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4화
참으로 시의적절한 개입이었다.
병사들의 동요가 커지기 전에, 서달은 전룡의 합류를 알렸다.
전룡에게 원한을 가진 병사들이 입술을 깨물었지만, 지금은 전시였고, 전권을 위임받은 서달의 명은 곧 황제의 명이나 다름없었다.
병사들은 분을 삭이며 검을 집어넣었다.
「그대들은 내 옆에 서게.」
그 한마디가 결정적이었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는 물론이고 사파를 떠받치는 거대 방파들까지, 여기엔 내로라하는 걸물들이 전부 모여 있었다.
하지만 군부의 장수들을 제외하면 외부인이 서달의 옆에 서는 걸 허락받은 자는 없었다.
서달은 자신의 옆자리를 내줌으로써 마른 비 일행에 대한 신뢰를 드러냈고, 그들이 특별한 존재임을 모두에게 알렸다.
「우 소협이 명 황실과 군부에게 어떤 존재인지는 두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근래 강남을 뒤흔든 젊은 영웅까지 우리에게 합류했으니, 남은 건 오랑캐 놈들의 손아귀에서 중원을 되찾는 것뿐이다!」
“오오오오! 우 소협!”
“백아도 우리와 함께 싸운다! 신수의 가호가 함께하길!”
“가자! 중원을 되찾으러!”
잔뜩 팽창해 있던 사기가 폭발할 듯 끓어올랐다.
정예 호위병들을 짚단처럼 베어 넘긴 사영.
희대의 암살자로부터 주원장과 병사들을 구한 이후, 마른 비에 대한 군부의 지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명의 정병들이 하늘을 찌를 듯한 함성으로 화답하니, 고우의 평야가 요동쳤다.
「이제 멈추는 일은 없다! 쉬지 않고 나아가 대도를 함락시킨다! 전군, 전진하라!」
마른 비 일행의 합류로 더욱 사기가 오른 병사들이 걸음을 내디뎠다.
“자네의 작품인가?”
서달이 말의 고삐를 늦추며 물었다.
구칠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예, 장군. 그렇사옵니다.”
서달은 구칠의 뒤통수를 힐끗 봤다가 마른 비에게 시선을 옮기며 웃었다.
“이 친구가 그런 연출을 할 거라고는 믿기 어렵지. 영리하군. 덕분에 군의 사기가 올랐어. 아주 잘했네.”
모두가 들을 수 있게 광범위 전음을 쓰고, 마른 비에게 감사를 표한 것.
그리고 일행을 자신의 옆자리에 둔 것.
그 모든 게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서달의 임기응변이었다.
그는 구칠의 의도를 간파하고 상황을 노련하게 이용했다.
“미천한 걸개가 미약하나마 도움이 됐다면 그 이상 바랄 게 없사옵니다.”
구칠은 다시 한번 공손히 읍하고 마른 비를 슬쩍 봤다.
‘거 봐라. 내가 뭐랬냐.’
구칠의 눈웃음에는 그런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신 말이 맞았네.”
마른 비는 고개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었다.
‘아주 좋아. 이 이상 좋을 수가 없구나!’
천천히 고개를 드는 구칠의 얼굴에는 만족스러움이 묻어났다.
자연스레 일행에 끼어든 그는 군웅들이 보는 앞에서 마른 비와 가까운 관계임을 과시했다.
그로인해 서달에게 눈도장을 찍고, 그의 옆자리에 서게 되었다.
이것만으로도 개방의 위상이 크게 올라가리라.
혹시 아는가.
여기서 눈에 띄는 공을 세우기라도 하면, 제국 군부의 정점과 관계를 틀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그걸 토대로….
“허리춤의 수결. 자네, 개방 소속인가?”
생각에 잠겼던 구칠이 화들짝 놀라며 대꾸했다.
“네?! 네, 장군. 개방의 장로이자 총순찰인 구칠이라 하옵니다.”
서달은 구칠을 힐끗 보고 묘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가? 이상하군. 개방이 언제부터…….”
순간, 구칠의 눈동자가 미미하게 떨렸다.
정면을 보고 있던 서달은 알아채지 못했고, 자신이 상관할 바가 아니라는 듯 고개를 털었다.
“하긴. 워낙 많은 이들이 모이는 곳이니 다양한 사연이 있겠지.”
구칠은 조마조마한 눈으로 서달을 올려다보다가 아무도 눈치챌 수 없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때, 조금 떨어져서 일행과 걷고 있던 마른 비가 서달에게 다가왔다.
“아저씨는 어디 있어?”
“아저씨? 아, 폐하 말인가? 허허, 폐하를 그리 부를 수 있는 건 자네밖에 없을 걸세. 후방에 계시네. 그분께서 쓰러지지만 않는다면 우린 절대 지지 않아. 대도를 함락시킬 때까지 안전한 곳에 계실 것이야.”
“흠……. 할 말이 있는데 미뤄야 하나.”
마른 비는 무언가 걸리는 게 있는 표정이었다.
속내를 짐작한 서달이 말을 건넸다.
“표금산 때문이로군.”
“어? 아저씨도 알아?”
서달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다마다. 대단히 위험한 자야. 처음부터 나는 그자를 쓰는 걸 반대했지. 허나 폐하께선 무슨 생각인지 그를 옆에 두시더군. 그자는 내가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한다는 걸 알고 있네. 그래서인지 그 이후론 거의 본 적이 없어. 아마 날 피해 다닌 거겠지.”
서달은 눈썹을 찌푸렸다.
“까맣게 잊고 있다가, 이번에 사자를 통해 듣고서야 그런 자가 있었다는 걸 떠올릴 수 있었지. 설마 폐하의 명을 받고 지저분한 일들을 수행하고 있었을 줄이야.”
“난 놈을 꼭 봐야겠어. 그놈, 전쟁에 나왔어?”
서달은 고개를 저었다.
“폐하의 명만 받는 자라서 나도 그자가 어디서 무얼 하는지는 알지 못해. 아마 전쟁에 나오지는 않았을 걸세.”
마른 비의 표정이 좋지 않자, 서달은 얼른 말을 덧붙였다.
“폐하께서 놈을 추궁하는 자리에 나도 있었네. 임무를 수행했다는, 너무나 확실한 증거가 있어서 더 몰아붙일 수가 없었어.”
“아저씨도 놈이 결백하다고 생각해?”
술술 이야기하던 서달의 말이 끊겼다.
잠시 눈살을 좁히며 말을 고르던 그가 마른 비를 바라봤다.
“폐하께서 내리신 판단이야. 내 생각이 어떻든 그건 중요하지 않지. 이 이상 언급하기 어렵다는 걸 이해해 주게나.”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마른 비는 그의 입장을 이해했고, 속내 또한 짐작했다.
서달은 말 위에서 몸을 기울여 마른 비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믿기지가 않더군. 감히 자네를 습격…… 커흠. 아무튼 폐하께서 자네가 그자와 대면하는 걸 허락하셨네. 머지않아 마주칠 기회가 오겠지.”
서달은 더욱 몸을 기울여 마른 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난 자네의 말을 믿네. 자네 같은 남자가 습격자를 착각할 리 있나.”
서달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만나면…… 산산이 부숴버리게. 뒷감당은 내가 하지.”
마른 비는 피식 웃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야. 뒷감당도 내가 할 거고. 말이라도 고마워.”
서달은 마른 비의 어깨를 툭 치고, 기울였던 상체를 바로 폈다.
멀리서 둘의 모습을 지켜보던 사람들은 말을 잇지 못했다.
“서달 대장군과 저토록 격의 없이…….”
“저 이족의 사내… 소문보다 명의 권력자들과 훨씬 가까운 모양이군.”
각지에서 달려온 무림인들은 마른 비의 일거수일투족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강소성을 넘는 건 금방이었다.
강소성은 주원장의 영역이었고, 무칼리가 돌아오기 전에 대도를 함락시킬 작정인 서달은 말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전격적으로 치고 올라온 명군은 금세 산동성에 진입했다.
“진격하라!”
서달은 앞으로 멈추는 일이 없을 거라는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25만 대군을 손발처럼 부리며 산동성을 휩쓸었다.
악경이 ‘의기충천’의 깃발을 내걸고 원에 싸움을 걸었던 이후, 산동성은 자발적으로 들고 일어난 민병대와 강호무림의 협객들이 원의 병사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차릴 수가 없는데, 명의 군대가 도착하자 산동성을 다스리던 원의 지휘 체계는 한순간에 무너져 버렸다.
악경에게 진상품을 빼앗기고 화병에 쓰러졌던 산동성의 총독은 또다시 하얗게 질린 얼굴로 목덜미를 잡고 주저앉았다.
그는 감히 대항할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병력을 이끌고 대도가 있는 북쪽으로 도망쳤다.
“대장군. 제갈세가(諸葛世家)에서 인사 올립니다. 지금껏 태산(泰山)을 거점으로 오랑캐 놈들과 싸웠습니다. 북벌에 합류하는 걸 허락해주시길.”
“제남(齊南)의 황보세가(皇甫世家)요! 우리가 맨주먹으로 때려눕힌 몽골 놈들만 천 명이 넘소! 싸우다 죽을 각오가 돼 있으니, 부디 우릴 선봉에 세워 주시오!”
“정파라고 깝죽대는 머저리들보다 열 배는 더 죽일 자신이 있소이다. 패마방(覇魔幇)도 합류하겠소.”
산동성에 뿌리내린 명가와 방파들도 속속들이 합류했다.
지금껏 산발적으로 싸우던 협객과 민병대도 더해져, 명의 군대는 대도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그대들의 의기는 잊지 않겠다. 소속에 맞게 좌우로 나뉘어져 정도맹과 사도련의 지휘를 받도록. 정사지간에 속하지 않은 자들은 대열의 후미에 합류하라.”
서달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는지 능숙하게 인원을 분배하여 군단에 편입시켰다.
정도맹과 사도련의 인사들에게 좌우 양 날개의 지휘를 맡겼고, 주축이 되는 명의 정예병을 중앙에 밀집시켜 유기적이고 신속한 대응을 꾀했다.
아무리 유명한 무인이나 문파가 합류해도 서달이 군을 멈추는 경우는 없었다.
그건 군웅들로 하여금 마른 비 일행의 특별함을 되새기게 만들었다.
명군은 성난 산사태처럼 산동성을 휩쓸었고, 마침내 대도가 있는 하북성(河北省)의 경계를 넘었다.
“곱게 물러날 리 없지. 역시 기다리고 있었나.”
진군을 거듭하던 군대가 멈춘 건 새카맣게 늘어선 적을 발견했을 때였다.
드넓게 펼쳐진 평야.
대도로 이어지는 기주(冀州) 평야에는 천하를 제패한 원의 기병대가 명군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주 평야라……. 괜찮은 전장이로군.”
‘하북을 제패하는 자, 천하를 평정하리라.’
그런 말이 있을 정도로 하북성은 예로부터 중화의 패권을 다투는 군웅들의 전장이었다.
그리고 고대 삼국 시절부터 인간의 피를 가장 많이 먹은 장소 중의 하나가 바로 이 기주 평야였다.
서달은 전장을 넓게 훑은 후 자신과 어깨를 나란히 한 사내에게 말했다.
“계획대로 내가 본대를 맡겠소. 상우춘 장군, 선봉을 부탁하오.”
서달이 지장(智將)이라면, 상우춘은 명군을 대표하는 맹장(猛將)이다.
지금껏 조용히 행군하며 힘을 비축했던 상우춘과 적색창기병이 붉은 깃발을 높이 올렸다.
“맡겨두시오, 장군! 내 바투의 머리를 일격에 깨부숴 길을 열겠소이다!”
명군의 중앙, 척 봐도 최정예임을 알 수 있는 기병대가 폭풍처럼 달려 나갔다.
붉은 갑주로 무장한 3만의 기병대는 지금껏 주원장의 적들을 분쇄해온 전가의 보도였고, 그 선두에는 언월도를 치켜든 상우춘이 있었다.
둥― 둥― 둥―!
북소리가 평야를 울리고, 새카맣게 늘어선 원군의 중앙에서 푸른 갑옷을 걸친 사내가 앞으로 나왔다.
일반 기마의 두 배는 될 법한 전마(戰馬).
푸른색의 장창을 장비하고 말에 올라탄 사내는 사나운 몽골 전사들 중에서도 홀로 빛나고 있었다.
“바투…!”
서달이 낮게 신음을 흘렸다.
여휘, 무칼리와 함께 원 황실 삼대 무장으로 꼽히는 맹장.
셋 중에서도 군을 지휘하는 능력만큼은 누구도 따라올 수 없다는 장수가 바로 바투였다.
“히히히히힝―!”
바투의 말이 앞다리를 치켜들며 울부짖자, 원 기병대에서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케식은 나를 따르라!”
카안의 호위를 담당하는 전사들.
오스트갈과 무칼리를 따라간 기병대 대신 바투가 데려온 건 황실의 정예군이었다.
“오오오오!”
명의 적색창기병과 원의 케식 군단이 기주 평야 한복판에서 거세게 충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