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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90화 (290/463)

290화

광범위 전음까지 펼치며 편수 대사를 비웃은 자는 냉혈승 조무였다.

그는 정파인들의 사나운 눈초리를 받으며 사도련이 포진한 진영에서 걸어 나왔다.

「크큭. 사숙. 오랜만이외다.」

반토막 난 도를 든 사내는 전장의 상황도 아랑곳하지 않고 편수 대사만을 노려봤다.

그는 심사가 뒤틀렸는지 불쾌한 표정이었다.

케식의 방어선에 구멍을 낸 편수 대사가 조무를 보며 대꾸했다.

「오랜만이구려, 시주. 잘 지내셨소이까?」

조무는 그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은 게 분명했다.

도를 든 손을 부들부들 떨던 그가 중얼댔다.

「그 말투……. 당신마저 나를 외인 취급하시겠다?」

조무는 무서운 표정을 짓더니 전선으로 성큼성큼 걸어가서 도를 휘둘렀다.

부아아악―!

수평으로 그어진 일격에 여섯 기의 케식이 고꾸라졌다.

그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도발적인 어조로 물었다.

「이래도 계속 그따위 태도를 유지할 거요?」

편수 대사의 눈이 가늘어지며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조무가 사용한 무기가 소림 방장이 부러뜨린 도였으며, 그의 무공은 소림을 대표하는 나한도법이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이든 해보시오, 사숙! 다른 놈들은 몰라도 당신은 내게 그러면 안 되는 거요!」

조무는 편수 대사보다 한 항렬 아래인 소림 출신의 파계승이었다.

비슷한 일로 살인을 저질렀지만, 편수 대사가 소림에 머무른 데 반해 그는 쫓겨났다.

손속이 너무 잔인하고, 죽이지 않아도 될 사람까지 죽였다는 게 이유였다.

소림에서 쫓겨난 이후, 그의 손속은 더욱 악랄해졌다.

자신이 승려였다는 한 가닥 자각은 있는지 악인들에게만 손을 썼지만, 소림의 무기와 무공으로 살업을 쌓는다는 게 문제였다.

뒤늦게 조치를 취하려 했으나 그가 사도련으로 들어가 버리는 바람에 지금에 와서는 손을 쓰기가 곤란해졌다.

십팔나한의 일인이었다가 사파로 넘어간 냉혈승 조무는 소림의 가장 큰 치부이자 골칫거리 중 하나였다.

「똑같이 죽였잖아! 당신은 사면을 받았는데, 왜 나만 쫓겨나야 한단 말이냐!」

조무는 가슴에 쌓인 한을 풀 듯 고래고래 외쳤다.

그때, 정도맹 진영에서 또 다른 전음이 들렸다.

「실로 한심한 종자로군. 전장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사춘기 소녀처럼 징징대고 있다니. 헛소리는 혼자 방구석에 처박혀서 하는 게 어떻겠나?」

꽈아앙―!

바삐 움직이며 케식과 궁기병을 막아내던 사내였다.

차돌 같은 주먹으로 적들을 부수는 그는 팽가의 장로인 파산권 팽찬이었다.

「아군이 쓰러지는 게 보이지도 않는가? 과연 사파로 넘어갈 만하구나. 너같이 한심한 놈은 본 적이 없다.」

「닥쳐라! 팽찬! 너 따위가 내게 시비를 거는 거냐?!」

어이가 없는 광경이었다.

전장에 나와서 사적인 과거를 들먹이며 말싸움이나 하고 있다니.

심지어 광범위 전음까지 써가며 말이다.

적색창기병에 섞여서 정신없이 싸우던 마른 비는 인상을 찌푸렸다.

“뭐 하는 거야? 저 사람들? 미친 거야?!”

하나하나가 상당한 힘을 지닌 자들이다.

저들이 나타난 순간 좌우측 전장이 고착될 정도로 정도맹과 사도련의 힘은 막강했다.

제대로 힘을 쏟으면 해볼 만할 것 같은데, 저게 대체 뭐 하는 짓거리란 말인가.

“저 사람은 그렇다고 쳐. 나머지는 왜 움직이지 않는 거지?”

유심히 들여다보니 몇몇을 빼고는 전투에 가담하지 않는다.

정도맹과 사도련에 속하지 않은 무인들이 더 열심히 싸우는 모양새였다.

마른 비는 그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는 걸 이해할 수 없었다.

콰카캉!

“큭…!”

적과 충돌한 뒤 기마째 밀려나온 적색창기병의 병사가 마른 비의 의문을 풀어줬다.

“우 소협! 그들에게 많은 걸 기대하면 안 됩니다! 저 정도가 한계예요! 저들은 전력을 기울이지 않을 겁니다!”

“무슨 말이야? 그게?”

대의와 명분을 세우기 위해 참전했으나, 정도맹과 사도련에게 중요한 건 전쟁 이후였다.

생색은 내되, 전력은 보존하길 바라는 것이다.

상황을 이해한 마른 비는 할 말을 잃었다.

“여기까지 와서 그런 걸 계산하고 있다고? 저 사람들이 좌우측의 핵심이야! 그럼 어떻게 해야…!”

병사는 칼을 휘두르며 띄엄띄엄 대꾸했다.

그도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표정이 좋지 않았다.

“어쩔 수 없죠. 이대로… 버텨만 줘도 됩니다! 쐐기진의 좌우만 묶어놔도… 크윽! 서달 장군님의 본대가 오면 이길 수 있으니까요! 저들도 그걸 아니까 저러는 겁니다!”

마른 비만 몰랐을 뿐, 명의 수뇌부는 이런 전개를 짐작했다.

정도맹과 사도련이 적극적으로 싸우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전황을 움직일 만큼 강한 힘을 지니고 있으나 명성과 명분만 챙기려는 자들.

잇속을 위해 참전한 자들의 한계였다.

“무슨 말인지는 알겠어. 위험을 무릅쓰긴 싫고, 이득은 원한다 이거지?”

마른 비는 충격을 받은 듯했지만, 겨우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곧 머리를 털더니 눈을 번뜩였다.

“이해는 되지만, 용서가 안 돼. 그러면 목숨을 걸고 싸우는 사람들은 뭐가 돼? 힘을 가졌으면 그만한 책임도 따르는 거야. 아니, 그런 걸 다 떠나서 함께 싸우는 전장에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그렇게 배웠다.

소수부족 중 유일하게 맹수를 퇴치할 수 있는 게 자신들이기에, 와족은 아무런 대가 없이 이웃을 도왔다.

삶은 더불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 능력과 재능을 나누어 공생한다.

그러면 그들 또한 내게 부족한 것을 채워준다.

눈에는 보이지 않을지라도 지금 나를 구성하는 것들의 일부는 다른 이들에게서 온 것임을, 삶이란 혼자 살아갈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걸 잊지 말라고 배웠다.

자신들의 나라를 세우려는 전쟁에 참전하고도 잔대가리나 굴리는 행태를 마른 비는 두고 보기가 힘들었다.

“저들이 움직여야 목숨을 잃는 사람이 줄어들어. 싸우지 않는다면 강제로라도 싸울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 주겠어.”

마른 비가 이를 깨물며 대장군기를 움켜쥐었을 때였다.

그보다 한발 앞서 다른 사내가 움직였다.

안위를 꾀하며 웅크리고 있던 정도맹과 사도련의 뒤통수를 후려친 건 바투였다.

텅 빈 중앙을 가로지르던 바투는 고개를 돌렸다.

쭉쭉 나아가는 지구르 군단과 달리, 쐐기진의 좌우익이 멈춰 섰기 때문이다.

그들은 굉장한 저항에 직면해 있었다.

경기병까지는 괜찮았는데, 무림인들이 가세하자 상황이 급변했다.

특히 정과 사의 깃발을 올린 놈들은 무시 못 할 힘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밀집대형이 틀어지며 아군이 분단될 위험이 높다.

전장을 훑은 바투는 결단을 내렸다.

“사와르여. 출격을 준비하라.”

지구르가 전장을 휘젓는 독수리의 날개라면, 사와르는 적의 숨통을 끊는 늑대의 발톱이다.

특전대라고 하나 병사에 불과한 지구르에 비해 사와르는 숫자는 적지만, 전원이 지휘관이자 장수들로 구성된 초원의 용자들이었다.

“지구르 부대를 맡긴다. 좌우를 정리하고 따라오라.”

“걱정 마십시오, 장군. 금방 처리하고 따라가겠나이다.”

고작 백 명 남짓한 인원이다.

하지만 사와르는 전원이 만 단위의 병력을 부리는 장군들이었다.

감색의 갑옷과 날개 형상의 우측 견갑을 입은 지구르.

진청의 갑주와 발톱 모양의 좌측 견갑을 착용한 사와르.

그들은 지위는 물론이고 무력에도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었다.

“돌격진의 좌우를 정리한다! 지구르는 우릴 따르라!”

“중갑 기병대는 속도를 올려라! 우리가 없는 동안 대장군을 보좌하라!”

중앙에서 떨어져나간 특전대는 경기병과 무림인이 밀집한 양옆을 들이쳤다.

그들이 전투에 돌입한 순간, 마음을 놓고 있던 명의 군세는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렸다.

꽈아아앙―!

“크아악! 뭐, 뭐냐, 이놈들은?!”

“못 막아! 이런 말도 안 되는 힘이…!”

그들은 문자 그대로 이 시대 최강의 기마대였다.

바투가 서달을 잡기 위해 아껴둔 비장의 수는 경기병은 물론이고 정도맹과 사도련의 진영까지 파죽지세로 헤집었다.

“전투를 준비하라! 보통 놈들이 아니다!”

“냄새나는 오랑캐 놈들이 감히…!”

정도맹과 사도련은 위기를 감지했다.

피 튀기는 전장에서 홀로 느긋하던 자들이 바짝 긴장하며 싸울 태세를 갖췄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낙관하고 있었다.

정예 중의 정예라는 케식과 붙어본 결과, 충분히 해볼 만하다는 결론을 내렸기 때문이다.

바투가 내보낸 푸른 발톱은 그들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갔고, 충돌의 순간, 힘의 우위가 갈렸다.

투콰카캉!

“아니?!”

“이, 이럴 수가…!”

자신의 힘에 취해 있던 자들의 얼굴에 경악이 떠올랐다.

제일 먼저 달려든 모용세가(慕容世家) 무인들의 목이 하늘을 날았다.

악명 자자한 귀수문의 제자들은 자랑하는 장법을 펼치지도 못한 채 몸통이 갈렸고, 강맹한 검술로 강호에 이름을 떨쳤던 풍룡검 추오는 검이 부러진 채 패퇴했다.

혈검문, 화산파, 심지어는 무당과 개방까지 진청과 감색이 어우러진 기마대의 돌격을 막지 못했다.

오스트갈이 키운 초원 최강의 부대는 가로막는 모든 걸 베어 넘길 사신의 칼날이었다.

쩌저정―! 콰캉!

숫자와 장비에서 뒤진다는 걸 감안해도 힘의 차이는 충격적이었다.

하늘을 날고 강철을 부수는 무림인들이 왜 국가와 황실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했는지가 여실히 드러난 순간이었다.

개개인의 힘이 아무리 강해도 잘 훈련된 군대를 당해낼 수는 없다는 걸 무림인들은 명확히 깨달았다.

“멍청한 놈들 같으니. 우리가 개입하기 전에 전선을 부숴놨다면 승산이 있었을 텐데.”

진청의 갑옷을 걸친 사와르가 비릿하게 웃었다.

그는 방금 남궁세가의 창궁무애검진을 깨부수고, 지휘자인 남궁결의 목을 날려버린 참이었다.

“크… 헉…….”

앞길이 창창한 남궁가의 차남은 형을 대신해 참전한 북벌에서 허무하게 목숨을 잃었다.

목만 남아서 땅에 나뒹구는 남궁결의 눈에, 겁에 질린 청년의 모습이 스쳤다.

“사, 살려…!”

남궁결이 그렇듯 청년 역시 마른 비 일행과 안면이 있는 자였다.

추하게 이기느니 명예로운 죽음을 택하겠다고 큰소릴 탕탕 쳤던 자.

응천부에서 여규와 철중구가 실전을 논하는 걸 듣고, 잡것들다운 천한 발상이라며 비웃었던 정의문의 제자였다.

경비대장에게 원의 기병대 앞에서 그따위 소릴 지껄여보라고 꾸지람을 들었던 그는, 막상 그 앞에 서자 검을 뽑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이따위 쓰레기들도 신성한 전장에 나오는가…!”

뼛속까지 전사인 사와르는 진심으로 분노했다.

그는 구역질이 난다는 듯 얼굴을 찌푸렸고, 도를 들어 올렸다.

햇볕을 받아 영롱히 빛나는 참마도가 그를 양단하려는 순간!

쿠아아앙!

다리가 마비되어 주저앉은 정의문의 제자를 구한 건 하늘에서 내리꽂힌 대장군기였다.

“누, 누가…!”

눈물로 범벅이 된 눈을 들어 올린 정의문의 제자는 보았다.

참마도의 반사광마저 차단한 금성철벽 같은 등을.

“괜찮아?”

늑대의 발톱을 부러뜨린 야생의 전사가 부드럽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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