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히히히히힝―!”
바투가 올라탄 전투마가 앞다리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말의 울음은 신호탄이 되었다.
“대장군을 따르라!”
“주제를 모르는 한족 놈들을 쓸어버려!”
전투마 위에서 철창과 참마도를 비껴든 바투의 모습은 하늘이 내린 신장과 같았다.
군데군데 깨진 푸른 갑옷도 그의 위용을 훼손치 못했으니, 재차 돌진을 시작한 원 기병대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후아…! 저 사람, 진짜 대단하네.”
마른 비는 솔직한 심정을 뱉었다.
개인의 무력이 뛰어난 무인들은 여럿 보았으나, 수십만에 이르는 병력을 통솔하여 전장을 움직이는 대장군을 목격한 건 처음이다.
서달과 상우춘을 가까이서 봤지만 그들의 장수로서의 역량은 확인하지 못했다.
그들도 명장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겠지만, 마른 비가 보기엔 무력도, 통솔력도 바투를 능가하진 못할 것 같았다.
“이건… 정면에서 받으면 안 돼!”
바투와 원 기병대의 돌진을 보고 내린 결론이었다.
지휘 같은 건 모르지만, 싸움의 흐름은 누구보다 잘 안다.
열다섯 살에 점창과의 전쟁에 난입했을 때, 마른 비는 한눈에 전투의 맥을 짚고 불씨를 지핀 경험이 있었다.
야생의 감각은 저걸 정면으로 받으면 필패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지휘관! 적색창기병의 지휘관은…!”
주위를 둘러본 마른 비의 표정이 굳었다.
상우춘이 쓰러지고, 그를 받치던 무장들도 중상을 입거나 사망했다.
항상 선두에 서서 힘으로 적을 분쇄해 온 상우춘은 강력한 무장들을 전부 중앙에 밀집시켜 놓았다.
압도적인 힘으로 적을 찍어 누르는 그것은 지금까진 패배를 모르는 전술이었으나, 이번엔 상대가 나빴다.
지금 적색창기병에는 전장 전체를 움직일 지휘관이 없었다.
“제길…!”
마른 비는 크게 숨을 들이켜고 외쳤다.
“길을 열어! 좌우로 갈라져서 비스듬히 진형을 짜! 적의 돌진력을 흘릴 수 있게!”
상우춘을 구하고, 일시적이나마 바투를 물리쳤다.
마른 비는 몰랐지만, 지금 명군의 이목은 그에게 집중돼 있었다.
마른 비의 명이 떨어지자마자 적색창기병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중앙을 트고, 좌우로 나뉜 병사들은 쐐기 진형을 이룬 원 기병대에 대응하여 사선으로 비스듬히 늘어섰다.
똑같이 힘으로 대응했던 상우춘과는 전혀 다른 발상.
싸움이건 전쟁이건 감당치 못할 힘이라면 흘리는 게 마땅했다.
“소, 소협! 중앙에 혼자 남으시면…!”
병사들을 좌우로 갈라놓은 마른 비는 여전히 중앙에 버티고 있었다.
해일처럼 밀려오는 기병대.
그 선두에 선 바투와 마주 보는 위치였다.
“네놈이 미쳤구나! 짐승과 둘이서 우리의 돌격을 막겠단 말이냐!”
바투의 기세는 살벌했다.
광전사처럼 돌진해오는 그는 마른 비의 오만함을 비웃듯 버럭 소리쳤다.
마른 비가 움직인 건 그때였다.
“그럴 리가. 난 그렇게 무모하지 않아.”
마른 비는 땅에 꽂힌 서달의 장군기를 뽑았다.
그리고 왼쪽으로 몸을 날렸다.
“별비야! 전열을 꺾어!”
“크항!”
그 말만으로도 뜻을 전하기엔 충분했다.
별비가 우측으로 움직인 걸 확인한 마른 비는 쏜살같이 내달리며 쇄도하는 기마를 공략했다.
“하앗!”
투버버벅―!
팔뚝에 껴서 등 뒤로 고정시킨 깃대가 지면을 휩쓸었고, 기다란 철봉이 휘둘러질 때마다 기마의 다리가 부러졌다.
마른 비는 원 기병대와 같은 방향으로 달리며 진형의 좌측을 무너뜨렸다.
“크아앙!”
마른 비가 거리를 계산하며 신중히 움직이는 데 반해 별비는 거리낄 것 없이 날뛰었다.
녀석은 기마보다 빨랐고, 크고 무거웠으며, 압도적으로 강했다.
발톱이 그어지고 날카로운 이빨이 빛을 뿜을 때마다 기마가 뭉텅이로 쓰러졌다.
지구르들은 참마도를 휘둘러 별비를 잡으려 했지만, 별비가 맞아줄 리 없었다.
진형을 따라 달리며 얄밉게 치고 빠지는 전술에 우측 진형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충분해! 이제 빠져! 별비야!”
더 이상은 위험하다.
까딱 실수해서 발이 묶이기라도 하면 그대로 황천행이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전열이 무너지자 뒤를 따르던 기마들이 뒤엉키며 땅을 굴렀고, 지구르들의 피해가 속출했다.
미약하나마 돌진을 늦춘 걸로 만족해야 한다.
마른 비는 원 기병대보다 빠르게 달려서 적색창기병이 기다리는 곳까지 후퇴했다.
“온다! 맞서되 힘의 방향을 거스르지 마라!”
간단한 지시만 듣고 마른 비의 의도를 구현한 건 이들이 명의 최정예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하나하나가 발군의 용사인 그들은 엄청난 열세에서도 마른 비의 지시를 이행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투카아앙―!
“크아악!”
“카학…!”
가장 강한 중앙군을 통과시키고 좌우의 힘을 흘린 덕분에 피해는 줄였지만, 이길 수 없는 건 여전했다.
짚단처럼 무너지는 전우들을 보며 적색창기병의 전의가 꺾일 때, 기다리던 지원군이 당도했다.
“우 소협! 우리가 왔소!”
지태율이었다.
원의 궁기병을 쫓던 좌우의 경기병대는 마른 비의 지시대로 방향을 수정했고, 때에 맞춰 전장에 돌입할 수 있었다.
쐐기진의 좌우를 두드리는 돌격.
지태율의 함성이 전장을 울렸다.
“들이쳐라!”
콰카캉―!
기마가 땅을 구르고, 인간이 하늘을 난다.
철로 된 갑주 따윈 기병의 충돌 앞에선 종잇장이나 다름없었다.
수백, 수천의 목숨이 한순간에 사그라지고 있었다.
“크학! 이, 이 새끼들…!”
“단단해! 뚫리지 않는다…!”
경기병 군단은 적색창기병에 비해 월등한 병력을 보유했지만, 힘과 무게가 부족했다.
가죽 갑옷은 기병끼리의 충돌에선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고, 심지어 쐐기진의 좌우를 지키는 건 방어에 특화된 케식 군단이었다.
금빛 갑주의 물결은 첫 충돌에서 출렁였을 뿐, 달려드는 경기병을 밀어내며 돌격을 늦추지 않았다.
“멍청한 놈들이 죽으려고 환장을 했구나!”
설상가상으로 말머리를 돌린 원의 궁기병대가 전장에 당도했다.
그들은 몽골식 만도를 빼들고 경기병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이대로라면 명의 기병 군단이 전멸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우와아아아―!”
우렁찬 함성이 들린 건 그때였다.
서달이 돌격시킨 중원의 무림인들.
평야의 끝에서 여기까지 달려온 명의 좌우익이 지금 도착했다.
“젠장! 칼 한번 휘두르기 힘들구나! 이럴 줄 알았으면 전투마를 키우는 건데…!”
“대장군기를 보고 달려왔소! 건우란 자의 지휘가 틀리지 않길 바랄 뿐이오!”
“빌어먹을 오랑캐 새끼들아! 사파 무림의 힘을 보여주마!”
후아아악―! 콰쾅!
퍼버버벙! 쩌정, 쩡―!
무림인들의 싸움은 군대의 전투와는 전혀 달랐다.
하늘을 날고, 검기를 뿜어내며, 비수를 흩뿌린다.
통일되지 않은 오만 가지 병기들이 번쩍이는 걸 보고 있자니 정신이 사나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강했다.
대규모 전쟁은 처음일 텐데도, 무(武)에 일생을 건 자들답게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다. 무너지지 않을 뿐이다.
그들은 기마대의 돌격을 늦추는 데는 성공했으나 진형을 파고드는 데는 실패했다.
“기껏해야 수천 단위로 패싸움이나 하던 것들이 어디서 나대느냐!”
원의 전사들이라고 무공을 모를 리 없다.
십칠식 참마도법은 천하를 제패하며 위력을 입증한 절세의 무예였다.
기마와 갑주로 무장한 기마대와 맨몸으로 싸우는 무림인들.
잠시 출렁였던 쐐기진의 외곽이 복구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패싸움이라……. 그런 소릴 지껄일 수준이 되는지 어디 한번 보자꾸나.」
콰아아앙!
정신을 차릴 수 없다.
다시 밀리기 시작한 좌우익에 이변이 벌어진 건 두 집단이 등장하면서부터였다.
정(正). 그리고 사(邪).
두 개의 깃발은 중원 무림을 양분하는 거대 집단의 상징이었다.
상황을 지켜보던 정도맹과 사도련의 무인들이 앞으로 나섰다.
“오오오! 풍룡검(風龍劍) 추 대협이시다!”
“소림, 무당, 개방까지…!”
“팽가의 파산권(破山拳) 장로님께서도 오셨어!”
“오대세가도 참전했구나!”
정도맹의 깃발 아래 뭉친 자들은 정파의 내로라하는 문파와 세가 출신이었다.
사도련에서도 유명한 무인들이 줄줄이 나타났다.
“패력혈창(覇力血槍)…!”
“귀수문(鬼手門)이 참전했다! 이길 수 있어!”
“저, 저거 냉혈승(冷血僧) 조무 아니야? 저런 놈도 이곳에…!”
정도맹과 사도련이 나서자 전장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그들은 한꺼번에 칼을 뽑았고, 곧바로 전장에 난입했다.
“창궁검대! 선두를 빼앗기지 마라!”
남궁세가.
푸른 옷을 입은 검사들을 통솔하는 건 강소성 북부에서 봤던 남궁결이었다.
“창궁무애검진(蒼穹無涯劍陣)을 펼쳐라!”
남궁결의 명령이 떨어지자 남궁가의 무인들이 마름모꼴로 늘어섰다.
일시에 내공을 끌어올리자, 그들의 머리 위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개진(開陣)!”
넓고 멀어 끝을 가늠할 수 없는 창천의 기상처럼.
웅혼한 검기가 뻗어나가며 금빛 방벽을 덮쳤다.
투콰아아앙―!
“으아아악!”
“커헉…!”
처음으로 케식의 방어선이 무너졌다.
남궁가는 그 한 수로 자신들이 왜 정파 최고의 가문이라 불리는지를 증명했다.
“아미타불. 아군을 살리려면 살계를 열 수밖에 없겠구나.”
왼쪽 소매가 휑한 노승이 홀로 걸어 나왔다.
이마에 찍힌 여섯 개의 계인은 그가 소림에 몸담은 자임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펴, 편수(片手) 대사…?!”
그는 소림 역사상 가장 빈번하게 참회동(懺悔洞)에 드나든 무승이었다.
젊은 시절, 살생을 금하는 소림의 계율을 어기고 무수한 살인을 저지른 남자이기도 했다.
소림이 그를 쫓아내지 않은 건 그가 사람을 죽였을 때는 항상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와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아악! 스님, 살려주세요!”
파락호들에게 겁탈 당할 뻔한 아낙을 구했다.
“재물을 내놓아라! 없다고? 그럼 죽어야지!”
약탈, 방화, 살인이 만연한 세상.
힘없는 일가족을 죽이려는 사파의 무인들을 몰살했다.
산문 밖 세상은 고요하고 아늑한 절간과는 달랐다.
세상을 떠돌수록 그는 살심이 걷잡을 수 없이 치솟는 걸 느꼈다.
“그래도 살인은 안 된다! 불제자의 손이 피로 물드는 건 용납할 수 없다!”
호통을 치는 소림 방장에게, 젊은 시절의 편수 대사는 대꾸했다.
“산문 밖을 나가보십시오, 사숙. 죽어 마땅한 축생들이 넘쳐납니다. 살려두면 무고한 이들을 해칠 테지요. 저는 그런 놈들은 보이는 대로 박멸할 겁니다.”
말을 끝맺는 순간, 그는 자신의 왼팔을 잘랐다.
아연실색한 방장에게, 젊은 무승은 결기 어린 얼굴로 말했다.
“손이 두 개면 두 배의 피가 묻겠지요. 이건 앞으로 살심이 치밀 때마다 재차 숙고하겠다는 제 약속입니다.”
그는 고통스럽게 말을 이었다.
“허나, 사숙. 죽어 마땅한 놈들을 살려두라 명하지 마십시오. 저는 도저히 그리하지 못하겠습니다.”
말을 잃은 사문의 어른에게 정중히 고개를 숙인 무승은 방장실을 나왔다.
그는 자신의 말을 실행에 옮겼고, 내부 사정이 어떻든 편수 대사는 세간에서 소림을 대표하는 무승으로 추앙받았다.
파격적인 행보로 이름을 떨친 편수 대사가 전장에 나타나자 정파의 무인들은 열광했다.
“아미타불. 날 저주하고 용서하지 마시게. 윤회의 굴레에서 고통받을 각오가 돼 있으니.”
후아아악―!
하나뿐인 팔에 집중된 건 무수한 소림의 내공심법 중에서도 손에 꼽는다는 대승범천신공(大乘梵天神功)이었다.
스르륵―
연대구품(蓮臺九品).
잔상을 남기는 수준을 넘어, 환영을 만들어낼 정도로 쾌속한 신법은 허공에 아홉 개의 분신을 만들어냈다.
아홉 명의 편수 대사가 아홉 개의 장법을 뻗어냈다.
금빛 찬란한 강기가 하늘로부터 내리꽂히고, 이십여 명의 케식과 기마가 한꺼번에 짓뭉개졌다.
쿠아아앙―!
편수 대사의 장법이 작렬한 대지엔 아홉 개의 손바닥 자국이 찍혀 있었다.
“그, 금강반약장(金剛般若掌)…!”
편수 대사의 장기로 유명한 소림 비전의 장법이었다.
말로만 듣던 신공을 목격한 무림인들은 전쟁 중이라는 것도 잊고 넋을 놓았다.
「흥! 늙은 땡중이 요란하게도 싸우는구나.」
하지만 누군가는 그 엄청난 신위 앞에서도 코웃음을 쳤다.
건너편 전장에서 도를 뽑아든 사내가 도발적인 태도로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