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4화
‘막았어?!’
마른 비는 진심으로 놀랐다.
무칼리는 전룡을 공격하는 중이었고, 천둥바위는 그 틈을 노리고 절묘하게 들어갔다.
하지만 타격의 순간, 무칼리가 몸을 비틀며 둘 사이에 대도를 끼워 넣은 것이다.
초평낭아공을 두른 대도는 천둥바위의 충격을 상쇄했고, 무칼리는 별다른 피해를 입지 않았다.
힘에 밀려 하늘로 튕겨 나갔을 뿐.
‘황실 삼대 무장이라 이거지?’
가만히 생각해보니 십좌급의 무장을 상대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바투와 무칼리를 만나기 전까지 마른 비가 싸운 적 중 가장 강한 건 비마였다.
마교 칠대 장로인 그도 무척이나 강했지만, 바투, 무칼리와 비교하니 손색이 있는 게 사실이었다.
‘어디서 이런 놈들이 나타난 거냐?!’
마른 비만 놀란 게 아니었다.
허공에 떠올랐다가 지면에 착지한 무칼리도 눈을 파르르 떨고 있었다.
‘이십 대 초중반에 불과한 놈들이 어떻게…!’
전력을 다하고도 적의 목을 치지 못한 게 얼마 만인가.
심지어 자신은 지금 주술의 힘을 받아들인 상태였다.
새파랗게 어린놈들이 그런 자신을 위기에 몰아넣고 있었다.
무칼리는 초조함을 느꼈다.
‘바로 간다.’
마른 비는 번갯불을 튕기기 위해 다리에 자연기를 집중시켰다.
승산?
십좌급의 무장을 일대일로 쓰러뜨릴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하지 않는다.
아직 자신이 그만한 경지에 오르지 못했다는 건 스스로가 가장 잘 아니까.
하지만 재밌는 건 질 거란 생각도 들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발만 묶으면 돼. 그럼 아군이 이긴다.’
마른 비가 이를 깨물고 정권을 준비할 때였다.
휘이이익―!
무칼리가 기마대 쪽을 힐끗 보더니 휘파람을 불었다.
두두두두―!
당가의 저지선을 우회해 달려오는 말 한 마리.
경쾌하게 뛰어오른 무칼리가 기마에 올라탔다.
“쿨럭… 퉷!”
무칼리가 뱉어낸 건 시커멓게 죽은 피였다.
당가의 독도 그에게는 큰 피해를 주지 못한 듯했다.
‘설마?’
싸우다말고 가버릴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마른 비가 황급히 달려드는 순간, 십여 자루의 참마도가 날아와 꽂혔다.
“큭…!”
진청의 갑옷을 입은 장군들.
교묘하게 마른 비의 진로를 가로막은 건 사와르들이었다.
“이럇!”
기마대를 이끌고 달려온 그들은 땅에 꽂힌 참마도를 회수하며 그대로 달려 나갔다.
기껏해야 이백 명도 안 되는 당가가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은 한계가 있었고, 그렇다면 우회하면 그만이다.
무칼리가 결단을 내리는 순간, 원의 기마대는 한 몸처럼 움직여서 저지선을 무시하고 달렸다.
“이런…!”
예상치 못한 움직임에 당황했지만, 마른 비의 대응은 신속했다.
그는 뛰어올랐고, 옆을 지나는 기병의 머리를 후려쳤다.
기수를 낙마시킨 후 그대로 기마에 올라탔다.
문제는 마른 비가 말을 타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히히히힝!”
기수가 바뀌었다는 걸 알아챈 말이 거부감을 드러내는 순간, 마른 비가 언령을 발했다.
『쉬이… 괜찮아. 해치지 않을 테니까 진정해.』
마른 비를 떨어뜨리기 위해 앞뒤로 몸부림을 치던 말이 얌전해졌다.
마른 비는 갈기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말했다.
『난 너희들과 달려본 적이 없어. 하지만 지금 네 힘이 필요해. 날 도와줄 수 있을까?』
“푸르륵, 푸륵…!”
말이 이에 대답하듯 울음을 흘렸다.
그리고 스스로 달리기 시작했다.
마른 비는 기마의 움직임에 저항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몸을 맡겼다.
사방팔방으로 날뛰는 별비도 타고 다닌 그가 말의 움직임에 적응하는 건 순식간이었다.
“이놈이 어디서 감히…!”
근처를 지나는 원의 기마대가 달려들었지만, 마른 비를 막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중요한 순간이니까 방해하지 마.”
마른 비는 돌아보지도 않고 발을 뻗었다.
안면에 발차기가 꽂힌 기병이 의식을 잃고 낙마했다.
순간 무언가를 깨달은 마른 비가 옆을 돌아봤다.
‘멀어…….’
말을 타지 않았을 때는 권각만으로 충분했다.
거리가 모자라면 발을 놀려서 적의 품으로 뛰어들면 그만이니까.
한데 방금 발을 뻗으며 느낀 건 마상전투에 접어들 경우, 이대로는 힘들겠다는 점이었다.
‘말을 타고 싸우려면…… 무기가 필요해.’
근처의 적을 하나 더 낙마시킨 마른 비는 상대가 놓친 참마도를 손에 쥐었다.
‘쓸 수 있을까?’
무기의 필요성은 전쟁의 초반부터 느꼈다.
기마에 올라탄 기병이 예상보다 훨씬 크고 위압적이었기 때문이다.
무력의 차이가 압도적이라 쓰러뜨리는 건 어렵지 않았으나, 전장에서 맨손으로 싸우는 건 여러모로 불리하고 비효율적인 일이었다.
‘끄응……. 영 자신 없는데.’
몸을 쓰는 건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지만, 검이나 도와 같은 병기를 다루는 건 또 다른 문제였다.
철중구는 그렇다 쳐도 여규가 사일검을 펼치는 걸 보고 있자면 묘기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뭐냐? 비아 너, 참마도도 다룰 줄 아나?”
전룡이었다.
그도 무칼리를 쫓기 위해 기마에 오른 모양이었다.
영령을 앞에 태운 그는 간간이 달려드는 적들을 창으로 거꾸러뜨리며 마른 비에게 따라붙었다.
“아니. 맨손은 거리가 안 나와서 일단 쥐어봤는데……. 흠, 쓸 수 있을지 모르겠네.”
달리는 기마 위에서, 마른 비는 참마도를 이리저리 휘둘러봤다.
영 어색한 동작이었다.
“나쁘지 않은 생각이다. 아예 말을 타지 않으면 모를까, 마상전에서 맨손으로 싸우는 사람은 없으니까.”
전룡은 고삐를 쥐고 있지도 않았다.
양손에 도와 창을 든 그는 다리만으로 기마를 제어하며 달리고 있었다.
전룡은 간단한 동작 몇 가지를 보여주며 말했다.
“도는 베기가 기본이다. 손날치기를 한다고 생각해. 팔이 늘어났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후려치는 거다. 정교한 기교 따윈 생각하지 말고 힘으로 뭉개라. 너라면 그걸로 충분해.”
전룡은 보기 좋게 웃더니 앞장섰다.
“내가 앞에서 진영을 부술 테니까 뒤따라와라. 기병들을 뚫고 무칼리에게 닿으면 도를 버리고 네 장기로 싸워. 그때까지는 무기가 있는 게 나을 거다.”
“알았어. 근데 형, 쉽게 따라잡기 힘들 것 같은데?”
마른 비의 말처럼 거리는 점점 벌어지고 있었다.
무칼리를 내버려둘 수 없어서 따라오긴 했는데, 기마술의 차이가 너무 큰 것이다.
마른 비가 눈살을 좁힐 때, 영령이 말했다.
“나만 믿어, 오라버니. 다 생각이 있어서 따라온 거라구.”
눈을 감았다 뜨자, 영령의 눈이 번쩍이며 빛났다.
“꽉 잡아, 오라버니. 지금부터 일직선으로 무칼리에게 갈 거야.”
후우우욱―
마른 비는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그건 그에게만 벌어진 일이 아니었다.
그를 태우고 있는 기마의 감정이 전해졌는데, 처음엔 당황했던 녀석이 곧 희열을 느낀 듯 힘차게 울부짖었다.
“히히히히히힝―!”
영령이 일행에게 가해지는 중력을 조절한 것이다.
두 마리의 말이 날 듯이 달려 나갔다.
뒤로 쳐졌던 그들은 적들을 점점 따라잡더니, 기마대의 측면에 다다랐다.
“준비해라! 비아야! 돌입한다!”
콰아아아앙!
전룡은 속도를 늦추지 않고 그대로 기마대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한옆으로 한껏 기울인 자세.
돌입의 순간, 그의 도가 빛을 뿜었다.
“이야아아아!”
수라참.
붉은 도강이 수평으로 그어지자, 기병들의 몸이 양단되며 피분수가 솟구쳤다.
전룡은 기마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돌진했다.
“차아압!”
전방으로 내지른 창이 부챗살처럼 퍼지며 다연발 찌르기를 쏟아냈다.
전룡의 창이 지배하는 간격 안에서 목숨을 부지할 수 있는 적은 없었다.
찌르고, 베며, 부순다.
도와 창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전룡은 그의 별호가 왜 수라인지를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하압!”
마상전이 처음인 마른 비도 분전하고 있었다.
손발이 닿지 않는 거리는 참마도를 휘둘러서 ‘부수고’, 근접한 적은 박투술로 제압한다.
마른 비의 베기는 적을 가른다기보다는 둔기로 박살내는 것에 가까웠지만, 아무도 받아내지 못했다.
기교가 나발이고 힘으로 깨부순다.
차라리 철퇴를 쥐어주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무지막지한 힘이었다.
‘이래서 무기를 쓰는구나!’
적을 제압할 수 있는 간격이 두 배는 늘어난 느낌이다.
상대의 무기와 부딪칠 때마다 몸이 상하지 않도록 교룡갑을 둘러칠 필요도 없었다.
전장에서 처음으로 도를 써본 마른 비는 자신에게 맞는 무기가 있으면 어떨까 하는 상상을 했다.
“전군! 나를 따르라!”
전룡과 마른 비가 무칼리의 옆구리를 찌를 때, 초원의 독수리는 서달을 향해 내리꽂혔다.
“힘으로 깨부순다! 들이쳐라!”
참마도가 휘둘러지자 중갑주가 물 먹은 습자지처럼 형편없이 찢겼다.
사선으로 내지른 장창은 육중한 방패를 사정없이 꿰뚫었다.
병과의 상성?
그따위 것은 힘의 차이가 비슷할 때나 먹히는 것이다.
초원의 주술을 등에 업은 바투는 손쓸 도리가 없는 폭풍과 같았다.
“자, 장군! 바투를 막을 장수가 없습니다!”
벌써 몇 명째인가.
정면으로 다가오는 바투를 저지하기 위해 명의 장수들이 달려들었지만, 일합도 버티지 못하고 고혼이 되었다.
강남의 패권을 쥐기 위해 전선을 누볐던 명장들이 아예 상대가 되지 않았다.
명군은 그제야 깨달았다.
제국에서 정점에 이른 무장과, 기껏해야 강남에서 치고받던 명의 장수들 사이엔 엄청난 격의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상우춘이 패퇴한 지금, 명의 장군들 중 바투와 칼을 맞댈 수 있는 건 서달이 유일했다.
“당황하지 마라. 이 정도는 당연히 예측했느니라.”
또한 전장 전체를 통틀어 차분한 것도 서달뿐이었다.
“잘라라.”
그의 명이 떨어지자 바투가 파고든 중보병 군단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일부러 중앙을 헐겁게 하고, 좌우에 정예를 배치한 진형.
장창을 앞세운 중보병이 돌격하여 쐐기진의 첨단부를 몸통과 분리시켰다.
“감싸라.”
쿠쿵! 쿠쿠쿠쿵―!
기마대를 앞뒤로 쪼갠 중보병들이 바투를 둥글게 둘러싸고 방패를 땅에 내리꽂았다.
뒤에 따라오는 후속부대 따윈 염두에 두지 않는 모습.
바투가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서달! 이게 뭐 하는 짓…!”
“쏴라. 벌집을 만들어버리도록.”
퓨퓩― 퓨퓨퓨퓩―!
중보병 군단이 일제히 무릎을 꿇자, 후방에 위치한 궁수대가 시위를 놓았다.
아군의 머리 위를 가로지른 화살이 바투와 함께 고립된 기마대에 쏟아져 내렸다.
“크악! 이런 짓을…!”
“서달! 네 이놈! 아군의 희생은 염두에 두지 않는 거냐!”
중갑을 걸치고, 방패 뒤에 몸을 숨겼다 하나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은 명군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하지만 서달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바투만 잡으면 된다. 놈만 없애면 나머지를 요리하는 건 일도 아니야. 승리를 위해 다소의 피해는 감수할 것이다.”
바투와 함께 고립된 자들은 원 기마대에서 고르고 고른 강자들이었다.
그들은 참마도를 휘두르며 화살을 쳐냈으나, 서달은 화살을 끝없이 퍼부었다.
숨 몇 번 고를 사이에 원의 정예들이 고슴도치가 되어 전멸했다.
“훅…! 후욱…!”
오직 바투만이 멀쩡했다.
화살은 그의 도막을 뚫지 못했고, 헤아릴 수 없는 화살이 주위에 나뒹굴었다.
하지만 서달은 웃었다.
“내공이란 결국 바닥을 드러내게 돼 있지. 얼마나 버티는지 보겠다, 바투.”
서달이 손을 들자 두 번째 화살비가 퍼부어졌다.
바투는 이번에도 쓰러지지 않았으나 기마는 지키지 못했다.
“히, 히힝…….”
쿠웅!
전장에서 말을 잃는다는 건 기동력을 상실한 것과 마찬가지다.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정말 대단하구나. 허나 너무 무모한 전술이었어. 내가 이 정도도 읽지 못할 것 같은가?”
“안 돼! 비켜라! 이 쓰레기 같은 놈들이…!”
“장구운…!”
원의 기마대는 바투를 구하기 위해 달려들었고, 헐거워진 명의 진형을 허물었다.
하지만 삽시간에 벌어진 일이라 그들이 바투에게 닿을 쯤엔 상황이 끝나 있을 터였다.
“그럼…….”
서달이 세 번째 화살비를 퍼부으려는 찰나, 명의 전열이 터져 나갔다.
콰아아아앙―!
붉어진 얼굴로 쌍도를 휘두르며 난입한 자.
기마대와 함께 평야를 가로질러 달려온 무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