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9화
마른 비 일행이 일어나질 않는 통에 시비들은 목욕물을 데우는 걸 몇 번이나 반복해야 했다.
그녀들은 한방 비누인 향비조(香肥皂)와 머리를 감는 향유(香油)를 준비한 채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른 비 일행이 욕실에 들어서자 그들의 옷을 벗겨주려 했다.
“어… 어? 이러지 마. 왜 이래?”
마른 비가 목욕 시중에 대해 알 리 없었다.
여규도 얼굴이 벌게져서 뒤로 주춤주춤 물러나다가 피와 땀에 찌든 옷을 움켜쥐며 외쳤다.
“저, 저는 괜찮아요! 제가 알아서 씻을게요!”
철중구만이 ‘키야~ 이게 바로 무릉도원이구나!’ 감탄하며 시비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하여튼 촌에서 온 것들이라 뭘 몰라요. 가만있어. 괜찮아. 너네 안 잡아먹어.”
중요한 손님에게 시비를 붙여 시중을 들게 하는 게 당연한 시대다.
하지만 전혀 다른 문화에서 자란 마른 비는 그게 도무지 적응이 되질 않았다.
그건 여규도 마찬가지였으니 둘은 바짝 얼어서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괘, 괜찮아. 우린 직접 씻을게.”
“혹시 저희가 거절해서 곤란해진다면 보낸 분께 말씀드릴게요. 이건 도저히 안 되겠어요…….”
마른 비와 여규는 뒤돌아서 옷을 벗은 후 그대로 뒷걸음질 쳐서 각자의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철중구가 혀를 차며 둘을 놀렸다.
“허이구~ 비융신들, 가지가지 한다. 새색시냐? 수줍음 많은 거 보소?”
그는 여유롭게 시비의 손길을 즐기며 목욕을 즐겼다.
“걔네 싫다는데 다 나한테 와. 내가 바로 장사의 쾌남….”
“그럼 저희는 마당에 있는 백호에게 가도 될까요? 동료 한 명이 배정됐는데 너무 커서 혼자는 힘들겠더라고요.”
마른 비와 여규에게 배정됐던 시비들은 철중구의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응. 그러면 되겠다. 수고스럽겠지만, 부탁할게. 강이나 호수가 아니라서 별비가 씻기 힘들 거야.”
“네. 그렇게 할게요. 근데… 정말 안전한 거 맞죠?”
“걱정하지 않아도 돼. 말도 알아들으니까 시키는 대로 할 거야.”
별비에 대해서 미리 들은 모양이었다.
마른 비가 부탁하자 시비들은 공손히 고개를 숙인 후 욕실을 나갔다.
철중구는 자신을 씻겨주는 여인을 곁눈질하더니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흠! 커흐흠. 이봐, 이름이 뭐야?”
“향단이라 하옵니다.”
“……향단?”
‘어디서 많이 듣던 이름인데?’하고 중얼거린 철중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황실에 배속돼 있어?”
“아닙니다. 황실 소속의 시비들은 아직 올라오지 못했어요. 따라온 사람들도 황가의 어른들을 모시기 바쁠 겁니다. 저희는 대도에서 고용되었어요.”
“오오, 그래?”
황실의 시비들은 황제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다.
괜히 집적거렸다가 사달이 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시비의 소속을 확인한 철중구는 괜히 가슴과 어깨에 한 번씩 힘을 주더니 말했다.
“흠흠. 이봐. 이따가 연회가 끝나면 저녁에 나랑 술이나 한 잔….”
“바쁩니다.”
칼 같은 거절에 철중구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됐고, 마른 비와 여규는 킥킥댔다.
“중구, 아저씨 같아.”
그 이후로 목욕이 끝날 때까지 철중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비들을 욕실에서 마주친 건 난감한 경험이었지만, 향비조와 향유는 정말 좋았다.
마른 비는 그런 것들이 존재하는지도 몰랐는데, 몸에서 좋은 냄새가 나자 신기한지 킁킁대며 냄새를 맡았다.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시비들은 예쁘게 웃더니 총총거리며 어딘가로 사라졌다가 돌아왔다.
그러고는 작은 주머니를 꺼내서 몸에 톡톡 두드려주었다.
“와아~ 이게 뭐야?”
은은하게 퍼지는 향기.
달큼하면서도 향긋한 냄새였다.
몸이 나른해지는가 싶더니 가슴이 두근대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가 기분이 좋아졌다.
용법에 따라 강심, 흥분, 진경제(鎭痙劑)로, 또는 기절하였을 때 정신이 들게 하는 약으로도 쓰이는 사향(麝香)이었다.
“사향은 사향노루의 사향선(麝香腺)을 건조시켜 얻는 분비물이랍니다. 원래는 지린내가 진동을 하지만, 그걸 묽게 하면 이처럼 향기로운 냄새가 나요. 신기하죠?”
강무재가 가져온 옷은 성장(盛裝)이었고, 이런 옷을 처음 본 마른 비가 혼자 입기는 어려웠다.
그가 익숙지 않은 옷을 입으며 낑낑대자 향단이라고 이름을 밝힌 시비가 달라붙었다.
그녀는 옷을 입혀주며 한 번씩 마른 비의 얼굴을 힐끔거렸는데, 어느 순간부터는 대놓고 은근한 눈빛으로 올려다봤다.
‘왜 저렇게 보는 거지? 어… 근데 이거 왜 이래?’
가슴이 두근대고, 무언가가 불끈거리며 치솟는다.
황실에서 엄선해 고용한 만큼 시비는 아름다웠지만, 단순히 그것 때문은 아닌 듯했다.
‘이 향에 뭔가가 있구나!’
마른 비의 얼굴이 벌게지자, 여규가 킥킥대며 은근한 어투로 말했다.
“비아야. 사향에는 성욕을 불러일으키는 최음(催淫) 작용이 있어. 정신 놓지 않게 조심해.”
그래서 몸이 후끈 달아오르는 모양이다.
마른 비가 자꾸만 성을 내고 고함을 지르는 아랫동네를 다스릴 때, 여규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비아, 네가 사향을 모를 줄이야. 사향노루 본 적 없어? 운남과 사천의 고산지대에 서식하는 짐승이라 많이 봤을 텐데? 중원에 유통되는 사향의 팔 할은 거기서 오는 거야.”
여규가 사향노루의 생김새를 설명하자 마른 비는 손바닥을 쳤다.
“아아, 알아! 그거 많이 봤어! 그게 사향노루야? 그 녀석에게서 이걸 얻는다고?”
잡아먹기만 했지, 이런 신기한 걸 얻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달착지근한 향기를 풍기는 사향을 접하자, 마른 비는 자연스럽게 노을이가 떠올랐다.
‘노을이한테 주면 좋아하겠는걸? 나중에 돌아갈 때 한 마리 잡아 가야겠다.’
스스로도 인식하지 못했지만, 최근 들어 노을이를 떠올리는 일이 잦아졌다.
잘 지내고 있을까, 족장 일은 힘들지 않을까, 좋아하는 사람은 생겼을까…….
‘좋아하는 사람?’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마른 비는 왠지 가슴이 시큰해졌다.
아직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마른 비는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알지 못했고, 막연하게 노을이가 보고 싶다고 느낄 뿐이었다.
“어이, 향단이. 장난이 심해. 그놈 그거 연애 한 번 못 해본 놈이라 진짜 설렐걸?”
철중구는 향단이가 마른 비에게 은근한 눈길을 보내자 입을 삐죽 내밀며 끼어들었다.
그러자 그녀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이렇게 멋진 분이 연애를 못 해봤다고요? 믿기 힘든걸요.”
그녀는 마른 비의 옷을 매만져주며 은근히 어깨와 가슴을 쓰다듬었다.
누가 봐도 그에게 관심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멋지다고? 내가?’
강해지는 것과 세상을 둘러보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지, 그런 건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마른 비가 자신을 보는 사람들의 눈길에 당황하자, 시비가 귀엽다는 듯 까르르 웃었다.
“이리 와보세요.”
그녀는 마른 비를 거울 앞으로 인도했다.
그리고 잘 차려입은 스스로의 모습을 본 마른 비는 입을 떡 벌렸다.
‘와…….’
이게 자신이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다.
떡 벌어진 어깨와 탄탄한 근육.
중원에서 큰 축에 속하는 사람들보다도 머리 하나는 큰 청년이 까만 눈을 빛내고 있었다.
변장에 능한 강무재는 눈대중만으로 마른 비에게 딱 맞는 옷을 준비했고, 푸른색의 성장을 입은 그는 태가 남달랐다.
“흐음…….”
향단이는 마른 비를 물끄러미 보다가 손가락을 튕기며 다가왔다.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둔 머리를 뒤에서 질끈 묶자, 자유분방한 기질을 풍기면서도 격식을 갖춘 청년의 모습이 완성됐다.
“정말 멋져요!”
옷이 날개다.
그녀의 감탄처럼 마른 비의 외모는 그의 명성만큼이나 출중했다.
강인하면서도 부드럽고 선한 인상.
친해지고 싶고, 다가가고 싶지만, 동시에 누구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존재감.
스물한 살, 수왕의 칭호를 얻은 마른 비는 어느덧 완연한 사내가 돼 있었다.
“휘유…… 맨날 꼬질꼬질하게 다니다가 차려입으니까 장난 아닌데? 난리가 나겠다야.”
여규가 휘파람을 불며 놀라워했고,
“헹! 제법 괜찮다만, 아직 애송이 티가 물씬 난다! 자고로 사내란 완숙미가 곁들여져야….”
철중구는 아무도 듣지 않는 말을 홀로 중얼댔다.
손을 모은 채 멍한 눈으로 마른 비를 보던 향단이가 가까이 다가와서 속삭였다.
“저기… 연회 끝나면 우리 술 한잔할래요?”
마른 비는 난감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고,
“아니, 시벌? 언제는 바쁘다며?”
철중구는 얼굴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잘 들어. 비아야.”
숙소를 나와 황성의 광장으로 향하는 길.
여규는 앞으로 벌어질 상황을 예상하며 마른 비에게 조언을 했다.
“논공행상은 말 그대로 공의 크고 작음을 논하고 그에 알맞은 상을 주는 자리야. 원래는 관직에 속한 사람들이 대상이지만, 이번엔 이례적으로 무림인들이 대거 참여할 거야.”
그 부분이 핵심이었다.
이번 논공행상은 명의 관료들뿐만 아니라 북벌에 참여한 무인들을 포괄하는 자리였고, 그렇다면 필연적으로 진영이 나뉜다.
정과 사.
양측의 뿌리 깊은 대립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황실에서도 언제나 둘을 분산 배치할 정도였다.
이번 논공행상에서도 그들은 칼로 자른 듯 나뉘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운남은 보통 새외무림으로 분류되지 않아. 하지만 중원인들에게 와족은 생소한 부족이고, 너는 미지의 세계에서 건너온 새외의 신비인이나 마찬가지야. 한마디로 소속이 불분명하단 뜻이지.”
“네 활약이 워낙 뛰어났고, 명 황실에서 공인했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한참이나 골머리를 앓았을 거다. 정파냐, 사파냐, 아니면 회색분자냐. 끊임없이 너의 성향을 물었을 거야. 이놈의 중원무림은 흑백을 가리지 않고선 이야기를 시작 못 하거든.”
철중구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말을 더했다.
그리고 둘이 이야기하는 바는 한 가지로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 논공행상에서 네가 어디에 앉느냐에 따라 중원은 네가 정파인지 사파인지를 판가름할 거야. 적어도 어느 쪽과 더 친한지 정도는 구분하겠지. 그건 앞으로 네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거고.”
“그냥 너희랑 같이 앉으면 안 돼?”
생각만 해도 골치 아픈 이야기였다.
셋이 한 곳에 앉는 게 가장 간편한 방법이겠으나, 여규와 철중구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우리가 그러기가 힘들어. 난 정파를 대표하는 구파일방 소속이고, 중구는 사파의 신성인 사호잖아. 사석에서 어울려 다니는 것도 말이 많은데, 공석에서만큼은 명확한 소속을 보여줘야 해.”
마른 비덕에 둘도 없는 친구가 됐지만, 사실 여규와 철중구처럼 소속을 뛰어넘어 친교를 다지는 건 흔치않은 일이었다.
특히 그들의 배경이나 실력이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세인들의 시선은 더욱 엄격해질 수밖에 없었다.
“차라리 명의 군부로 가는 건 어떠냐? 강무재, 그 형씨가 애매하면 그쪽으로 오라던데.”
강무재는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언질을 남겼다.
군부의 상층부가 앉는 쪽에 자리를 하나 마련해주겠다고.
관직이 없는 마른 비에게 황실의 개국공신들 옆에 자리를 내주겠다는 건 실로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하지만 마른 비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싫어. 전쟁을 빨리 끝내기 위해서 참전했지만, 이제 웬만하면 그쪽이랑은 엮이지 않을 거야. 그런 곳에 앉는 것도 부담스럽고. 괜히 갔다가 관직 같은 걸 준다고 그러면 어떡해?”
여규는 잘 생각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야. 그럼 그냥 비아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정파로 가든 사파로 가든 우리끼리의 관계는 변함이 없을 테니까.”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광장에 접어들었다.
대명전에 가까운 앞쪽에는 명의 관료들이, 광장의 좌우측에는 각각 정파와 사파가 포진해 있는 게 한눈에 보였다.
그리고 마른 비 일행이 나타나자 요란한 환영 행사가 행해졌다.
“오오! 북벌의 일등공신이 마침내 당도했습니다! 건우, 여규, 철중구! 수왕의 일행이 입장합니다!”
현악기와 타악기가 어우러진 선율이 울려 퍼졌다.
그리고 수만에 이르는 눈길이 일시에 마른 비에게 집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