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91화 (291/463)

291화

“정신 차려. 무인이란 사람이 적에게 무릎을 꿇으면 어떡해?”

사와르를 기마째 뭉개버린 마른 비가 손을 뻗었다.

정의문의 무인은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 손을 바라봤다.

“그, 그놈이다! 대장군을 막아섰던 이민족 놈!”

몽골 전사들의 눈에 불길이 치솟았다.

흩어져 있던 명의 군세를 단번에 깨부술 수 있었는데, 좌우익이 가로막힌 건 따지고 보면 전부 저놈 때문이었다.

“죽여!”

“목을 쳐라!”

그들이 마른 비를 덮치려는 찰나, 날카로운 파공음이 일었다.

쐐새색―!

예검이 기마의 목을 꿰뚫고, 말을 잃은 기병들이 착지를 위해 몸을 날렸다.

“큭! 어떤 놈이…!”

마침내 전장에 당도한 건 운남에서부터 마른 비와 어깨를 나란히 한 벗이었다.

“규! 왔구나!”

마른 비가 바투에게 달려드는 바람에 여규는 합류하지 못했고, 적색창기병에 섞여서 적을 상대했다.

그러다가 마른 비가 좌측 전장으로 움직이는 걸 보고 즉각 따라온 것이다.

그리고 이쪽으로 온 건 여규만이 아니었다.

“개새끼들이이이이! 비켜, 이것들아!”

이건 함성인가, 비명인가?

지금껏 이런 기합성은 없었다.

잘 익은 오리구이처럼 벌게진 얼굴로 다가오는 자.

요란하게 아군을 헤치고 튀어나온 건 철중구였다.

“야, 이 시벌! 왜 나만 안 데려가?! 빌어먹을 새끼들이 길을 안 열어줘서 10만 명을 돌아왔잖아!”

궁수 4만에 중보병 6만.

죽어라 경공을 펼친 철중구는 대견하게도 그 모두를 앞질러서 쫓아왔다.

그리고 그 말은 전진 배치한 보병들이 곧 도착할 거라는 뜻이었다.

“으엉? 뭐야, 이 새끼는? 병신이 왜 전장에서 울고 자빠졌어? 얼라? 너 이 새끼, 응천부에서 지랄했던 놈 아니야?”

철중구는 자신에게 지랄한 자를 잊지 않는다.

정의문의 제자를 본 그는 눈을 부라렸지만, 금세 표정을 풀고 코웃음을 쳤다.

“헹! 그럼 그렇지. 실전도 안 겪어본 풋내기가 뭘 안다고 주접이야, 주접이?”

그는 코를 들이마시는 사내를 두고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마른 비와 여규의 옆에 섰다.

“잘 봐라. 쥐뿔도 모르는 애새끼야. 형님들이 진짜 싸움이 뭔지 보여줄 테니까.”

도를 뽑아든 그는 고개를 돌려서 마른 비를 쳐다봤다.

그리고 가까이 가더니 정의문의 제자가 들을 수 없을 만큼 작게 속삭였다.

“야, 비아야. 근데 이거 빠지는 게 낫지 않겠냐? 감색은 몰라도 진청 갑옷 입은 새끼들은 졸라 세던데? 우리 셋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야.”

오십 명의 사와르와 수만에 이르는 지구르.

정도맹도 막아내지 못했던 병력이다.

마른 비 일행 셋이서 그들을 막는 건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맞아. 이대론 어렵지. 그래도 물러설 순 없어. 그럼 전선이 붕괴될 테니까. 이 전장의 결과가 전쟁의 승패를 가를 거야.”

“어…… 야, 오해하지 마라? 내가 딱히 쫀 건 아닌데, 이건 그냥 개죽음이 아닐까 싶어서.”

우물대는 철중구에게, 마른 비는 말했다.

“시도해볼 만한 게 있어. 잘 되면 이길 수 있을 거야. 날 믿어, 중구.”

표정을 굳힌 마른 비는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대장군기를 높이 들었다.

『모두 잘 들어! 한 번! 단 한 번만 막아내면 돼! 그럼 아군이 도착한다!』

지축을 울리는 발소리.

서달이 이끄는 본대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도맹 진영은 술렁임을 멈추지 않았다.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전부 달려들어도 힘에서 너무 밀립니다!”

“개죽음이오! 장비부터 병력, 모든 게 열세이지 않소이까! 동방과 서방의 제국들도 막아내지 못했던 저들을 우리만으로 어찌 막는단 말이오!”

“좌익은 포기하고 후퇴했다가 명의 본대가 오면 합류해서 거드는 척을 하는 게…!”

정도맹 무인들은 두려운 얼굴로 슬금슬금 발을 물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우측 전장의 사도련도 마찬가지였다.

전쟁에 익숙한 원 기병대는 이쪽의 상황을 대번에 눈치챘고, 전장 전체를 서서히 압박하며 정도맹과 사도련이 발을 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이 물러서는 순간, 단번에 들이칠 준비를 하면서.

명 진영 좌우익에 패색이 번질 때, 마른 비의 언령이 전장을 울렸다.

『지금 좌우익이 와해되면 전장 전체가 무너져! 물러서는 자, 대장군의 명을 어긴 것으로 간주한다! 싸울 준비를 해!』

명의 경기병들과 의기에 불타는 무인들이 이를 악물었다.

의기충천의 깃발을 등에 꽂고, 협검의 의지를 물려받은 이들이 경기병과 함께 가장 먼저 앞으로 나섰다.

두 번째는 복수심에 불타는 자들이었다.

원의 횡포하에서 소중한 사람과 잃어서는 안 될 것들을 잃은 자들이 칼을 빼들었다.

마지막은 공명심과 사사로운 이익에 눈이 먼 자들이었다.

주원장은 북벌에 앞서 어마어마한 포상금과 지위를 내걸었고, 그건 뜨내기로 전전하던 무인들에게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었다.

“명령만 내리십쇼, 우 소협!”

“강남에서의 활약을 들었소! 그대를 흠모해 왔소이다!”

“바투를 물러서게 했을 때, 소름이 돋았소! 싸울 준비가 끝났으니 한판 붙어봅시다!”

칠 할에 가까운 병사들이 앞으로 나섰다.

여전히 움직이지 않거나 몸을 물리는 건 정도맹과 사도련, 그리고 죽음의 공포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마른 비는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다.

지는 게 두려워 나서지 않는다면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불어넣어 주면 된다.

마른 비는 대장군기가 펄럭이도록 크게 휘둘렀다.

그리고 우렁차게 외쳤다.

『좌익의 전열은 내가! 우익의 전열은 백아가 꺾는다! 우릴 믿어! 놈들의 진형이 무너지는 순간, 전부 달려드는 거야!』

어처구니없는 호언장담이었다.

이 순간만큼은 마른 비를 믿고 앞으로 나섰던 자들도 모두 실소를 흘렸다.

일신에 지닌 무위와 용맹은 인정하지만, 건우라는 청년은 스스로를 과신하는 듯했다.

마른 비를 믿는 건 그의 일행들뿐이었다.

“애송이가 겁대가리를 상실했구나! 어쩌다가 대장군을 한 번 물러서게 했다고 눈에 뵈는 게 없는가!”

열이 뻗쳤는지, 사와르 중 한 명이 목에 핏대를 세우고 외쳤다.

적당한 재돌격 시점을 가늠하던 그는 곧바로 기마대를 움직였다.

“이놈들을 쓸어버리고 그 뒤에 도착할 명의 본대를 격파한다! 용맹한 대초원의 전사들이여! 돌격하라!”

좌우익을 보다 수월하게 부수기 위해 정도맹과 사도련이 빠지길 기다린 건 사와르들의 실수였다.

그들은 다소의 피해를 입더라도 돌격을 멈추지 말았어야 했다.

기마대가 밀려오는 순간, 마른 비의 전투함성이 파도가 되어 그들을 덮쳤다.

『멈춰! 다가오면 죽인다!』

전력으로 터뜨린 언령에는 맹수들을 옥죄는 야수 제어의 권능이 녹아 있었다.

각성한 야수들조차 움츠러들게 만드는 와족의 비기를 한낱 기마 따위가 버텨낼 리 없었다.

원의 병사를 태운 말들은 심혼을 뒤흔드는 위압에 정신이 날아갔고, 허연 눈자위를 드러내며 고꾸라졌다.

우측 전장 또한 마찬가지였다.

“커허허허헝!”

고금을 통틀어 범이 전장에 나온 적이 있을까?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압도적인 힘으로 전장 전체에 위압을 가한 경우는?

야생의 살기를 줄기줄기 퍼뜨리며 포효를 토해낸 경우는?

인간은 몰라도, 짐승이라면 절대 버텨낼 수 없다.

별비의 포효는 야수 제어보다도 효과적으로 기마들을 뒤흔들었다.

“히… 히히히힝!”

“뭐냐?! 이놈이 미쳤나? 머, 멈춰…! 으아아악!”

“부딪친다! 기, 기마를 제어해…! 커헉!”

잔뜩 겁을 집어먹고 그 자리에 주저앉는 기마는 양호한 편이었다.

눈을 까뒤집고 기절하는 녀석이 있는가 하면, 도망치려다 아군과 충돌하는 녀석도 있었다.

마른 비와 별비가 위압을 가하는 순간, 좌우측의 전장이 일거에 뒤집어졌다.

전원이 기마대로 구성된 원의 군사 편제가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 순간이었다.

“이, 이럴 수가…!”

명의 군사들은 기적을 목도했다.

도저히 막을 수 없으리라 여겼던 악몽 같은 기마대가 함성 한 번에 무너져 내리다니!

엉망으로 뒤엉킨 원의 병사들은 기마와 갑주의 무게에 눌려 숨이 끊어지고 중상을 입었다.

한 명을 쓰러뜨리기 위해 아군 서너 명의 목숨을 바쳐야 할 만큼 강인한 전사들이 목이 부러지고 사지가 박살 나서 땅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그 강렬한 광경은 모두의 뇌리에 지워지지 않는 화인처럼 새겨졌다.

그때, 가장 가까이서 기적을 목격한 정의문의 제자가 혼이 나간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수왕(獸王)…!”

유구한 무림사.

스물 초반의 나이에 단 한 번의 전투로 왕의 칭호를 얻은 남자가 있었던가.

이전에도 크고 작은 싸움은 치렀지만, 무림의 거물들이 집결한 첫 전투에서 마른 비는 제왕의 호(號)를 획득했다.

“허! 이 새끼…! 이걸 해내네?!”

철중구가 진심 어린 감탄을 흘렸다.

수왕.

아주 그럴 듯하다.

마른 비에게 그보다 잘 어울리는 칭호는 없을 것 같았다.

“봤냐! 새끼들아! 얘가 내 친구다! 이 몸의 영향을 무지막지하게 받은 놈이라고!”

친구가 잘나가면 기분이 좋다.

지금 누구보다 어깨가 으쓱한 건 여규와 철중구였다.

그들이 신이 나서 달려 나가려는 순간, 마른 비의 명령이 떨어졌다.

『지금이야! 지금 공격하면 이길 수 있어! 전군, 돌격해!』

현 상황에 어느 누가 그의 명을 거스를 수 있을까.

발을 빼려던 자들마저 전신을 관통하는 전율을 느끼며 칼을 뽑았다.

명의 군사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투지를 거친 함성으로 표출했다.

“돌진! 돌진하라!”

“전원, 우 소협의 뒤를 따르라! 우린 이길 수 있다!”

“우오오오! 가자!”

사기충천.

패색이 짙던 전장이 용광로처럼 끓어올랐다.

마른 비는 타오르는 사기를 등에 업고 전진했다.

“규! 중구! 좌우를 부탁해!”

키이이잉―!

고대의 술식.

마른 비의 얼굴에서 전투화장이 빛을 발했다.

기하학적인 무늬들이 빛을 뿜는 순간, 야생의 전사는 적진 한복판에 들어와 있었다.

“하압!”

쿠아아앙!

진각.

대지의 힘을 뽑아 올리는 그것은 와족 전투기술을 발동하는 기수식이나 다름없다.

폭풍 같은 자연기가 발끝에서부터 치솟고, 강대한 대자연의 기가 마른 비의 몸을 빌려 현신했다.

수왕이 푸르른 영기를 전신에 둘러치니, 지금 여기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투신(鬪神)이 전장에 강림했다.

“크아악! 마, 막아…!”

“끄헉…! 배… 내 배가 뚫렸….”

마른 비의 주먹이 꽂힌 곳은 화탄이 터진 것처럼 폭발했고, 발차기가 휩쓴 곳은 흔적도 없이 쓸려 나갔다.

천하를 제패한 원의 장군들이 진형을 짜고 달려들었으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참마도건 철갑주건 내공을 둘러친 육신이건 간에 모조리 부서지고 박살 나서 허물어졌다.

그리고 수만이 밀집한 적진을 일직선으로 꿰뚫는 수왕의 곁엔 검과 도가 있었다.

“하앗!”

“키야아압!”

사일검의 절초가 비산하고, 적사자도의 패력이 적들을 뭉갰다.

항상 티격태격하지만, 마른 비의 좌우를 받치는 그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2인조였다.

십칠식 참마도법이 광풍처럼 휘몰아쳤지만, 범의 앙심과 교룡갑을 발동한 수왕의 육신은 절대로 깨지지 않는 방패나 다름없었다.

마른 비의 그늘에 든 여규와 철중구는 수비를 도외시한 채 공격에만 모든 힘을 쏟았다.

“모, 못 막아! 상대가 안 된다!”

“붙지 마라! 저 셋은 그냥 통과시켜!”

가장 먼저 적진에 뛰어든 세 명은 무아지경이 되어 돌파를 감행했다.

방패, 그리고 검과 도.

언뜻 보기엔 단출하기 짝이 없는 구성이다.

하지만 함께 사선을 넘나들었고, 수없이 합을 맞추었으며, 한 명 한 명이 절정의 경지를 넘어선 그들은 일기당천의 무인들이었다.

콰아아앙―!

기마를 잃고, 진형이 완파된 데다 부상까지 입은 원의 병사들은 마른 비 일행의 돌진을 막지 못했다.

천하최강을 자랑하던 원의 무장들이 사색이 된 채 길을 비키는 전무후무한 일이 벌어졌다.

그리고 마른 비 일행의 뒤를 따라 명의 좌익이 그들을 덮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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