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화
집결
《“특이한 오라버니지.”
온갖 곡식이 익어가는 가을.
이름 없는 야산, 운치 있게 피워놓은 모닥불 앞에서 밤하늘의 별빛을 눈에 담은 여인이 그리 말했다.
“협검 악 대협 기억해? 검 한 자루 들고 대도에 쳐들어갔던.”
잊을 리가 있을까.
원명 교체기, 무림을 넘어 민간에서까지 회자되는 전설적인 일화가 아닌가.
무슨 생각인지 ‘그’는 무림인들의 활약을 사서에서 지워버렸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협검의 황성 침공에는 여러 영웅이 관련되어 있고, 역대 최강의 살수라고 불리는 영살(影殺)은 직접 가담하기까지 했다.
진실을 덮으려는 어긋난 욕망에 씁쓸해하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잊을 수 없는 사건이지. 의기충천. 수많은 협객협사들이 북벌에 가담한 계기가 됐잖아. 그때 나와 아저씨도 산동성에 들어갔었어. 알려진 대로, 악 대협은 아저씨에게 스승이자 은인이거든.”
“아, 그래서 그토록…!”
수라가 산동성에서 혈로를 걸었다는 건 나중에야 밝혀진 사실이다.
원에 빌붙은 탐관오리부터 병영에 이르기까지, 닥치는 대로 습격하여 살육을 벌였다고 했다.
원군에 쫓기는 중에 철천지원수인 천인회(天人會)의 습격까지 더해져 그곳에서 뼈를 묻을 뻔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땐 나도 모르게 탄식을 흘리고야 말았다.
“그놈들과 그때부터 싸우고 계셨군요!”
수라를 말할 때면 반드시 함께 언급되는 여인.
하늘이 내린 놀라운 능력으로 압인소검(壓人小劍)이란 별호까지 획득한 여걸은 씁쓸히 웃었다.
“나 때문이지, 뭐. 재수 없게 나 같은 애를 만나는 바람에 아저씨가 주구장창 고생만 했어.”
“쓸데없는 소리.”
철창으로 모닥불을 뒤적이던 사내가 핀잔을 줬다.
나는 사실 그의 말을 듣고 싶었다.
허나 수라는 과묵하다는 소문대로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눈길을 보내봤지만, 그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계속해라, 령아.”
수라는 이야기를 빨리 끝내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내가 민망해하자, 영 소저는 미안하다는 듯이 말했다.
“당신이 이해해. 이 아저씨 사회성이란 게 아예 없거든. 아무튼 그때 만났어. 아저씨가 천인회와 싸우다가 초주검이 되는 바람에 내가 백원 의원으로 데려갔는데, 거기 오라버니가 있더라고.”
그녀는 추격을 염려하여 산동성이 아닌 강소성 지부로 갔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 수라 못지않은 중상을 입은 수왕이 있었던 것이다.
“중상을 입었다고요? 수왕이?”
금시초문이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대도에 입성한 수왕이 홍무제 앞에서 벌인 파격적인 행동.
사정을 모르면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이 하나씩 짜 맞춰지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그런 일을 벌인 거군요! 이제야 알겠습니다. 아무튼 백원 의원에서 몸을 회복하는 동안 북벌에 같이 참전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이거죠?”
“맞네.”
조용히 듣고만 있던 수라가 입을 열었다.
나는 그와 이야기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재빨리 질문했다.
“외람된 말이지만… 대협께선 친하게 지내는 이들이 많지 않은 걸로 압니다. 함께 싸운 전우와도 앙숙인 경우가 있었죠. 가령 저 북벽이라던가….”
“그놈 이야기를 할 거면 당장 꺼지게.”
귀안.
수라는 북벽의 이름만 들어도 열이 받는지 귀안까지 개방하며 으르렁댔다.
등골이 쭈뼛 섰지만, 정말 흔치 않은 기회였기에 두려움을 참으며 관찰했다.
전투력의 상승뿐만 아니라 부유하는 망령과 귀신, 사귀까지 잡아낸다는 퇴마(退魔)의 상징이 아닌가.
내가 부들부들 떨면서도 눈을 돌리지 않자, 수라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다.
“월주는 알다가도 모르겠군. 월검대주도 그렇지만, 어디서 이렇게 희한한 인간들만 잔뜩 모아놓은 건지.”
수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영 소저도 눈을 찌푸리며 거들었다.
“맞아. 그래도 이분은 되게 무난한데, 뭘. 동월이었나? 난 그 사람 진짜 마음에 안 들어. 겨울 달은 얼어 죽을! 이름을 화호(火狐)라고 지었어야 해! 불여우 같은 년!”
“헉! 부대주께서… 뭔가 실수를 저질렀습니까?”
조심스레 묻자, 상반된 대답이 나왔다.
“전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내게 친하게 지내자고 했을 뿐이야.”
수라가 태연하게 대꾸한 반면,
“아저씨는 가만히 있어! 이러니까 내가 구박을 하는 거라고! 그년이 아저씨한테 살살 꼬리치는 걸 왜 모르는데?!”
영 소저는 도끼눈을 뜨고 펄쩍 뛰었다.
‘하아… 또 그건가…….’
부대주는 이게 문제다.
지내보면 정말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아는데, 타고난 색기가 종종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어릴 때 사람 때문에 고생을 한 터라, 그녀는 사람을 굉장히 까다롭게 가리는 편이었다.
흔들리지 않을 성품을 지닌 자들에게만 살갑게 구는데, 문제는 당사자가 아니라 지인들이었다.
특히 그 지인이 여자라면 십중팔구 영 소저와 같은 반응을 보이곤 했다.
처음엔 억울해하고 조심하던 부대주도 요즘은 그러거나 말거나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라 대원들만 난처한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런 반응을 은근히 즐기고 있을지도.
“그, 저… 아무튼 간에…….”
뾰족한 목소리로 수라를 몰아치던 영 소저가 고개를 돌렸다.
“아무튼 뭐! 왜?!”
부대주에 대한 감정이 나한테 전이가 됐는지 영 소저는 대단히 까칠했다.
“이야기를 마저 듣고 싶어서……. 전 대협께서 사교성이 밝은 편이 아닌데도 수왕과 친해진 이유를 묻던 참이었습니다. 그의 어떤 점에 반해 마음을 열게 되었는지요…….”
괜히 분란을 일으킨 것 같아 내 목소리는 기어들어가고 있었다.
북벽과의 일화도 묻고 싶었지만, 한 번 더 말을 꺼냈다간 바로 쫓겨날 것 같아서 물을 수 없었다.
수라는 영 소저의 잔소리가 지겨웠는지 내 질문을 덥석 물었다.
“비아와 친해진 계기? 의도한 게 아니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렇게 돼 있더군.”
“어쩌다 보니까 호형호제할 정도로 가까워졌다?”
수라는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생각에 잠겼다.
왜 수왕과 가까워졌는지 생각해본 적이 없는 눈치였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입을 열었다.
“악한 자, 선한 자, 교활한 자, 영리한 자, 잇속에 밝은 자, 단순무식한 멍청이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났지만, 나와 령이의 마음을 끌어당긴 자는 극히 드물었네.”
“맞아. 십중팔구는 적이거나 우릴 이용하려는 사람들이었지.”
수라는 자신의 생각에 확신을 얻었는지 좀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말했다.
“비아는 선해. 하지만 그뿐이라면 내가 끌리지 않았을 걸세. 녀석은 외적으로 드러나는 무력 이상으로 내면이 강하지. 그토록 많은 일을 겪었음에도 변치 않은 걸 보면 알 수 있어. 심지어 ‘그 일’이 터진 후에도 말이야.”
“그 일? 아……. 맞아. 나라면 어디 한 군데는 이상해졌을 거야.”
영 소저는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을 말하는 건지 모를 리 없었고, 나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한참 어린 동생이지만, 그래서 끌린 거겠지. 또한 그 녀석은 순수하네. 누군가는 그걸 두고 멍청하고 답답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난 그게 비아의 주위에 사람이 많은 이유라고 생각해. 특히 내게는… 그게 눈부실 정도로 빛나 보였지. 난 마음을 연 게 아니야. 열 수밖에 없었던 걸세.”
굉장한 평가였다.
나이가 들수록 느끼는 건 모두에게 사랑받는 인간 따윈 있을 수 없다는 것인데, 수왕은 알면 알수록 내 상식을 깨는 존재였다.
물론 수왕의 적들은 그를 증오하겠지만, 그와 척을 진 자들은 하나같이 문제가 있는 족속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을 때, 수라가 말을 이었다.
“백원 의원에 있을 때는 즐거웠지. 비아의 일행은 모두 괜찮은 녀석들이었어. 규는 말할 것도 없고, 중구도 사내답게 시원시원한 녀석이지. 그 녀석들과는 지금도 가끔 연락을 주고받네.”
“맞아. 난 특히 별비를 알게 된 게 좋았어. 그 복슬복슬한 털이라니! 아, 또 쓰다듬고 싶다!”
“……중구? 투도 말입니까?”
뭔가 내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이야기를 들어버렸다.
기록을 남기는 자로서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건 무엇보다 중요한 법.
나는 직설적으로 물었다.
“듣기로는 투도는 조금 다르게 이야기를 했다던데….”
“음? 무슨 말이지?”
“월검대주께서 수왕에 대해 묻기 위해 투도를 만난 적이 있는데, 그때 대협에 대한 이야기도 오고간 모양입니다. 기록을 읽어 봤습니다만… 그대로 읊어드릴까요?”
수라는 눈으로 재촉했다.
나는 기억을 되짚으며 수라에 대한 투도의 말을 인용했다.
“사내새끼가 존나게 우중충해서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다……. 칼 좀 쓴다고 오지게 잘난 척을 한다……. 내가 협검한테 배웠으면 천하제일검이 됐을 텐데 그 새낀 재능이 없다…….”
“호오~? 계속해 봐.”
그쯤에서 멈췄어야 했다.
눈치 없게도 나는 전부 말해버렸다.
“또 뭐라더라? 아…! 그 새끼를 키운 건 팔 할이 나다……. 대련이 끝나면 항상 같이 씻었는데, 생긴 거랑 다르게 작더라…….”
“호오오…… 중구가 정말 그랬단 말이지?”
착각이었을까?
모닥불을 뒤집던 철창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 같았다.
영 소저가 얼굴을 짚으며 한숨을 내쉬는 것도 본 것 같다.
수라는 벌떡 일어나더니 방향을 가늠하듯 주위를 둘러봤다.
“마침 근처에 사도련의 총단이 있었지. 그 새끼, 아니… 중구 그 친구, 지금 거기에 있나?”
“수왕이 살신전(殺神戰)에 참전했을 때 투견대를 이끌고 후방을 지원했다고 들었습니다. 그 이후로는 특별한 일이 없었으니 총단에 있겠죠. 어? 그러고 보니 대협께서도 살신전에….”
수라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영 소저를 재촉했다.
“가자.”
“하아… 이 시간에? 아저씨, 지금 한밤중이야. 사도련이 무슨 동네 구멍가게도 아니고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괜찮다. 중구 그놈이 물고 빠는 련주는 오히려 좋아할걸? 아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서 구경하러 올 거다.”
그제야 난 내가 큰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뜨악한 얼굴을 한 내게, 수라는 미소를 보이며 말했다.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걱정 말게. 자네 이름은 입도 뻥긋 안 할 테니까. 그저 오랜만에 친구끼리 몸의 대화가 필요하다고 느꼈을 뿐이야.”
영 소저는 뭐 이런 인간이 다 있냐는 얼굴로 날 쏘아봤다.
“진짜 환장하겠네. 살다 살다 전 아저씨보다 눈치 없는 사람은 처음 본다. 후우… 일 커지면 월주님께 따지러 갈 거니까 그렇게 알아!”
수라의 입은 웃고 있었지만, 눈은 그렇지 않았다.
귀안을 번뜩이는 그는 끔찍한 살기를 흩뿌리며 사도련이 있는 방향으로 산을 내려갔다.
그리고 난 본능적으로 사도련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몸을 날렸다.》
혼세록 대담 편
「수라 전룡, 압인소검 영령」
삭월 월목대원 태인 저
제국의 수도.
동서양의 문물이 오가며 찬란한 번성을 이룩했던 대도에선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기주 평야의 대회전을 끝으로 원은 명에 대항할 힘을 완전히 상실해버렸고, 탈진한 바투와 중상을 입은 무칼리가 도착하자 카안은 말을 잃은 채 두 눈을 꾹 감았다.
백 년을 이어온 제국의 명맥이 자신의 대에서 끊겼다는 걸 실감한 절대자는 칙칙하게 죽은 눈으로 말했다.
“……초원으로 간다. 전군, 퇴각하라.”
대도의 두터운 성벽에 기대 최후의 항전을 펼치리라는 모두의 예상은 빗나갔다.
초원의 전사들은 부수고 빼앗는 자들이지, 지키는 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성전은 그들의 장기가 아니었으며, 모든 장수가 쓰러진 지금 원에겐 아무런 승산이 없었다.
“불을 질러라. 우리가 이룩한 유산은 어떤 것도 넘겨주지 않으리니.”
카안은 비통한 심정을 토해내듯 방화를 명했고, 그것이 한 시대의 패자가 남긴 마지막 말이 되었다.
그건 마치 주원장에겐 어떤 것도 넘겨줄 수 없다는 외침이자 최후의 발악처럼 보였다.
주원장이 원의 유산 따윈 애초에 남겨둘 생각이 없다는 걸 알았다면 카안은 어떤 심정이 들었을까?
웅장한 성벽 너머로 넘실대는 화마는 저물어가는 시대를 상징하듯 모든 이의 가슴에 여운을 남겼다.
“마침내 중원을 우리 손으로 수복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것이 전쟁의 끝을 의미한다는 점이었다.
북벌에 참전한 군웅들은 자신들이 역사의 현장에 서 있다는 걸 깨달았다.
누군가는 환호했고, 누군가는 주저앉아 눈물을 흘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살아남은 것에 안도했다.
수십만에 달하는 명의 정병들은 그 숫자만큼의 생각을 품은 채 붉게 타오르는 대도를 바라봤다.
“언제까지 멍하니 서 있을 거냐! 진입하라! 그리고 불을 꺼!”
지휘관들이 가장 먼저 감상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승리에 도취될 틈도 없이 곧바로 움직였다.
전쟁 못지않게 지긋지긋한 게 전후처리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도 작은 미소가 떠오른 걸 보면 달갑게 임무를 수행할 준비가 된 듯했다.
“악 대협! 그리고 당가주의 시신을 챙겨라! 영웅들의 시신이 불에 타게 두지 마!”
무림의 군웅들은 퍼뜩 정신을 차리고 황성으로 진입했다.
헐레벌떡 달려간 그들은 저 멀리 황성의 정문에서, 망루에 매달린 두 사람의 수급을 끌어올리는 자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그들을 지켜보는 청년과 백호 한 마리도.
널따란 등을 지닌 사내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는 건 이들의 몫이야. 당신들은 고인이 편히 잠들길 바라며 기도를 올려주었으면 좋겠어.”
마른 비는 슬픈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의 나지막한 부탁이 끝나자마자, 즉각적인 반발이 터져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