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80화 (280/463)

280화

‘칠 일 후, 황성으로 찾아가겠다. 그간 원 제국이 저지른 만행과 한족에 대한 핍박의 죄를 카안의 면전에서 직접 물을 것이다.’

온 천하가 발칵 뒤집혔다.

협검은 카안에게 ‘죄’를 묻겠다고 선언했다.

카안이 길을 열어줄 리 없다.

전투는 필연이며, 그 귀결은 누군가의 죽음이다.

카안을 시해하겠다 말하지 않았지만, 보낸 쪽이나 받은 쪽이나 넘쳐흐를 피를 예감했다.

방문을 예고하는 서찰을 살첩이라 명명한 이유다.

문제는 도저히 승산이 없는 싸움이란 점이었다.

“이, 이게 무슨 일이야? 대협이 왜 이런 얼토당토않은 행동을……. 이건 죽으러 가는 거잖아!”

소식을 접한 여규는 망연자실한 얼굴이었다.

마른 비와 철중구의 표정도 다를 바 없었다.

한족이라면 모두가 같은 심정이리라.

단 한 명, 이 일을 사주한 주원장만 제외하면.

“무슨 짓을 한 거지? 그 능구렁이가 무슨 짓을 했길래 형님이…!”

악경을 멋대로 형님으로 모시기로 한 철중구가 분개했다.

그리고 마른 비는 마지막으로 봤던 악경의 모습을 떠올렸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일, 내가 아니면 안 되는 일이 주어졌다고만 해두지. 이 일을 위해 내가 살아온 게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드네.’

마른 비가 기억하는 그는 억지로 떠밀린 자의 얼굴이 아니었다.

“……아냐, 중구. 옆에서 부추겼을지는 몰라도, 이건 아저씨가 스스로 결정한 일일 거야.”

마른 비의 판단은 옳았다.

전무후무한 황성 침공은 악경의 선택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의지로 죽을 곳을 정했다.

중요한 건 이 일이 미칠 여파였다.

‘내 너의 앞까지 가리라. 그리고 너에게 죄를 물을 것이다.’

악경이 죽음을 각오하고 사지로 걸어 들어가는 의도는 뻔했다.

의기충천.

결전의 때가 다가오니 동포들이여, 일어서라.

명태조의 군세에 호응하여 오랑캐들을 밀어내라!

악경은 제 한 몸 던져 백 년간 짓밟혔던 한족의 마음에 불씨를 일으킬 작정인 게 분명했다.

“좋아. 스스로 선택한 거라고 쳐! 그런데 아무리 형님이라도 대도까지 갈 수나 있겠냐?! 카안에게 죄를 묻겠다고 선언한 인간을 가만히 놔두겠어? 당장 척살대를 보내겠지!”

“아니. 못 건드릴 거야.”

마른 비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그도 이제는 아는 것이다.

문명사회에서 명분과 명예, 여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철중구는 카안의 입장과 협검이란 이름이 지니는 무게를 고려하지 못했다.

“아저씨는 한족의 기상을 상징하는 존재야. 그런 남자의 도전을 무시하고 척살대를 보낸다? 그랬다가는 천하의 비웃음거리가 될 거야. 카안은 아저씨가 오는 걸 기다릴 수밖에 없어.”

살첩은 한족의 영웅이 제국의 정점에게 띄운 도전장이자, 전면전의 선포였다.

살첩이 당도한 시점에서 카안은 악경의 도전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아저씨는 황성에 도착하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여길 거야. 카안이 도전을 무시하고 죽인다면 한족은 분개하며 들고 일어날 테니까.”

원의 사기를 꺾고, 명의 기세를 키운다.

원의 지배하에서 침체된 한족의 기개를 드높여 북벌을 돕기 위한 작업.

불굴의 상징이자 저항의 표상인 협검만이 가능한 일이었다.

“빌어먹을! 황제란 놈이 민족의 영웅을 희생양으로 던지다니! 그놈은 언제 움직일 생각인 거냐!”

철중구는 막말을 내뱉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온 천하가 한 명의 무인과 제국의 대치를 숨죽이고 지켜봤다.

가슴을 짓누르는 칠 일이 흘렀을 때, 놀라운 소식이 전역을 강타했다.

소식을 들으러 나갔던 의생이 막사로 뛰어 들어오며 외쳤다.

“대, 대협께서 카안의 군대와…!”

평생토록 제국과 싸워온 무인은 결국 그의 뜻대로 생을 마감했다.

악경은 홀로 대도에 쳐들어가 황성의 정문을 부쉈고, 근위대인 시위군단을 일직선으로 꿰뚫었다.

바투와 무칼리가 이끄는 카안의 친위대, 케식마저 수백을 베어 넘긴 그는 카안의 얼굴이 보이는 황성의 광장에서 장렬히 전사했다.

피를 끓게 만드는 위용이었으나, 정작 놀라운 건 그게 아니었다.

“……당가주? 천수사 당천기 말이야? 그 이름이 여기서 왜 나와?”

침을 튀기며 설명하는 의생.

소식을 들은 철중구는 어이가 없다는 반응이었다.

당천기를 직접 만났던 마른 비와 여규의 놀라움은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여규가 당황한 얼굴로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가주님께서 카안을 습격했다고요? 악 대협에게 시선이 쏠린 틈을 타서?”

주원장에게 귀빈 대접을 받으면서도 당가의 가솔들이 얼굴을 펴지 못했던 이유.

황성 침공에 가담했다면 결과가 어떻든 당천기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다.

마른 비는 당운석과 당영령이 침통했던 이유를 이제야 알 수 있었다.

“네. 카안은 황궁에서 나와 수만의 병력에 둘러싸인 채 악 대협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카안은 황성의 광장에서 바투, 무칼리와 악경이 맞붙은 경천동지할 전투를 직접 관전했다.

모두의 이목이 정면에 집중된 그때!

작은 그림자 하나가 황성의 성벽을 넘었다.

성벽 꼭대기에 선 습격자는 몸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허공을 가로질렀다.

시위군단의 머리 위를 날아간 은빛 궤적은 카안이 사선으로 내려다보이는 지점에서 비수의 소나기를 퍼부었다.

만천화우.

노을이 드리운 하늘에 은빛 비수가 낙뢰처럼 내리꽂혔다.

“허를 찌른 한 수였지만, 카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고 해요. 케식 수십 명이 몸을 날려서 필살의 절기를 막았고, 그들이 놓친 비수는 카안의 호위를 담당하던 여휘 대장군이 차단했다고 합니다.”

마른 비와 철중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여규를 돌아봤다.

여규는 한 번쯤은 아버지의 이름이 나올 걸 예상했는지 최대한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술이 파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럼 여휘 아저씨는 다치지 않은 거지?”

마른 비의 물음에 의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카안의 생사보다 여휘의 안위를 먼저 묻는 게 이상한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 수십 만 초원 전사들 중에서 고르고 고른 케식 육십 명이 목숨을 잃었지만, 두터운 갑주까지 입고 있던 터라 만천화우의 위력을 죽일 수 있었죠. 여휘 대장군은 상처 하나 입지 않고 카안을 지켜냈습니다. 그때까지는요.”

“그때까지라니? 뭐가 또 있단 말이야?”

의생은 목이 마르는지 침을 꿀꺽 삼키고 말했다.

“전부 미끼였습니다. 악 대협도, 당가주도. 만천화우를 막아낸 친위대의 시선이 당가주에게 쏠렸을 때, 카안을 노린 검이 등 뒤에서 날아들었죠.”

“등 뒤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의생은 자신도 궁금해 죽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살수. 어디서 그런 자가 튀어나왔는지 모르겠지만, 살기에 예민한 몽골 전사들의 기감을 뚫고 카안의 지근거리까지 접근한 자가 있었습니다. 황실 삼대 무장의 시선을 돌려놓고 등을 친 거죠. 노을이 드리운 그림자에서 사람이 솟아났다는 둥, 연기가 뭉쳐서 카안을 공격했다는 둥 말이 많습니다.”

마른 비 일행의 눈이 일시에 커졌다.

그림자. 그리고 살수.

사영임을 알려주는 그보다 확실한 증거가 어디 있겠는가.

주원장이 그를 악경, 당천기와 엮어 황성 침공에 투입한 게 틀림없었다.

사영이 남긴 말처럼 그가 아니면 불가능한 암습이었다.

“명성과 무력으로 정면에서 시선을 붙든 악 대협. 측면을 파고들어 중거리에서 비수를 쏟아부은 당가주. 그리고 결정타를 꽂아 넣은 정체불명의 암살자. 호위들의 동선과 눈길까지 염두에 둔 절묘한 암습이었답니다. 어떻게 이런 초절정의 무인들이 연수합격을 펼치게 된 건지……. 중원이 난리가 났습니다.”

의생은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결과를 묻자,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암살자의 검이 카안에게 닿기 직전, 만천화우를 쳐낸 여휘 대장군이 몸을 날려 검을 막았다고 합니다. 검은 여휘 대장군의 몸을 관통하여 카안에게도 상처를 입혔지만….”

“관통이라고요?!”

초조한 얼굴로 듣고 있던 여규가 휘청거렸다.

마른 비와 철중구가 부축하려 하자, 여규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괜찮아. 그래서 어떻게 됐죠? 아버… 아니, 여휘 대장군은….”

의생은 여규가 뱉은 말을 듣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점창의 제자라는 건 알았지만, 여휘의 아들이었다니!

상황을 짐작한 의생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여휘 대장군께선 의식불명 상태라고 합니다. 그분의 반격에 살수도 치명상을 입었지만, 놀랍게도 갑자기 사라졌다더군요. 카안은 상처를 입었을 뿐 생명에는 지장이 없답니다.”

“의식불명…….”

예견된 실패였다.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합공으로 카안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지만, 목숨을 취하는 게 가능할 리 없었다.

그만큼 해낸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마른 비 일행이 여휘와 사영을 걱정할 때, 의생의 말이 이어졌다.

“카안의 진노가 하늘을 찌른다고 합니다. 악 대협 홀로 쳐들어온 거라고 믿고 있다가 암살자의 칼에 죽을 뻔했으니까요. 그토록 아끼던 여휘 대장군까지 사경을 헤매는 상황……. 카안은 절대 가만있지 않을 겁니다.”

도저히 이해가 안 되는 건 당천기였다.

악경이야 원을 무너뜨리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남자다.

정체불명의 살수는 출신을 모르니 제쳐두더라도, 당가는 양지에 드러나 있지 않은가.

이렇게 된 이상 당가의 몰살은 기정사실이다.

주춧돌 하나 남기지 않고 뿌리 뽑힐 게 뻔한데 왜 이런 무리수를 둔 걸까.

‘세가의 안전을 담보할 수 있는 무언가가 있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아냐… 확실해. 가주님이 가솔들을 죽음에 내몰 리 없지. 한데 원의 군대를 상대로 무슨 수로?’

세가의 이익을 위해서만 움직인다는 당천기가 아무 대책 없이 이런 일을 벌일 리 없었다.

세상이 이런저런 추측으로 시끄러울 때, 카안은 자신의 분노를 즉각적인 행동으로 표출했다.

“……카안이 악 대협과 당가주의 시신을 끔찍하게 훼손했답니다. 그리고 황성의 정문에 목을 내걸었죠.”

막사에 모인 모두가 탄식했다.

악경과 돈독한 관계였던 백원 의원의 의생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분노했다.

“제국에 대항해 황성으로 쳐들어간 세 명은 지금 영웅이나 마찬가집니다. 의원인 저도 이토록 피가 끓는데, 무인들은 어떻겠습니까? 들고 일어나길 망설이던 이들이 전부 강남으로 달려가고 있어요.”

비분강개(悲憤慷慨).

지금 한족의 심정을 그보다 잘 나타낼 수 있는 단어는 없었다.

무기를 휘두를 수 있는 자들은 너도나도 칼을 들고 주원장의 깃발 아래 뭉쳤다.

그동안 깔아놓은 안배들이 수면 위로 드러나고 있었다.

“몽골 전사들은 자신에게 칼을 겨눈 자를 절대 살려두지 않죠.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하고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라도 카안은 응징에 나설 겁니다. 당가가 초토화 되겠죠.”

모두가 그리 예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틀렸다.

카안의 명을 받은 4만의 기병대가 대도에서 출격했고, 그들은 사천이 아닌 중원의 서북부를 향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지휘자는 무칼리! 한데 방향이……. 이대로 쭉 가면 신강이잖아? 설마 천산을 치려는 건가?!”

철중구의 말처럼 무칼리가 이끄는 4만 기병의 칼끝은 마교를 향하고 있었다.

사태를 주시하던 이들은 깨달았다.

가장 심대한 피해를 입힌 암살자가 마교 소속이었다는걸.

그게 아니고서야 당가를 놔두고 천산으로 향할 리가 없었다.

“명이 호시탐탐 노리는 걸 알 텐데 총 9만의 병력을 빼다니. 무슨 자신감이지?”

철중구는 탁자에 깔린 지도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여휘의 소식을 듣고 실의에 빠졌던 여규가 천천히 말했다.

“그래도 아직 대도에 주둔한 병력이 17만에 육박해. 외부에 알려진 응천부의 군세는 10만 안팎……. 아직은 못 움직이리란 확신이 있는 거겠지. 본격적인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초원의 반란과 불안 요소들을 정리하려는 걸 거야.”

‘그렇군.’ 하고 고개를 끄덕인 철중구가 물었다.

“상황이 상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는구만. 아무리 마교라도 원의 정예 기병대 4만을 홀로 당할 순 없어. 이러다가 마교가 멸망하는 거 아니냐?”

마른 비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소교주가 주원장 아저씨와 무슨 말을 나눈 거지? 마교가 내전 중이랬나? 설령 반란 세력을 잡으려고 그랬다 쳐도 이건 너무 과해. 천산이 쑥대밭이 될 텐데 왜 이런 짓을….”

마른 비의 궁금증은 금세 풀렸다.

감숙 끝자락, 신강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소교주가 이끄는 마교의 타격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중원의 시끄러움은 자신과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소교주는 또 다른 자들과 싸우고 있었고, 원 기병대의 진로로 슬금슬금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세 집단이 충돌하는 순간, 주원장의 호령이 강남 땅을 뒤흔들었다.

이 순간을 위해 안휘와 절강 일대에 걸쳐 분산 배치해둔 병력이 북상했다.

꽁꽁 숨겨둔 숫자는 외부에 알려진 바와 달리 자그마치 25만.

협검의 죽음으로 의분에 찬 무림인들과 민병대를 전부 합한 숫자였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내 반드시 카안의 목을 베어 한족의 하늘을 되찾고 말리라. 전군, 진격하라!”

홍무제의 외침을 시작으로 역사를 뒤바꾼 북벌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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