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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83화 (283/463)

283화

“좌창에 우도. 물러섬을 모르는 불굴의 투지까지……. 전룡이란 친구가 악 대협과 비슷하단 생각은 했었지. 한데 정말로 그분의 진전을 이은 건가…!”

단순한 관찰만으로는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전룡이 악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추측한 적이 있지만, 억측이라 치부했었다.

악경이 검을 쓰는 데 반해 전룡은 도를 사용했고, 악경이 후인을 키웠을 거라고는 믿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정식 사제 관계는 아닌 모양이야. 그냥 형이 살아남을 수 있도록 아저씨가 도움을 준 정도? 아무튼 당신이 보기엔 어때? 황성에 들어가는 것, 가능할 것 같아?”

백원 의원을 향해 걷던 구칠이 눈살을 찌푸렸다.

“어림없는 소리! 거기가 어딘데 들어간단 말인가? 지금 황성은 전시태세일세. 쇠락했다 하나 원은 중화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지배한 정복왕조야. 제국의 정예 17만이 포진한 곳에 들어간다고? 정도맹과 사도련이 연합해서 쳐들어가도 한 시진도 못 버티고 전멸할걸세!”

“역시 그렇지?”

마른 비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어떻게든 전룡을 말려야 하는데 방법이 없었다.

해답은 구칠이 주었다.

“왜 홀로 움직이려는 거지? 지금 올라오는 북벌군에 합류하면 되잖아?”

“형은 장사성의 진영에서 주원장 아저씨의 군과 싸웠어. 천 명을 넘게 베었다던데 받아들일 리 없잖아.”

“무슨 순진한 소릴…! 그때는 하나의 깃발 아래 모이기 전이었지. 지금은 원을 몰아내기 위해 출신과 소속을 막론하고 집결한 상황일세. 대도를 점령할 때까지 과거의 은원 따윈 사소한 일일 뿐이야.”

구칠이 검지로 머리를 두드리며 말했다.

“생각해보게. 주원장은 진우량과 장사성의 병력은 물론이고, 정파와 사파, 마교까지 닥치는 대로 받아들였어. 한데 그런 뛰어난 무인을 내치겠는가?”

마른 비의 눈이 커다래졌다.

듣고 보니 당연한 이야기였는데, 일행 중에선 누구도 떠올리지 못했다는 게 신기할 따름이었다.

“그 친구, 자신의 손으로 대협의 시신을 수습하고 싶은 거지? 대협의 복수도 하고 말이야. 그러면서 애지중지 데리고 다니는 소녀도 지키고 싶을 거야. 맞나?”

마른 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구칠은 힘주어 말했다.

“모든 측면을 고려할 때 북벌군에 합류하는 게 최선일세. 우선 그 친구를 설득하고, 주원장의 진영에 들어갈 수 있도록 천거해. 그리고 그의 바람을 들어줄 수 있게 협상을 하게.”

“천거? 협상? 내가 뭐라고?”

구칠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었다.

“자네, 가신으로 들어오라는 주원장의 제의를 걷어찼다면서? 그 남자가 거절당했던 사람에게 또 손을 내밀 자로 보이는가? 그만큼 자네가 탐나는 거야. 무력도 무력이지만, 지금은 자네의 평판과 명성이 필요한 거겠지.”

평판? 명성?

마른 비는 잠시 멍해졌다.

점창의 이름을 듣고 덤비길 망설이는 운가의 무인들을 보았을 때.

철중구가 야투에서 관객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젊은 투사를 살려 보냈을 때.

마른 비는 이름값에 대해 고민한 적이 있다.

하지만 그건 여전히 자신과는 거리가 멀어 보이는 말이었다.

“허, 참! 답답하군! 이래서 정보가 중요한 거야. 애송이 세 명이서 귀를 닫은 채 싸돌아다니기만 하니 세상 돌아가는 걸 알 리가 있나!”

구칠은 잘 들으라는 듯 검지를 까닥였다.

“지금 강남에서 자네의 명성은 상상 이상으로 엄청나네. 그럴 수밖에 없지. 명 태조의 목숨을 구하고, 응천부 한복판에서 무위를 뽐냈어. 그리고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법지대에서 백성들을 도왔지. 자네와 자네의 일행이 합류하는 것만으로도 군의 사기를 어마어마하게 끌어올릴 수 있단 말이야.”

구칠은 토 달지 말고 자신의 말대로 하라는 듯 강한 어조로 말했다.

“전룡을 설득하고, 주원장의 진영에 그를 천거하게. 자네의 일행으로서 합류한다고 전해. 무조건 승낙할 테니까.”

구칠은 한발 더 나아가 합류 시기와 방법까지 일러줬다.

“북벌군이 올라올 때, 모두가 보는 앞에 서 있게. 백아인가 하는 자네의 호랑이 친구도 함께. 군웅들은 단박에 깨닫겠지. 자네가 바로 소문의 신성이라는걸.”

마른 비는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갸웃했다.

“그냥 조용히 합류하면 되잖아? 뭘 그렇게 요란스럽게….”

“떽!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줄 알게! 내 장담하는데 그쪽에서도 무척이나 좋아할 걸세!”

* * *

회상을 마친 마른 비가 고개를 들었다.

‘굳이 이래야 할까?’ 하는 생각엔 변함이 없지만, 구칠은 다 이유가 있으니까 시키는 대로 하라고 강하게 밀어붙였다.

여규는 난감한 표정이었고, 철중구는 미친 듯이 좋아했다.

전룡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령을 옆에 둔 채 악경의 시신을 찾을 수 있다면 뭐든 괜찮아 보였다.

두두두두―

어느새 바짝 다가온 대군의 물결.

마른 비는 선두에 서서 압도적인 존재감을 뽐내는 장수를 포착했다.

“가자.”

마른 비는 일행을 이끌고 앞으로 나섰다.

사내 역시 마른 비를 보았고, 곧바로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스윽―

사내가 오른손을 들어 올리자, 지평선을 뒤덮은 대군의 행렬이 멈췄다.

끝이 보이지 않는 인파가 정지하는 데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됐다.

갑자기 나타난 몇 명 때문에 행군을 멈추는 건 비효율적이고 이해가 가지 않는 처사였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정지를 명한 자가 군의 총대장인 서달이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이로군.”

휘황찬란한 갑주로 무장한 서달이 투구 사이로 웃음을 내비쳤다.

그는 천천히 말을 몰아서 마른 비에게 다가왔다.

장사성과의 전쟁 이후 더욱 단단해진 존재감으로, 명 황실 제일의 무장은 마른 비 일행을 내려다봤다.

“사자를 통해 들었네. 폐하의 합류 요청을 수락했다고?”

“응. 그러려고. 괜찮지?”

서달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탁은 우리가 하지 않았나. 자네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지.”

서달은 여규, 철중구와도 눈인사를 나눈 뒤 전룡에게 시선을 주었다.

전룡 역시 피하지 않고 서달을 마주봤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불편한 침묵을 깬 건 서달이었다.

“오랜만일세. 이렇게 보니 감회가 새롭군. 장사성을 칠 때, 자네 때문에 무척이나 애를 먹었지. 자네만 없었다면 놈을 무너뜨리는 기간이 삼 분의 일은 단축됐을 거야.”

“나도 마찬가지요. 당신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지. 그때보다 더 강해진 것 같구려.”

서달은 누가 할 소리냐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둘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른 비가 말했다.

“아저씨. 적으로 만났던 사이인 건 아는데, 지금은 더 중요한 일이 있잖아? 그 뭐냐… 대의! 그러니까 형이 합류하는걸….”

서달은 끝까지 듣지도 않고 말을 잘랐다.

“그건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 것이야. 이런 사내가 한편이라면 얼마나 큰 힘이 되겠나? 당연히 수락하네.”

초조해하던 영령이 얼굴을 활짝 폈다.

장사성의 진영에서 서달과 대치했던 영령은 그의 무서움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녀는 서달이 자신들을 받아들이지 않을까 봐 불안했던 모양이었다.

“협검의 수급. 위대한 영웅이 그런 취급을 받는 걸 나도 참을 수 없네. 대도를 점령하는 대로 황성에 걸린 시신을 수습할 생각이었어. 전룡이라 했나? 그건 자네에게 맡기지.”

서달의 일 처리는 시원시원했다.

전령을 통해 들은 마른 비의 부탁을 망설임 없이 들어줬다.

그리고 그는 단순히 부탁을 들어주는 걸로 그치지 않았다.

말 위에서 주먹을 포갠 그는 정중한 태도로 마른 비에게 포권했다.

「재회가 늦어 이제야 인사를 드리오. 폐하를 위기에서 구해준 점, 나 서달이 군부를 대표하여 감사드리겠소. 우 소협, 그대는 명 황실의 은인이외다.」

평원을 울리는 광범위 전음이었다.

25만 대군의 총사령관이자 개국공신.

날고 기는 무림의 명숙들조차 눈도 마주치지 못하는 절대적인 권력자가 서달이다.

그런 엄청난 인물이 스물한 살 이족의 청년에게 예를 취했다.

천지를 뒤덮은 대군이 집결한 가운데, 헤아릴 수 없는 눈동자가 그 장면을 지켜봤다.

“거참… 이 아저씨 갑자기 부담스럽게 왜 이래?”

마른 비는 당황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두 손을 가슴 앞에서 맞잡았다.

예를 받았으니 그에 상응하는 예를 표함이 마땅하다.

와족식 포권.

오른손은 아버지 하늘의 광활함이요, 왼손은 어머니 땅의 넉넉함이라.

위와 아래에서 손가락 마디 끝으로 둥글게 맞잡은 손은 대자연을 상징할지니.

중원에서 이야기하는 태극의 형상을 그려낸 손에 정심한 자연기가 담겼다.

푸화하학―!

전력으로 개방하는 기운.

그것은 천 년을 이어 내려온 와족의 정중한 예법이었다.

새로운 시대를 열어젖힐 전환점에서, 천하의 영웅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왕이라 불리게 될 남자가 진면목을 드러냈다.

『부탁받은 일을 수행했을 뿐이야. 너무 거창하게 인사를 받으니 민망하네.』

언령이 평야에 번졌다.

푸른 자연기가 타오르고, 비산한 기운이 대기를 흩뜨렸다.

중원 무림에 존재한 적 없는 독보적인 기운이 일대를 뒤덮으니, 숨죽이고 지켜보던 이들이 경악을 토했다.

“크르르르…….”

화룡점정은 별비의 등장이었다.

새하얀 영수가 은신을 풀고 거체를 드러내는 순간, 소문을 듣고도 반신반의했던 자들이 헛바람을 삼켰다.

“커허헝!”

마른 비를 호위하듯 버티고 선 별비는 힘차게 포효했고, 마른 비의 기운에 호응하여 자연기를 발산했다.

혼으로 이어진 벗.

하나로 융합된 자연기가 강대한 기운을 뿜어내며 대지를 뒤흔들었다.

“이, 이럴 수가…!”

“어떻게 이런 힘을…?!”

군단의 최전선에는 강자들만이 모여 있기에 놀라움은 더욱 컸다.

하나로 뭉친 둘의 기운은 서달의 존재감을 지워버릴 정도였고, 군웅들은 입을 다물 생각도 못 한 채 마른 비를 주목했다.

‘허어…! 그새 이렇게 성장했단 말인가?!’

서달의 얼굴에도 은은한 놀라움이 일었다.

홍무 원년.

변방에서 올라와 수많은 고비를 넘기며 성장한 마른 비와 별비는 천하인들의 뇌리에 강렬한 존재감을 각인시켰다.

서달이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진형의 우측이 들썩였다.

“여규! 고검의 아들이다!”

“대단하군…! 칠룡에 못지않아! 아니, 그 이상인가?!”

소란이 일었다.

군세의 중앙을 완전무장한 명의 정병들이 채웠다면, 양 날개는 천하 각지에서 달려온 무림인들이 담당하고 있었다.

풍기는 기운으로 보아 우측에는 정파가, 좌측에는 사파가 포진했고, 여규를 보고 웅성거리는 건 정파의 무인들이었다.

“황제 폐하께서 공인했네. 고검은 한의 백성들을 위해 원 황실에 투신한 게 맞노라고. 중원에 나온 아들의 행보만 봐도 알 수 있지. 그간 우리가 여 장로를 오해했던 게야.”

나이 지긋한 명숙이 들으라는 듯 말했다.

누군가에게는 다시없는 열사이고, 누군가에게는 민족을 등진 배신자였다.

여휘에 대한 논란은 최근까지도 끊이지 않았으나 주원장의 한마디로 모든 게 정리돼 버렸다.

그게 진실이기도 했지만, 곧 합류할 여규로 인해 잡음이 이는 걸 주원장이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내세우지 않는 여규를 대신해 그의 걸출함에 대해 소문을 퍼뜨린 건 주원장 나름의 작은 선물이었다.

“카하핫! 이렇게 많은 인간이 모인 건 처음 본다! 피가 펄펄 끓어오르는구만! 여길 봐라, 자식들아! 이 몸이 바로 철중구 님이시다! 카하하!”

뻔뻔함으로는 천하제일인 철중구는 알아서 스스로를 피력했다.

돋보이길 좋아하는 그답게 ‘네 마리 호랑이’ 어쩌고 떠드는 걸 창피해진 여규가 뜯어말렸다.

‘정말이네?’

마른 비는 내심 놀랐다.

과장인 줄 알았더니, 구칠의 말이 옳았다.

일행에게 쏟아지는 군웅들의 관심과 찬탄은 상상 이상으로 뜨거웠다.

외부와 단절된 채 떠돌아서 실감하지 못했던 거였다.

자신들이 지금 강남에서 얼마나 유명한지를.

“소문이… 축소되었군. 건우라는 자는 물론이고, 여규와 철중구라는 자들도 소문 이상이야.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기운…… 저건 후기지수의 수준이 아니지 않은가!”

하나하나가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만큼 비범한 자들이다.

군웅들의 시선이 무심한 듯 서 있는 전룡에게 옮겨 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저, 저놈…?! 수라다…!”

가장 먼저 전룡을 알아본 건 주원장의 병사들이었다.

저자 하나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동료들이 고혼이 되었던가.

주원장의 호위들이 사영을 두려워했듯, 장사성과의 전쟁에 참전했던 병사들에게 전룡은 공포의 대명사나 다름없었다.

“저놈 때문에 우리 부대가 몰살했어!”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도살자 새끼가…!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낯짝을 들이미는 거냐!”

차차창!

칼을 뽑은 자들 중엔 일반 보병뿐만 아니라 적색창기병의 정예들도 수두룩했다.

전룡이 남쪽의 전장에서 얼마나 날뛰었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그에게 전우를 잃은 병사들이 분노를 드러낼 때였다.

「그만. 진정하라. 그 역시 원과 싸우기 위해 이 자리에 왔다. 과거의 원한은 잊어라. 그는 이제 우리와 함께할 것이다.」

서달의 전음이 병사들을 내리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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