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7화
“이놈이 설마…?!”
수많은 전장을 누빈 용장.
상우춘은 바투의 의도를 대번에 파악했다.
“나와 정예 기병대를 부수고, 서달 장군께 닿겠다?”
지금까지 벌어진 전쟁의 흐름 전체가 놈의 노림수였다.
모든 면에서 열세인 상황.
이건 바투가 준비한 최강의 수이자, 승기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작전이었다.
“대단하군. 평가를 수정하지.”
자신도, 서달도 지략에서 놈에게 밀렸다.
촘촘하게 배치한 병과의 연계가 끊어지고, 군단 사이의 거리가 벌어졌다.
지금 전장의 형세는 바투가 의도한 대로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한 가지 전제가 성립해야만 가능한 전술이지.”
바투는 수십만이 모인 전장을 일거에 꿰뚫으려 하고 있었다.
이 돌진이 성공하려면 바투와 원 기병대의 무력이 이쪽을 압도해야 한다.
상황 파악을 끝낸 상우춘은 여유롭게 웃었다.
“적색창기병! 내 뒤를 받쳐라!”
정면 힘 싸움을 원하는가?
좋다. 원하는 대로 해주마.
그리고 철저하게 부숴줄 것이다.
상우춘의 명에 따라 살아남은 적색창기병의 정예들이 밀집했다.
‘병력을 물리긴 늦었다. 첨단부의 바투와 지구르만 부숴놓으면 돼. 그때쯤이면 좌우익의 경기병과 무림인, 전진배치한 중보병이 당도한다.’
먼저 자신과 함께 적을 쫓아온 적색창기병은 2만에 불과하지만, 서달은 중보병과 궁병을 전진시켜 중앙 전장에 바짝 붙여놓았다.
기동력의 차이로 거리가 벌어졌더라도 바투와 지구르를 몰살할 때쯤이면 지원군이 당도하리라.
후속으로 밀려오는 병력은 그들과 함께 처리하면 된다.
상우춘은 절대 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창을 내밀어라! 내공을 끌어올려 몸을 보호하고, 적들의 선봉을 뭉갠다! 대 명군의 힘을 보여주자!”
“네, 장군!”
“오랑캐 놈들을 박살 낼 준비가 됐습니다!”
“오오오오!”
상우춘의 고무에 힘입은 적색창기병들이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충돌을 코앞에 둔 상황.
핏빛 기마대가 승리를 그리며 돌진할 때였다.
“지금이다. 술사들이여.”
푸른 장창을 꼬나든 바투가 후방으로 슬쩍 시선을 돌렸다.
원 진영의 최후미.
전장 전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정갈한 차림의 사내들이 나타났다.
나무 지팡이를 들고, 동물의 뼈로 만든 장신구를 귀와 목에 걸고 있지만, 그들은 전혀 촌스럽거나 지저분해 보이지 않았다.
몽골의 전통적인 무늬들이 새겨진 옷은 중원의 복식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멋스럽고 깔끔했다.
단정한 머리와 깨끗이 세안한 얼굴도 일반적으로 떠올릴 원시적인 술사들과는 달랐다.
오십여 명의 몽골 술사들은 일렬로 길게 늘어섰고,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술언을 외웠다.
“북방의 바람이여. 그 쾌속한 질주의 능을 초원의 자식들에게 허락하소서.”
휘오오오―
청아한 바람이 평야를 휩쓰는 순간!
원 기병대에 변화가 일어났다.
“히히히히힝―!”
돌격 중인 기마들이 힘차게 울부짖었다.
근육이 팽창하고, 땅을 디디는 다리에 힘이 실린다.
갑작스레 배가된 속도가 돌진력을 상승시키니, 명 기병대는 예상했던 것보다 두 박자는 빠른 시점에 적을 맞이해야 했다.
“어, 어엇…?!”
꽈아아아아앙!
“크아악!”
“카학!”
초원 최강의 정예병.
지구르의 병기는 몽골식 만도가 아니었다.
기병과 기마를 일격에 썰어버리기 위한 참마도.
철퇴의 무게에 버금가는 중병은 적색창기병의 무기는 물론이고 갑주와 기마를 통째로 양단하며 전선을 뭉갰다.
“초원을 누비는 늑대의 영이여. 그 사나움과 용맹을 전투에 임한 전사들에게 부여하소서.”
부오오오―
그건 마치 햇볕이 내리쬐는 듯한 광경이었다.
술사들이 늘어선 언덕에서 주홍빛 빛의 줄기가 퍼지자 전장의 기병들이 숨을 크게 들이켰다.
내공의 증폭과 투지의 상승.
원 기병대의 뇌리에서 죽음의 공포와 패배에 대한 불안감이 걷혔다.
“오오오오! 천하의 지배자 카안을 위하여!”
꽈아아앙―!
거인의 손바닥이 불개미 떼를 쓸어버리는 것 같은 광경이었다.
감색의 지구르 군단은 압도적인 힘과 기세로 적색창기병의 선두를 날려버렸다.
절대 밀리지 않으리라 자신했던 명의 정예들이 갑옷과 함께 찌그러진 채 하늘을 날았다.
“이, 이럴 수가…!”
상우춘은 상상도 못 한 전황에 경악을 토했다.
그는 자신을 제외한 좌우의 기병들이 무너지는 걸 지켜봐야만 했다.
너무 큰 충격에 정신을 놓은 사이,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는 실망했겠군. 다시 붙어 볼까?”
바투.
푸른 장창이 공기를 찢으며 엄습했다.
상우춘은 언월도를 들어서 방어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콰차차차창!
몸은 물론이고, 기마마저 밀린다.
바투의 찌르기에 상우춘의 돌격은 강제로 멈춰 세워졌다.
이어지는 연격에 상우춘은 애마와 함께 통째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으… 크윽! 흡…!”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벅차다.
술력을 등에 업은 바투는 조금 전까지 막상막하의 승부를 펼치던 상우춘을 가볍게 압도하고 있었다.
“갈 길이 멀다. 술력이 다하기 전에 서달이 있는 곳까지 가려면 시간이 없어.”
바투는 창을 깊게 끌어당기며 말했다.
“이만 죽어라.”
쾌애애애액―!
전장 한복판에서 푸른빛이 번뜩였다.
마른 비는 별비와 함께 정신없이 달리고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는 전장.
가장 먼저 닿은 건 후미에 위치한 궁수대였다.
‘우회하면 늦어!’
4만에 이르는 인파를 돌아갈 순 없다.
지금도 위태로운데 그렇게 했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벌어지리라.
마른 비는 속도를 늦추지 않고 외쳤다.
“별비야! 길을 열어!”
마른 비의 뜻을 짐작한 별비가 한발 앞서 달려 나갔다.
별비는 궁수대가 가까워지자 자연기를 실은 포효를 터뜨렸다.
“커허허헝!”
인간의 외침이었다면 이토록 효과적일 수 없었으리라.
별비의 포효는 진군 중인 궁수대 전원을 돌려세우는 데 성공했다.
“음?!”
“이, 이게 무슨…?”
“아니?!”
궁수대는 고개를 돌렸고, 집채만 한 백호가 달려오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그 뒤에 서달의 깃발을 든 사내가 무지막지한 속도로 따라붙는 것도.
『길을 열어! 백아가 지나간다!』
광범위 언령.
별비가 주의를 집중시킨 뒤라 더욱 효과적이었다.
병사들은 마른 비와 별비가 진형을 통과하려 한다는 걸 눈치채고 재빨리 길을 열었다.
4만의 병력 사이에 뻥 뚫린 대로가 생겼다.
마른 비는 궁수대 사이를 전속력으로 통과하며 외쳤다.
『긴장을 풀지 마!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급작스런 상황에 대비해!』
마른 비도 아직까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정확한 언질을 줄 순 없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승리가 가까워졌다고 믿고 느슨해졌던 병사들이 긴장의 끈을 조였으니까.
“알겠습니다! 소협!”
“몸조심하십시오!”
“백아 님! 명의 병사들에게 신수의 가호를…!”
마른 비와 별비가 전장으로 향한다는 걸 깨달은 병사들이 격려를 전했다.
병사들은 둘을 본 것만으로도 힘을 얻었고, 진군 속도를 끌어올렸다.
진형이 원래대로 돌아가려 할 때, 여규와 전룡, 영령이 당도했다.
“길을 열어줘요! 우리도 지나가야 해요!”
여규가 외쳤으나 병사들의 눈길은 앞서 나간 마른 비에게 쏠려 있었다.
무엇보다 그의 방식은 너무나 온건했다.
병사들의 주의를 끌어당긴 건 전룡이었다.
이쪽을 돌아볼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한 수.
전룡은 소름이 돋을 만큼 진한 살기를 피워 올렸다.
“헛…!”
“뭐, 뭐냐?!”
생명체 본연의 생존 본능을 위협하는 살의.
전룡은 병사들의 고개를 강제로 돌려버렸다.
「비켜라! 전부 베어버리기 전에!」
전룡은 귀안을 번뜩이며 전음을 퍼뜨렸다.
무지막지하지만 실로 효과적인 방법.
병사들은 움찔하며 뒤를 돌았으나, 길을 비키는 게 아니라 싸울 태세를 갖췄다.
그들을 물러서게 한 건 여규였다.
「비켜줘요! 수라가 전장으로 향합니다!」
여규는 길을 트는 요령을 깨달았고, 전룡의 별호를 재빨리 외쳤다.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이 황급히 물러났다.
닫히려던 길이 다시 열렸다.
“여 소협! 무리하지 마십쇼!”
“우 소협을 지켜주세요!”
여규에게 호의적인 반응이 쏟아졌다면,
“수라! 넌 싸우다 뒈져 버려라!”
“도살자 새끼! 서 장군님의 명령만 아니었다면 네 뒤통수에 화살을 꽂았을 거다!”
전룡에게는 저주와 악담이 퍼부어졌다.
하지만 익숙한지 전룡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히려 여규가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전 형. 대체 남쪽에서 무슨 짓을 한 거예요?”
“그냥 베었다. 덤비는 놈들은 전부 다. 덤비지 않으면 찾아가서.”
전룡은 잠시 시간차를 두고 말했다.
“사정이 있어서 장사성에게 몸을 의탁했었어. 그때는 적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랬군요.”
여규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으리라.
여규와 전룡, 영령은 대화를 멈추고 더욱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철중구가 도착한 건 그때였다.
“길 열어! 나도 지나가야 해!”
안타깝게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여규의 전음을 들었던 철중구는 ‘오호라, 이래서?’ 하는 표정으로 외쳤다.
「투도가 전장으로 간다! 길을 열어!」
여전히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기껏해야 후미에 위치한 수십 명이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울컥한 철중구가 이번엔 이름을 외쳤다.
「사호의 일인, 철중구가 지나간단 말이다!」
점점 좁아지던 길이 완전히 닫혔다.
궁수대의 후미에 도착한 철중구는 당황하며 외쳤다.
“이 시바…! 나도 일행이라고! 길 열란 말이다! 새끼들아!”
철중구는 난처한 표정을 짓는 병사들을 보며 노발대발했다.
“전룡 새끼는 되는데, 왜 내가…?!”
열이 뻗치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던 철중구는 결국 슬픈 표정으로 대열을 우회했다.
‘거의 다 왔어!’
마른 비는 같은 방식으로 중보병의 행렬을 통과했다.
그러자 저 멀리 적진으로 돌격하는 적색창기병이 보였다.
그리고 좌우로 도망치는 원의 궁기병과, 그들을 쫓는 경기병대를 시야에 담을 수 있었다.
마른 비는 적색창기병이 돌진하는 방향, 그 너머를 바라봤다.
‘술력! 아까 느낀 건 술력이 분명해!’
마른 비와 별비가 느낀 이상 징후.
그건 바로 술력의 준동이었다.
과거 점창과의 전쟁에서 잎의 노래가 와족 전사들에게 내린 축복처럼, 적은 대단위 술력을 퍼부으려는 게 틀림없었다.
술력에 익숙한 자신과 달리, 서달이나 상우춘은 주술에 대해 모를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제대로 펼쳐지면 상식을 초월한 효능을 발휘하는 게 바로 술법이었다.
마른 비가 서둘러 전장으로 나온 건 예상치 못한 수를 막고, 상우춘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어? 잠깐…! 그게 전부가 아니야?’
마른 비는 훌쩍 뛰어올라서 전장을 넓게 훑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첨예한 군기를 뿜어내는 거대한 쐐기 진형과, 그 뒤편 언덕에 모인 술사들을.
원의 기병대가 가다듬은 힘과 주술사들의 역량을 가늠한 결과, 이건 2만가량의 적색창기병으로 막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저걸로는 절대 못 막아! 어떡하지?’
상우춘을 받치는 병력이 턱없이 모자라다.
가장 큰 문제는 힘을 한곳에 집결한 원에 비해 명의 군세는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는 점이었다.
이대로는 병과의 특성을 살리지 못한 채 각개격파당할 확률이 높았다.
심지어 꽁지가 빠져라 도망치던 궁기병마저 쐐기 진형 근처에 이르자, 반전하여 재돌격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어딜 움직여야…!’
제일 먼저 끌어 쓸 수 있는 병력.
그건 아군의 병사 중 가장 기동력이 뛰어난 경기병이었다.
『여길 주목해!』
마른 비는 전력을 다해서 언령을 터뜨렸다.
다행히도 그건 좌우로 돌격하던 경기병들의 이목을 끄는 데 성공했고, 마른 비는 허공에 뜬 채 깃발을 휘둘렀다.
파라라라락―!
서달의 깃발을 본 경기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마른 비는 하강하며 다시 한번 외쳤고, 손에 쥔 깃발을 있는 힘껏 휘둘렀다.
『경기병! 지금부터 내 지시를 따른다!』
전장을 울리는 메아리.
훌쩍 뛰어오른 별비가 기마처럼 마른 비를 자신의 등에 태웠다.
『지금부터 상우춘 장군을 구하러 간다! 전원, 나를 따라와!』
대장군기를 철창처럼 옆구리에 낀 마른 비가 별비와 함께 날아올랐다.
“지시를 따르라고?”
“상우춘 장군을 구하러 간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우 소협은 지휘권이 없잖아?”
선뜻 따라나서지 못한 채 우왕좌왕하는 경기병들.
상황을 정리한 건 지태율이었다.
“대장군기가 안 보인단 말이냐! 서달 장군님의 허가가 떨어진 거다! 지금부터 경기병은 우 소협의 명을 받든다!”
콰아아아앙!
지태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적색창기병과 지구르가 충돌했다.
술력이 치솟고, 전세가 단번에 기울기 시작했다.
“아, 아니?!”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냐?!”
경기병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마른 비의 뒤를 쫓기 시작했다.
“안 돼! 상우춘 장군이 위험해! 별비야, 뛰어!”
“크항!”
달려가던 별비가 도약했다.
하늘 높이 솟구친 몸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마른 비가 깃대를 집어 던졌다.
쾌애애애액―!
화살처럼 내리꽂히는 강철 깃대.
사선으로 날아간 철봉은 적색창기병의 머리 위를 가로질렀다.
쿠아아앙!
하늘에서 던져진 깃대가 지면 깊숙이 박혔다.
전장의 한복판, 대장군기가 바람을 받아 펄럭이는 광경은 찬연하기만 했다.
화탄이 터진 것처럼 움푹 파인 그곳엔 말에서 굴러떨어진 바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