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8화
“구칠이 맞냐고?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그럼 내가 구칠이지, 다른 사람이겠나.”
구칠은 별 희한한 소릴 다 듣는다는 듯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마른 비는 말없이 구칠을 빤히 바라봤다.
민망해진 구칠이 헛기침을 했다.
“크흠! 거참……. 자네, 진심이로군. 내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길래 이런 의심을 받게 된 거지? 이유나 좀 들어보세.”
마른 비는 여전히 대꾸를 하지 않았고, 눈 한 번 깜빡이지 않고 구칠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그의 눈, 코, 입 어디에서도 어색한 점은 찾을 수 없었다.
침묵을 지키던 마른 비가 말했다.
“정의개라는 별호가 붙은 이유에 대해 들었어. 우직하고 고지식한 성품일 줄 알았는데 생각과 많이 달라서.”
구칠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그런 이유로? 생각과 다르다라……. 자네 눈에 내가 어떻게 보이길래?”
“굉장히 현실적이고 계산적으로 보여. 난 당신처럼 약삭빠른 사람을 별로 보지 못했어. 왜 당신에게 정의개란 별호가 붙은 걸까? 난 모르겠어.”
“허, 허허허……. 당황스럽구먼. 좋아. 그렇게 느낀 이유가 있겠지? 구체적으로 뭣 때문에 그러는지 물어도 되겠나?”
“당신, 처음부터 보고 있었잖아. 진즉에 중재할 수 있었는데 끼어들 시점을 쟀어. 그리고 아까도 말했지만 난 두 대주란 사람이 맹주의 명을 잘못 해석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내 느낌으론 당신도 그걸 알고 있고.”
구칠이 군중 속에 섞여서 상황을 지켜본 것과 두문진에게 책임을 전가한 것, 개방의 이익이 극대화되도록 연출한 것까지.
마른 비는 모두 알고 있었다.
잠시 눈빛이 흔들렸던 구칠은 표정을 굳히며 불쾌한 심정을 드러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 스스로를 변호했다.
“끼어들 시점을 쟀다……. 그래, 그 부분은 인정하네. 자네는 그걸 안 좋게 본 모양이지만, 난 개방을 대표하는 장로일세. 내 언행이 곧 개방의 평판과 직결되지. 그래서 신중히 상황을 지켜본 건 사실이야. 자네가 그걸 약삭빠르게 느꼈다면 어쩔 수 없지.”
잠시 숨을 고른 구칠은 진지하게 표정을 가다듬었다.
“허나 맹주님의 뜻을 두 대주가 곡해했다는 건 본인의 입으로도 시인한 부분일세. 당사자가 그렇다는데 외부인인 자네가 느낌만으로 아니라고 한다? 그리고 고작 그런 이유로 내 존재 자체를 의심하다니?”
구칠은 만면에 서운하다는 빛을 띠며 말했다.
“도무지 앞뒤가 안 맞는 이야기가 아닌가? 내가 마음에 안 든다면 그렇다고 솔직히 말하게. 누가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날 떠보지 말고.”
구칠의 말은 일목요연했고, 그의 언변은 유창했다.
가장 큰 문제는 마른 비의 질문이 두서가 없다는 점이었다.
괜한 트집을 잡는다고 느껴질 상황.
주변에 있는 이들이 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둘을 힐끔거리기 시작했다.
“느낌이라고 했지? 난 오랫동안 자네를 지켜봤고, 자네가 그 느낌에 의존해 많은 일을 처리해왔다는 걸 알고 있네. 그리고 그게 대부분 좋은 결과를 도출했다는 것도. 하지만 그건 말 그대로 느낌일 뿐이야. 객관적인 근거가 없는 감각이나 감정의 영역일 뿐이라고.”
구칠은 둘의 대화에 귀 기울이는 군중을 둘러봤다.
그건 자신의 말이 틀리냐고 묻는 동시에 자연스럽게 그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는 행위이기도 했다.
“여기 있는 누구를 붙잡고 물어도 같은 대답이 나올 걸세. 지금 자네의 질문은 도무지 납득할 수가 없어. 아무래도 큰 전쟁을 겪은 후라 예민해진 것 같네. 허허, 내 이번엔 그냥 웃고 넘어가지.”
뛰어난 힘을 지녔지만, 경험이 부족한 젊은 영웅.
구칠은 마른 비의 까칠함을 전쟁 후의 예민함으로 포장하며 부드럽게 넘어갈 기회를 주었다.
그건 자신의 아량을 드러내고, 향후 마른 비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하게 만들 수 있는 처세이기도 했다.
누가 봐도 지금은 마른 비가 실수한 것처럼 보였고, 어지간한 인간이라면 이런 분위기에서 사과하고 물러설 테니까.
그리고 비난받을 상황을 모면해 준 구칠에게 고마움을 느끼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마른 비는 물러서지 않았고, 사과하지도 않았다.
“설명할 수 없지만, 당신은 뭔가 이상해. 처음 봤을 때부터 그랬어. 왜냐고 물으면 답할 수 없어. 나도 집어내질 못하겠거든.”
그나마 표면적으로 보이는 게 성격과 별호와의 괴리라서 그걸 예로 들었을 뿐이다.
좀 더 근원적인 것.
인간 자체에서 풍기는 기묘한 위화감.
하지만 꼼꼼히 살펴도 잡아낼 수가 없었고, 이런 경우는 마른 비도 처음이었다.
“마음에 안 들면 말하라고 했지? 맞아. 난 당신이 마음에 안 들어. 무언가 불투명한 게 당신을 덮고 있는 느낌이야. 난 당신이 누군지 모르겠어.”
사람들과 금세 말을 트고 지내는 마른 비가 지금껏 구칠을 ‘당신’이라고 부르며 거리를 둔 이유였다.
마른 비는 자신의 느낌을 믿었고, 끝까지 미안하다는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사람들이 웅성댔고, 구칠은 혀를 찼다.
“허어… 참. 생각보다 괴팍한 친구로군. 아, 그렇다고 그를 나쁘게 생각하진 말게나. 치열한 전쟁을 겪은 후에 심적으로 불안정해지는 건 흔히 있는 일이니. 이런 것쯤이야 수왕이란 사내가 이룬 위업에 비하면 사소할 뿐일세.”
구칠은 시끄러워진 좌중을 향해 말했다.
그건 노강호의 너그러움으로 보였고, 정의개란 별호에 썩 어울리는 모습이기도 했다.
전룡이 있는 정문 쪽으로 가버린 마른 비도, 주변을 수습하느라 바쁜 구칠도 알아채지 못했다.
구름처럼 모인 인파 속에서 착 가라앉은 눈으로 둘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뭔가 있구나?”
마른 비를 믿는 건 여규뿐이었다.
그는 둘의 대치를 조용히 지켜보았고, 마른 비가 등을 돌리자 뒤를 따랐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황성의 정문에서 악경과 당천기의 시신을 수습하고 내려오는 전룡과 당가의 무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마른 비가 생각에 잠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콕 집어서 설명하긴 어려운데, 분명히 뭔가 있어. 저 사람, 보면 볼수록 이상해.”
“비아,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사람들 반응은 신경 쓰지 마. 네 느낌은 틀린 적이 없고, 이번에도 그럴 거야. 상황이 정리되면 내가 한번 알아볼게.”
여규가 정문 너머에 있는 구칠을 힐끗거리며 말했다.
당장 알 수 없는 것보다는 눈앞에 당면한 일이 먼저다.
마른 비와 여규는 슬픔에 잠긴 전룡과 당가의 식솔들을 위로했다.
두 영웅의 시신을 무사히 수습한 그들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눌 때였다.
대도의 남문.
북벌군이 지나온 길이 시끄러워졌다.
“황제 폐하, 납시오!”
주원장.
새 시대를 열어젖힌 제왕이 마침내 대도에 당도했다.
“오오오! 홍무제! 원의 지배를 끝낸 위대한 황제시여!”
주원장이 도착하자 대도는 더욱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열화와 같은 환성 속에서 황제는 대도의 정문인 여정문(麗正門)을 지났고, 황성으로 들어가는 입구인 숭천문(崇天門)을 통과했다.
백마에 오른 채 금빛 찬란한 의장대에게 둘러싸인 그의 위세는 대단했다.
대명전(大明殿).
역대 카안들이 거했던 곳이자 원의 황궁으로 쓰였던 전각의 이름이었다.
원을 멸망시킨 신생 제국의 이름이 대명이니, 참으로 묘한 우연의 일치였다.
주원장은 불타버린 대명전을 바라보며 짤막한 소감을 말했다.
“한 시대의 절대자였던 자가 마지막에 떠올린 게 고작 방화란 말인가?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그는 위엄 어린 눈으로 병사들을 내려다보며 명했다.
“부숴라. 그리고 새 시대에 걸맞은 황궁을 축조하라.”
주원장은 피로에 지친 북벌군을 배려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전후처리가 끝나는 대로 전쟁에 참가한 영웅들을 한곳에 부를 것이다. 그때까지 그들을 쉬게 하고 소홀함 없이 대접하도록.”
주원장의 명에 따라 북벌에 참가한 무림인들은 숙소를 배정받았다.
숙소는 철저히 공로에 따라 배분되었는데, 마른 비 일행은 황성 우측에 딸린 화려한 전각을 통째로 쓰게 되었다.
삼층 높이의 건물을 올려다보던 마른 비가 감탄했다.
“와~ 이렇게 섬세한 건축물은 처음 봐. 여긴 불에도 거의 안 탔네?”
건물 곳곳에 묻은 그을음과 매캐한 향.
그 두 가지만 빼면 마른 비 일행의 숙소는 불이 났었다는 걸 믿기 힘들 정도로 멀쩡했다.
원군이 도망가며 불을 질렀지만, 본디 황제가 거하는 황성의 전각들은 쉽게 타지 않도록 설계되기 마련이다.
황급히 도망쳐야 했던 그들은 카안의 명에 따라 주요 문화재와 유산, 그리고 황궁을 태우는 데 집중했고, 그것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은 멀쩡한 편이었다.
“이야~! 비단 금침이야! 나 이런 거 처음 봐!”
여규가 최상급 비단으로 짠 이부자리와 베개를 쓰다듬으며 감탄했다.
철중구는 벌써 그 안으로 쏙 들어가서 파묻혀 있었다.
마른 비도 침상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고, 얼마 안 가서 새근새근 잠이 들었다.
“야! 이것들아! 좀 씻고…! 하아… 못 살겠다, 정말.”
마른 비와 철중구는 피와 땀, 흙먼지가 범벅이 된 몸으로 침상에 뛰어들었고, 말릴 새도 없이 곯아떨어졌다.
하긴 그럴 만도 하다.
전장의 한복판에 난입해서 수만의 병력을 꿰뚫었고, 마른 비의 경우 이 시대 최강으로 거론되는 무장들과 혈투를 벌이지 않았나.
별비조차도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다리를 꺾으며 엎어져서 코를 골았다.
깨끗하게 씻고 자면 좋겠지만, 그건 여규의 바람일 뿐이었다.
“으으… 인생 첫 비단금침에서의 하룻밤이…….”
하지만 여규는 잠도 잘 수 없었다.
당장이라도 의식을 잃고 쓰러질 것 같지만, 경계를 설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군의 진영이지만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고, 깨어 있는 사람이 하나쯤은 있어야 했다.
최소한 여규의 상식에는 그랬다.
하지만 친구란 놈들은 하나같이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고 살아온 인간들이었고, 다가와서 칼을 꽂으면 곱게 죽어줄 자세로 뻗어 있었다.
“내 팔자야…….”
여규는 비척대며 걸어가서 의자에 앉았고, 퀭한 눈으로 일행을 둘러봤다.
그리고 작게 웃었다.
“으음…….”
마른 비가 손을 뻗어서 철중구의 머리를 쓰다듬었기 때문이다.
별비와 자는 게 습관이 돼서 그런지 마른 비는 곯아떨어진 상황에서도 부드럽게 손을 놀리며 철중구를 쓰다듬었고, 철중구는 그 손길이 만족스러운지 고개를 까딱거렸다.
‘평온한 광경이네.’
이렇게 좋은 곳에서 맘 편히 쉬는 게 얼마 만인가.
여규는 둘의 자는 모습을 보며 푸근히 미소 지었다.
여규의 얼굴이 딱딱해진 건 잠시 후였다.
“향단아…….”
무슨 꿈을 꾸는 건가.
그리고 향단이는 대체 누군가.
마른 비의 손길을 느끼던 철중구는 그의 팔을 잡더니 꿈속에서 중얼댔다.
“거기가… 아냐…….”
그러더니 마른 비의 손을 흉측한 곳으로 끌어당기는 게 아닌가.
“우욱…!”
여규는 깜짝 놀라서 잠이 확 깨버렸다.
마른 비가 몸을 뒤척이며 무산돼서 망정이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다.
“중구 저건 도대체 무슨 꿈을 꾸는 거야?”
울렁이는 속을 간신히 다스린 여규가 감기는 눈을 치켜뜨며 중얼댔다.
“졸려서 미치겠다……. 밥 먹을 때는 일어나겠지?”
하지만 그의 친구들은 항상 예상을 깨는 인간들이었고, 밥도 먹지 않은 채 내리 사흘을 잤다.
여규가 앉은 채로 기절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은 건 잠에서 막 깬 철중구의 말이었다.
“후아아암……. 잘 잤다. 으엇! 깜짝이야! 규, 너 왜 그러고 있냐?”
“……드디어 깼구나.”
“왜 음침하게 그러고 앉아 있어? ……얼라? 너 곧 죽을 거 같은 영감의 얼굴을 하고 있는데? 괜찮은 거냐?”
“경계… 이제 네가 서….”
대꾸할 기력도 남지 않은 여규는 침몰하듯 머리를 꺾으며 기절했다.
“뭐래? 하여튼 이해할 수 없는 놈이라니까. 엄청 불편해 보이는데 왜 저러고 자는 거야? 저게 편한가?”
여규를 침상에 눕힐 생각을 했다면, 그건 철중구가 아니다.
그는 도통 모르겠다는 얼굴로 중얼대더니 비단금침에 파묻혀서 다시 잠이 들었다.
밥도 안 먹고 내리 나흘을 잔 일행을 깨운 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뭐야? 아직도 안 일어났나?”
방으로 들어선 사내는 강무재였다.
그간 고생을 했는지 수척해진 그는 침상으로 다가오다가 코를 움켜쥐었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자네들, 씻지도 않고 여태까지 잤나?”
피와 땀과 흙먼지가 어우러진 환상의 악취.
강무재의 말소리에 잠에서 깬 마른 비가 부스스 눈을 떴다.
“……어? 아저씨, 오랜만이네?”
강무재는 ‘너희 정말 끝내주는구나.’라는 표정을 짓더니 깨끗한 옷을 탁자에 내려놨다.
“시비들이 아무리 문을 두드려도 반응이 없다길래 직접 왔네. 근데 이건 뭐……. 얼른 일어나서 씻게! 늦었어!”
“응? 늦다니, 뭘?”
강무재는 이마를 짚더니 한숨을 쉬었다.
“폐하께서 군웅들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다고 서둘러 자리를 마련하셨네. 연회가 준비돼 있어. 그리고 논공행상이 있을 걸세.”
강무재는 의복을 가리키며 말했다.
“자네는 그 자리의 주인공이야. 이거 꼭 입고 오게. 그리고 당장 일어나서 씻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