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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88화 (288/463)

288화

“이만 죽어라.”

몸 안쪽으로 깊게 당긴 장창.

초원의 호흡법으로 쌓은 내공을 철창의 끝에 응집한다.

회전을 담은 찌르기는 죽이고자 한 적을 살려둔 적 없는 필살의 절기였다.

“뇌포(雷砲).”

퀴아아아앙―!

바투의 창이 상우춘의 몸을 꿰뚫으려는 찰나, 하늘에서 철봉이 내리꽂혔다.

“음?!”

쿠아아아앙!

난데없는 급습이었다.

몸을 빼내는 데는 성공했지만, 상우춘의 숨통을 끊지 못했다.

궤도가 빗나간 창은 왼쪽 옆구리를 긁는 데 그쳤다.

그것만으로도 상우춘은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지만, 입맛이 쓸 수밖에 없었다.

“어떤 놈이…….”

말에서 굴러떨어진 바투는 몸을 일으키다가 그대로 굳었다.

웅장하게 펄럭이는 깃발 아래, 해체되다시피 박살 난 전투마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 안 돼…!”

바투의 비명은 처절했다.

몽골족에게 말이란 어떤 보물보다도 귀중하기 때문이다.

말이 없으면 이동하지 못하며, 싸울 수 없다.

교감을 주고받는 애마는 초원의 전사에게 있어 배우자보다도 가깝고 소중한 존재였다.

처참하게 죽은 애마를 조롱하듯 펄럭이는 깃발.

그건 바투에게 끔찍한 상실감과 분노를 안겨주었다.

“서달! 네 이놈…!”

언제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바투의 눈이 전면을 훑었을 때, 화염을 담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들어찼다.

있어야 할 서달이 아니라 웬 이민족 청년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경기병! 깃발이 있는 쪽으로 움직여!』

깃대를 집어 던진 청년은 입술을 달싹이면서 하늘에서 하강하고 있었다.

“커허헝!”

범의 울음소리가 들리고, 새하얀 거체가 뛰어올랐다.

청년을 태운 맹수는 사뿐히 착지했고, 초원을 달리는 기마처럼 질주하기 시작했다.

범의 덩치가 워낙 커서 적색창기병의 후미에 있는 청년의 얼굴이 보였다.

머나먼 남방에서 올라온 듯한 사내는 척 보기에도 비범한 기운을 물씬 풍기고 있었다.

“적색창기병! 길을 열어!”

창칼이 부딪치고 단말마의 비명이 난무하는 와중에도 청년의 목소리는 뚜렷이 들렸다.

바다가 갈라지듯 쫙 열린 길로 장대한 백호가 달리기 시작했다.

“……뭐냐? 저건?”

바투는 창을 든 팔로 눈을 비볐다.

지금 꿈이라도 꾸는 건가?

백호를 기마처럼 타고 다니는 청년?

척 봐도 군인은 아닌데, 적색창기병이 군말 없이 길을 열어줘?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바투가 정신을 빼앗긴 사이, 마른 비는 거리를 좁혔다.

퍼뜩 정신이 든 바투가 눈길을 내렸을 때, 부상당한 상우춘은 적색창기병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크윽…! 더럽게 아프군.”

상우춘은 옆구리를 부여잡은 채 입가에서 피를 흘렸다.

그러면서도 투지를 잃지 않은 눈으로 바투를 노려봤다.

“그게 말로만 듣던 초원의 주술인가? 그건 너의 힘이 아니다, 바투. 난 네게 패한 게 아니야.”

저 지경이 되고도 저런 소릴 늘어놓다니.

호승심과 투지만큼은 비할 데 없는 남자였다.

바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한다. 전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협력을 구했지만, 난 원래 술사들을 좋아하지 않아. 그건 그렇고, 저건 대체 뭐냐.”

바투의 창은 달려오는 마른 비와 별비를 가리키고 있었다.

상우춘이 쓰러진 이상 적색창기병의 전멸은 기정사실이다.

막간을 이용해 바투는 궁금증을 해소하고자 질문을 던졌다.

답을 듣고 나서 상우춘을 처리할 생각으로.

“쿨럭…! 소문이 대도까지는 전해지지 않았나? 흐흐, 창피하구만. 꼬맹이 덕분에 목숨을 구하다니.”

상우춘은 등 뒤에서 급격히 확대되는 기운을 느끼며 말했다.

“긴장해라, 바투. 아군의 비밀병기가 다가오고 있으니까. 따로따로면 몰라도 저 둘이 함께 덤비면 명군 내에서도 당할 자가 없다.”

“비밀병기? 당할 자가 없다고?”

바투는 지그시 인상을 썼다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과 짐승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실로 막강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뿐이다.

어디서 괴상한 것들을 영입한 모양인데, 그래 봤자 술법을 받은 자신이 질 리는 없었다.

바투는 상우춘을 처리하고 청년을 맞이하기로 했다.

“하늘에 가서 지켜봐라. 누가 이기는지…… 음?!”

갑작스레 엄습하는 기운!

바투는 황급히 철창을 들어 올렸다.

콰차차창!

창신을 후려갈긴 새하얀 기운에, 바투는 오 장이나 주르륵 밀려났다.

시선이 닿은 곳엔 앞발을 휘두른 백호가 있었다.

‘뭐, 뭐냐, 이게? 강기? 짐승이 강기를 쓴다고?!’

놈들이 당도할 때까진 시간이 있었다.

그사이에 상우춘을 처리할 생각이었는데!

바투가 다급히 몸을 날리며 외쳤다.

“지구르! 상우춘을 처리해라! 놈이 도망가게 둬선 안 돼!”

바투는 직접 달려들며 창을 뻗었지만, 늦었다.

전장을 일직선으로 가로지른 섬광은 벌써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그걸 막으러 온 거야. 장군을 해치게 둘 것 같아?”

위와 아래에서 동시에 가해진 공격.

바투는 기겁하며 창을 들어 올렸다.

부아아악―! 투쾅!

별비의 발톱에 지구르가 난자되고, 마른 비의 발차기는 바투를 밀어냈다.

좌우에서 후드득 터지는 핏물 사이로 바투의 안색이 변했다.

‘강하다! 예상보다 더…!’

묵직한 일격은 마른 비에 대한 평가를 일거에 뒤집기에 충분했다.

이건 될성부른 새싹 정도가 아니다.

대지에 단단히 뿌리 내린 거목.

믿을 수 없게도 눈앞에 있는 청년은 일가를 이룬 종사나 다름없었다.

휘리릭―!

바투가 놀라건 말건 마른 비는 멈추지 않았다.

그의 몸이 깊게 회전하자 작열하는 푸른 불꽃이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콰아아앙―!

“흐읍…!”

불벼락.

마른 비의 일격은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십좌급의 무장을 또다시 물러서게 했다.

‘틈을 주면 안 돼. 곧바로!’

잠깐이라도 머뭇거리면 당하고 만다.

공격을 하는 건 이쪽인데도 빈틈을 노리는 눈빛에 신경이 바짝 곤두선다.

마른 비는 뒤꿈치를 막은 바투의 창을 발판 삼아 재차 도약했다.

“하앗!”

숨을 크게 들이켠 마른 비는 바투의 머리 위로 솟구쳤고, 폭우 같은 발차기를 쏟아냈다.

사선으로 쏟아지는 무호흡 연격.

햇볕 짱짱한 기주 평야의 하늘에 피륙의 소낙비가 내렸다.

쩡! 쩌저정! 빠바바박!

과연 단단하다.

바투는 창 한 자루로 엄밀한 수비를 구사했고, 마른 비의 연타를 모조리 막아냈다.

쉼 없이 움직이는 철창 사이로 맹수의 눈빛이 빛났다.

‘공격이 끊기면…!’

쩡! 쩌정―!

‘바로 반격이 올 거야!’

마른 비는 직감했다.

소낙비가 헐거워지는 순간, 바투가 공세에 나설 거라는걸.

그리고 그때 오는 건 자신이 받아낼 수 있는 일격이 아닐 터였다.

‘숨이 차…!’

폐에 밀어 넣었던 공기가 바닥을 드러내고 있다.

전력을 다한 움직임은 엄청난 속도로 공기를 잡아먹었고, 호흡을 가쁘게 만들었다.

어떤 공격을 펼칠지 당장 결단을 내려야 했다.

‘그것… 통할까?’

애뢰산에서 자신보다 월등히 강한 설지굉과 싸웠을 때.

하수라면 알아채지 못할 시선의 움직임으로 고수인 그를 속여 넘겼다.

아버지는 그런 얕은수는 잊어버리라 했지만, 그땐 자신이 어리숙했었다.

‘할 수 있어. 해보자!’

마른 비는 자신의 본능을 좇기로 했다.

연타에 분산했던 기운을 한곳에 집중시킨다.

이 한 수로 끝내고야 말겠다는 결의.

굳은 의지와 농밀한 살의는 바투 같은 전사조차 긴장하게 할 만큼 강렬했다.

‘시선…!’

좌측 어깨.

마른 비는 소낙비를 내리찍으며 슬쩍 눈을 돌려서 바투의 어깨를 쳐다봤다.

그리고 그 순간, 곧바로 반응이 왔다.

“역시 아직은 애송이로군.”

바투는 즉각 움직였다.

그는 도리어 마른 비가 바라본 방향으로 기동했다.

“속을 것 같으냐?”

찰나지만, 뭉클대는 살의는 몸 정중앙을 훑고 지나갔다.

한순간에 승부가 갈리는 전투에서 시선으로 속임수를 걸 만큼 대담한 놈이지만, 안타깝게도 무공 경지는 이쪽이 위였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놈이 준비한 최후의 승부수가 온다.

의도를 간파한 이상 무리하게 정면으로 받을 필요는 없을 터.

바투는 마른 비의 기술을 흘리고 반격을 꽂아 넣을 계획이었다.

처맞기 전까지는.

“걸렸어.”

퀴우우웅―

소름 끼치는 파공음이 바투의 정수리로 내리꽂혔다.

필살의 오연격을 일점에 집중한 맹타!

몸을 거꾸로 뒤집은 마른 비가 기동 중인 바투를 요격했다.

투쾅―!

하늘에서 땅을 향해 시전한 중선오격이다.

회피 경로를 예상하고 뻗은 무자비한 강격은 바투를 강제로 멈춰 세웠다.

폭음이 터지자 지구르 전사들이 비명을 질렀다.

“자, 장군! 괜찮으십니까?!”

하지만 그들보다 더 놀란 건 마른 비였다.

완벽히 잡았다고 생각한 적이 건재했기 때문이다.

“크윽…….”

아니다.

건재하진 않다!

창을 수평으로 들어 올린 바투는 중선오격을 방어했지만, 충분한 힘을 싣지 못해 힘에서 밀리고 말았다.

풍압에 얻어맞은 바투는 머리에서 피를 뚝뚝 흘렸다.

지면에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자, 장군께서 무릎을…!”

지구르 전사들 사이에 경악이 번졌다.

바투가 누구인가.

그는 대초원의 혼이라는 오스트갈의 후계로 낙점받은 남자다.

전략전술은 이미 오스트갈을 뛰어넘었으며, 무력만 무르익는다면 대초원 최강의 칭호를 짊어질 전사다.

지구르들은 십여 년간 전장을 누비면서도 그가 낭패를 겪는 건 보지 못했다.

한데 고작 약관에 불과한 청년에게 무릎을 꿇어?

원 기병대 전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동요하지 마라!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이를 악문 바투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일어서는 동시에 창을 휘둘렀다.

창날이 향하는 궤도엔 막 착지에 성공한 마른 비가 있었다.

‘당한다…!’

전력을 기울인 일격이었다.

텅 빈 폐부는 미친 듯이 공기를 빨아들이고 있었다.

몸통을 가르려는 창날 앞에서, 마른 비는 남은 자연기를 끌어모아 타격점에 집중했다.

그리고 이를 악문 채 통증에 대비했다.

바람이 날아든 건 그때였다.

투콰앙―!

사람의 몸통만 한 앞발이 바투를 날려버렸다.

새하얀 거체가 몸을 세우고, 세상 누구보다 든든한 아군이 마른 비를 내려다봤다.

〔저놈, 날 잊은 것 같더라고?〕

“자, 장구운…!”

지구르 전사들의 비명이 터지는 가운데, 별비는 눈을 들어 저 멀리 날아간 바투를 바라봤다.

허공을 가로지른 그는 중갑 기병대 사이에 형편없이 처박혔다.

〔저놈, 엄청난 괴물이다. 그 와중에도 창의 궤도를 비틀어서 막았어. 얻어맞은 방향으로 일부러 몸을 날렸고. 큰 타격은 없을 거다.〕

별비의 예상이 맞았다.

바투는 곧바로 벌떡 일어섰다.

몸 여기저기가 긁혔지만 별비의 급습에 당하고도 저 정도로 끝났다는 건 그의 무력이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이란 뜻이었다.

주술을 받아들인 십좌급의 무장은 결코 녹록한 상대가 아니었다.

빠드드득―!

바투는 소리가 나도록 이빨을 갈았다.

좌우의 전선은 적색창기병을 밀어붙이고 있지만, 진형의 핵이 되는 중앙이 정체된 바람에 돌격은 멈춘 거나 다름없었다.

상우춘이나 서달도 아니고, 듣도 보도 못한 놈들에게 저지당한 바투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도! 내 도를 가져와라!”

바투는 철창을 왼손에 든 채 꼿꼿이 서서 마른 비를 노려봤다.

황급히 진형을 헤치고 온 기병이 보관하고 있던 대도를 건넸다.

자신의 말에 연결해서 끌고 온 여분의 전투마와 함께.

“인간과 짐승. 두 놈 다 토막을 내주겠다! 전부 죽여 버릴 것이야!”

실핏줄이 터진 바투의 눈은 그의 분노가 어느 정도인지를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마상전에 유리하다는 점 때문에 주로 창을 사용하지만, 그의 진신무공은 참마도를 쓸 때 나온다.

그리고 기마에 올라탄 초원의 전사는 땅에서 싸울 때보다 몇 배는 큰 힘을 발휘한다.

비로소 완전한 군장을 갖춘 푸른 독수리가 거세게 울부짖었다.

“전군, 나를 따르라! 저놈들을 짓밟고 서달에게 갈 것이다!”

천하를 일통한 제국군의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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