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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82화 (282/463)

282화

거지들에게 한 발 더 다가서며, 마른 비는 영령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날 쫓는 놈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끔찍한 의상이야! 그놈들, 소매에 바지통까지 너무 커서 펄럭이는 걸 입고 다닌다니까? 심지어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전부 흰색이라고!’

영령은 소름 끼친다는 듯 몸서리를 치며 말했다.

‘오라버니. 난 그놈들이 좋은 놈들이었어도 절대 거기 들어가지 않았을 거야. 수염 시커먼 아저씨부터 빡빡 대머리까지 전부 그런 옷을 입고 다닌다고! 무슨 단체복이 그따위야?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그녀는 ‘그들’을 흉내 내듯 양손을 배 앞에 다소곳이 모았다.

‘요래, 요래. 요런다고! 사춘기 소녀들도 꺼릴 옷을 입고, 두 손을 얌전히 모으고선 딱 봐도 꾸며낸 미소를 지으면서 이야기해. 지들이랑 같이 가자고. 내가 하늘의 점지를 받은 특별한 인간이래나 뭐래나? 난 미개한 구인류가 아니라 자신들 같은 신인류와 더불어 살아야 한대. 미친 새끼들! 어우, 생각만 해도 끔찍해!’

‘회’에 대해 물은 날, 영령은 철중구 못지않은 욕설을 뿜어내며 포효했다.

지금으로선 그게 회라는 집단에 대한 유일한 단서였다.

개방에서 정보를 얻어내기로 한 이상, 마른 비는 전쟁의 흐름이나 황성의 경계 상황 같은 단순한 내용을 넘어 전룡과 영령의 적들에 대해서도 캐묻기로 했다.

“모, 모르오! 왜 그런 걸 우리에게 묻는단 말이오? 설령 안다고 해도 말할 수 없소. 본방의 정보를 이용하고 싶은 거라면 분타에 정식으로 요청하고, 절차를 밟아서….”

이결 제자의 답변이 마른 비의 회상을 깼다.

마른 비는 짧게 한숨을 쉬며 툭 뱉었다.

“좋지 않은 선택이네. 당신, 실수한 거야.”

후아아악―!

급격히 끌어올려지는 자연기.

힘을 가졌다고 해서 아무 때나 무분별하게 힘을 사용하는 자들을 마른 비는 경멸한다.

꼭 필요할 때가 아니면 힘을 쓰지 않겠다는 생각은 경험이 쌓이고 경지가 깊어질수록 점점 강해지고 있었다.

허나 지금은 전룡이 죽으러 가는 걸 말려야 하는 상황이며, 이들은 일 년 가까이 자신을 의심하고 미행한 자들이었다.

마른 비가 손을 뻗어 거지 사내의 멱살을 움켜쥐려는데, 다급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멈추게! 감히 본방의 제자를 핍박하다니! 이게 무슨 경우 없는 행동인가!”

씩씩대며 달려온 건 정의개 구칠이었다.

시뻘겋게 물든 얼굴은 힘껏 경공을 펼쳤기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는 마른 비의 돌발 행동에 당황한 게 틀림없었다.

작년 만금당 강소 지부 앞에서 마른 비를 추궁할 때와 달리, 그의 눈동자는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당신이 나와야지.”

일개 방도들이 알아봐야 얼마나 알겠는가.

마른 비는 처음부터 구칠과 대화할 생각이었고, 그가 튀어나올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상황을 눈치챈 구칠은 더욱 크게 동요했다.

“실랑이할 생각도, 시간도 없어. 당신들에게 듣고 싶은 게 있어서 왔어. 뭘 묻고 싶은지 알지?”

그건 일종의 시험이었다.

이제 막 당도한 구칠이 마른 비의 질문을 들었을 리 없다.

허나 그들이 마른 비를 주시하고 있었다면, 지난 몇 달간 부대낀 전룡과 영령에 대해서도 조사를 마쳤을 거다.

장사성의 진영에서 서달의 진군을 가로막았고, 산동성에서 날뛰며 수라라는 별호까지 붙은 전룡을 간과할 리 없을 테니까.

그리고 조금 전의 상황도 지켜보고 있었을 게 틀림없다.

하지만 구칠은 순순히 토설할 만큼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난 자네가 본방의 제자들에게 물은 것을 듣지 못했네. 내가 마음을 들여다보는 능력이 있는 것도 아닌데 어찌 알겠는가. 그저 세상이 어지러우니 전쟁 상황이 궁금해서 온 게 아닐까 짐작할 뿐일세.”

네 짐작처럼 우리는 너를 감시하지 않았다.

난 네가 뭘 원하는지 모른다.

그러니 아쉬운 게 있다면 네 입으로 직접 말해라.

눈 가리고 아웅이지만, 감시를 했다고 시인하는 것과 언제든 발을 뺄 수 있게 잡아떼는 건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그리고 이 상황이 충돌로 이어지든, 협상으로 이어지든 그 작은 차이가 결정적인 명분이나 구실로 작용할 터였다.

구칠은 작은 흠도 잡히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지만, 마른 비는 애초부터 잔머리 싸움을 할 생각이 없었다.

“서로가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해서 피곤하게 말 늘이고 싶지 않아. 내가 처음에 말했지? 쓸데없는 일로 귀찮게 하면 참지 않을 거라고. 당신들은 날 충분히 귀찮게 했어. 그만하면 많이 참아준 것 같은데.”

마른 비는 이결 제자에게 향했던 몸을 구칠에게 돌렸다.

“당신들을 못 본 척한 이유는 하나야. 개방은 규가 속한 점창처럼 정파의 기둥 중 하나라며? 오해가 풀리길 바랐고, 가급적 충돌을 피하고 싶었어. 언젠가는 도움을 주고받는 관계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고.”

거기까지 말한 마른 비는 고개를 저었다.

“내 생각이 틀렸네. 당신은 솔직하지 못해. 솔직하지 못한 사람은 신뢰할 수 없지. 그리고 능력도 없어. 내가 뭘 물었을지는 뻔하잖아? 일 년 넘게 날 감시했고, 우리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으면서 내가 여기 왜 왔는지도 모른다면 당신들은 무능력한 거야.”

마른 비는 느긋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난 오늘을 기점으로 우리 관계를 재정립하는 게 어떨까 했어. 이백 명이나 되는 인원을 나한테 붙여놓는 거, 낭비라고 생각하지 않아? 당신도 마찬가지야. 총순찰이라며? 할 일 없는 사람이 아닐 텐데?”

마른 비는 구칠의 눈을 똑바로 보며 결정타를 날렸다.

“이 시간부로 사람들을 물려. 믿을 수도 없고, 무능력한 데다, 좋은 관계로 발전할 가능성이 없는 자들이 내 주변에서 얼쩡대는 걸 더 이상 두고 볼 생각 없으니까. 당신들보다는 하오문이 훨씬 낫겠어.”

개방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도발이었다.

구칠은 지독한 모욕감에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른 비가 급히 정보를 필요로 한다는 걸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일 년간 지켜본 결과, 구칠은 마른 비가 마교의 주구가 아니라는 것과 걸출한 힘에 올바른 성품까지 겸비한 자라는 확신을 얻었다.

일행을 제외하면 중원에 아무런 세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과, 슬슬 정보 단체의 필요성을 절감할 거라는 것까지도.

마른 비 역시 자신에 대해 속속들이 파악했을 개방이 인원을 물리지 않는 건, 자신과 관계를 트기 위함이란 걸 어렴풋이 짐작했다.

서로가 상대의 속마음을 뻔히 아는 상황이다.

하지만 구칠은 첫 만남에 결례를 저질렀고, 줄기차게 감시해왔다는 약점이 있었다.

그래서 마른 비가 먼저 다가와 아쉬운 부탁을 하거나,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주어서 그걸 빌미로 관계를 발전시킬 순간만을 기다렸는데…….

구칠은 마른 비가 이렇게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안 돼! 이자를 어떻게든 끌어들여야 하는데…….’

마른 비는 알 수 없었지만, 일 년 전과는 정말 많은 부분이 달라져 있었다.

개방의 내부 사정으로 구칠에겐 강력한 아군이 필요한 상황이었고, 그가 보기에 마른 비만큼 적격인 존재는 없었다.

구칠의 머리가 어지럽게 돌아갈 때, 마른 비는 깔끔하게 등을 돌렸다.

“개방… 실망스럽네. 고작 이 정도라면 당신들이 지닌 정보도 신뢰할 수 없겠어.”

마른 비는 그 말만을 남긴 채 뚜벅뚜벅 걸어갔다.

전룡의 문제로 시급을 다투는 상황에서 이건 도박에 가까웠지만, 마른 비는 확신했다.

구칠이 자신을 잡을 거라고.

“……으윽! 자, 잠깐만! 우 소협! 질문에 대한 답을 드리겠소!”

구칠의 다급한 목소리에, 마른 비는 씨익 웃었다.

오직 별비만이 볼 수 있는 미소였다.

웃음을 싹 지운 마른 비가 고개를 꺾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그래? 그럼 한번 들어볼까? 근데… 사과부터 해야지?”

구칠의 얼굴이 왈칵 일그러졌다.

〔허어… 규랑 중구 놈과 한참 다니더니…… 애 배렸네, 배렸어.〕

유일하게 상황을 아는 별비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전격적인 행보 덕분에, 마른 비와 개방의 관계는 극적으로 변화했다.

화해의 의미로 악수를 한 뒤 구칠은 잔머리를 굴리지 않았고, 마른 비를 실망시키지도 않았다.

개방의 명성에 걸맞은 방대한 정보를 바탕으로, 구칠은 날카로운 분석력을 보여줬다.

“치열한 공작 끝에 주원장은 오스트갈과 무칼리를 카안에게서 떼어놓는 데 성공했네. 그들이 데리고 간 9만 정예병이 있다면 모를까, 지금 대도에 있는 병력만으로는 명을 막을 수 없어.”

구칠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혹시 빠뜨리거나 잘못 판단한 부분이 있을까 싶어 신중하게 말을 고르는 눈치였다.

“심지어 고검마저 쓰러진 상황이지. 말 위에 올라탄 바투는 전장에서 귀신같은 용력을 발휘하지만, 혼자서는 명의 장수들을 당해낼 수 없네.”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이었다.

구칠은 북벌이 성공하리라 확신하고 있었다.

“오스트갈과 무칼리가 데리고 간 기병대야말로 서방 원정까지 이룩해낸 초원 무력의 정수지. 장성을 넘은 이상, 전령이 죽을힘을 다해 달려도 오스트갈은 따라잡지 못해. 그가 대도에 있었다면 북벌은 기한 없이 미뤄졌을 거야.”

“오스트갈……. 초원의 혼이라고 불린다며? 그렇게 강해?”

마른 비의 질문에 구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지. 지금은 잊힌 이름들…… 내가 코흘리개 애송이일 시절에 은거해버린 전대의 십좌들이라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을 거야. 생존 여부도 모르지만, 그분들이 살아있더라도 비약적인 발전을 이뤄내지 못했다면 패할 걸세.”

구칠은 북쪽을 바라봤다가 북서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스트갈은 이미 초원의 반란군 진압에 돌입했네. 대도가 떨어질 때까지 그는 돌아오지 못해. 무칼리만 복귀해도 상황은 훨씬 어려워지겠지만…… 저 영악한 소교주가 놈을 꽉 물고 놔주지 않는 모양이야.”

“소교주? 소교주가 아직 싸우고 있어?”

구칠은 고개를 끄덕였다.

“카안을 친 살수. 주원장을 공격했고, 자네가 막아냈다는 암살자 맞지? 추측건대 그자는 마교의 반란분자들이 아닌, 소교주의 휘하겠지. 소교주는 일부러 그자가 마교 출신이란 걸 카안에게 흘렸을 거야. 이이제이의 계책에 속은 무칼리가 천산으로 달려갈 때, 천산을 점거한 반란분자들은 기겁했겠지.”

정확한 판단이었다.

마른 비는 사영의 정체에 대해 아무런 귀띔을 하지 않았지만, 구칠은 진실에 접근해 있었다.

“초대 천마가 천산에 둥지를 튼 이래, 한 명의 침입자도 허용한 적 없다는 마교의 관문. 그 전설이 깨지는 걸 목격할 기회였는데 아쉽게 됐어. 제아무리 마교라도 십좌급의 무장이 이끄는 4만 정예군을 당해낼 순 없을 테니까.”

구칠은 정말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셨다.

“마교의 반란분자들은 천산의 관문을 거점으로 무칼리를 맞이하려 했겠지. 한데 뭘 어떻게 한 건지, 소교주가 그들을 천산에서 끌어냈네. 그리고 목숨을 걸고 감숙의 접경지역까지 놈들을 유인했어.”

그렇게 벌어진 세 무력집단의 충돌.

가만히 둔다면 원의 기병대가 분열된 마교의 세력을 전멸시켰으리라.

바로 그때, 기다렸다는 듯 명의 군대가 북벌을 감행했다.

“이, 이럴 수가! 카안께 돌아가야 한다! 회군하라!”

상상을 초월하는 숫자가 밀고 올라오자, 혼비백산한 무칼리는 피해를 감수하고 말머리를 돌렸다.

전열이 천산의 마교도들과 맞붙은 상황.

소교주는 철수하는 기병대의 옆구리를 집요하게 쑤셨다.

그리고 유격전을 펼치며 회군하는 무칼리를 끈질기게 붙잡았다.

산악지형으로 끌어들인 탓에 기마의 기동력은 상실됐고, 무칼리는 아직도 감숙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이게 북방과 중원, 강남까지를 아우르는 현재의 전황일세. 명의 군대는 벌써 우리가 있는 강소성의 북부까지 접근했지. 산동성만 넘으면 대도까지는 금방이야. 심지어 산동성에서는 악 대협의 의기에 감복한 협객과 민병대가 원의 병사들을 줄기차게 괴롭혀왔네.”

백 년간 불가능하리라 여겨진 북벌이 현실로 성큼 다가와 있었다.

그리고 마른 비는 곧 친구들과 함께 북벌군의 선두에 설 예정이었다.

어쩌다가 머나먼 변방에서 출발한 여정이 천하를 뒤흔드는 대전의 한복판으로 이어졌는가.

마른 비는 새삼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여기까지 함께 해준 친구들이 정말 소중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최근에 맺은 인연을 절대로 잃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전쟁의 흐름은 알겠어. 시간이 없으니 가면서 다음 이야기를 해줘.”

마른 비는 구칠을 백원 의원 쪽으로 잡아끌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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