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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297화 (297/463)

297화

“당가주의 시신을 당가에서 수습하는 건 당연한 일이오! 한데 수라는? 저자가 뭔데 악 대협의 주검을 가져간단 말이오?”

“대협께선 생전에 우리 정가장과 인연이 닿았소! 본가의 내부에 사당을 마련하고, 매년 제를 올리겠소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대협께서 원 황실에 수배되어 쫓길 때, 본문에 잠시 몸을 의탁하신 적이 있소이다! 대협께선 장강이 내려다보이는 본문의 풍광을 좋아하셨지. 그분께서 편히 쉬실 수 있게 그곳에…!”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른 비는 악경의 시신을 서로 가져가겠다고 다투는 자들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악경의 수급을 탐내는 건 중소문파들만이 아니었다.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고 계시는구려. 악 대협은 특정 개인이나 문파만의 영웅이 아니오. 정파 전체, 나아가 한족 모두의 영웅이지. 그렇다면 격에 맞게 우리 정도맹에서 그분의 장례를 주관하는 게 이치에 맞을 것이외다.”

정도 문파들의 연합체.

정도맹에서도 악경의 시신을 수습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마른 비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가족이나 친인척도 아니잖아? 심지어 저들은 아저씨의 친구로도 보이지 않아. 왜들 이러는 거지?’

답은 여규가 주었다.

조용히 다가온 그는 이를 깨물며 속삭였다.

“역겹네. 이 사람들, 악 대협의 시신을 이용하려는 거야.”

마른 비는 충격에 휩싸여서 되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한족의 제국이 세워진 지금, 악 대협은 만백성이 우러러보는 영웅이야. 한데 그분은 가족도, 세력도 없이 평생을 홀로 지냈지. 심지어 가깝다고 알려진 지인도 없어. 이런 상황이니 그분을 모시는 문파나 가문은 단번에 세간의 주목을 받을 거야.”

여규는 서로 목소리를 높이는 자들을 혐오스런 눈으로 돌아봤다.

“조문객이 줄을 잇겠지. 악 대협의 사당이나 묘를 관리하는 측은 엄청난 기부도 받을 거야. 악 대협이 생전에 쌓은 업적에 자신들의 이름을 슬쩍 끼워 넣을 수도 있고, 그분의 명성과 평판을 일부 나눠 가질 수도 있지. 단번에 명문세가로 입지를 굳힐 절호의 기회란 뜻이야.”

잠든 영웅의 시신을 가지고 이익을 탐한다?

마른 비의 머리로는 도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발상이었다.

철중구가 사도련 쪽으로 갔기에 망정이지, 그가 있었다면 대뜸 욕부터 뱉고 봤으리라.

머리가 어질해질 정도로 충격을 받은 마른 비는 겨우 정신을 수습했고, 뱃속 깊은 곳에서 욕지기가 끓어오르는 걸 느꼈다.

그가 고함을 치려는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주검을 가져가? 장례를 주관한다고? 누가? 네놈들이 말이냐?”

전룡이었다.

그는 깨끗한 무명에 싼 악경의 수급을 소중히 품에 안고 있었다.

무릎을 꿇고 눈물을 흘리던 그는 망루에서 일어나 탐욕에 찬 군상들을 내려다봤다.

그리고 한 자 한 자 짓씹듯이 말했다.

“추악한 놈들 같으니라고. 대협께서 홀로 원에 대항할 때, 그분의 옆에 선 자가 한 명이라도 있었느냐? 정도맹? 대협께서 너희에게 들고일어나길 요청했을 때, 뭐라고 했지? 지금은 때가 아니다, 때를 기다리자……. 그렇게 말한 뒤로 십 년간 너흰 무얼 했느냐?”

장례를 주관하겠다고 나선 정도맹의 무인이 당황했다.

그는 설마 전룡이 그 이야기를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눈치였다.

얼굴이 벌게진 그는 목에 핏대까지 세워가며 항변했다.

“그, 그것은…! 섣불리 나섰다가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에…!”

“개소리 지껄이지 마. 차라리 원 황실이 두려웠다고 솔직히 말해라. 너희만이 아니라 모두가 그랬으니까. 그렇기에 대협께 죄송하고 회한이 사무치는 것이다. 대가릴 처박고 나서지 못했다면 염치를 알아라. 정파의 기둥이란 놈들이 이러는 거, 부끄럽지도 않느냐?”

전룡의 비난을 들은 정도맹의 무인은 곧 발작할 듯이 흥분했다.

그가 뭐라고 외치려는 찰나, 사방에서 비난이 쏟아졌다.

이익에 눈이 뒤집혀 양심을 버린 자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이 훨씬 많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마른 비가 그랬듯이 협검을 추모하러 왔다가 아연실색했고, 상황을 파악하자 분노했다.

“우우우! 당장 물러나라!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쓰레기 같은 놈들! 오십 평생, 정파인이란 게 이토록 부끄러웠던 적이 없다! 대협의 시신 앞에 무릎 꿇고 사죄를 올려라!”

“냉큼 꺼지지 못해?! 이따위 놈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니…!”

군웅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타올랐다.

속내를 들키고, 여론에 밀린 중소문파들이 주춤대며 물러났다.

하지만 정도맹에서 파견된 자는 좀 더 뻔뻔했다.

맹주로부터 악경의 수급을 확보하란 명을 받은 그는 물러설 수도 없었다.

“자, 잠깐! 모두 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보시오! 우리가 안 좋게 보일 수 있다는 건 인정하오! 허면 저자는? 수라가 무슨 자격으로 대협의 시신을 가져간단 말이오? 저자야말로 악 대협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자가 아니겠소이까? 차라리 본맹에 맡기는 게…!”

끝까지 물러서지 않는다.

마른 비는 진심으로 화가 났고, 앞으로 나섰다.

활화산처럼 끓어오른 자연기가 걷잡을 수 없는 살기가 되어 정도맹의 사내를 옥좼다.

“그만 떠드는 게 좋을 거야. 그 이상 지껄이면 그 입을 뭉개버릴 테니까.”

“수, 수왕? 당신이 왜 나서는 것이오?”

정도맹 무인의 안색이 흙빛이 됐다.

북벌을 기점으로 마른 비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었고, 그와 충돌하는 건 굉장히 부담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약관을 갓 넘은 나이에 엄청난 신위를 선보인 것부터, 전장을 뜻대로 재편한 통솔력, 명 군부의 비호를 받는 것까지 그는 이미 누구도 함부로 대할 수 없었다.

바투를 물러서게 하고, 무칼리를 쓰러뜨린 일화는 세인들을 열광케 했으며, 강소성에서의 선행은 마른 비의 이름을 드높였다.

심지어 신령스런 백호를 데리고 다닌다는 소문이 더해져 수왕은 지금 새외에서 온 신비인이자, 모든 이들이 가장 만나보고 싶어 하는 유명인이었다.

“수왕의 말이 맞다! 그만 떠들고 뒤로 물러나! 수라의 자격을 따지는 건 둘째치고, 너희에겐 절대 대협의 시신을 맡길 수 없어!”

“정도맹은 얼어 죽을! 너희가 대체 무얼 했단 말이냐!”

정도맹? 웃기지도 않을 뿐이다.

그들이 원 치하에선 바짝 수그렸고, 전장에 나와서도 몸을 사리기 급급했던 걸 군웅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들의 권위는 바닥까지 떨어졌고, 설령 맹주가 이 자리에 있다 해도 지금 수왕 앞에서는 한 수 접어줘야 할 실정이다.

허나 집단의 위세에 기대어 많은 일을 해결해온 사내는 습관적으로 조직의 이름을 댔다.

“수, 수왕! 내가 정도맹에서 나왔다는 걸 기억하시오! 아무리 당신이라도 맹주님의 명을 받드는 나를 핍박하는 건 큰 부담을 져야 할…!”

“말로는 안 되겠네.”

마른 비는 자연기를 끌어올리며 한 발 한 발 다가갔다.

악경과 당천기.

그들과의 만남은 짧았지만, 둘 다 지울 수 없을 만큼 강렬한 인상을 남긴 사내들이다.

저마다의 대의를 위해 스러져간 영웅들을 추모하기도 바쁜데, 이따위 난장을 피우다니.

“부담? 어느 쪽이 부담스러울지는 지켜보자고. 난 그런 거 전혀 못 느끼니까. 맹주란 사람에게 전해. 원하는 게 있으면 잔머리 굴리지 말고 직접 움직이라고.”

군웅들이 놀라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누가 천검(天劍)에게 저런 막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마른 비가 주원장 앞에서도 할 말을 다 하는 남자라는 걸 그들이 알 리 없었다.

놀라움은 경악으로 변했고, 곧 폭발적인 열광으로 진화했다.

“오오오오! 맞다! 맹주에게 직접 오라고 해라!”

“전장에도 나오지 않은 자가 무슨 할 말이 있단 말이냐!”

“수왕! 난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든 당신을 지지하겠소!”

마른 비는 뚜벅뚜벅 걸어가서 사내의 앞에 섰다.

그리고 코앞에서 그를 노려봤다.

맹주의 심부름꾼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물러서지 않으려 했으나, 마른 비의 안광은 그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을 아득히 벗어나 있었다.

“큭…!”

저도 모르게 눈을 돌린 그는 뒤늦게 실책을 깨닫고 수치심에 부들부들 떨었다.

또 하나의 일화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마지막 기회야. 물러서.”

마른 비는 기세를 일으켜 사내를 압박했고, 이렇게도 저렇게도 할 수 없는 정도맹의 무인은 식은땀만 줄줄 흘렸다.

일촉즉발의 상황을 중재한 건 의외의 인물이었다.

“허허허. 어쩌다가 상황이 이렇게 흘렀단 말인가. 수왕, 그쯤 하시게. 그는 맹주님의 명을 받은 게 아니야.”

군웅들 속에서 걸어 나온 건 정의개 구칠이었다.

전쟁이 시작될 때 사라졌던 그는 코빼기도 안 보이다가 갑자기 나타났고, 대치 중인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그는 마른 비의 옆에 서서 안타까운 얼굴로 사내를 바라봤다.

“두 대주. 대협을 모시고 싶은 심정은 이해하네만, 이번 건 자네의 실수일세. 맹에서 대협의 장례를 성대히 치르고 싶었던 게지? 만인이 기억할 수 있게 사당도 마련하고 말이야. 허나 대협을 모실 명분이 없네. 우리가 그분께 힘이 되지 못했다는 건 인정해야 할 것이야.”

정도맹 정보기관의 하나를 담당하고 있는 두문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갑자기 구칠이 튀어나온 것도 예상 밖이었지만, 그의 말은 더 의외였기 때문이다.

“장로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제 실수라니요? 저는 엄연히 맹주님의 명을 받고….”

“어허! 자네가 명을 받는 자리에 나도 있지 않았나! 맹주께서 언제 그런 말씀을 하셨단 말인가? 그저 대협의 시신을 잘 돌보라고 하셨지. 그건 시신이 훼손되는 걸 막고 추모를 올리란 뜻일세. 맹으로 들고 오라는 게 아니라.”

구칠의 표정은 엄했다.

그리고 눈빛으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이대로 맹주를 욕보일 것이냐, 아니면 홀로 책임을 뒤집어쓰고 문책을 피할 것이냐.

그는 두문진에게 선택을 강요했다.

‘설마… 날 버린 건가…!’

한순간에 상황을 파악한 두문진이 입술을 깨물었다.

억울해 미칠 것 같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이대로는 명을 이행할 수도 없고, 맹주의 얼굴에 똥칠만 하게 되는 꼴이니까.

“죄송… 합니다. 제가 사적인 감정에 치우쳐… 맹주님의 명을 확대해석… 한 것 같습니다.”

그는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억지로 움직여서 말했다.

이것으로 맹주와 정도맹이 비난을 받는 건 피할 수 있을지 몰라도 자신의 입지는 끝이다.

하지만 이러지 않으면 아예 발붙일 곳도 없어질 것이다.

구칠이 하지 않는다면 맹주가 그렇게 할 테니까.

구칠은 고개를 끄덕인 후 마른 비에게 말했다.

“오해가 있었던 것 같네, 수왕. 두 대주도 좋은 뜻으로 그런 걸 거야. 이쯤하고 용서해주는 게 어떤가?”

구칠이 마른 비의 어깨에 슬쩍 손을 올리며 말했다.

매우 친밀해 보이는 광경.

알 만한 사람이 보면 구칠이 마른 비와의 친분을 은근히 과시하는 걸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무림의 군웅들께서 아셔야 할 것이 있소. 본방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수라는 악 대협께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다는구려. 어린 시절 함께 생활한 적도 있고. 안 그렇소?”

구칠이 망루 위에서 두문진을 내려다보는 전룡에게 물었다.

전룡은 그를 물끄러미 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군웅들은 놀라며 탄성을 터뜨렸다.

“이럴 수가! 정말인가?! 수라가 대협의 진전을 이었다고?!”

“어쩐지 나이에 비해 말도 안 되게 강하다 했어!”

“그게 사실이라면… 대협의 시신을 수습하는 자로 수라보다 적합한 자는 있을 수 없겠군.”

개방의 총순찰이자 장로인 구칠의 말이었다.

정의개라는 별호답게 그는 신망이 두터웠고, 정파 최고의 정보 단체에서 조사한 내용에 의문을 제기할 사람은 없었다.

대도에 입성하자마자 벌어진 소란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음… 개방……….’

눈치 빠른 자들은 깨달았다.

이번 사태에서 가장 큰 득을 본 건 개방이라는걸.

구칠은 방금 전의 행동으로 마른 비와 전룡을 도왔고, 정도맹 맹주의 체면을 살렸으며, 수왕과의 친분을 과시했다.

더군다나 중재자로서 군웅들에게 눈도장도 찍었다.

만약 노린 거라면 기가 막힌 처세였다.

“어떤가? 적절한 등장이었나? 아무리 자네라도 정도맹과 척을 지는 건 바람직하지 않아. 성질 좀 죽이라고.”

의도했든 아니든 가장 만족스러운 건 구칠일 수밖에 없었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마른 비의 어깨를 팡팡 두드렸다.

“음. 고마워. 당신 덕분에 힘을 쓰지 않고 끝나게 됐네. 맹주란 사람이 시키지 않았다는 건 솔직히 믿기 어렵지만.”

마른 비의 말에 구칠은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순간, 마른 비가 선수를 쳤다.

“근데 말이야.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

“궁금한 것? 뭔가? 뭐든 물어보게.”

마른 비는 의미를 알 수 없는 눈길로 구칠을 보다가 말했다.

“당신… 정말 구칠이란 사람이 맞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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