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6화
“상우춘 장군이 위험하다고?”
서달은 고개를 돌려 상우춘을 찾았다.
적색창기병과 케식이 맞붙은 평야의 한복판.
상우춘과 바투는 피와 살이 난무하는 흉험한 전장 속에서도 한눈에 띌 만큼 치열한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은 처음 맞붙은 이래 한시도 쉬지 않고 창칼을 주고받았다.
“……밀리진 않는 것 같은데?”
상우춘의 무위는 명군 최강이라 불릴 자격이 있었다.
사나운 초원 전사 중에서 고르고 고른 무장인 바투에게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양군을 대표하는 장수들은 승기를 가져오기 위해 일합마다 생사가 오가는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저기가 아냐! 훨씬 뒤야! 저 뒤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어!”
마른 비는 다급하게 외쳤지만, 서달은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일신에 지닌 무력도, 전장을 보는 눈도 아직은 마른 비보다는 서달이 뛰어나다.
하지만 평생을 전장에서 살아온 서달은 아무런 징후를 느끼지 못했다.
“……확실한가? 병력에서 밀리는 판에 정면 힘 싸움과 궁기병을 이용한 견제까지 막혔어. 원은 더 이상 취할 수 있는 전략이 없을 터인데…….”
수천에서 수만이 붙는 전장이라면 별동대를 이용한 급습이나 갑작스런 군진의 변형 같은 유기적 전술을 시도할 만하다.
하지만 이건 수십만 단위의 대전이며, 흐름을 뒤엎을 만한 병력이 움직인다면 서달이 놓칠 리 없었다.
하다못해 압도적인 무장이나 잘 훈련된 특전대가 있다면 모르겠지만, 원에는 그럴 만한 장군도, 정예병도 없었다.
“아냐. 분명히 뭔가 있어. 날 믿어야 해, 아저씨.”
마른 비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너무도 진지한 얼굴이라 서달은 그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알겠네. 내가 무얼 하면 되겠는가?”
옆에서 듣던 부장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전권을 위임받아 전장에 나온 이상 서달은 자신의 판단대로 움직인다.
설령 주원장의 명이라 할지라도 현장에서 적절치 않다고 판단되면 자신의 뜻대로 병력을 운용하는 게 서달이란 남자였다.
한데 명 최고의 지장이라는 서달이 군략을 모르는 야인에게 조언을 구해?
부장들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만 끔뻑댔다.
“보병으론 늦어. 기병이 있어야 하는데…… 예비병이 없다면 큰일이네.”
마른 비는 난감한 표정으로 전방을 주시했다.
서달은 잠시 눈을 감았다 뜨더니 외쳤다.
“기수! 깃발을 이리로 가져와라!”
서달의 명을 전장에 전파하는 깃발.
기수가 철로 된 깃대에 ‘서(徐)’라는 글자가 새겨진 대형 깃발을 들고 허둥지둥 달려왔다.
“받게! 이거라면 전장의 병사들을 움직일 수 있을 거야!”
사람 키의 네 배는 될 법한 철봉.
기수는 낑낑대며 깃대를 마른 비에게 넘겼다.
“굉장히 무겁습니다! 조심…!”
마른 비는 덩치 큰 기수가 양손으로 들고 있던 깃대를 한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가볍게 들어 올렸다.
기수의 놀란 얼굴을 뒤로 하고, 마른 비는 서달의 깃발을 하늘 높이 쳐들었다.
“상우춘 장군에게 갈 거야! 다들 날 따라와!”
마른 비는 일행에게 외쳤고, 대답도 듣지 않은 채 달려 나갔다.
멍하니 서 있던 철중구가 뜨악한 얼굴로 구시렁댔다.
“저 미친…! 쟤 또 뭘 본 거야? 저길 들어간다고? 괜히 끼어들었다가 뒈지는 거 아녀?”
“그럼 비아 혼자 가게 놔두려고?”
여규가 철중구의 어깨를 툭 치더니 몸을 날렸다.
“겁쟁이로군.”
전룡도 도발적인 말을 남기고 뒤를 따랐다.
그의 옆엔 당연하다는 듯 영령이 따라붙었는데, 능숙한 자세로 보아 전장에 난입하는 게 처음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녀는 철중구를 위아래로 훑더니 말했다.
“아저씨. 무서우면 무리하지 마. 싸우다 다리 풀리면 죽거든. 숨어 있어도 비웃지 않을게.”
자신에게 가해지는 중력을 조절한 영령은 전룡에 못지않은 속도로 달려 나갔다.
철중구는 어이가 없다는 듯 인상을 찌그러뜨리며 외쳤다.
“시벌! 뭐가 어쩌고 어째?! 겁쟁이? 무서워? 말 다 했냐! 이것들이 싸움의 천재를 뭐로 보고…!”
그는 벌게진 얼굴로 튀어나가다가 멈칫했다.
일행 중에 홀로 남아 있는 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뭐야? 안 갈 거요?”
머뭇거리는 자는 구칠이었다.
어쩐 일인지 그는 똥마려운 개처럼 끙끙대고 있었다.
구칠은 슬쩍 눈을 돌려 서달의 눈치를 살피더니 철중구에게 가라는 손짓을 했다.
“나, 난 이제 개방의 형제들에게 합류해야 할 것 같네. 전쟁이 끝나고 만나세.”
구칠은 그 말만 남기고 우측 전장으로 황급히 몸을 날렸다.
철중구는 기가 찬 얼굴로 중얼댔다.
“가라고 할 때는 안 가고 버티더니 싸울 때가 되니까 사라져? 별 거지 같은……. 아, 거지 맞구나?”
철중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 일행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죽어라아아!”
“카아압!”
명의 전진 거점을 치러 간 궁기병대가 패주를 시작한 뒤에도 양측 최정예들은 혈투를 벌이고 있었다.
난마로 뒤엉킨 기마대가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일진일퇴의 공방을 벌였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지칠 줄 모르는 두 명의 무장이 존재했다.
콰차창! 쩌정! 콰캉―!
상우춘과 바투의 무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한 번만 삐끗해도 황천으로 갈 생사결이 끝난 건 바투 때문이었다.
그는 상우춘의 언월도를 받아넘긴 후 기마를 움직여 뒤로 물러섰다.
“후우, 후욱…! 뭐냐! 한참 흥이 오르는데 왜 물러서는 거지?!”
상우춘이 언월도로 바투를 가리키며 외쳤다.
통짜 쇠로 된 붉은 갑주는 군데군데가 깨지고 박살 나 있었다.
초원의 전사라면 누구나 알아보는 바투의 푸른 갑옷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바투는 깨져서 너덜거리는 오른쪽 견갑을 탈착한 후 땅에 버리며 말했다.
“예상외로 강하군. 이대로는 끝이 안 나겠어. 난 가겠다.”
상우춘의 눈썹이 꿈틀댔다.
“……가다니? 결전에 임한 장수가 끝을 맺지 않고 등을 돌린다고? 황실 삼대 무장이자 초원 최고의 명장이란 놈이 도망을 친단 말이냐?!”
“너와 달리 난 신경 쓸 게 많다. 여휘와 무칼리 중 한 명만 있었어도 훨씬 홀가분했을 텐데. 그랬다면 지금과는 많은 게 달라졌겠지.”
운이 좋은 줄 알라는 투였다.
거기까지 말한 바투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이… 이놈이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등을 돌려?!”
상우춘에게 그건 지독한 모욕처럼 느껴졌다.
그는 대노하여 말고삐를 잡아당겼고, 사납게 돌진했다.
강제로라도 다시 돌려세우리라.
팔십 근이 넘는 언월도가 빛을 토할 때였다.
콰창! 쩌저정―!
네 자루의 대도(大刀)가 상우춘의 언월도를 막아섰다.
서로 교차하여 맞물린 도는 철의 방벽처럼 바투를 지켰고, 바투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은 채 유유히 멀어졌다.
“이것들이 감히…!”
상우춘의 이마에 푸른 힘줄이 돋았다.
그는 건방지게 끼어든 놈들을 날려버리려고 힘을 더했지만, 네 자루의 도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상우춘은 그제야 놀란 얼굴로 적들을 살폈다.
‘안 밀리고 버틴다고? 어디서 이런 놈들이…?’
바투의 직속 호위쯤 되는 건가?
사내들은 감색(紺色)의 갑옷을 입고 있었다.
짙은 청색에 적색 빛깔이 감도는 갑주는 척 봐도 명장의 손길이 닿은 물건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특이한 건 오른쪽 어깨 부위의 견갑이었다.
독수리의 날개를 형상화한 그것은 매우 상징적이었고, 이들이 특수한 병사들이란 걸 짐작게 했다.
“가만. 감색의 갑주와 날개 형상의 견갑? 네놈들, 설마…!”
들어본 적 있다.
카안의 친위대인 케식과 황성 근위대인 시위군단.
주로 대도에 머물며 카안의 안위를 지키는 데 힘쓰는 그들과 달리, 초원에 상주하며 오스트갈의 명을 받는 특수부대가 있다는 소문을.
그들은 중원의 문화와 양식에 물든 원의 일반 병사들과 달리 초원의 야성을 고스란히 간직한 전사들이라고 했다.
또한 케식이 수비와 요인 보호에 능숙한 자들이라면 그들은 사나운 늑대처럼 공격에 특화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구르…!”
대초원 최강의 포식자인 독수리의 우익.
상우춘은 자신의 도를 막은 놈들이 오스트갈이 직접 키운 초원의 정예라는 걸 직감했다.
“병력을 맞바꾼 건가?! 재미있군!”
북방의 반란을 막으러 간 오스트갈은 대도의 정예들을 끌고 올라가는 대신, 초원의 정예들을 내려보냈다.
그리고 바투의 휘하에 두어 만약을 대비케 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놈들은 고작 네놈이서 상우춘의 일격을 막을 정도로 강했다.
“흐흐흐. 이건 생각을 못 했군. 허나 네놈들… 날 너무 우습게 봤구나.”
상우춘은 옅은 웃음을 흘리더니 눈을 빛냈다.
초원의 정예?
그게 어쨌단 말이냐.
제법이긴 하나 그래 봤자 일반 병사일 뿐.
언월도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자 지구르들의 팔이 떨리기 시작했다.
“……?!”
흔들림 없던 얼굴들에 다급함이 들어찼다.
지구르들이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행동을 취하려는 찰나, 상우춘의 언월도가 수평으로 그어졌다.
“카아압!”
부아아아악―!
피가 솟구치고, 몸통이 양단된 전사 네 명이 말에서 굴러떨어졌다.
순식간에 목숨을 잃은 지구르들의 얼굴엔 경악이 서려 있었다.
“잔챙이들 상대로 어깨에 힘주던 놈들이 감히 누굴 막아?”
상우춘은 쯧, 혀를 차더니 전면을 바라봤다.
지구르들이 시간을 버는 사이, 바투는 어느덧 작게 보일 만큼 멀어져 있었다.
“바투! 부하들을 죽게 내버려 두고, 꼬랑지 만 개처럼 도망치는 거냐?!”
쩌렁 울리는 호통은 전장의 소음을 잡아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그건 아군의 사기를 올리는 동시에 적들의 기세를 꺾기에 충분했다.
상우춘은 언월도를 휘두르며 외쳤다.
“보아라! 말 탄 오랑캐 놈들이 떠받드는 무장의 수준이란 고작 이 정도다!”
그는 상(常)의 글자가 새겨진 깃발을 기수에게서 빼앗아 하늘 높이 들어 올렸다.
“명의 군사들이여! 힘을 내라! 나 상우춘이 있는 한 패배란 없다!”
“오오오오!”
폭발할 듯 치솟는 군기.
언제나 그랬듯 상십만은 이번에도 승리했다.
“이대로 진격해 끝을 낼 것이다! 전군, 나를 따르라!”
“우와아아아!”
팽팽하던 전장의 무게추가 단번에 기울기 시작했다.
금빛 갑주를 걸친 케식들까지 말머리를 돌려 바투의 뒤를 따르니, 원의 전열은 삽시간에 무너져 내렸다.
“바투, 이 병신 같은 놈이…! 이건 역사에 기록될 전투란 말이다! 이따위 졸전을 벌이려고 여기까지 온 것이냐!”
상우춘은 화가 나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화려한 전투를 치를 수만 있다면 여기서 죽어도 상관없다는 각오로 전장에 나왔는데, 적장은 그의 기대를 배신했다.
푸른 갑옷의 사내는 케식과 중기병대를 이끌고 썰물처럼 빠져 버렸다.
“전부 죽여라! 등을 보인 생쥐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고 카안에게 간다!”
상우춘과 명의 기병대가 뒤를 잡힌 적들을 일방적으로 도살할 때였다.
정신없이 도주하던 적들이 좌우로 갈라지며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수만의 기병대는 무언가를 감싸고 돌 듯 우회했고, 케식은 중간에, 중갑 기병대는 더 나아가 후미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들이 완전히 멈췄을 때, 하나로 뭉친 거대한 진형이 모습을 드러냈다.
“뭐냐, 저건? ……쐐기 진형?”
말을 달리던 상우춘이 눈썹을 찌푸렸다.
뾰족한 삼각형 형태의 돌격진.
그 최선두에는 푸른 갑옷을 걸친 바투가 있었다.
다각, 다각.
바투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해일처럼 밀려오는 명군을 바라봤다.
그는 시선을 상우춘에게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단단히 밀집하라. 지구르들은 내 뒤를 받치고, 케식은 진형이 무너지지 않도록 외곽을 보호하라. 중심은 중갑 기병대가 받친다.”
수만의 병력으로 가려놓은 후방엔 이 순간을 위해 준비한 바투의 안배가 있었다.
서달이 4만의 궁병을 미끼로 궁기병을 끌어들였듯, 바투 또한 지금까지의 전투 흐름 전체를 먹이로 던졌다.
바투를 쫓느라 명의 기병대는 보병 중심의 본대와 멀어져 버렸다.
개개인의 무력은 강하나 진형이라 할 만한 것 없이 무작정 돌진해오는 좌우익의 무림인들.
병과(兵科)의 연계가 끊기고, 군단 사이의 거리가 벌어진 지금이 바투가 기다린 적기였다.
“이 한 수로 상우춘과 서달의 목을 베어 전쟁을 끝낸다.”
초원 최고의 지휘관이자, 전장의 독수리라 불리는 사내가 푸른 장창을 들어 올렸다.
“전군! 돌격하라!”
명군의 피를 갈구하는 독수리의 발톱이 전장에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