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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93화 (293/463)

293화

“맙소사…….”

“무칼리…!”

전투마가 작게 느껴질 만큼 커다란 덩치를 지닌 남자였다.

호화찬란한 감색의 갑주 위로 울퉁불퉁한 근육이 보이는 듯했다.

무칼리는 힘 좋은 원의 기병들도 양손으로 다뤄야 할 크기의 대도를 오른손과 왼손에 하나씩 쥔 채, 다리만으로 기마를 제어해 달려오고 있었다.

“큰일 났네.”

어지간해선 약한 소리를 하지 않는 마른 비조차 그렇게 중얼댈 만큼, 현 상황에서 무칼리의 등장은 치명적이었다.

“소교주가 막고 있다고 하지 않았나? 저놈이 여기로 왔다는 건….”

철중구가 불길한 상상을 떠올렸는지 눈살을 좁혔다.

가장 냉철하게 적을 살핀 건 여규였다.

“4만……. 천산을 치기 위해 신강으로 떠날 때, 무칼리는 정예 기병대 4만을 끌고 갔다고 했어. 봐, 비아야. 지금 무칼리를 따르는 건 4만에 한참 못 미쳐.”

어림잡아 3만 명.

얼핏 봐도 1만에 가까운 병력이 증발해 있었다.

그건 마교의 반란분자들과 무칼리가 제대로 충돌했다는 뜻이며, 주원장과 소교주의 이이제이 계책이 먹혔다는 증거였다.

“소교주가 이끄는 타격대의 숫자는 많지 않아. 그 정도 병력으로 지금까지 시간을 끈 것만으로도 기적에 가까운 거야.”

상황을 짐작한 여규는 혀를 내둘렀다.

원 기병대의 힘을 알고, 전략전술을 공부한 입장에서 소교주가 한 일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실감했기 때문이다.

반면 전략 따윈 알지 못하고, 배울 생각도 없는 칼잡이의 사고는 아주 단순했다.

“아무튼 이리로 왔잖아. 그래서 저건 어쩔 건데?”

누구도 막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지금 좌우익은 힘의 균형이 팽팽한 상태였고, 뺄 수 있는 병력이 없었다.

힘이 빠진 바투의 군대를 서달의 본대가 부술 수 있도록 시간만 끄는 상황.

무칼리는 노련한 장수답게 한눈에 전황을 파악했고, 곧바로 중앙 전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자신이 바투와 합류하여 서달의 목을 베기만 하면 병력의 열세를 뒤집고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으니까.

“미치겠네. 답이 없잖아?”

철중구는 기세 좋게 달려가는 기마대를 맥이 빠진 얼굴로 바라만 봤다.

이번에도 가장 먼저 몸을 일으킨 건 마른 비였다.

“해보자.”

“으엉? 해보긴 뭘 해봐? 아까랑은 달라, 인마! 너 그 ‘크엉~!’ 하는 거 또 쓸 수 있어? 뇌력인지 뭔지 바닥난 거 아니야?”

철중구의 말이 맞았다.

유일한 희망은 야수 제어인데, 사와르가 이끄는 기마대를 멈추기 위해 마른 비는 뇌력을 완전히 소진한 상태였다.

별비도 당분간은 자연기를 실은 포효를 터뜨릴 수 없을 터.

하지만 마른 비는 포기하지 않았고, 맹렬히 머리를 굴렸다.

‘기마……. 기마만 막으면 돼. 전부 거꾸러뜨릴 필요도 없어. 전열만 꺾으면 자기들끼리 부딪혀서 나뒹굴 거야.’

마른 비는 아군이 있는 전장을 훑었다.

그리고 발견했다.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에서 대단히 이질적인 전투를 하고 있는 자들을.

『운석! 영령! 전장에서 이탈해! 병력을 이끌고 날 따라와!』

저거다.

저들이라면 지금 내가 원하는 그림을 그려줄 수 있다!

좌익에서 정신없이 싸우던 당운석과 당영령이 마른 비의 언령을 듣고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고개를 돌린 그들은 마른 비가 향하는 지점을 보았고, 이해했다.

“대주님!”

녹수대주 당건휘.

그도 마른 비의 의도를 알아챘지만, 탐탁지 않은 기색이었다.

당가만으로 무칼리를 막아섰다가 일이 잘못되면 다치는 걸로는 끝나지 않기 때문이다.

『뭘 꾸물대고 있어! 당장 합류해!』

마른 비는 당건휘의 뇌리에 언령을 때려 박았다.

“빌어먹을…!”

대장군기를 맡긴 이상, 마른 비의 명은 곧 서달의 명이다.

당건휘는 얼굴을 찌그러뜨렸지만, 거역할 수 없었다.

“당가는 전장을 이탈하라! 우 소협을 도와 무칼리를 막는다!”

마른 비를 수왕이 아닌 우 소협으로 격하시켜 부르는 게 그가 불만을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규! 중구! 별비를 따라가!”

검과 도를 빼들고 달리던 두 사람이 덜컥 멈췄다.

“뭐? 너랑 같이 가는 게 아니라?”

“가라니? 어디를?”

마른 비는 손가락으로 기주 평야 끝자락에 있는 언덕을 가리켰다.

“주술사! 원 기병대에 걸린 축복을 해제해야 해! 무칼리를 막고, 주술만 걷어내면 서달 장군이 무조건 이겨!”

“……주술? 너 그런 것도 믿냐?”

10만 명을 돌아오느라 전장에 합류하는 게 늦은 철중구는 원 기마대의 힘이 증폭되는 걸 보지 못 했다.

와족과의 전쟁을 겪으며 주술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체감한 여규가 표정을 굳히며 철중구를 잡아끌었다.

“비아가 시키는 대로 해! 따라와, 중구!”

별비는 이미 이쪽으로 뛰고 있었다.

마른 비 일행은 중앙 벌판에서 합류했고, 별비의 등에서 전룡과 영령이 훌쩍 뛰어 내렸다.

별비는 멈추지 않고 달려서 여규와 철중구를 등에 태웠다.

“시벌! 살다 보니 별비 형님 등에 다 타보네! 나 흥분돼서 졸도할 거 같애!”

하여간 저 입은 쉬는 법이 없다.

별비는 제발 입 좀 다물라는 듯 낮게 그르렁대더니 휑하게 비어버린 평야를 가로질렀다.

“형, 준비됐어?”

“언제든지. 수왕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되다니 영광이다.”

병사들이 외치는 걸 들은 모양이다.

전룡의 농담에 얼굴이 벌게진 마른 비가 말했다.

“나야말로. 수라와 함께 싸우니까 든든하네.”

듣고 있던 영령이 기괴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염병! 쌍으로 까고 있네. 하여튼 남자들이란.”

영령이 낯부끄럽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을 때, 당가가 당도했다.

“비아야! 뭘 하면 돼? 지시만 내려!”

마른 비는 코앞까지 다가온 기마대를 보며 말했다.

“독. 그리고 비수. 무칼리를 따로 떨어뜨려줘.”

달려오며 싸울 준비를 끝낸 당가의 무인들은 곧바로 움직였다.

틱, 티틱, 틱, 투툭―!

당영령은 가만히 서서 엄지손가락을 튕겼다.

그녀의 입꼬리가 올라가는 순간,

“죽어.”

푸화아아악―!

오색빛깔 독무의 향연이 펼쳐졌다.

신선폐(神仙廢), 오보단장독(五步斷腸毒), 상린남영(祥鱗藍影), 칠보단혼산(七步斷魂散)…!

오랜 연구 끝에 만들어낸 당가 독술의 결정체가 독니를 드러냈다.

마른 비에게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건 그놈이 남다른 것이다.

절독의 구름이 피어오르는 순간, 흉험한 기세로 달려오던 기마대의 전열이 거꾸러졌다.

“히… 히힝… 히히히힝!”

“커, 커컥…!”

“이게 무슨…! 독?!”

독화살을 날리는 놈들은 봤어도 전장에서 독을 뿌려대는 놈들은 없다.

효율적이지도 않고, 쓸 수 있는 상황도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허나 오명을 뒤집어쓰고 손가락질 받으면서도 포기하지 않은 당가의 독술은 녹색 손아귀로 초원 전사들의 목줄을 옥좼다.

천수사 당천기.

그의 결단은 옳았다.

“카학…!”

“독이라니?! 이 더러운 놈들이…!”

기마가 무릎을 꺾고, 달리던 자세 그대로 거꾸러진다.

중독되어 새카맣게 변한 병사들의 얼굴 위로 핏줄이 불거졌다.

독구름이 깔린 영역에 들어서는 순간, 기마고 사람이고 할 것 없이 피를 토하며 땅 위에 나뒹굴었다.

“추, 충돌한다!”

무너져 내린 전열은 장애물이나 다름없었다.

원의 기마대는 놀라운 기마술로 아군을 뛰어 넘었으나, 그들을 기다리는 건 은빛 비수의 폭풍이었다.

“허공에 뜬 기마. 더없이 좋은 표적이 아닌가?”

천녀산화(天女散花), 구환살(九幻殺), 추혼비접(追魂飛蝶), 연환십이참(連環十二斬)…!

당가 비전의 암기술이 불꽃을 토했다.

햇빛을 산란시키며 쏟아지는 비수의 반사광은 찬란하기만 했다.

“크아악!”

“컥…! 쿠헉!”

크고 무거운 암기들은 갑주를 종잇장처럼 찢었고, 작고 가벼운 비수들은 갑주의 틈과 기마를 요격하여 무너뜨렸다.

날아올랐다가 추락한 기마대는 이차 장애물이 되어 뒤를 따르던 아군의 진로를 가로막았다.

꽈아앙―! 꽝! 푸카캉!

중갑주를 걸친 기병과 육중한 전투마가 충돌하자 참상이 벌어졌다.

용맹하게 달려들던 원 기마대의 선봉은 무기 한번 휘두르지 못하고 숨이 끊어졌다.

“카아악! 쓰레기 같은 놈들이…!”

푸하아아악―!

독무를 뚫고 나온 장대한 체구의 거한.

쌍도를 든 사내는 핏발 선 눈으로 녹수대를 노려봤다.

“그 복장…! 당가! 카안께 비수를 날린 늙은 개가 네놈들의 수장이렷다!”

늙은 개.

가문의 영광과 미래를 위해 목숨을 던진 가주의 명예가 더럽혀졌다.

녹수대와 은비대는 눈이 뒤집혀서 무칼리에게 달려들었다.

“흥!”

무칼리는 두 자루의 대도를 가슴 앞까지 끌어당겼다가 새가 활개를 펴듯 좌우로 휘둘렀다.

촤아아아악―!

당가 무인 십여 명의 몸통이 한꺼번에 양단되며 피를 뿜었다.

무칼리는 그대로 돌진하며 쌍도를 휘둘렀다.

“카아압!”

광풍참.

무칼리가 펼치는 참마도법은 야투에서 마른 비가 경험한 것과는 달랐다.

뻔히 보면서도 막을 수 없는 패력이 휘몰아친다.

근접전에 취약한 당가의 무인들은 일도도 받아내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병력을 뒤로 물려!”

당가는 무칼리를 당해낼 수 없다.

자신이 나서야 한다!

마른 비가 발을 뗄 때, 영령이 그를 말렸다.

“오라버니, 기다려. 아저씨가 갈 거야.”

우우우웅―

마른 비가 고개를 돌렸을 때, 자세를 낮춘 전룡의 몸에서 기의 폭풍이 휘몰아쳤다.

“육섬(六閃).”

퀴아아아악―!

등에 멘 여섯 자루의 단창.

전룡의 입술이 열리자, 여섯 줄기 붉은 섬광이 무칼리에게 쇄도했다.

“음?!”

기로써 창을 조종하는 그것은 두말할 여지없는 이기어창이었다.

최단거리를 가로지른 창들은 치명적인 급소를 노렸고, 무칼리는 쌍도를 끌어당기며 미친 듯이 휘둘렀다.

“카아아아!”

도막.

두 자루의 대도로 펼치는 엄밀한 수비식이었다.

단창이 꽂힐 때마다 막의 외곽이 일그러졌지만, 중첩된 도막을 뚫기엔 힘이 모자랐다.

허공을 선회한 창들이 회수되는 걸 기다리지 않고, 전룡은 돌진했다.

“제마공진격(制魔空震擊).”

그것은 한 자루 철창으로 구현하는 필멸의 기예였다.

웅혼한 힘이 철창의 끝에 집중되자, 공간 자체를 소멸시킬 것 같은 불길한 떨림이 시작된다.

전룡이 손을 뻗은 순간, 일직선으로 쏘아진 철창은 압축했던 공기를 터뜨리며 폭발했다.

콰차창―!

도막이 깨졌다.

철창이 꽂히는 순간, 이중으로 중첩시킨 방어막은 유리그릇이 박살나 듯 형편없이 부서졌다.

“커흡…!”

무칼리의 눈이 경악으로 물들고, 그의 팔이 양옆으로 튕겨나갔을 때!

전룡이 도를 수직으로 그었다.

“죽어라.”

수라참(修羅斬).

짙붉은 강기로 이글거리는 도가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혔다.

“애송이가…! 나대지 마라!”

누가 봐도 끝난 승부였다.

하지만 무칼리는 포기하지 않았고, 땅에 엎어질 듯이 자세를 낮췄다.

그는 도가 흐르는 방향으로 먼저 움직이는 한편, 측면으로 회피를 시도했다.

스가가각―!

두툼한 견갑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지만, 무칼리는 아무런 피해도 입지 않았다.

‘이런…!’

십좌급의 무장이라더니 과연 엄청난 놈이다.

비대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몸을 저토록 경쾌하게 놀리다니!

전력을 기울인 공격이 빗나가자, 전룡은 순간적으로 경직 상태에 빠졌다.

“하마터면 골로 갈 뻔했군. 이제는 내 차례다. 죽어라.”

‘이건 못 피해! 중상을 입더라도 급소만은…!

대도가 날아들고, 전룡이 통증에 대비하는 순간, 마른 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내 차례야. 네가 죽어.”

꽈아아아앙―!

천둥바위.

푸르른 충격파가 무칼리를 하늘로 날려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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