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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77화 (277/463)

277화

“커허…….”

고개를 숙인 철중구가 신음을 흘렸다.

기척도, 파공음도 없었다.

상공에서 기의 파동이 일더니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머리를 후려쳤다.

입에서 피를 줄줄 흘리는 철중구를 확인한 소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외쳤다.

“봤지? 아무도 다가오지 마! 우릴 건드리려고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 뭐 해? 빨리 의원을 부르라고!”

공터에 모인 사람들은 허깨비라도 본 것처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건 마른 비와 여규도 마찬가지였다.

“주, 중구…! 괜찮아?!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전혀 감을 잡지 못하는 여규에 비해 마른 비는 어렴풋이나마 소녀의 능력을 눈치챘다.

“상단전……. 언령이 발동될 때와 비슷했어. 발동 요령과 효과는 전혀 다르지만.”

마른 비의 중얼거림을 들은 소녀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뭐, 뭐야? 네가 그걸 어떻게?”

언령을 아는 것 같진 않았다.

‘상단전’이란 단어에 놀랐을 뿐.

좋게 말하면 솔직하고, 나쁘게 말하면 어리숙한 반응이다.

무척이나 초조해하고 있고, 두려운 나머지 공격적인 반응을 보였지만, 소녀는 심성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하지만 어찌 됐든 철중구를 공격한 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마른 비가 매섭게 노려보자, 소녀가 더듬댔다.

“너, 너… 회(會)에서 나왔어?”

‘회?’

거칠 것 없던 소녀는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무언가를 뼛속 깊이 두려워하는 듯했다.

회가 뭐냐고 물으려 할 때, 고함이 터졌다.

“카악…! 이런 시벌! 쥐똥만 한 꼬맹이가! 뒈지는 줄 알았네! 뭐 하는 짓이냐!”

충격에서 벗어난 철중구가 벌떡 일어섰다.

그는 고개를 돌려 피 섞인 침을 퉤 뱉고는 소녀를 노려봤다.

“여자는 안 때리는 주의인데, 이 따위로 굴면 얄짤 없어! 당장 사과해, 미친년아!”

하여튼 몸 하나는 튼튼한 놈이었다.

그리고 단순했다.

뭐에 당했는지도 모르고, 상대의 능력도 모르면서 성질대로였다.

아니, 성질대로 했다면 벌써 도를 휘두르고 있겠지.

철중구는 지금 정말 많이 참고 있었다.

‘호오… 이런 면도 있네?’

여규가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살기를 드러낸 상대지만, 여자고, 어린아이다.

무엇보다 철중구는 소녀가 겁에 질렸다는 걸 눈치채고 있었다.

생면부지의 어른들에게 둘러싸인 소녀.

게다가 꼭 살리고 싶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다.

그는 소녀의 두려움과 불안감을 이해했다.

“야, 너! 얼른 사과해. 그럼 없던 일로 해줄 테니까. 이 쥐똥만 한 애새끼야.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그렇지, 딴 데 가서 이따위로 굴다간 단숨에 살해당한다?”

코피를 줄줄 흘리면서도 철중구는 차분하게 말했다.

소녀는 우선 그가 죽지 않았다는 데서 놀랐고, 없던 일로 해준다는 대목에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다가 그가 관용을 베풀고 있다는 걸 퍼뜩 깨달았다.

소녀는 주춤대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 미안…. 아저씨를 치료하면 안 된다고 하길래……. 그리고 당신, 험상궂게 생겼단 말야. 화도 나고 무서웠어.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마른 비의 짐작대로였다.

소녀는 앙칼진 면은 있지만, 본바탕이 나쁜 것 같진 않았다.

그녀는 마른 비 일행을 보며 애원했다.

“제발… 제발 의원을 불러줘.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아저씨가…!”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다.

철중구는 우는 건 질색이라는 듯 눈을 찌푸리더니 성큼성큼 다가갔다.

“울지 마! 알았으니까 울지 말라고! 네가 등에 메고 있는 거, 뭐 하는 놈이냐. 위험한 놈 같은데 난동을 부리지 않을 거라는 확신은 있어?”

누가 보면 백원 의원의 원주인 줄 알겠다.

철중구가 특유의 걸음걸이로 건들대며 다가갈 때, 사내가 정신을 차린 듯 움찔했다.

축 늘어져 있던 고개가 힘겹게 들렸다.

“려, 령아…. 여기가… 어디냐.”

산발한 머리와 거지나 다름없는 몰골.

흉험한 무기를 주렁주렁 매달고, 피칠갑을 한 사내는 모두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겼다.

“아저씨?! 정신이 들었어? 괜찮아?!”

소녀가 깜짝 놀라며 고개를 뒤로 돌렸다.

눈물로 범벅이 된 얼굴.

사내의 눈이 흔들렸다.

“왜… 울고 있는 거냐. 누가 널… 울렸지?”

사내는 발견했다.

보도를 어깨에 걸치고 껄렁대며 다가오는 ‘험상궂은’ 사내를.

가물거리던 눈빛에 화염이 들어찼다.

“너냐? 네가 령이를 울렸나?”

“뭐라는 거야? 이 새끼가? 애한테 업힌 놈이 허세는? 다 죽어가는 놈이 눈에 힘준다고 쫄 것 같냐? 눈깔에 힘 안 빼?”

위협적인 말과 달리 철중구는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산발한 머리 아래 번뜩이는 눈동자를 보았기 때문이다.

‘뭔 놈의 눈빛이…….’

별의별 인간을 다 겪은 철중구지만, 이토록 살벌한 눈은 본 적이 없었다.

귀안(鬼眼).

귀신이 있다면 딱 저런 눈을 하고 있으리라.

심지어 오금이 저릴 살기가 담겨 있어 심장이 약한 사람은 보는 것만으로 기절할 것 같았다.

‘시벌. 쪽팔리게….’

철중구는 자신이 기세에서 밀렸다는 걸 깨달았다.

오기가 생겨 더욱 눈에 힘을 주려던 순간이었다.

‘염병.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그는 자신이 몸도 못 가누고, 정신도 제대로 차리지 못한 환자를 상대로 흥분하고 있다는 걸 자각했다.

“후우… 야, 귀신 눈깔. 감히 이 몸에게 눈을 부라린 건 나중에 정산할 테니까 눈깔에 힘 풀어라. 그리고 얘는 지 혼자 운 거야. 아니, 내가 일정 부분 기여한 건 맞는데….”

철중구가 긴장을 풀며 몸을 이완시킬 때였다.

사내가 중얼거렸다.

“네놈이… 영이를 울렸단 말이지….”

오싹!

철중구뿐만 아니라 멀리 있는 마른 비와 여규의 등골까지 서늘하게 만드는 살기였다.

쾌애애애액―!

그 순간, 사내의 손에 들린 철창이 허공을 날았다.

철중구는 몸을 뒤틀며 반사적으로 도를 들어 올렸고, 흑색의 창이 도신(刀身)의 옆면을 때렸다.

쩌저엉―!

“큭…!”

오 장 가까이 튕겨나간 철중구가 데굴데굴 굴렀다.

창을 받아낸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고, 비켜낸 창이 어깨를 긁는 바람에 피가 철철 흘렀다.

‘무슨 힘이…!’

빈사 상태인 놈의 힘이 이 정도라니?

철중구가 기가 질린 표정을 지을 때, 사내의 얼굴에도 놀라움이 서렸다.

‘막아?’

죽일 작정으로 던진 창이었다.

갑주를 걸친 기병은 물론이고, 기마까지 서너 마리는 관통하고도 남을 힘이 담겨 있었다.

‘위험한 놈이다! 령이를 지켜야 해!’

경각심을 느낀 사내는 발을 뻗어 몸을 일으켰다.

힘이 다해 휘청거리면서도 그는 철중구만을 노려보고 있었다.

“쌍놈의 새끼가…! 환자건 시체건 안 봐준다! 대가리를 세로로 쪼개주마!”

열불이 난 철중구가 기세를 일으키며 다가왔다.

“아저씨! 아니야! 적이 아니라고!”

소녀는 사내를 말렸지만, 그의 귀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몸으로 악착같이 버티고 서서 소녀의 앞을 막을 뿐이다.

굉장한 투지요, 투철한 보호 본능이었다.

눈이 뒤집힌 철중구가 도를 휘두르려는 찰나, 음성이 들렸다.

“중구! 그만!”

별비의 등에 업힌 마른 비였다.

부상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지만, 그의 목소리엔 힘이 있었고, 이성을 잃은 자들조차 고개를 돌리게 만드는 마력이 있었다.

그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는 철중구를 멈춰 세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기도 했다.

“……뭐냐? 지금 내가 봐주다가 한 방 먹은 거 안 보여? 아무리 비아 너라도 지금 말리는 건….”

철중구가 눈살을 찌푸리자, 마른 비는 턱짓을 했다.

“봐. 중구. 의식을 잃었어.”

고개를 돌린 철중구는 그제야 사내가 선 채로 기절했다는 걸 깨달았다.

소녀가 앞으로 뛰쳐나와 양팔을 벌리며 외쳤다.

“아저씨는 날 지키려고 한 거야! 지금 주변을 볼 수 있는 상태가 아니란 말야! 부탁이야! 이렇게 빌게! 한 번만 용서해줘!”

소녀는 무릎까지 꿇으며 필사적으로 애원했다.

철중구는 도를 든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다가 결국 화딱지가 난다는 듯 휙 돌아섰다.

“시벌. 선 채로 의식을 잃어? 염병할 놈이 진짜 가지가지 하네.”

도착한 지는 조금 됐지만,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끼어들지 못하고 있던 의생들이 달려 나와 사내를 부축했다.

간이 침상에 누운 사내의 몸엔 끔찍한 창상이 가득했다.

치료를 받지 못한 채 계속 싸워왔는지 피와 고름이 뒤엉킨 환부는 썩어가는 곳도 있었다.

의생들이 분주하게 손을 놀리는 가운데, 누군가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수라라고 불리는 사람, 맞지?”

별비의 등에 엎드린 마른 비였다.

소녀는 거대한 백호를 보고 움찔했다.

그리고 한참이나 마른 비를 올려다보다가 물었다.

“……당신, 좋은 사람이야?”

경계심 가득한 눈초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묻는다는 것 자체가 마른 비를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여긴다는 증거였다.

스스로도 질문이 웃기다고 생각했는지, 소녀는 한숨을 푹 쉬고 말을 이었다.

“맞아. 최근에 아저씨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이 있더라.”

질문에 답한 소녀는 이번엔 마른 비에게 물었다.

“백호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에 대한 소문을 들었어. 산지옥이나 다름없는 강소성 북부에서 몇 달이나 백성들을 도왔다면서? 지금 강남에서 당신을 모르는 사람은 없어. 이름이 건우 맞지?”

마른 비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소녀는 뒤로 몇 발짝 물러나서 까치발을 하더니 붕대를 두른 마른 비의 상체를 관찰했다.

“당신도 엄청 다쳤구나. 왜 좋은 사람들은 다 상처 입는 걸까? 얘가 그 유명한 백아야? 아니, 백풍이었나? 소문은 무시무시하던데 굉장히 얌전하네? 덩치에 비해 귀엽기도 하고.”

소녀는 긴장이 풀렸는지 털썩 주저앉았다.

“난 영령이야. 싸움을 말려줘서 고마워.”

영령이라고 스스로를 밝힌 소녀는 별비가 신기한지 연신 힐끔거렸다.

“아까는 내가 잘못했어. 아저씨가 잘못될까 봐 너무 불안하고 무서웠거든. 아저씨가 죽었다면 나도 따라 죽었을 거야. 난… 아저씨 말고는 기댈 곳이 없거든.”

저 어린 나이에 무슨 일을 겪은 걸까?

투명한 눈엔 헤아릴 수 없는 사연이 담겨 있었다.

마른 비는 이제 괜찮다는 듯 따스한 눈으로 영령을 내려다봤다.

마음이 사르르 풀린 그녀가 예쁜 미소를 지었다.

“근데 진짜 회에서 나온 거 아니지? 아니다. 멍청한 질문이네. 그랬다면 아저씨는 죽고, 난 잡혀가고 있겠지.”

아까부터 궁금했던 부분이다.

회가 뭐냐고 묻자, 영령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곤란하면 대답하지 않아도 돼.”

마른 비는 영령을 배려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이 남자에게는 솔직하고 싶었고, 털어놔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난 특별한 능력이 있어. 태어날 때부터 그랬지.”

아까 철중구의 머리를 후려쳤던 그 힘을 말하는 것이리라.

마른 비는 그녀의 말에 집중했다.

“나도 회의 정확한 명칭은 몰라. 나처럼 특별한 힘을 지닌 자들이 모인 곳이라는 것만 알 뿐. 내가 어릴 적부터 그들은 날 주목했고, 내 힘을 탐냈어. 날… 그들의 조직으로 데려가려고 했지.”

영령은 침상에 누운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해줄게. 아무튼 아저씨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날 지켜주는 사람이야. 아저씨가 없었다면 난 벌써 죽거나 끌려갔을 거야.”

“이런……. 힘들었겠구나. 어떤 힘이길래 그들이 널 원하는 건지 물어도 돼?”

영령은 잠시 고민하는 기색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를 믿기로 했는지 낮지만 딱 부러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서 있는 이 땅이 둥글고, 천천히 돌고 있다면 믿겠어?”

“……응?”

이게 무슨 뜬금없는 소린가.

평평하고 단단히 고정된 대지가 돌고 있다?

마른 비가 고개를 갸웃할 때, 영령은 또 한 가지 믿기 힘든 이야길 꺼냈다.

“모든 물체, 심지어 당신과 나 사이에도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면?”

“……으응?”

마른 비의 표정은 가관이었다.

영령은 믿어도 그만, 안 믿어도 그만이라는 듯 웃었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야. 설명하긴 어렵지만 난 그게 뚜렷이 느껴져. 땅이 둥글고, 천천히 돈다면 우리는 어떻게 튕겨 나가지 않고 서 있는 걸까?”

마른 비로서는 도저히 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아니, 아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영령은 개의치 않고 말했다.

“아까 물체 사이에 서로 끌어당기는 힘이 있댔지? 우리가 서 있는 땅도 마찬가지야. 저 아래에서 무언가가 우리를 강하게 끌어당기고 있어. 그래서 우린 서 있을 수 있는 거야.”

“……으음.”

저러다 등에서 떨어지는 게 아닐까?

마른 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못해 너무 기울여서 중심이 위태로웠다.

영령은 이해하는 걸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 배시시 웃었다.

“땅이 끌어당기는 힘과 회전하는 원심력. 그 둘을 합한 걸 나는 중력(重力)이라고 불러. 난 그걸 다룰 수 있어.”

‘초능?’

그건 사영이나 옥예린이 지닌 능력처럼 영령에게만 부여된 선천적 자질이었다.

마른 비가 새삼스런 눈으로 볼 때, 그녀가 말했다.

“회에서 왜 내 능력을 원하는지는 몰라. 아무튼 난 그것 때문에 평생을 쫓겨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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