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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85화 (285/463)

285화

“네놈이 바투구나! 덤벼라! 단칼에 몸통에서 목을 분리해주마!”

전장 전체를 조망하며 병력을 운용하는 서달과 달리, 상우춘은 항상 최전선에서 칼을 휘두르는 장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의 무력으로 적들을 깨부쉈고, ‘상십만’이라는 별호처럼 십만의 병력을 손에 쥔 이래 패배를 모르는 맹장이었다.

적색창기병을 상징하는 핏빛 갑옷 위로, 적들을 두 동강냈던 언월도가 햇살을 갈랐다.

“시끄러운 놈이로군.”

푸른 광택을 띤 갑주.

초원의 하늘을 누비는 독수리의 형상이 새겨진 견갑 아래, 새파란 장창이 살기를 토했다.

콰창! 쩌저정―! 꽈앙!

언월도의 참격이 그어지고, 장창의 찌르기가 허공을 꿰뚫었다.

총합 40만이 넘는 대군이 집결한 전장에서 가장 먼저 창을 맞댄 건 양측을 대표하는 무장들이었다.

“빌어먹을 반 대머리 새끼가 창은 좀 쓰는구나!”

상우춘은 울컥 치민 놀라움을 도발로 대신했다.

전력을 다한 참격을 상대가 받아낸 것이다.

몽골 특유의 변발이 돋보이는 바투는 날카로운 눈매만큼이나 강맹한 창술을 구사했다.

“약해빠진 한족치고는 쓸 만하군.”

전투민족의 자부심이 묻어나는 말이었다.

그간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한족을 보았지만, 그중 바투가 인정한 남자는 단 둘뿐이었다.

전장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여휘.

그리고… 얼마 전 목숨을 빼앗은 악경.

여휘도 대단하지만, 악경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유일하게 경외심을 품게 한 적이었다.

악경을 보기 전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얼마 전 그를 마주했던 바투는 상우춘에게 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카아아압!”

하지만 절대 만만한 상대가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하다.

족히 팔십 근은 나갈 법한 중병이 휘둘러질 때마다 공기가 터져 나갔다.

전력을 다해 부딪쳐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강자.

바투와 상우춘은 전장 속에 자신들만의 전장을 만들며 경천동지할 승부를 펼쳤다.

“우오오오오!”

“덤벼라! 오랑캐 놈들아!”

수장들이 일대일 결전에 돌입한 사이, 케식과 적색창기병도 맞붙었다.

몽골식 만도와 철창.

각각 베기와 찌르기에 특화된 병기의 특성처럼 양측은 사용하는 무예도 달랐다.

십칠식 참마도법이 적색창기병의 머리를 날리자, 적창천공갑이 케식의 갑주를 꿰뚫었다.

좌우로 산개한 케식 군단이 적색창기병의 전열을 허물고, 날카로운 핏빛 쐐기가 황금색 방벽을 파고들었다.

꽈아아아앙!

“크아악!”

“끄아아아아…!”

갑주째 양단된 몸통이 피를 뿌리며 굴러떨어지고, 상반신이 뭉개진 기마가 하늘을 날았다.

평원을 내달린 수만의 기마대가 충돌하자, 그 파괴력은 상상을 초월했다.

차 한 잔 마실 시간 동안 5천이 넘는 생명이 평야 위에 스러졌다.

살의가 넘실대는 전장에서 사람의 목숨이 촛불처럼 덧없이 꺼져 갔다.

‘막상막하…!’

마른 비는 서달의 옆에서 케식과 적색창기병의 충돌을 지켜봤다.

시야를 확보하기 위해 별비의 등에 올라선 그는 전장을 가장 멀리, 그리고 넓게 조망할 수 있었다.

‘돌파력과 방어력은 우열을 가릴 수 없어. 양측 최정예의 힘은 엇비슷해.’

적색창기병이 3만에 달하는 데 반해 금빛 갑주를 걸친 케식의 숫자는 1만에도 못 미쳤다.

하지만 바투는 그 뒤를 중갑 기병대로 받쳤고, 그들은 오스트갈과 무칼리를 따라간 정예에 못지않았다.

적의 기세를 꺾기 위한 초전은 어느 쪽도 승기를 잡지 못한 채 꽉 뭉친 덩어리처럼 전장 중앙에 고착돼 버렸다.

“어마어마하구만.”

기가 질린 듯한 철중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마른 비는 옆을 돌아봤다.

‘슬슬 움직일 때가….’

마른 비의 예상이 맞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서달의 명령이 떨어졌다.

“중보병! 전진하라!”

사각 방패를 들고 중갑주로 무장한 보병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보병이 기동을 시작한 직후, 서달은 궁수대도 전진 배치했다.

“기마대가 맞붙은 전장 뒤편에 거점을 형성한다! 그곳을 중심으로 적들을 압박하라!”

서달도, 상우춘도 기병의 단순 돌격으로 승리를 취할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았다.

적색창기병을 제외한 명의 기병대는 인마일체의 기마술을 구사하는 원의 기병대를 당할 수 없었고, 그렇다면 이쪽의 장점을 살려야 한다.

서달이 준비한 건 병과의 특성을 살린 유기적 조합이었다.

“궁사 준비!”

중보병들은 기마대가 맞붙은 중앙 전장에 바짝 붙었다.

그들이 방패를 땅에 내리꽂아 강철의 벽을 형성하자, 그 뒤에 궁수들이 자리를 잡았다.

주원장은 북벌을 떠올린 순간부터 활의 개량을 명했고, 고려의 활과 몽골의 활을 참조하여 개량을 거듭한 끝에 활의 사거리를 비약적으로 늘릴 수 있었다.

“쏴라!”

쐐새새새새색―!

사만 명의 궁수가 쏟아낸 사만 개의 화살이 하늘을 뒤덮었다.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살은 아군을 지나쳐 원 기병대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은 화살의 비.

불의의 일격을 당한 원 기병대에 피해가 속출했다.

“제2파! 발(發)!”

슈아아아악―!

사만 개의 화살이 또다시 허공을 갈랐다.

빽빽하게 밀집한 화살 뭉텅이가 하늘로부터 내리꽂히는 장면은 마치 검은 폭우가 쏟아지는 것 같았다.

“방패를 들어라!”

이번 궁사는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원의 병사들은 팔뚝에 휴대한 기병전용의 소형 방패로 화살을 막거나 무기를 이용해 쳐냈다.

명의 압박이 시작되자 원의 진형도 변화했다.

“궁기병! 좌우를 들이쳐라!”

상우춘의 언월도를 튕겨낸 바투가 목청껏 외쳤다.

그는 일대일 접전을 벌이는 와중에도 전장의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두두두두―!

바투의 명이 떨어지자 후방에서 기마대가 달려 나왔다.

그들은 정면 힘 싸움보다는 기마의 기동력과 원거리 궁사로 적을 농락하는 궁기병이었으며, 원이 세계를 제패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었다.

“끼럇!”

중앙 전장을 향해 달려든 궁기병들은 거리를 둔 채 활시위를 당겼고, 적색창기병의 외곽을 따라 전진하며 갑주와 투구 사이에 정확히 화살을 박아 넣었다.

기사(騎射).

다리로 말을 부리며 활을 쏘는 그것은 신기나 다름없었다.

적색창기병의 외곽이 속수무책으로 허물어졌다.

궁기병들은 연사를 가하며 적색창기병을 지나쳤고, 후미에 위치한 명의 궁수들을 향해 돌진했다.

“궁수를 지켜라! 중보병들은 방패를…!”

명의 지휘자가 다급히 외쳤으나 그건 아무 의미가 없었다.

궁기병들은 돌파를 감행하지 않고 둥글게 뭉친 명의 거점을 따라 돌았다.

그리고 외곽에서 궁사를 가했다.

명의 궁수대도 반격을 했지만, 쉴 새 없이 움직이며 화살을 날리는 궁기병을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병사의 질적 차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원은 기병과 궁기병뿐인 단조로운 구성으로도 숫자의 열세를 만회하며 선전하고 있었다.

“역시 쉽지 않군.”

서달이 작게 중얼거렸다.

오스트갈과 무칼리, 그리고 9만의 정예를 떼어 놓았음에도 이 정도다.

만약 놈들이 대도에 주둔했다면?

상상만 해도 끔찍하다.

하지만 적은 지휘관이 부족했고, 병력의 열세를 뒤엎을 만한 결정적인 무력이 모자랐다.

서달은 궁기병이 아군이 형성한 강철의 벽을 우회해 궁수들을 칠 때까지 기다렸다.

“지금이다! 출격하라!”

방패와 장창으로 무장한 중보병.

기동력과 궁사에 특화된 궁기병으로 강철의 벽을 뚫으려면 커다란 피해를 감수해야 한다.

서달은 적들이 중보병을 우회해 뒤에 있는 궁수대에 달려들 걸 예상했다.

“출진이다! 나를 따르라!”

본대가 갈라지며 중앙에 숨겨둔 기마대가 달려 나갔다.

중갑주로 무장한 적색창기병과 달리 가죽을 여러 겹 덧댄 혁갑(革甲)을 입고 기동력을 끌어올린 경기병이었다.

궁기병을 잡기 위한 요격대를 이끄는 건 철중구에게 덤볐다가 박살이 났던 지태율이었다.

“뭐야? 저놈이 지휘관이야?!”

철중구가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워했다.

자신이 피떡을 만들었던 상대가 수만의 군세를 이끄는 모습은 색다를 수밖에 없다.

지태율은 병사들을 독려하는 한편, 용맹하게 창을 휘두르며 달려 나갔다.

“곧 충돌한다. 양익을 펼쳐라.”

서달은 당황하거나 망설이는 법이 없었다.

무수히 검토한 모의 전투를 기반으로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다.

서달의 명을 받은 기수가 깃발을 흔들자, 본대의 좌우에서 요란한 함성이 터졌다.

“드디어 출진이다! 말 탄 오랑캐 놈들에게 정파 무림의 힘을 보여주자!”

우익에서 정도맹 지휘관이 힘차게 외쳤다.

“그간 저 새끼들 때문에 숨도 못 쉬고 살아왔던 걸 떠올려라! 싹 다 쓸어버리고 중원을 먹는 거다!”

이에 질세라 좌익에서는 사도련의 무인들이 기세를 드높였다.

“전원, 돌진하라!”

“우오오오오!”

각양각색의 문파와 방파.

손발을 맞춰본 적 없는 이들이 유기적인 움직임이 가능할 리 없다.

서달은 적당한 시점에 양익에 배치한 무림인들을 출격시켰고, 그들은 지금부터 적이 후퇴하거나 전멸할 때까지 좌우에서 전장을 밀어붙일 터였다.

대규모 전쟁을 경험한 적 없는 이들이나, 무림인 개개인의 무력은 완전무장한 일반 병사들을 상회한다.

서달은 무림인들을 이용해 전장의 좌우에 파도를 일으킬 생각이었다.

“빌어먹을! 함정이다! 선회하라!”

설마 4만의 궁수를 미끼 삼았을 줄이야.

유인책에 걸린 궁기병대의 지휘관이 후퇴를 명했으나, 너무 늦었다.

지태율은 병력을 둘로 나눠 돌진시켰고, 명의 경기병은 날카로운 쐐기가 되어 궁기병대를 찢어발겼다.

“후퇴, 후퇴하라! 전열은 포기해! 살릴 수 없다!”

중앙 전장을 지나쳐 명의 전진 거점까지 다다른 상황이다.

서달이 있는 본대와 제법 거리가 있어서 방심하고 있던 궁기병들은 갑자기 튀어나온 경기병에게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궁기병의 상당수는 놀라운 기마술로 급선회에 성공했으나, 가속도가 붙기 전에 정도맹과 사도련의 무인들이 그들을 덮쳤다.

“돌진! 돌진하라!”

“다 죽여라! 몽땅 쓸어버려!”

무림인들은 말을 타지 않고 맨몸으로 달렸지만, 빨랐다.

내공을 끌어올려 경공을 펼치자 폭발적인 속도로 거리가 줄어들었다.

검, 도, 창, 도끼, 비수, 낫, 심지어 맨손까지…….

각양각색의 무기와 복장은 조잡하기 짝이 없었으나, 그들은 강했다.

꽈아아아앙!

뒤를 잡힌 궁기병이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검기와 도기가 난무하고, 시퍼런 강기가 기마와 기병을 통째로 짓이겼다.

난장판이란 말이 어울리는 광경이었지만, 수 대에 걸쳐 갈고 닦은 무예들은 놀라운 살상력을 보여주었다.

“이, 이따위 잡것들에게…!”

수적 열세만 아니었다면.

뒤를 잡히지만 않았다면.

제대로 진형을 갖추고 싸웠다면!

원의 지휘관은 억울함과 울분에 휩싸여 부들부들 떨었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건 말을 달리는 것밖에 없었다.

“오오오오! 이겼다!”

“보았느냐! 이것이 중원 무림의 저력이니라!”

궁기병대를 퇴치한 무인들이 목에 핏줄이 서도록 소리 질렀다.

힘이 있어도 감히 대항할 수 없었던 핍박의 세월.

난생처음 호쾌하게 싸웠고, 싱거울 정도로 쉽게 승리했다.

그들은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는 궁기병들을 보며 그간의 울분을 털어냈다.

“벌써 저러면 안 되는데…….”

조용히 전황을 지켜보던 여규가 중얼댔다.

“병신들이 싸움이 끝난 것도 아닌데 들뜨기는……. 어디서 맨날 쳐 맞고 다녔나. 공격 한번 막아냈다고 저 난리야?”

철중구도 어이가 없는 듯 혀를 찼다.

서달은 그들을 돌아보며 껄껄 웃었다.

“병력의 차이가 너무 크네. 저들은 군을 움직일 지휘관도, 무장도 모자란 상황이지. 지려야 질 수가 없는 싸움이야. 그간의 울분을 시원하게 토해내는 것도 나쁘지 않지.”

하지만 서달은 금세 표정을 진지하게 바꿨다.

“적이 준비한 수를 막았고, 사기도 끌어올렸으니 이제 전진만이 남았네. 이대로 진군하여 대도를 함락시킬 것이야.”

적을 2만 명 가까이 쓰러뜨릴 동안, 아군의 손실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적이 무슨 수를 쓰든 힘으로 뭉개면 된다는 확신을 얻었다.

서달은 손을 들어 본대를 전진시켰다.

전원이 기병으로 구성된 원과 달리 명의 군대는 육 할 이상이 보병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명의 본대가 한 발 한 발 전진할 때마다 기주 평야가 흔들렸다.

서달이 움직이자, 앞서 나간 병력도 전열을 추스르고 상우춘이 있는 전장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뭔가 이상해.”

서달조차 승리를 낙관하는 상황.

모두가 활짝 웃는 가운데 마른 비만 홀로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별비야. 이거 느껴져?”

“크앙?”

마른 비의 말을 들은 별비는 감각을 끌어올렸고, 곧 몸을 딱딱하게 굳혔다.

그 반응을 본 마른 비는 별비의 등에서 훌쩍 뛰어내리며 외쳤다.

“아저씨! 빨리 달릴 수 있는 병력…! 말 탄 병사! 그거 아직 남았어?”

서달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마른 비를 돌아봤다.

“기병을 말하는 건가? 적색창기병과 경기병을 전부 내보내서 예비병은 없네. 왜 그러지?”

마른 비는 심각한 얼굴로 대꾸했다.

“저 멀리에 뭔가 있어! 당장 움직여야 해! 상우춘 장군이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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