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81화 (281/463)

281화

드드드드―

지축이 울리고 있었다.

25만이란 숫자는 지평선을 가득 메웠고, 끝없이 이어진 인간의 행렬에 땅이 요동쳤다.

하늘까지 치솟은 군기.

보이지 않는 벽이 천지를 뒤덮으며 밀려오는 느낌이었다.

“어마어마하네.”

별비와 나란히 선 마른 비는 인간의 군집이 이루어낸 경이적인 광경에 심취해 있었다.

기병, 보병, 궁병, 공성병기와 보급마차, 수로를 장악한 대형 선박까지.

날카로운 병장기로 무장한 병사들이 눈이 닿는 모든 곳을 메운 채 다가온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기가 질릴 위용.

이토록 많은 인원이 하나의 깃발 아래 모였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마음에는 안 들지만, 대단한 인간이야.”

철중구가 중얼거렸다.

자신의 목적을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하는 건 참기 힘들지만, 그런다고 누구나 이런 장관을 만들어낼 수 있는 건 아니다.

좋고 싫고를 떠나, 주원장이 새로운 시대를 열 장본인이라는 건 분명해 보였다.

“그래. 그건 부정할 수 없지.”

여규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여휘가 사경을 헤맨다는 소식을 들은 뒤로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자던 그는 어느 정도 충격에서 회복된 듯했다.

한의 백성을 위해 황실에 투신했으나, 그 때문에 죽여 없애야 할 적을 지켜야 한다는 모순.

그 끝에 목숨이 오가는 중상까지 입었다.

여규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성현의 면모, 호걸의 기풍, 도적의 성품을 동시에 지닌 사람이지. 나도 그를 좋아하진 않지만, 중화 역사상 전례가 없는 자수성가를 이뤄낸 자일세. 말 그대로 밑바닥에서 여기까지 올라온 인물이야. 그리고 곧 중화를 통일한 황제가 되겠지.”

여규의 말을 받은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꾀죄죄한 복장과 코를 찡그리게 만드는 악취.

봉두난발한 머리에선 이가 기어 다니는 게 보일 정도였다.

놀랍게도 마른 비 일행 사이에 껴 있는 건 정의개 구칠이었다.

철중구는 그가 아니꼬운지 눈살을 찌푸렸다.

“이봐, 당신. 볼일 끝났으면 이만 가는 게 어때? 왜 은근슬쩍 끼어서 일행인 척하는데?”

구칠은 타박에도 굴하지 않고 뻔뻔하게 말했다.

“사해는 동도라 했네. 초면의 결례에 대해선 내 사과하지 않았나. 사정을 모르는 자라면 우 소협과 마교의 관계를 의심해 볼 만도 하지. 오해는 풀렸고, 이것도 인연인데 앞으로 긴밀한 사이로 발전해 보자고. 허허헛!”

과연 거지다운 넉살이었다.

하지만 철중구는 인상을 더욱 찌그러뜨렸다.

“나한테 사파 어쩌고 한 건 기억 안 나쇼? 추측만으로 비아를 몰아붙일 땐 언제고, 이제 와서 친하게 지내자고? 누구 마음대로?”

“정사 간에 서로에 대한 인식이 안 좋은 게 어디 하루 이틀이던가. 자네도 정파를 별로 안 좋아한다면서? 자네에 대해 알기 전엔 편견을 가졌던 걸 인정하네. 우 소협도 마찬가지고. 우리 자잘한 과거는 잊어버리자고.”

구칠은 철중구의 표정이 어떻든 손을 휘휘 젓고선 마른 비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전 소협의 합류 가능 여부는 전적으로 자네에게 달렸네. 과거 칼을 맞댄 사이라 반감을 품은 자들이 적지 않을 거야. 원을 무너뜨리려면 힘을 합쳐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게. 대의를 언급하란 뜻이야.”

구칠은 밀려오는 대군의 행렬을 넓게 훑었다.

“저 많은 인원을 통틀어도 자네들만 한 전력을 가진 무리는 찾기 힘들지. 그리고 자네는 주원장의 병사들뿐만 아니라 백성들에게까지 사랑받는 존재야. 실리와 명분. 두 가지를 모두 가지고 있으니 절대로 거절하지 못할 걸세.”

마른 비는 구칠을 힐끗 보고,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며 대꾸했다.

“알았어. 그럴게.”

마른 비는 며칠 전의 기억을 스치듯 떠올렸다.

* * *

“다 죽여 버리겠다.”

활화산처럼 끓어오르는 살의.

맨 처음 목격한 이후로 한 번도 본 적 없던 눈이다.

북쪽을 바라보는 전룡은 살을 에는 살기를 거세게 뿜어내고 있었다.

“야야! 진정해! 진정하라고! 시벌! 눈 곱게 안 뜨냐? 애 떨어지겠네!”

철중구는 당황하며 전룡의 흥분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썼다.

백원 의원 전체를 집어삼킬 것 같은 살기에 마른 비와 여규가 달려왔다.

“무, 무슨 일이야? 전 형, 진정해요!”

여규가 황급히 앞을 막아섰고,

“형! 갑자기 왜 그래?! ……어? 설마 우는 거야?”

전룡의 팔을 붙잡은 마른 비는 흠칫했다.

귀안을 개방한 전룡의 눈가에는 눈물이 고여 있었다.

“……왐마? 이 새끼, 귀신 눈깔을 해가지고선 왜 질질 짜는 거야? 존나 안 어울리네. 엇, 시바! 그렇게 보지 마라. 애 떨어진다니까?”

농담을 건넸던 철중구가 흠칫하며 움츠러들었다.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살의.

분노, 슬픔, 비통한 감정이 여과 없이 전해진다.

척 보기에도 전룡의 상태는 매우 불안정했다.

“그냥 놔둬. 은인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어. 아저씨, 지금 많이 힘들 거야.”

조금 떨어진 곳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전룡만큼이나 슬픈 얼굴을 한 소녀.

영령이었다.

“은인? 은인이 목숨을 잃었다고?”

마른 비는 전룡의 얼굴을 쳐다보고, 그가 바라보는 북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깨달았다.

“그 은인이라는 게 설마….”

영령은 이제 와서 무엇을 숨기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악 대협. 아저씨를 해치거나 이용하려고 드는 놈들뿐인 세상에서 유일하게 은정을 베푼 분이야. 아저씨가 지금껏 살아 있고, 강해진 건 전부 그분 덕분이야. 그 덕에 나도 살아남을 수 있었고.”

지난 몇 달간, 서로 편히 부를 만큼 가까워지면서도 한 번도 듣지 못한 과거 이야기였다.

영령의 말을 듣는 순간, 마른 비는 전룡이 산동성에 들어갔던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저씨의 뒤를 쫓아 산동성에 갔던 거구나…!”

살첩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철중구의 대련 요청도 무시한 채 막사에 처박혀 있던 전룡은 식사도 거른 채 두문불출했다.

그러다가 뒤늦게 악경의 죽음을 전해 듣고는 이렇듯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뛰어나온 것이었다.

“길바닥에서 쓰레기처럼 스러질 목숨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버림받고, 날 버린 그들이 몰살당했을 때, 난 죽으려 했어. 아니, 죽을 수밖에 없었지.”

형편없이 구겨져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을 때, 하늘은 그에게 기적 같은 인연을 선물했다.

전룡에게 있어 악경과 함께했던 시간은 영령을 만나기 전까지의 기억을 통틀어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추억이었다.

무뚝뚝한 줄만 알았던 사내는 지금 마음으로 울고 있었다.

그는 떨리는 눈길로 왼손에 쥔 철창과 오른손에 든 도를 내려다봤다.

“그분은 아무런 연고도 없는 내게 평생을 두고도 갚을 수 없는 은혜를 베푸셨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나도, 령이도 살아 있지 못했을 거야. 그런데, 그런데…!”

전룡은 두 눈을 꾹 감고 하늘을 올려다봤다.

수라라고까지 불리는 사내의 눈에서 맑은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하는 침묵이 이어지고, 한동안 멈춘 듯이 서 있던 사내는 눈을 떴다.

“무모하다는 건 누구보다 잘 안다. 하지만 난 가야만 해. 그분은 내게 아버지나 다름없는 분이야. 낳기만 하고 거들떠보지도 않다가 죽음을 강요한 인간이 아니라, 그분이 내 하나뿐인 아버지요, 스승이다.”

잠시 누그러졌던 살기가 고개를 들었다.

전룡은 대도가 있는 북쪽을 노려봤다.

“황성의 정문에 걸려 있는 그분의 시신을 찾아올 것이다.”

악경의 목을 말하는 것이리라.

대도도 아닌 황성의 정문, 본보기로 걸어놓은 수급이다.

철통같은 경비를 뚫고 그걸 가지러 간다는 건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황성으로 쳐들어가는 건 아니고? 네 눈깔을 보면 그러고도 남을 거 같은데?”

철중구가 전룡의 눈을 똑바로 보며 물었다.

그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 그것이라는 걸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알 수 있었다.

힘의 열세?

그들이 아는 전룡은 그런 걸 신경 쓰는 남자가 아니다.

그가 수급을 회수하는 걸로 그치려는 이유는 단 하나.

지켜야 할 사람이 있기 때문이었다.

“괜찮아. 난 신경 쓰지 마. 다녀와, 아저씨.”

누구보다 전룡의 마음을 헤아리는 건 영령이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 텐데도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대협 덕분에 아저씨가 있듯이, 지금껏 내가 살아 있는 건 아저씨 덕분이야. 아저씨가 그렇게 됐다면 난 무조건 갔을 거야. 그러니까 아저씨도 가는 게 맞아.”

영령은 눈물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힘이 되어주고 싶지만, 내가 없는 게 아저씨가 움직이기 훨씬 편할 거야. 가. 가서 대협의 시신을 찾아와. 그분은 거기에 그렇게 매달려 있어선 안 될 분이니까.”

그녀는 웃었고, 또한 울었다.

전룡은 영령을 두고 가는 게 너무나 미안했고,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황성의 경계 상황도, 영령을 노리는 집단의 동향도 모르지만, 자신은 지금 가야만 했다.

“비아야. 염치없는 말이지만, 령이를 잠시 부탁한다. 넌 우리가 처음으로 만난 믿을 만한 사람이야. 난 절대 죽지 않아. 반드시 돌아온다. 그러니….”

전룡이 힘겹게 말을 이을 때, 마른 비가 손을 들어 제지했다.

“어림없는 소리 하지 마. 아무리 형이라도 거기 가면 무조건 죽어. 그건 우리가 전부 몰려가도 마찬가지일 거야.”

그럼 어쩌란 말이냐?

난 가야만 한다!

대협을 그리 둘 수 없단 말이다!

귀안을 번뜩이는 전룡에게, 마른 비는 말했다.

“기다려. 내가 방법을 찾아볼게.”

“별비야.”

일행을 놔두고 백원 의원 밖으로 나온 마른 비는 별비를 불렀다.

〔저쪽이다. 희미하지만 냄새가 나.〕

마른 비의 의도를 읽은 별비는 앞장서서 마른 비를 이끌었다.

인간의 오감으로는 감지할 수 없는 거리.

야트막한 언덕을 세 개쯤 넘었을 때, 서너 명의 거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엇? 다, 당신이 어떻게…!”

이결(二結).

강호무림에선 개목(丐目)이라 불리는 자들이다.

‘거지의 눈’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그들은 개방을 위해 정보를 수집하고 연락책이 되는 방도들이었다.

십만에 육박하는 개방의 거지들 중 칠 할 이상이 하나 또는 두 개의 매듭을 달고 있었고, 그들이 바로 개방을 정파 제일의 정보 단체가 될 수 있게 한 개목이었다.

무결(無結), 처음 입문하여 삼 년 동안 매듭이 없이 활동하는 백의개(白衣丐)까지 합치면, 개방의 구할 이상은 이렇다 할 무공을 지니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래도 이결이라면 제 몸 하나 겨우 지킬 수준은 되었고, 지금 마른 비의 앞에 있는 자들은 전원이 두 개의 매듭을 달고 있었다.

“개방 맞지? 묻고 싶은 게 있어.”

마른 비는 당황하는 거지들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오, 오지 마시오! 우리에게 뭘 묻는단 말이오?!”

개방의 제자들은 마른 비가 다가오자 기겁했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이 발각되었다는 데 놀랐고, 마른 비와 별비의 존재감에 주눅이 들었으며, 켕기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당황했다.

마른 비가 멈추지 않자, 이결 제자 한 명이 소리쳤다.

“오,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소! 개방의 제자를 피, 핍박하고도…!”

그의 얼굴이 안쓰러울 정도로 일그러졌지만, 마른 비는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핍박? 내가 뭘 했다고? 뭘 좀 묻고 싶은 거라니까?”

마른 비는 걸음을 멈추고 거지들을 주욱 둘러봤다.

그리고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였다.

“가만히 생각하니 웃기네. 당신들 입에서 핍박이란 소리가 나와? 만금당 지부에서 마주친 뒤로 계속 날 쫓아다녔지? 감시하는 인원이 최소 이백 명은 될 것 같던데. 핍박은 당신들이 한 거 아냐?”

거지들은 마른 비가 알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한 눈치였다.

서로를 돌아보며 눈알만 뒤룩뒤룩 굴리다가, 한 명이 외쳤다.

“그, 그렇지 않소! 우린 그저 동냥을 하러 나왔을 뿐이오! 근거 없는 심증으로 넘겨짚는 거라면…!”

“동냥? 당신들 말고는 아무도 없는 언덕 위에서?”

마른 비는 짜증 난다는 듯 눈썹을 찌푸렸다.

“내가 지금 마음이 좀 급해. 그러니 묻는 말에 순순히 대답하는 게 좋을 거야. 황성의 경계 상황과 전쟁의 흐름. 그리고 날개처럼 펄럭이는 새하얀 옷을 입고, 특이한 능력을 쓰는 자들의 동향. 모른다고 하지 마. 당신들이 모를 리 없으니까.”

마른 비는 거지들과 하나하나 눈을 마주친 뒤, 힘주어 말했다.

“아는 대로 불어. 당신들이 입을 열지 않으면, 별비의 입이 대신 열릴 거야. 그리고 그 뒤는 나도 장담 못 해.”

한꺼번에 움직이는 시선.

대번에 주목을 받은 별비가 슬쩍 이빨을 드러냈다.

“크르르릉…….”

그건 그 어떤 협박보다 무서웠다.

개방 제자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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