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292화 (292/463)

292화

“명을 위하여!”

“오오오! 원통하게 죽은 악 대협을 떠올려라!”

“크흑…! 아버님, 어머님! 보고 계십니까!”

“오랑캐 새끼들아! 목을 내놔라! 니들의 목이면 한 방에 인생역전이다!”

저마다 참전의 이유가 다르듯 부르짖는 구호도 천차만별이었다.

하지만 이 순간, 모두를 아우르는 존재가 있었으니 마른 비의 이름이 울릴 때마다 병사들의 피가 끓어올랐다.

“수왕을 따르라!”

출신은 물론이요, 품은 뜻이 제각각인 병사를 하나로 뭉치게 한 남자.

압도적인 힘으로 적진을 돌파한 마른 비는 중원의 무인들에게 경외감을 심어주었고, 명군의 사기를 폭발적으로 끌어 올렸다.

“부끄럽구나.”

한쪽 소매가 휑한 노인이 눈을 감았다.

처음 모습을 드러낸 이래 종횡무진 전선을 누빈 편수 대사는 마른 비의 활약을 보고 그렇게 말했다.

“저자는 한족이 아니며, 어떠한 이해관계에도 얽혀 있지 않다. 강소성에서 민초들을 구했듯 저 청년은 순수하게 대의를 위해 움직일 뿐이야. 반면 정파라 자부하는 우리는 어떠한가.”

정도맹의 행태를 꼬집는 말이었다.

다른 자가 이런 말을 했다면 난리가 났겠지만, 일생에 걸쳐 스스로를 증명한 노승의 언어엔 묵직한 무게가 실려 있었다.

“아직 늦지 않았네. 지금부터의 행보가 전쟁 이후의 정도맹에 대한 평가를 가를 것이야. 명심하시게.”

후배들에게 조언을 건넨 노승은 훌쩍 몸을 날렸다.

편수 대사가 진청의 갑옷을 입은 적들에게 달려가며 남긴 말은 모두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수왕이라……. 힘과 성정, 통솔력과 배짱까지. 나는 지금껏 이토록 왕의 호(號)가 어울리는 남자를 보지 못했다.”

소림의 존경받는 무승이 마른 비를 인정했다.

그 한마디는 마른 비의 이름이 온 천하로 퍼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

“진형을 갖춰라!”

“중상자는 버린다! 싸울 수 있는 자들은 다섯 명씩 뭉쳐서 적들을 상대하라!”

명군의 기세는 하늘을 찔렀으나, 그들이 당도했을 때는 원의 정예들도 정신을 수습한 시점이었다.

기마를 잃은 상황에서도 그들의 전력은 명군을 압도했고, 셋에 불과한 마른 비 일행이 돌파에 성공한 것과 달리 피 튀기는 난전이 벌어졌다.

“남궁가의 원수를 갚아라!”

“빌어먹을 오랑캐 놈들! 너희 때문에 가족이 몰살했다! 너희만 죽일 수 있다면 이 한 몸 바쳐서…!”

“이놈들, 별것 아니야! 쓸어버려!”

콰아아앙―!

의분에 찬 정파 무림인들을 침묵시킨 건 다섯 명씩 조를 짠 사와르였다.

“빌어먹을 꼬마 하나 때문에 우리 체면이 말이 아니구나. 수왕이라 했나? 좋다. 그놈이 우리보다 강하다는 걸 인정한다. 하지만 너희는 아니야.”

기마가 없어도 초원의 정예들은 강했다.

기세 좋게 달려든 명군의 진격이 멈췄다.

참마도가 휘둘러질 때마다 정파 무인들의 피가 평야에 흩뿌려졌다.

지구르만 해도 감당하기가 벅찬데 장군급인 사와르 다섯 명이 뭉치자 명의 좌익은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전세가 뒤집히려는 찰나, 금빛 강기가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쿠아아아앙!

금강반약장이었다.

편수 대사의 절기는 사와르 이개 조를 물러서게 했다.

놀라운 건 이십여 기의 케식을 뭉갰던 일격이 가로막혔단 점이다.

참마도를 들어 올린 열 명의 사와르는 상처 하나 없이 소림의 절공을 받아냈다.

“아미타불. 시주들은 노납과 어울려 보세나.”

“음… 소림…!”

사와르 중 한 명이 이를 갈았다.

편수 대사가 소림을 대표하는 무승이라지만, 홀로 열 명의 장군을 감당할 순 없으며, 전선을 책임질 수 없는 것 또한 자명했다.

밀리던 전선이 균형을 이룬 건 정도맹이 본격적으로 참전하면서부터였다.

“건우란 자가 홀로 진형을 부쉈다. 이놈들도 처리하지 못한다면 칼을 버리고 괭이질이나 하는 게 나을 것이야!”

“진청의 갑옷을 입은 놈들에겐 다가가지 마라! 한 놈 한 놈이 도강을 구사하는 놈들이야! 대주급 이하는 놈들의 주위에 얼씬거리지도 마!”

“감색의 갑옷도 강한 건 마찬가지다! 전부 다 일당백의 괴물들이야! 구파일방과 오대세가를 중심으로 뭉쳐라. 기마가 없고, 부상을 입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해!”

정도맹의 지휘자들이 진형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제대로 싸우기로 마음을 먹자 뭉클거리는 투기가 전장을 채웠다.

“명의 본대가 승리할 때까지 적들을 잡아둔다! 이놈들이 없으면 바투는 서달 장군을 이기지 못해!”

팽가의 장로이자 정도맹의 간부인 파산권 팽찬이 앞으로 나서며 으르렁댔다.

“버러지 같은 사도련 놈들보다 못 죽이면 연무장에 대가리부터 꽂힐 줄 알아라! 정도맹, 돌격하라!”

사도련이 담당한 우익도 끓어오르는 건 마찬가지였다.

마른 비가 일으킨 불꽃은 화염이 되어 전장 전체를 불태웠다.

바야흐로 북벌의 승패를 가르는 대전이 막바지에 이르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산산조각 난 감색 갑주의 파편이 평야에 흩뿌려졌다.

좌익의 끝자락.

적진을 일직선으로 꿰뚫은 세 명이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크헉! 헉! 허억…!”

대체 몇 명을 쓰러뜨린 걸까.

처음 적진에 돌입한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다음부터는 거의 정신이 날아간 채로 싸웠다.

온몸이 적의 피로 물든 마른 비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 씨바! 죽겠다!”

철중구는 도를 들어 올릴 힘도 없어 보였다.

완전히 탈진한 그는 땅바닥에 엎어진 채 일어서지 못했다.

“학, 하악…….”

여규도 두 손으로 검을 짚고 간신히 버텼다.

휘청거리는 다리는 당장이라도 툭 꺾일 것 같았다.

“미친……. 우리가 진짜 저걸 뚫고 나온 거냐?”

철중구는 볼을 땅에 댄 채 그들이 이뤄낸 위업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는 수만에 이르는 적진을 돌파했다는 게 믿기지 않는 눈치였다.

“훅, 후욱……. 비아가 아니었으면 얼마 못 가서 토막이 났을 거야. 뒤에서 보는데 진짜 엄청나더라.”

마른 비의 특징이 고스란히 담긴 별호가 아니었다면, 오늘 그는 투신의 칭호를 얻었으리라.

그런 과장된 별칭이 아깝지 않을 만큼 마른 비는 용맹무쌍했다.

“조금만 쉬자. 손 하나 까딱할 힘도 없어…….”

전투화장이 지속 중인데도 체력이 완전히 바닥났다.

투지가 꺾인 적들이 길을 터서 망정이지, 피해를 감수하고 막아섰다면 중간에 쓰러졌을 게 틀림없었다.

“대머리 할아버지가 정도맹 무인들을 자극했어. 좌익은 괜찮을 거야.”

싸우는 와중에도 마른 비는 뒤쪽이 따라오는지를 살폈고, 편수 대사가 말하는 걸 들었다.

그 뒤에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도맹이 움직였을 거라고 확신했다.

“그러냐? 다행이네. 그럼 좌익은 그렇다 치고…… 우익은? 저기는 사파 놈들이라 몸 사리는 병신들이 더 많을 텐데?”

철중구의 추측이었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 달리 우익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별비가 멋지게 기마들을 자빠뜨린 탓도 컸지만, 그쪽에도 마른 비 못지않은 존재감을 지닌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일행이 저 멀리 보이는 우측 전장으로 시선을 돌렸을 때였다.

콰아아아앙―!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광경이다.

적진 끄트머리가 꽝! 하고 터져 나가더니, 사내 한 명이 미친 듯이 창을 휘두르며 튀어 나왔다.

적진을 돌파하고도 계속 허우적대던 그는 몇 걸음 더 가더니 풀썩 엎어졌다.

여섯 자루의 단창을 메고, 양손에 기다란 철창과 도를 든 남자.

전룡이었다.

“저, 저…! 허이구, 저 비융신. 무인이란 새끼가 혼자 오두방정 떨다가 엎어지는 거 봐라. 누가 보면 쟤 혼자 싸운 줄 알겠네. 아주 그냥 일 대 십칠만 영웅 전기를 쓰고 계셔요.”

엎어져서 일어나지 못하는 놈이 할 말은 아니었지만, 철중구는 비아냥대며 전룡을 놀렸다.

그러다가 그는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어… 어? 저 새끼들, 쫓아가는데? 지구르인지 뭔지 하는 새끼들, 뒤돌아서 전룡 죽이러 간다!”

마른 비와 여규도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섰다.

원의 좌익이 마른 비 일행을 잡는 걸 포기한 데 반해 우익은 전룡을 추격해서 죽일 작정인 모양이었다.

전룡은 힘이 다한 듯 일어서는 것도 힘겨워했지만, 겨우 돌아서서 자세를 잡았다.

“야, 전룡! 이 멍청한 새끼야! 못 이겨! 도망쳐!”

튼튼하기로는 마른 비 못지않은 놈이니 조금 쉬면 금세 회복하겠지만, 지금은 완전히 탈진한 상태였다.

현 상황에서 수십 명의 지구르를 당해낼 수는 없었다.

“야, 이 시발! 멈춰! 이 새끼들아!”

철중구가 팔을 부들부들 떨며 상체를 세울 때였다.

여규가 휘청대는 다리를 옮기고, 마른 비가 제시간에 맞출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몸을 날렸을 때였다.

“커허허헝!”

투콰아아앙―!

새하얀 섬광이 감색의 지구르 군단을 뚫고 나왔다.

허공에 백색의 선을 그으며 내달린 영수가 전룡에게 달려드는 지구르들을 따라잡았다.

“크아앙!”

푸화하학―!

시뻘건 피분수가 솟구쳤다.

철중구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별비의 무지막지한 위용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워……. 역시 별비를 형님으로 모셔야겠어. 존나 쎄.”

철중구가 털퍼덕 엎어지며 혀를 내둘렀다.

그리고 안도한 듯 숨을 내쉬었다.

전룡만 보면 욕을 한 바가지 쏟아내지만, 거친 말과 달리 누구보다 그를 염려하는 건 철중구인 듯했다.

막상 그러냐고 물으면 얼굴을 찡그리면서 쌍욕을 퍼붓겠지만.

“다행이야. 모두 무사한 듯하네.”

놀랍게도 별비의 등에는 영령이 타고 있었다.

그녀는 별비가 적들을 해치우자 등에서 훌쩍 뛰어내려 전룡에게 달려갔다.

피 칠갑을 한 전룡을 보는 게 마음이 아픈지 그녀는 울먹이고 있었다.

그들이 헤집은 우측 전장에서 엄청난 함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오! 수라…!”

“인간 맞나?! 세상에! 저런 놈이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저놈 저거, 완전 미친 새끼 아냐?! 방주! 저 새끼 무조건 영입합시다! 저놈만 있으면 우리가 짱 먹을 수 있소!”

정파의 무인들이 수왕을 연호했듯 사파의 무인들은 수라를 부르짖었다.

또 다른 자들은 별비를 보고 감탄했다.

“봤냐?! ‘크앙!’ 외치니까 ‘히히힝!’하고 자빠지는 거? 개 쩔어! 나도 전쟁이 끝나면 호랑이 키운다!”

“아서라. 건우인가 하는 놈이 괴물이니까 저런 걸 데리고 다니지, 넌 잡혀먹어.”

“백풍…! 하얀 바람! 수라와 백풍의 뒤를 따라라! 우린 이길 수 있다!”

우측 전장은 열광의 도가니였다.

뭘 어떻게 했는지 사파의 무인들은 전룡과 별비의 이름을 부르짖으며 미친 듯이 돌격했다.

그 때문에 그쪽으로 간 사와르와 지구르 군단도 발이 묶여버렸다.

“좋아. 이길 수 있어!”

전황을 확인한 마른 비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해야만 하는 일이라 나섰지만, 정도맹과 사도련이 따라줄지는 미지수였다.

자신은 그들과 아무런 접점이 없었고, 명 군부에서 정식 직위를 받은 것도 아니었다.

다행히도 좌우익이 호응하여 원의 최정예들을 옭아맬 수 있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중갑 기마대를 이끌고 서달을 치러간 바투뿐.

그가 십좌에 필적하는 무장이고, 술력의 힘을 받았다 한들 사와르와 지구르 군단 없이 명의 본대를 물리칠 순 없었다.

“너무 많은 피가 흘렀어. 아저씨, 한시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줘.”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려 곧 맞붙을 중앙 전장을 바라볼 때였다.

두두두두―

귓가를 간질이는 불길한 소리.

마른 비의 고개가 서쪽으로 홱 돌아갔다.

‘뭐지? 더 이상 올 병력은 없는데?’

제국의 명운을 건 한판 승부.

아군도, 적군도 예비병을 놀릴 여력 따윈 없었다.

그렇다면 다른 지역에서 온 병력이란 말인데…….

다른 건 둘째치고 방향이 심상찮다.

마른 비는 눈살을 좁히며 안력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탄식을 뱉었다.

‘아…!’

처음 보았지만, 한눈에 알겠다.

완전 무장한 전투마에 올라타 쌍도를 비껴든 채 달려오는 장수.

끓어 넘치는 패력은 바투에 못지않은 위용을 드러내고 있었다.

핏발 선 눈으로 수만의 기마대를 독촉하는 건 황실 삼대 무장 중 하나인 무칼리였다.

“전군, 진격하라! 쥐새끼 같은 한족 놈들을 짓밟아라!”

뒤늦게 그들을 발견한 명군의 눈에 절망이 차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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