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79화 (279/463)

279화

“반기를 들었다고? 원 황실에 대항해서?”

칭기즈 칸에 의해 통일되기 전까지 북방초원에는 여러 부족이 난립했었다는 걸 마른 비가 알 리 없었다.

여규는 간단한 설명을 덧붙여서 마른 비의 이해를 도왔고, 초원에서조차 잊혔던 이름 하나를 꺼냈다.

“다모그. 나도 이번에 처음 들은 이름이야. 몽골 제국이 세워지기 전에 몰락한 메르키트 연맹의 후예래. 부족이 몰락하는 바람에 역사의 전면에 나서지 못했지만, 초원의 혼이라는 오스트갈에 비견할 만한 전사라더라. 그 사람이 이번 반란의 주역이래.”

희한한 일이었다.

초원에서도 잊힌 이름이 여규의 귀에까지 들어온 것도 그렇고, 그동안 죽은 듯이 살던 부족들이 이 시기에 들고 일어난 것도 그렇다.

여규는 그럴 듯한 추측을 내놨다.

“공작이라고 보는 게 타당할 거 같아. 오왕 님, 이제는 폐하라고 불러야 하나? 그분이 소문을 퍼뜨린 거겠지. 어쩌면 반란 자체가 그분의 작품일 수도 있고. 아니, 틀림없을 거야.”

명의 건국과 초원의 반란.

공교로울 정도로 딱 맞물린 시기에 일이 일어났다.

그리고 잊혔던 인물이 천하에 이름을 알리며 전면에 나왔다.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도 절묘하지 않은가.

“과거 메르키트 연맹이 멸망한 건 약탈혼을 목적으로 테무진의 아내 보르테를 납치했기 때문이래. 분노한 칭기즈 칸은 메르키트 연맹을 철저하게 부숴 버렸지. 연맹의 병력은 대부분 흡수됐지만, 수장들의 핏줄은 뿔뿔이 흩어져 초원에서 죽은 듯이 살아왔다고 해.”

존재가 알려지면 척살령이 떨어질 핏줄의 후손이 기나긴 세월 동안 끈질기게 살아남아 힘을 길렀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현실적으로 어려운 이야기였다.

주원장이 십 년간 공들여온 북방초원에 대한 공작이 발동된 순간이며, 북벌을 위한 시동이 걸린 순간이었다.

“규모는 훨씬 크지만, 이건 악 대협의 도발과 흡사해. 누가 뭐래도 원 황실의 본진은 초원이야. 과거의 망령이자 초원의 혼에 비견되는 전사. 그런 자가 군세를 일으켰다면 카안은 절대 무시할 수 없어.”

누구를 끌어내기 위한 밑 작업인가.

그리고 어느 정도의 병력을 출격시킬 것인가.

여규가 북방초원부터 중원, 강남을 아우르는 천하 정세를 그릴 때, 마른 비는 인물에 집중했다.

“우아~ 골치 아퍼. 난 그렇게 복잡한 건 모르겠다. 내가 궁금한 건 하나야. 악 아저씨와 사영. 그 둘의 소식이 들리지 않잖아. 그들을 어디에 쓰려는 거지?”

한동안 잊고 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여규의 머리로도 도저히 짐작할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여규의 미간에 골이 패일 때, 몇 달 전 재방문을 약속했던 사내가 막사의 입구로 들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협. 상황이 너무 숨 가쁘게 흐른 데다 조사할 게 많아서 그만……. 제가 너무 늦었군요.”

지난 번 북벌에 대한 협조를 요청했던 주원장의 사자, 준오였다.

그는 정중히 목례를 한 후 마른 비를 살폈다.

“움직임이 가볍군요. 몸이 많이 회복되신 모양입니다.”

마른 비가 웃으며 팔을 휘돌렸다.

준오는 다행이란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얼굴이 어두워졌다.

“시간이 촉박하니 바로 말씀 올리겠습니다. 일전에 요청하신 습격자에 대한 부분을 면밀히 조사했습니다. 해당 기간에 임무나 휴가 등의 이유로 응천부를 떠났던 이는 총 칠백여 명……. 허나 단독으로 소협을 습격할 만한 무공을 지닌 이를 추리면 단박에 십여 명으로 압축되더군요.”

정면 대결이 아닌 암습을 염두에 둔 숫자였다.

그중에서도 실제 성공할 수 있는 자를 추리고, 마른 비에게 건네받은 인상착의까지 대조하자 용의자는 하나로 좁혀졌다.

“표금산. 저도 존재를 모르고 있던 남자였습니다. 폐하의 명을 전하는 사자로서 꽤 많은 일을 수행했음에도 말이죠. 용의자가 좁혀진 뒤에야 폐하께서 어렵게 입을 떼시더군요.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하는 사냥개들의 수장이라고.”

준오도 표금산이 정확히 어떤 일을 하는지는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자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란 듯했다.

준오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주저하며 말했다.

“폐하께선 곧바로 그자를 소환하셨지요. 그리고 불같이 화를 내며 추궁하셨습니다. 네가 한 짓이 맞느냐고. 모든 정황이 그자를 가리키고 있었으니까요. 한데… 저는 그자를 이리로 데려올 수 없었습니다.”

“……왜죠?”

조용히 듣고 있던 여규가 물었다.

준오는 송구하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그자가 그 시기에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는 명확한 증거가 있었습니다. 검 조각은 그의 애검이 아니었으며, 시중에서 산 평범한 철검으로 판명됐지요.”

“임무 수행이요? 말도 안 돼! ……상처! 비아에게 당한 상처는요? 그건 숨길 수 없는 증거예요!”

여규가 속이 터지는 얼굴로 외쳤다.

“저희가 그를 소환했을 때는 두 달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였습니다. 얼굴을 가격당한 상처는 흔적도 없었고, 복부를 찔린 자상도 완쾌된 뒤였습니다. 몸에 상처가 너무 많아 특정할 수도 없었지요. 유력하고도 유일한 증거는 부서졌다는 오른쪽 발가락인데…….”

준오도 답답한 듯 억눌린 어조로 말했다.

“같이 궁을 떠났던 수하들. 강소성 남부의 잔존 저항세력을 처리했던 자들이 증언하더군요. 그자가 임무 중에 부상을 입어 발가락을 잘랐다고.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해당 장면을 목격한 민간인까지 확보했습니다. 정황이 그토록 확실하니… 도저히 그 이상 추궁할 수가 없더군요.”

빌어먹게도 철저한 놈이었다.

그 정도 고수가, 그것도 암중에서 움직이는 사냥개들이 목표를 처리하는 광경을 민간인에게 들킨다?

씨알도 안 먹힐 소리다.

비슷한 대역을 써서 해당 장면을 연출했겠지.

아마도 대역은 실제로 발가락을 잘랐을 것이다.

그러니 충격적인 장면을 ‘우연히’ 목격한 민간인이 기억하는 것이겠지.

충복으로 온갖 더러운 일을 도맡아 처리한 자를, 그토록 확실한 정황하에서 더 이상 밀어붙이긴 힘들었을 거다.

여규가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을 토할 때, 마른 비가 말했다.

“아저씨가 일부러 놓아준 건 아니고?”

그 한마디에 여규와 준오의 표정이 일시에 굳었다.

“비, 비아야…! 그건…!”

여규는 깜짝 놀란 얼굴로 준오의 표정을 살폈고, 준오의 얼굴에는 노기가 떠올랐다.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아무리 소협이라도 해도 될 말이 있고, 해선 안 될 말이 있소. 폐하의 저의와 진정성을 의심하는 그 말…….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즉참을 피하기 어렵다는 걸 명심하시오. 선을 넘지 않는 걸 당부드리는 바요.”

준오는 말투까지 변하고 있었다.

주군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충성심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주원장이 평소 얼마나 외부에 비치는 모습에 신경을 써왔는지를 알 수 있었다.

마른 비는 준오와 다퉈봤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걸 깨닫고 몸을 돌렸다.

“당신은 기분 나쁠지 몰라도 난 그렇게 생각해. 내가 본 아저씨라면 뭐가 진실인지 모를 리 없어. 빈틈없는 핑곗거리가 있다는 걸 확인하고 처벌을 물린 거겠지. 그자는 또 찾기 힘들 만큼 유용한 칼일 테니까.”

하지만 이걸로 적당히 얼버무릴 수 있다고 여겼다면 그건 주원장의 착각이다.

마른 비는 표금산을 절대 가만히 놔둘 생각이 없었다.

“북벌……. 좋아, 가담하지. 원래는 아저씨가 만들 세상이 궁금해서였지만, 이제는 하루라도 빨리 전란을 끝내기 위해서야. 내가 두 눈으로 본 백성들의 참상은 너무 처참했거든.”

마른 비는 한마디를 더하는 걸 잊지 않았다.

“아저씨에 대한 판단은 잠시 미뤄두겠어. 직접 보고 물을 거야. 아저씨에게도, 그자에게도. 그것 때문에라도 참여해야겠어. 만약 내가 추측한 게 맞다면, 우리 관계가 전과는 달라질 거라고 전해.”

황제를 판단한다?

오만하고도 위험한 말이었다.

관계가 달라진다?

엄포나 다름없는 말이며, 수하들이 들으면 난리가 날 말이었다.

허나 마른 비는 그렇게 말했고, 준오는 반발하지 못했다.

겉으론 아니라고 하지만 그 역시 마음속으로는 마른 비의 추측에 동의한 데다 기세에 눌렸기 때문이었다.

“돌아가. 북벌이 시작되면 사람을 보내. 난 여기 있을 테니까.”

준오는 더 이상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막사를 나설 수밖에 없었다.

콰차차창―!

마른 비는 준오를 보내고 심란해진 마음을 다스리기 위해 여규와 막사를 나섰다.

그리고 의원에서 멀리 떨어진 언덕에 올랐다.

거기엔 최근 일주일간, 밥 먹고 하루 종일 싸움만 하는 두 남자가 있었다.

전룡과 철중구는 지치지도 않는지 먹고 자는 시간만 빼면 칼을 주고받았다.

“투견이냐? 대단하다, 정말.”

여규가 혀를 내두르자, 바위에 걸터앉아 턱을 괴고 있던 영령이 고개를 돌렸다.

“오라버니들, 왔어? 그러게 말야. 질린다, 질려. 아저씨만큼이나 싸움을 좋아하는 인간은 처음 봐. 저 아저씨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꽈아아앙!

전룡의 힘에 밀린 철중구가 나자빠졌다.

그가 벌떡 일어나려는 찰나, 목에 철창이 겨눠졌다.

“네 실력으로는 안 된다. 이쯤 하는 게 어떠냐?”

철중구의 얼굴은 벌겋게 부풀어 오르다 못해 터질 것 같았다.

울화통이 치민 그는 분을 참지 못하고 땅을 데굴데굴 굴렀다.

“으아아아! 시발! 왜! 왜 한 번도 못 이기는 거냐! 이런 겉멋만 든 새끼한테 내가 왜 지는 거냐고!”

창에 어깨를 얻어맞았던 철중구가 전룡을 가만둘 리 없었다.

그는 전룡의 몸이 낫자마자 비무를 청했고, 마른 비 이외의 존재에게 밀리는 건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강한 호승심을 드러냈다.

하지만 결과는 완패.

계속 패하자 철중구의 호승심은 오기가 버무려진 적의로 변했다.

비슷한 기질의 사내에게 밀리자 더욱 견딜 수 없는 눈치였다.

“휴우… 사호가 되고 그렇게 좋아했는데. 어쩌다 우리 중구가 전투력 측정기가 됐을까?”

새로운 인물과 마주치면 철중구는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제일 먼저 나섰다.

철중구의 싸움 결과로 상대의 전력을 가늠하는 게 익숙해진 일행이었다.

“왜 지는 거냐고? 몰라서 묻나? 네가 약하기 때문이다. 너와 난 거쳐 온 싸움판의 질이 달라.”

조롱 섞인 도발처럼 보이지만, 그건 전룡식의 농담이었다.

나이와 기질이 비슷해서일까?

그는 철중구를 가장 편하게 대했다.

슬픈 건 철중구는 돌아버리기 직전인데, 전룡은 그를 귀여운 동생 대하듯 한다는 점이었다.

‘도와 철창. 등에 맨 여섯 자루의 단창. 저렇게 다양한 무기를 쓰는 사람은 드문데. 생각 이상으로 강해.’

전룡은 여규의 상식을 깨는 남자였다.

하나의 병기를 깨우치는 것도 평생이 모자랄 일인데, 여러 가지 무기를 다룬다?

십중팔구 조잡해지기 마련이다.

철중구가 겉멋만 든 새끼라고 욕하는 이유였다.

하지만 전룡은 그 많은 병기를 자신의 몸처럼 다뤘다.

그리고 철중구를 찍어 누르는 것으로 무위를 증명했다.

‘난 못 이겨. 비아와 붙으면 어떻게 될까?’

여규가 홀로 궁금해할 때, 영령이 심드렁하게 중얼댔다.

“아저씨. 그만하지? 백 날 천 날 해도 안 돼.”

그 말이 철중구의 발작을 부추겼다.

“닥쳐! 이길 때까지 한다! 그리고 비아와 규는 오라버닌데, 왜 나만 아저씨냐?”

“몰라서 물어? 거울 가져다줄까?”

“우아아아아! 역시 너네 둘 다 존나 마음에 안 들어!”

철중구의 비통한 외침은 그칠 줄을 몰랐다.

철중구의 패전 기록이 늘어나고, 마른 비와 전룡의 몸이 완전히 회복됐을 때였다.

누구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지만, 조만간 둘이 한번 붙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커질 무렵이었다.

그리고 천하가 명과 원 사이에 감도는 전운에 숨죽이고 있는 시점이었다.

두두두두―!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함을 깨고, 대도에서 오만 기병이 쏟아져 나왔다.

최정예로 이루어진 몽골 기병대를 이끄는 건 붉은 갈기를 휘날리는 전투마에 올라탄 노장이었다.

백색의 미염을 쓰다듬으며 두터운 참마도를 쥔 사내는 오만 기병을 자신을 위한 배경으로 전락시켜 버리며 북방초원을 향해 내달렸다.

‘움직였다!’

천하 정세를 볼 줄 아는 자들은 주원장의 노림수가 먹혔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그 정도의 안목이 있는 자들은 카안이 북방의 반란을 빠르게 평정하기 위해 초강수를 두었다는 걸 눈치챘다.

오스트갈.

카안의 옆을 떠날 줄 모르던 최강의 무장이 초원으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대도에 주둔하는 병력은 여전히 막강했고, 그들을 지휘하는 황실 삼대 무장도 여전했다.

‘다음은? 다음 수는 무엇이냐?’

천하의 시선이 응천부로 집중되고, 오스트갈이 장성을 넘은 직후, 누구도 생각지 못한 한 수가 천하를 진동시켰다.

산동성을 휘저은 무용으로 십좌의 정점에 자리매김한 사내.

당대 천하제일검 악경의 살첩이 황성에 당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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