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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78화 (278/463)

278화

“중력이라고요?”

난생처음 듣는 단어다.

어느새 다가와 귀 기울이고 있던 여규가 황당한 얼굴을 했다.

“영령 소저라고 했죠? 미안하지만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땅이 회전을 하고 있고, 모든 물체에 서로를 끌어당기는 힘이 존재한다? 솔직히 믿기가 힘드네요.”

영령은 여규를 흥미로운 눈길로 살폈다.

“흐음. 나 같은 꼬마한테 존대라니. 예의 바른 오라버니네? 얼굴도 참하게 잘생겼고. 욕이나 찍찍 뱉다가 창 맞고 날아간 누구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아.”

영령은 대담하게 다가와서 여규의 얼굴을 뜯어보며 웃었다.

여성과 제대로 된 대화 한번 해본 적 없는 여규의 얼굴이 붉어졌다.

“꺄아~ 얼굴 빨개지는 거 봐! 오라버니, 진짜 귀엽다~!”

살쾡이같이 표독스럽던 모습은 온데간데없다.

안정을 찾았는지 영령은 십 대 초반의 소녀다운 장난기가 묻어났다.

일행에 대한 경계심이 누그러지자 생긴 변화이기도 했다.

마른 비와 여규가 보기 좋다고 느낀 반면, 창 맞고 날아갔던 누군가는 코웃음을 쳤다.

“요물이 따로 없구만. 반 시진 전까지만 해도 죽인다고 지랄을 떨던 게 ‘꺄아~!’는 얼어 죽을? 속지 마라. 저거 나이만 어릴 뿐이지, 산전수전 다 겪은 요물이 분명해.”

철중구가 발로 땅을 탕탕 치며 말했다.

“땅이 돌고, 끌어당겨? 웃기고 있네! 꼬맹이, 네가 묘한 능력을 지녔다는 건 인정하는데, 사이비 학사 같은 소릴 늘어놓을 거면….”

“시험해 볼래?”

영령이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쏘아봤다.

철중구는 피식 웃더니 어깨를 으쓱했다.

“하? 그러시던가! 내가 네 허풍의 정체를 낱낱이 까발려 줄….”

후우우욱―!

철중구는 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육신에 가해진 변화를 느꼈기 때문이다.

“……으엉?”

몸이 가볍다.

육신을 구속했던 족쇄가 풀려나간 느낌.

슬쩍 힘만 줘도 팔다리가 휙휙 움직이고, 몸이 깃털처럼 사뿐하다.

철중구의 눈이 동그래지는 걸 보고 영령이 어떠냐는 듯 물었다.

“이래도 못 믿겠어?”

“어, 어떻게 이런….”

다른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변화였다.

마른 비와 여규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영령이 하늘을 가리키며 말했다.

“당신에게 가해지는 중력의 크기를 줄였어. 위로 힘껏 뛰어봐.”

가장 실험해보고 싶은 건 철중구였다.

그는 펄쩍 뛰어올랐고, 대번에 깨달았다.

몸이 엄청나게 가벼워졌다는걸.

“우와~!”

고개를 꺾은 마른 비가 입을 쩍 벌렸다.

철중구의 몸은 어느새 창공에 떠 있었고, 저공비행하는 새들이 발아래로 지나갔다.

그는 기겁한 새들 중 한 마리를 낚아채서 땅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자신의 손에서 발버둥치는 새를 멍하니 바라봤다.

“이럴 수가……. 몸이 엄청나게 가벼워! 지금이라면 평소보다 배는 빠르게 움직일 수 있겠어. 좋아! 꼬맹이! 이 상태를 유지해라! 규, 너 일루 와! 한판 붙자!”

하여튼 기회를 놓치지 않는 인간이었다.

여규의 의사는 묻지도 않고 성큼성큼 다가서는 철중구에게 영령이 말했다.

“누구 마음대로? 귀여운 오라버니를 괴롭히는 걸 두고 볼 것 같아?”

쿠우웅―!

“어, 어억…?!”

철중구가 갑자기 무언가에 짓눌린 듯 주저앉았다.

그는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똑바로 서기 위해 노력했으나, 쉽지 않았다.

“이번엔 반대로 중력을 가중시켰어. 몸이 무거워졌지?”

상황을 파악한 여규가 사악하게 웃으며 철중구에게 다가갔다.

“붙자고? 그럴까?”

“야… 야! 잠깐…!”

철중구는 황급히 내공을 끌어올려 어깨를 짓누르는 중력에 저항했지만, 여규가 이 좋은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발차기가 작렬하고, 턱을 얻어맞은 철중구의 눈이 풀렸다.

“이… 새끼… 아까 깐 데를 또….”

쿠웅!

얼떨결에 1승을 챙긴 여규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와… 진짜 신기하네!”

진귀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듯했다.

마른 비와 여규가 입을 벌리며 놀라워할 때, 뜻밖의 방문자가 막사로 들어섰다.

“우 소협을 뵙기 위해 왔습니다. 여기 계신지요?”

차림새로 볼 때 누군가의 명을 전하는 사자(使者)였다.

사내는 별비를 발견했고, 똑바로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소협. 준오라고 합니다. 오왕 전하의 명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부상은 어떠십니까?”

마른 비 일행은 대화를 나누기 위해 작은 간이 막사로 이동했다.

준오는 마른 비가 다쳤다는 걸 알고 있었다.

주원장은 자신의 진영에 당도한 화수연을 통해 마른 비가 백원 의원에 있다는 것과 부상을 입었다는 걸 전해 들었고, 사람을 보낸 것이다.

그리고 그건 단순히 안부를 묻기 위한 게 아니었다.

“강소성 북부에서 몇 달간 백성들을 도왔다고 들었습니다. 심지어 짐승들이 미쳐 날뛰는 원인까지 제거하셨다고요? 소협의 일행에 대한 칭송이 하늘을 찌르더군요.”

아무도 살피지 않는 무법지대에서,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베푼 선행.

별비의 강렬한 존재감까지 더해져 마른 비 일행에 대한 백성들의 지지는 그야말로 엄청났다.

주원장의 사자로 온 사내는 직설적으로 용건을 꺼냈다.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곧 북벌이 시작됩니다. 전하께선 소협이 북벌에 참가해주시길 바랍니다.”

“비아는 이미 오왕 님의 제의를 거절했어요. 그리고 지금 그 말씀은….”

주원장의 속내를 짐작한 여규가 말을 꺼냈으나, 준오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솔직히 말씀드리죠. 네, 전하께선 소협이 지닌 힘과 백성들에게 받는 지지를 필요로 하십니다. 젊은 영웅이나 다름없는 소협께서 북벌의 선봉장이 되어주신다면 커다란 ‘홍보 효과’가 있겠죠. 전하의 가신이 아니라 협력자로서 힘이 되어주길 바라는 겁니다.”

“……솔직하시네요.”

그 말밖에는 할 게 없었다.

말장난에 불과할 수도 있지만, 전처럼 자신의 휘하에 들어오라는 제의가 아닌, 대의를 위한 협력 요청이었다.

전란으로 인해 고통받는 이들을 목격했고, 그걸 하루라도 빨리 끝내기 위해서라면 가담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비아가 왜 다친 건지 아시나요?”

여규의 물음에 준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이 질문이 왜 나오는지 감을 잡을 수가 없다는 투였다.

“괴한들과의 전투 도중 습격을 받으셨다고….”

“그 습격자가 오왕 님의 휘하에 있는 사내입니다.”

준오는 경악을 숨기지 못했다.

“그, 그럴 리가요…! 소협에 대한 전하의 대우는 파격적일 만큼 특별합니다. 미치지 않고서야 전하께 속한 자가 소협께 칼을 겨눌 리가요! 저, 절대 그럴 리 없습니다!”

준오는 당황해서 다급히 말을 쏟아냈다.

표정을 면밀히 살폈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단독 행동인가.’

마른 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습격자의 기질로 보아 단독 소행일 확률이 높을 거라고 여겼는데, 과연 그런 모양이었다.

마른 비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준오에게 말했다.

“예전에 아저씨를 보고 나올 때 만났던 적이 있기 때문에 확실해. 복면 때문에 얼굴은 확인하지 못했지만, 눈빛과 기질이 같았거든. 놈은 복귀 운운했어. 한 달 전에 복귀한 자를 중심으로 살펴보면 되겠지.”

“그, 그럴 수가…. 어떤 미친놈이…!”

마른 비는 복부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어차피 당분간은 움직이기 힘들어. 몸이 나으려면 시간이 필요하거든. 장담은 못 하지만, 북벌과 때가 맞으면 힘을 빌려줄 수도 있을 거야. 하지만 그 전에 날 습격한 자를 찾아와. 난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으니까.”

준오는 분개한 표정으로 말했다.

“알겠습니다! 인상착의만 알려주십시오! 어떤 놈인지는 몰라도, 찾아내는 데 한 달이면 충분할 겁니다! 반드시 색출해서 대령하겠습니다!”

준오는 마른 비에게 호감을 지닌 모양이었다.

그는 마치 자신의 일처럼 화를 내며 부들부들 떨었다.

마른 비 일행은 기억을 더듬어 표금산의 얼굴을 묘사했고, 준오가 초상화를 그렸다.

그리고 잠시 막사를 나갔다 온 마른 비는 준오에게 무언가를 건넸다.

“이걸 가져가. 내 배에 꽂혀 있던 그자의 검 조각이야. 범인을 잡고, 몸이 나으면 북벌에 대한 참여를 검토해볼게.”

준오는 긍정적인 대답을 얻어낸 데 만족한 듯 깊게 고개를 숙였다.

“반드시 찾아내겠습니다. 그리고 이건 오왕 전하께서 보내신 선물입니다. 자상의 회복에 효험이 있다더군요. 곧 다시 뵙겠습니다, 소협. 쾌차하시길.”

주원장의 사자를 보낸 마른 비는 다시 영령이 있는 곳으로 이동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섰을 때, 그녀는 전신에 붕대를 칭칭 감은 사내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의식을 차린 건가?’

족히 며칠은 기절해 있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처인데 벌써 눈을 뜬 모양이다.

무지막지한 기파만큼이나 튼튼한 사내였다.

“일어났네. 정신이 좀 들어?”

마른 비는 원래부터 알고 있는 사람을 대하듯 친근하게 말을 건네며 사내에게 다가섰다.

반면 여규와 철중구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실례가 많았다. 내가 큰 실수를 했더군. 사과한다.”

사내는 뚝뚝 끊기는 어조로 대꾸하며 마른 비를 바라봤다.

풀어헤친 산발부터 인간 세상과는 동떨어져 살아온 듯한 태도까지.

야인 그 자체인 남자였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든 건 눈 때문이었다.

소름 끼치는 살기를 담았던 귀기 어린 눈이 지금은 무척이나 맑고 부드러웠다.

철중구는 기가 차다는 듯 툴툴댔다.

“귀신 새끼처럼 노려보던 놈이 소 같은 눈망울을 하고 있네. 애나 어른이나 죄다 요물이구만. 속지 마라. 두 놈 다 정상이 아니야.”

사내는 철중구를 물끄러미 보다가 툭 뱉었다.

“미안하게 됐다. 어깨는 괜찮나?”

철중구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눈썹을 치켜뜨며 반문했다.

“너 같으면 괜찮겠냐? 다 죽어가는 놈을 팰 수도 없고. 일어나기만 해봐. 아주 그냥 박살을 내줄 테니까.”

“네가 말인가? 이 친구라면 몰라도 그쪽 실력으로는 힘들 것 같은데.”

“뭐가 어쩌고 어째?!”

지금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철중구를 여규가 말렸다.

마른 비는 왠지 둘이 비슷하다는 생각에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마른 비야. 앞으로 종종 보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드네. 잘 부탁해.”

사내는 누군가와 악수를 하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마른 비의 손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영령이 ‘악수! 이 멍청아!’라고 재촉한 뒤에야 사내는 손을 맞잡았다.

“전룡이다. 잘… 부탁한다.”

“전룡은 얼어 죽을. 이름까지 좟 같네, 시벌 놈이.”

철중구는 사내가 마음에 안 드는지 한시도 쉬지 않고 투덜댔다.

마른 비와 전룡이 몸을 회복하는 데는 서너 달이나 걸렸다.

마른 비는 장기가 엉망이 된 탓에 회복이 더뎠고, 전룡은 외상과 내상이 너무도 심했다.

둘 다 튼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남자들이지만, 죽음 직전까지 내몰렸던 육체는 쉽게 낫지 않았다.

후유증이 없다는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산동성에는 왜 들어간 거야? 사지라는 걸 몰랐을 리 없을 텐데. 저 사람, 원의 병사들에게 당한 거야?”

마른 비는 전룡이 산동성에 들어간 이유가 궁금했지만, 영령은 유독 그 부분에 대해선 말을 아꼈다.

“그건 말하기가 좀 그래. 아저씨에게 결정적인 피해를 입힌 게 원의 병사들이 아니라는 걸 말해줄 수 있을 뿐이야. 그… 나를 쫓는다는 회에서 나온 놈들 짓이었어.”

마른 비도 무언가를 캐묻는 성격이 아니다 보니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하지만 영령의 말을 들은 마른 비는 별비에게 백원 의원으로 접근하는 자들을 주시하라고 일렀다.

언제든지 그녀를 노리는 추격자들이 습격을 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별다른 일 없이 시간은 흘렀고, 마른 비는 휴식을 취하는 가운데 새해를 맞이했다.

그리고 마른 비의 몸이 거의 회복되어 갈 무렵, 강소성 남쪽에서 전해진 소식이 중원을 달궜다.

“비아야! 오왕 님이 응천부에서 제위에 올랐대! 국호는 명(明). 연호는 홍무(洪武). 드디어 황제의 자리에 등극한 거야!”

허겁지겁 달려온 여규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외쳤다.

한족인 그에게 명의 건국은 흥분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여규는 또 하나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을 전했다.

“북방초원이 요동치고 있어. 카안에게 눌려 있던 부족들이 반기를 든 모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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