰러졌다더라.”

진상품을 탈취한 건 악경이지만, 마차를 옮기고 보물을 식량으로 바꿔서 백성들에게 나누어준 조직이 있을 터였다.

아무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말하지 않았지만, 그게 누구의 세력인지 모르는 자는 없었다.

하지만 총독은 악경에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주원장의 짓이라는 증거를 잡을 수도 없었거니와, 약탈의 주범이 평도(平度) 근방의 다리에 깃발을 꽂은 채 도발을 감행했기 때문이었다.

“덤벼라.”

의기충천(意氣衝天).

새하얀 깃발 위에 피로 쓴 네 글자였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약탈자는 산동 반도(山東半島)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제국을 상대로 승부를 걸어왔다.

“미친……. 존나 멋있는 인간이야.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언제 눈을 뜬 것인가.

바닥에 엎어진 철중구가 볼을 땅에 댄 채 말했다.

여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산동성의 총독도, 원 황실도 대협을 두고 볼 수 없었어. 눈에 뻔히 보이는 도발이지만, 그걸 무시해 봐. 온 천하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데, 비웃음거리가 되겠지. 총독은 대협 하나를 잡기 위해 일만 병력을 투입했어.”

일 대 일만.

천하가 뒤집혀도 이길 수 없는 싸움이었다.

제아무리 천하제일에 근접한 무인이라 하나, 갑옷과 기마로 무장한 정예병 일만을 홀로 감당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하지만 악경은 지지 않았다.

“대협은 평도 뒤편의 강을 건너는 다리를 등지고 싸움을 걸었어. 딱 하나뿐인 다리인데, 멀리서 목격한 자들에 의하면 장판파의 장비(張飛)가 환생한 것 같았다고 해. 일만 병력이 대협 하나를 쓰러뜨리지 못하고 반나절을 싸웠다지?”

슬슬 체력의 안배를 걱정해야 할 시점이었다.

안달이 난 병사들이 배를 이용해 뒤편에서 칠 계획을 짤 때였다.

악경은 강바람을 받아 펄럭이는 깃발을 등에 꽂은 채 다리를 건넜다.

“평도에서 시작해 래서(萊西), 래양(萊陽)을 거쳐 해양(海陽)까지. 칠 일에 걸친 추격전이 펼쳐졌어. 그동안 대협은 잠 한숨 자지 않고, 한 조각의 음식도 먹지 않은 채 삼천의 기병을 홀로 베었지. 하지만 산동 반도의 남쪽 끝, 해양의 바닷가에 당도했을 때, 대협은 기력이 다했다고 해.”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대도에서 출격시킨 카안의 직속 기병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오고 있었다.

마침내 악경을 따라잡은 그들을 이끄는 건 황실 삼대 무장 중의 하나인 바투였다.

“바투와 무칼리. 수많은 원의 명장 중에서도 세 손가락에 꼽히는 괴물이야. 나머지 한 자리는… 아버지의 차지고.”

그 위에 있는 건 카안과 대초원의 혼이라 불리는 오스트갈뿐이었다.

강남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은 이때 바투를 내보낸 걸 보면, 카안의 진노를 짐작할 수 있었다.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네. 영웅의 무용담 같은 거. 그래서 아저씨는 살아 있는 거지?”

마른 비는 여규의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해 있었다.

별비마저 꿈쩍도 하지 않은 채 귀를 세우고 있는 걸 보고, 여규는 웃었다.

“그럼. 당연하지. 오왕 님이 개입했는데 대협을 죽게 놔둘 리가. 바투가 고함을 지르며 달려올 때, 함선이 나타났어.”

산동 반도의 남쪽 끝에 위치한 해양은 강소성에서 멀지 않은 곳이다.

육로로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중원의 동쪽 끝에 자리한 강소성에서 바다를 이용하면 금세 닿을 수 있는 곳이었다.

천문학적인 현상금을 걸고도 십 년간 잡지 못한 대역죄인을 생포하겠다는 생각에 병사들이 들떴을 때, 함포가 쏘아졌다.

“쾅! 콰쾅! 기병뿐인 전열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어. 마지막 힘을 다해 경공을 펼친 대협은 물 위를 날아서 함선에 안착했지. 크으…! 상상만 해도 멋지다! 그걸 내 눈으로 봤어야 하는 건데!”

여규는 주먹을 붕붕 휘두르며 즐거워했다.

어느새 일어나 앉은 철중구도 벌겋게 부은 턱을 주무르며 말했다.

“그러게. 정파인은 꼴 보기 싫지만, 악 대협은 예외다. 개 멋있어! 아주 그냥 상남자야! 난 그분을 형님으로 모시기로 했다!”

뻑하면 형님이다.

악경이 받아줄 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철중구도 간만에 신이 나 있었다.

반면 무언가를 골똘히 고민하던 마른 비가 말했다.

“흠… 그거, 정식 선전포고는 아니지만 한판 붙자는 신호를 보낸 거네? 왜 그런 거지? 강남을 평정했다며? 그냥 치고 올라가면 되는 거 아닌가?”

여규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내 추측인데, 아마도 오왕 님은 그 한 수로 카안을 도발한 게 아닌가 싶어. 북벌… 듣기는 좋지만, 실패하는 순간 끝장이잖아. 몽골의 기병대는 육지에선 무적이지만, 수전에선 힘을 못 쓰거든. 가능하면 강남으로 끌어들여서 싸우는 게 최선이니까.”

날카로운 판단이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여규는 말을 멈추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만. 지금 막 떠오른 생각인데……. 그 일이 벌어진 게 우리가 운태산을 헤맬 때쯤이거든? 그리고 원은 지금까지 움직이지 않았어. 오왕 님이 이걸 예측하지 못했을까? 어쩌면 그 일 자체가 북벌을 위한 밑 작업이었을지도….”

장사성이 무너진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강남의 힘이 주원장을 중심으로 빠르게 재편되고 있지만, 아직은 이질적인 병력을 통합할 시간이 필요했다.

카안이 있는 대도로 진격하려면 산동성을 거쳐야 하니, 혼란을 일으켜서 적들을 흔들어놓고 그사이에 자신은 북벌을 위한 준비를 마치려는 게 아닌가 싶었다.

“네 말이 맞는 거 같다. 형님이 한바탕 뒤집어 놓는 바람에 피 끓는 놈들이 산동으로 모이고 있잖아. ‘의기충천’이란 글자에 등짝을 얻어맞은 거 아니겠냐.”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잠들어 있는 한 달간 참으로 많은 일이 일어난 모양이다.

마른 비의 질문에, 철중구는 킁! 하고 콧바람을 뿜었다.

“말 그대로야. 형님의 기백에 반한 거지. 가슴이 펄펄 끓는 놈들이 너도나도 몰려갔단다. 형님이 했던 것처럼 산동에서 몽골 놈들을 괴롭힌대. 오왕의 소집령은 무시한 놈들이 말이야. 네가 다치지만 않았으면 나도 당장에…!”

여규는 쯧쯧 혀를 차며 손사래를 쳤다.

“아서라. 죽기 딱 좋아. 아마도 오왕 님은 그것까지 의도한 걸 거야. 민병대나 협사들이 산발적으로 움직여서 혼란을 일으키면 시간을 벌 수 있으니까. 그들이 전멸할 때쯤 정비를 끝내고 행동에 나서겠지.”

대화를 나눌수록 여규는 주원장의 의도에 점점 근접하고 있었다.

잠시 생각에 잠겼던 그가 무언가가 생각난 듯 손뼉을 쳤다.

“아! 비아야! 산동성에 들어간 무인들 중에 자주 언급되는 사람이 있더라. 그 왜, 장사성 진영에서 튀어나온 남자에 대해 들었던 거 기억 나?”

“서달 아저씨를 애 먹였다는 사람?”

“응! 맞아! 마치 아수라가 현신한 거 같다는…! 그 남자도 산동성에 들어간 거 같아. 혼자서 여기저기 휘젓고 다니는데, 얼마 전에는 한자리에서 기병 삼백을 베었다더라.”

“혼자서 삼백을? 대단한데?”

마른 비가 맞장구를 칠 때, 철중구가 끼어들었다.

“한 놈 더 있잖아. 아니지, 그건 한 놈이 아니구나. 삼백 기 정도의 기병대가 불쑥 나타났는데, 파괴력이 어마어마하다더군. 차림새로 보아 탈영병이나 퇴역 군인 같은데, 북방에서 내려온 놈들 같대. 좌충우돌 닥치는 대로 휩쓸고 다닌다더라.”

“응. 산동성에 들어간 혈기 왕성한 무인들 가운데서도 그 둘이 단연 독보적인가 봐.”

철중구는 몸이 근질근질한 것 같았다.

“비아야! 네 몸이 나으면 우리도 올라가자! 우리 셋에 별비면 파란을 일으킬 거다! 각자 ‘의! 기! 충! 천!’을 한 글자씩 쓴 깃발을 메는 거야! 크으~ 얼마나 멋지겠냐? 글자 순서가 틀리지 않게 싸울 때도 서로의 위치는 바뀌면 안 돼!”

“무슨 합체하냐? 의욕은 알겠는데 그건 좀…….”

상상만 해도 최악의 그림이었다.

셋은 오랜만에 시답지 않은 농담을 하며 낄낄댔다.

한동안 축 처져 있었는데, 일행의 중심인 마른 비가 일어나자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었다.

별비까지 즐거운 표정으로 한가롭게 여유를 즐길 때였다.

웅성, 웅성.

백원 의원 쪽이 시끄러웠다.

일행은 서로를 마주 보고 경공을 펼쳐 달려갔다.

전보다 훨씬 축소된 의원의 공터에서 피투성이 사내를 업은 여자아이가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의원! 의원을 데려오란 말이야! 빨리!”

기껏해야 열 살을 좀 넘었을까?

정확한 나이는 짐작이 안 되지만, 아직 어린 여아였다.

자신보다 몇 배는 큰 사내를 업고 있는 소녀의 모습은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뭐지?’

마른 비는 눈살을 좁히며 소녀를 살폈다.

무공을 수련했다면 저 정도의 힘을 발휘하는 건 어렵지 않다.

문제는 소녀에게서 내공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아냐. 무공을 배우긴 했어. 성취가 미약할 뿐.’

소녀는 무를 수련했다고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약했다.

한데 저렇게 큰 사내를 가볍게 업고 있다고?

‘근력이 특출하게 강한 것도 아닌 거 같은데…….’

소녀의 팔다리는 또래 여자아이들과 다를 바 없었다.

제대로 먹질 못한 건지 오히려 가는 편에 속했다.

자연기를 끌어올려서 집중한 후에야 마른 비는 소녀의 주위에 기묘한 힘이 감도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씨발, 뭘 멍하니 보고 섰어! 의원을 데려오라고! 멍청한 새끼들아! 사람이 죽어가잖아!”

소녀의 입은 거칠었다.

그리고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눈가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칼에 난자됐는지 온몸이 엉망이 된 사내.

기절한 듯 고개를 숙인 그는 여섯 자루의 단창을 등에 메고 있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와중에도 양손엔 묵직해 보이는 도와 철창 한 자루를 꼭 쥐고 있었다.

“……저거, 존나 위험한 새끼다.”

철중구가 바짝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마른 비와 여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온몸에서 풀풀 피어나는 피 냄새.

죽인 인간의 수가 못해도 백 단위는 가뿐히 넘으리라.

기절한 상태에서도 무지막지한 살기를 흘리는 남자였다.

“정체를 확인하기 전엔 치료하면 안 돼. 저런 게 날뛰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다.”

철중구가 침을 꿀꺽 삼키며 중얼거릴 때, 소녀가 고개를 홱 돌렸다.

“너 방금 뭐라 그랬어?”

“으엉?”

소녀가 살쾡이 같은 눈으로 노려봤지만, 철중구가 겁을 먹을 리 없었다.

그가 건들건들한 자세로 인상을 찌그러뜨리자, 소녀가 말했다.

“죽어.”

아무런 조짐도 없었다.

소녀는 제자리에서 입을 열었을 뿐인데, 둔중한 무언가가 철중구의 머리를 강타했다.

꽈아아아앙!

보이지 않는 망치에 내리 찍힌 것처럼, 철중구가 풀썩 무릎을 꿇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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