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5화
“아니! 어떻게?!”
서달이 언성을 높이며 흠칫했다.
무칼리가 달려오는 건 봤지만 이건 너무 빨랐기 때문이다.
적들을 훑어본 서달은 무칼리의 기마대가 기묘한 기운에 휩싸인 걸 발견했다.
‘정체불명의 힘…! 저게 초원의 주술인가?’
마른 비의 짐작과 달리 서달도, 상우춘도 술법에 대해 알고 있었다.
그저 그 효능을 얕봤을 뿐.
기병들이 그랬듯 원의 기마들은 주술의 힘을 받아 잠력을 개방했고, 그건 기동력의 상승으로 나타났다.
그 결과 무칼리는 평야를 가로질러 절묘한 시점에 명의 본대를 들이칠 수 있었다.
“바투! 내가 왔다!”
무칼리는 전장이 쩌렁 울리도록 소리쳤다.
“위대한 초원의 전사들이여! 병정놀이나 일삼아 온 나약한 것들에게 진짜 전쟁이 무엇인지 보여줘라!”
“오오오오!”
폭발적으로 타오르는 군기.
말머리를 들어 올린 무칼리는 전장 전체를 짓누를 듯한 위용을 뽐냈다.
“전군! 돌격하라!”
투콰카카캉!
피와 철의 향연.
그 끝에는 결국 덧없이 스러지는 목숨이 있을 뿐이다.
차디찬 땅에 뜨거운 핏물이 고이고, 가쁘게 토해진 숨결이 한가로운 대기에 열기를 피워 올린다.
쇳소리 부딪히는 이곳은 천하 패권의 향방이 걸린 전장의 한복판이었다.
“중보병! 반전하라! 무칼리를 막아!”
서달의 외침이 날카롭다면, 바투의 음성은 묵직했다.
“전세가 뒤집히는가? 그렇다면 절대 죽을 수 없지. 오라, 무칼리여. 네가 당도할 때까지 죽지 않고 서 있겠다.”
장창과 도를 든 사내는 두 팔을 벌리며 웃었다.
“곧 네 목을 따러 간다. 기대해라, 서달.”
여전히 원군이 열세인 건 분명했다.
하지만 서달은 더 이상 침착할 수 없었다.
무칼리의 군이 바투와 합류하고, 악을 쓰며 달려드는 바투의 기마대가 거기에 더해지는 순간, 그들의 돌격을 막기가 쉽지 않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서달이 본영의 위치를 옮기는 걸 고려하며 뒤를 힐끗 볼 때였다.
또 한번 전황을 뒤집을 남자가 하늘에서부터 내리꽂혔다.
“비아야! 힘을 아껴라! 내가 널 무칼리에게 보내주겠다!”
적들의 피를 뒤집어쓴 전룡이 외쳤다.
둘 다 온전한 상태로 무칼리에게 가는 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마상전에 익숙한 자신이 길을 내고, 마른 비를 무칼리에게 보내는 게 최선일 터.
전룡은 마른 비의 호위이자 길잡이가 되어 길을 열었다.
“오오오오!”
투콰카캉!
전룡은 창칼의 숲을 헤집는 벌목꾼과 같았다.
그의 도는 기마의 밑동을 베었고, 철창은 기병의 가지를 쳐냈다.
팔다리가 잘린 인간과 말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갔다.
귀안을 개방한 수라는 개세의 무력으로 피의 돌파를 이뤄냈다.
“부, 붙지 마라! 당해낼 수 없다!”
용맹하게 달려들던 초원의 전사들이 겁먹은 개처럼 꼬리를 내렸다.
정예들이 조를 짜고 덤벼도, 물량으로 밀어붙여도, 전룡을 저지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들이 거리를 벌리며 활을 빼들 때,
“육섬, 파(破).”
허리를 굽힌 전룡의 등에서 여섯 줄기 파멸의 섬광이 빛을 뿜었다.
선형(扇形)으로 뻗어 나간 단창들은 전방의 적을 찢어발기며 시야를 열었다.
“크아아악!”
분수처럼 터진 피가 가라앉을 무렵, 저 멀리 무칼리의 등이 보였다.
“다 왔다!”
전룡이 귀안을 번쩍이고, 길을 뚫기 위해 힘을 모을 때,
화아아아악―!
이변이 일어났다.
정체불명의 기운이 감각을 간질인 순간, 적의 기마가 요동을 쳤다.
“히히히힝―!”
말들은 힘이 끓어오르는지 맹렬히 울부짖었다.
그리고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했다.
영령의 초능에는 못 미쳤으나, 주술은 원군의 기동력을 눈에 띄게 끌어올렸고, 장애물이 없는 무칼리는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뒤처졌던 기마대가 달려들며 전룡을 옭아매자, 무칼리는 순식간에 시야 너머로 사라져 버렸다.
차창! 쩌저정―! 콰쾅!
적의 공격을 받아내는 전룡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이런! 놓치다니…!”
난감한 상황이었다.
이대로라면 무칼리는 바투에게 합류할 터.
마른 비는 적들을 상대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정신 차려! 이용할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지형. 환경. 사람……. 분명히 이 상황을 헤칠 돌파구가…!’
그때, 마른 비는 보았다.
죽고 죽이는 인간들을 비웃듯 한가로이 허공을 날고 있는 철새들을.
‘저거야!’
마른 비는 남은 뇌력을 박박 긁어서 언령을 터뜨렸다.
『여기야! 이리 와서 날 데려가!』
“가아악, 가악! ……가악?!”
철새들의 우두머리가 마른 비의 부름에 반응했다.
허공에서 선회한 녀석은 자신의 무리를 끌고 지상으로 낙하했다.
마른 비는 중심을 잡으며 말에서 일어섰고, 거리가 가까워진 순간 훌쩍 뛰어올랐다.
“어?! 오라버니, 뭐 하는 거야?!”
전룡의 말에 타고 있던 영령이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녀는 마른 비의 의도를 눈치챘고, 힘을 보탰다.
“나 참! 진짜 골 때리는 인간이네! 나보다 더해!”
영령은 중력을 조절해 마른 비의 체중을 최대한 경감시켰다.
새카맣게 달라붙은 새들이 마른 비를 들어 올렸고, 전장의 앞쪽으로 운반하기 시작했다.
어둔 날개의 다리를 붙잡고 날아가는 그믐에 비하면 모양이 빠지지만, 이보다 효율적인 이동수단은 없었다.
철새를 이용해 전장을 가로지르는 마른 비를 보며 원의 병사들은 입을 헤 벌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적들이 활을 꺼냈으나, 마른 비는 이미 멀어진 후였다.
“저쪽이야!”
마른 비는 원의 기마대를 앞질렀고, 무칼리를 금세 따라잡을 수 있었다.
그의 머리 위까지 가기 위해 의지를 보내는 순간,
덜컥!
새들이 주춤대며 하강하기 시작했다.
영령에게서 멀어지자 초능의 효과가 풀린 모양이었다.
갑작스레 가중된 무게에 새들은 당황했고,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했다.
아직은 거리가 있는 상황.
마른 비는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도와줘!』
마른 비는 허리를 하늘을 향해 꺾으며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그리고 한데 밀집한 철새들을 수평으로 디뎠다.
‘기회는 한 번뿐이야!’
평야의 상공에 떠오른 검은 구(球).
마른 비는 낙엽 가누기로 중심을 잡는 동시에 체중을 흩뜨렸다.
새들을 디딤돌 삼은 수왕이 허공에서 몸을 날리니, 그것은 무림사에 길이 남을 경이적인 광경이었다.
“하앗!”
마른 비는 천제(天帝)가 쏘아낸 화살처럼 지상으로 내리꽂혔다.
사선으로 낙하하는 지점엔 말머리를 들어 올리고 진격을 명령하는 무칼리가 있었다.
우르르릉―!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다.
하늘에서 꺼내든 뢰창은 푸른 전광을 줄기줄기 흘리며 모두의 이목을 잡아끌었다.
지금 그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건 서달에게 집중하고 있는 무칼리와 바투, 그리고 그들 주변의 병사뿐이었다.
“자, 자, 장구우우운―!”
후방에서 마른 비를 본 병사들이 질겁하여 소리를 질렀다.
“……?!”
무칼리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을 때, 뢰창은 그의 면전에 쇄도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과연 황실 삼대 무장은 달랐다.
창졸간에도, 무칼리는 황급히 쌍도를 휘둘러 도막을 펼쳤다.
쩌저저저정―!
구형의 방벽을 일그러뜨리며 전진하는 기의 창.
이차로 터진 음파가 주변에 몰린 기병들을 휩쓸었다.
급하게 펼친 도막은 불완전했고, 내공으로 몸을 미처 보호하지 못한 무칼리의 고막이 터졌다.
“크, 커흑…!”
귀에서 피가 줄줄 흘러나와도 무칼리는 이를 악물고 버텼다.
“크아아아악!”
미친 듯이 쌍도를 휘두른 무칼리가 마침내 뢰창의 궤도를 비켜냈다.
짙푸른 창이 머리 옆을 스치고 지나가자 그는 거칠게 숨을 토했다.
바로 그때, 수왕이 당도했다.
휘리리리릭―!
회전에, 회전에, 회전을 더한다.
마른 비는 뢰창을 던지자마자 수직으로 돌았고, 오른발을 들어 올렸다.
강대한 기운이 뒤꿈치에 응집되니, 일격필살 불벼락이 무칼리를 덮쳤다.
꽈르르릉―! 쩌저정―!
무칼리는 쌍도를 교차하여 막았지만, 마른 비의 일격은 하늘에서 떨어진 운석과 같았다.
첫 번째 도가 부러지고, 두 번째 도가 동강 났다.
무칼리의 왼쪽 어깨뼈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파열됐다.
위에서 가해진 힘을 이기지 못한 기마의 다리가 작살나며 꺾였다.
투콰카카캉!
“커허…….”
땅으로 내동댕이쳐진 무칼리가 볼품없이 구르다가 의식을 잃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깔렸다.
“헉… 허억…….”
오직 마른 비의 숨소리만이 들릴 뿐이었다.
십좌급의 무장을 침묵시킨 청년은 그 한 수로 전장의 흐름을 뒤바꿔버렸다.
“무… 무칼리…!”
바투조차 경악에 휩싸여 움직이지 못했다.
수십 년간 어깨를 나란히 하고 전장을 누볐지만, 무칼리가 패하고 의식을 잃는 건 본 일이 없다.
아니, 그가 낙마하는 것조차 보지 못했다.
초원의 독수리는 늑대의 침몰에 머리가 새하얘져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뭣들 하고 있나! 궁수대, 화살을 날려라!”
가장 먼저 움직인 건 서달이었다.
위기를 감지하고 진형을 재편하려던 그는 마른 비가 살린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바투가 퍼뜩 정신을 차렸을 땐 4만의 궁수가 쏘아낸 화살이 바람을 가르고 있었다.
“크아아아아!”
바투는 핏발 선 눈으로 날아드는 화살을 쳐냈다.
영겁과도 같은 시간이 지났을 때, 피아를 막론하고 일대에 서 있는 건 그밖에 없었다.
“저게 정녕 사람이란 말인가…!”
도저히 인간이라 믿기 힘든 무위.
명군이 두려움 섞인 탄식을 뱉었다.
‘기마대가 도착했다. 무칼리가 이끌고 온 정예까지 합쳐서 최후의 승부를 걸면….’
바투가 흐릿한 눈으로 승산을 점칠 때였다.
벌써 다했어야 할 기력을 끊임없이 되살리던 기운이 사그라들었다.
“……!”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주던 초원의 축복.
그 힘이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전장 후방에 위치한 주술사들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서달은 그 희미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지금이다! 흑색검단(黑色劍團)! 출격하라!”
명군의 기병에 적색창기병이 있다면, 보병을 대표하는 정예는 흑색검단이다.
서달이 직접 키운 그들은 상우춘이 육성한 적색창기병과 함께 명군을 견인하는 정예였다.
최후의 최후까지 아껴놓은 병력.
서달의 명이 떨어지자 칠흑의 중갑주와 대검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진영을 가르며 돌진했다.
“이, 이런…….”
실낱같은 희망마저 사라지자, 바투의 얼굴이 무참히 일그러졌다.
‘여기서 무너지는가…….’
기주 평야의 전투는 총력을 기울인 마지막 항전이었다.
여기서 패하면 대도는 함락된 거나 마찬가지고, 그건 원의 몰락을 의미했다.
어떻게든 이겨야 하는데…… 저 검은 군단은 도저히 막아낼 자신이 없었다.
‘패배한다 해도 마지막 순간까지 저항하리라. 대도에 홀로 쳐들어온 그 사내처럼!’
바투가 악경을 떠올리며 결사항전을 다짐할 때였다.
그의 결심을 흔드는 목소리가 들렸다.
“장군! 승세는 기울었습니다! 원통하지만 물러나야 합니다!”
“장군마저 쓰러지면 누가 카안을 보필한단 말입니까! 후일을 기약하소서!”
전선을 돌파한 바투의 기병대였다.
바투의 성정을 잘 아는 수하들은 필사적으로 그를 만류했다.
‘카안을 보필….’
그래. 어쩌면 그것이 더 중요한 책무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수하들을 하나라도 더 살리는 게 자신이 할 일이었다.
죽는 건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니까.
“후퇴하라! 기동력의 우위는 이쪽에 있다! 말머리를 돌려서 대도로 퇴각하라!”
천만다행인 건 중앙 전장에 기병이 없다는 점이었다.
바투는 병사들이 마른 비를 견제하며 무칼리를 구하는 걸 확인했다.
놀라운 힘을 보여준 자였으나, 그도 힘이 다한 듯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마른 비를 구하기 위해 달려드는 전룡을 보며, 바투는 미련을 버리고 퇴각했다.
제국의 몰락을 예감한 사내의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