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00화 (300/463)

300화

“허어…! 옷을 차려입으니 완전히 딴 사람 같구먼!”

“헌앙하구나! 수왕이란 별호에 걸맞은 모습이도다!”

“보면 볼수록 대단한 청년이로고.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출중한 힘을…!”

나이 지긋한 강호의 명숙들은 마른 비를 완전히 인정했다.

마른 비는 그들의 경쟁자도, 앙숙도 아니었으며, 잠재적인 적대자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면 그렇지 않은 자들도 있었다.

“쳇! 어디서 왔는지도 모를 야만인이 관심을 독차지하는군.”

“인정할 수 없다. 뭔가 술수를 부린 거야. 저 나이에 십좌급의 무장을 꺾는다는 게 말이 되나.”

“맞다. 유서 깊은 중원의 문파에서도 그 정도의 기재는 배출하지 못했어. 숨겨진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질시에 사로잡힌 자들이었다.

출신도 불분명한데다가 한족도 아니며, 약관에 불과한 마른 비가 관심을 독차지하자 배가 아픈 게 틀림없었다.

그들은 전반적으로 젊은 편이었으며, 한가락 하는 세력의 자제들인 경우가 많았다.

한편 마른 비를 부러워하면서도 그가 주목을 받게 된 걸 축하하고, 가깝게 지내길 바라는 자들도 있었다.

“스물 초반에 왕의 칭호가 붙은 무인이 있었나? 무림사를 뒤져도 전무후무한 일이다. 굉장한 사내가 등장했어.”

“수왕이 무칼리를 눕히는 걸 보았다. 하늘에서 하강하며 뒤꿈치를 꽂을 때, 온몸에 소름이 돋더군. 그는 진짜야.”

“상상도 못 할 사선을 넘어왔을 거예요. 타고난 재능이 아무리 뛰어나도 그렇지 않고서야 저런 실력을 지닐 수 없죠.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군요.”

황성의 광장에 밀집한 수만 명이 마른 비의 등장으로 술렁였다.

저마다 다른 이야기를 나누고 있지만, 그들의 관심사는 같았다.

혜성처럼 등장한 신비의 고수가 과연 어느 편이냐는 것.

군중의 시선은 자연스레 마른 비를 따르는 두 명의 사내에게도 쏠렸다.

“점창파…! 여규라 했던가? 고검의 아들이랬지. 호부 밑에 견자 없다더니 과연…….”

“그가 검을 쓰는 걸 봤다. 난 그토록 날카로운 검술을 본 적이 없어. 한데… 그건 분광검이 아니었어. 정말 점창이 맞나?”

“고검이 전장을 누비며 살기 짙은 검술을 창안했다고 들었어요. 아마 그걸 물려받은 거겠죠.”

무림인들은 여규를 보며 수군댔다.

“수왕이 저자와 굉장히 친하다고 들었는데……. 그럼 이쪽으로 오겠죠?”

“확실하다. 지금까지의 수왕의 행보를 보면 그는 협객이나 마찬가지야. 분명히 이리로 올 거다.”

정파의 무인들은 강력한 우군이 생기리라 기대하며 들떴다.

반면 사파 진영은 침울했다.

“빌어먹을. 정파 쪽에 또 하나 괴물이 나타났군.”

“원의 치세가 끝났다. 백 년간 납작 엎드려서 힘을 키운 세력들은 팽창할 대로 팽창해 있어. 머지않아 전쟁이 일어날 텐데……. 큰일이군.”

“수왕과 붙게 되면 난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갈 거다. 기마대 돌파하는 것 봤지? 저자 앞에선 방어고 뭐고 없어. 패군이 나온다면 모를까, 저건 아무도 못 막는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희미하게나마 기대를 품게 하는 것이 있었으니, 어디서 소문을 주워들은 자들이 입을 놀리기 시작했다.

“아냐. 아직 몰라! 소문에 따르면, 수왕을 키운 건 절반이 투도라더군. 그와 피 튀기는 실전 대련을 하며 강해진 거래.”

“아! 나도 들었다! 대도에 진입하자마자 투도가 련주님을 찾아왔어. 련주께서 참전하지 않은 걸 알고 실망하며 돌아갔는데, 그때 본인의 입으로 그렇게 말했어!”

“철중구? 저놈도 엄청나긴 한데, 수왕보다 약하지 않아? 자기보다 강한 사람을 키웠다고? 그게 가능한가?”

“명색이 사호의 일인인데 없는 말을 했겠나! 그럴 만한 이유가 있겠지!”

철중구는 상상도 못 했다.

어깨에 힘 좀 주느라 내뱉은 허풍이 사파의 희망이 될 줄은.

소문은 삽시간에 살을 더해 퍼졌고, 사파의 무인들은 눈을 반짝이며 마른 비가 자신들 쪽으로 오길 바랐다.

저벅, 저벅.

마른 비 일행이 광장으로 진입하자 웅성거림이 뚝 그쳤다.

십좌에 필적하는 무인.

나이를 감안할 때 마른 비의 성장 가능성은 무궁무진했고, 어쩌면 차후 천하제일을 노려볼 만한 거목이 될지도 모른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될 것이다.

정사의 무인들은 침을 꿀꺽 삼키며 마른 비가 자신들의 진영으로 오길 소망했다.

“비아야. 우린 가볼게.”

여규와 철중구가 손을 흔들며 양옆으로 흩어졌고, 마른 비는 광장에 홀로 서서 빼곡하게 들어찬 군중을 둘러봤다.

따갑게 쏟아지는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거참. 뒤로 몰래 올 걸 그랬나? 왜 이렇게 쳐다봐? 부담스럽게.”

대명전 앞에 앉은 군부의 인물들조차 등을 돌려서 호기심에 찬 눈으로 마른 비를 주시하고 있었다.

‘하아… 그냥 가 버릴까?’

마른 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해할 때였다.

광장을 둘러보던 그는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발견하고 화색을 띠었다.

‘어?! 저 사람도 왔네? 잘됐어! 저기로 가야겠다!’

목적지를 정한 마른 비는 깔끔하게 비워놓은 광장의 중앙을 가로질렀다.

걸음을 옮길수록 마른 비의 얼굴이 환하게 피어나는데 반해, 무림인들의 얼굴은 시커멓게 죽었다.

‘왜, 왜 저기로?!’

‘뭐냐! 정말 저쪽으로 가는 거야?!’

마른 비가 향한 건 광장의 입구 쪽이었다.

광장을 기준으로 대명전이 있는 북쪽에 명의 관료들이, 좌우에 정파와 사파가 포진해 있다면, 입구가 있는 남쪽에는 또 다른 세력이 있었다.

그들은 고작 수백에 불과했지만, 어마어마한 기세를 풍기고 있었고, 정사는 물론이고 정사지간에 속한 자들과도 괴리된 채 홀로 떨어져 있었다.

모두가 의식하고 있지만, 애써 모른 척하던 자들.

마른 비는 거리낌 없이 다가가서 그들의 앞에 섰다.

“오랜만이야. 살아 있었네?”

마른 비의 말에, 무리의 맨 앞에 앉아서 팔짱을 끼고 있던 사내가 피식 웃었다.

“설마 그게 인사는 아니겠지?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한테 그게 할 소린가?”

흑색 장포를 입고, 사위를 압도하는 기운을 풍기는 남자.

마른 비를 반갑게 맞은 건 천진운이었다.

첫 만남에서 정중히 예를 갖췄던 것과 달리, 둘은 자연스럽게 말을 놓고 있었다.

마른 비가 천진운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주고받는 순간, 광장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 이게 무슨…!”

“마교라니?! 수왕 저자, 마교의 주구인가?”

“그럴 리가 없잖아! 수왕은 비마를 죽였다고 했다!”

“마교의 인물들과 친분이 있는 것 같은데? 심지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소교주야!”

마른 비가 마교 쪽으로 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치 못했다.

수왕이 진영을 가리지 않고 친교를 다진다는 건 유명하고, 한때 마교의 인물과 어울렸다는 소문이 돈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교를 택할 정도라니!

‘천진운…! 역대 천마의 핏줄 중에서도 비견할 자가 없다는 천재가 아닌가! 수왕이 왜 저자와…?’

이건 절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사안이었다.

정사를 불문하고 중원 무림은 마교에게 근원적인 공포를 품고 있다.

자신의 편에 서주길 바란 존재가 악의 대명사로 치부되는 마교와 어울리자,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다.

경외와 호기심이 경악으로, 경악이 두려움과 혐오, 우려 섞인 감정으로 바뀌는 건 한순간이었다.

진영 논리에 매몰되지 않은 자들은 마른 비가 중원의 사정과는 동떨어진 자라는 걸 떠올리고 그럴 수도 있다고 여겼지만, 대다수의 무인들은 고리눈을 뜨고 경계심을 끌어올렸다.

하지만 마른 비는 그러거나 말거나 반갑게 말을 건넸다.

“대단했다고 들었어. 겨우 이 숫자로 무칼리를 붙들어 놓은 거야?”

마른 비가 천진운의 수하들을 둘러보며 감탄했다.

직접 붙어본 결과 무칼리가 이끄는 기마대의 힘이 얼마나 엄청난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교의 반란분자들과 원의 기마대를 충돌시킨 천진운은 수백에 불과한 병력으로 무칼리를 물고 늘어졌고, 그 덕분에 북벌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주원장과 수립한 계획을 완벽하게 성공시킨 그는 이틀 전에 대도에 입성해 있었다.

“사전에 철저하게 전략을 짠 덕분이다. 산악지형에서 유격전을 펼쳤으니 망정이지, 평야에서 붙었다면 순식간에 몰살했을 거야. 무칼리 그놈, 정말 무지막지하더군.”

천진운은 떠올리기도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상황에서 어떤 지원도 바랄 수 없는 상황.

그는 말 그대로 사선을 넘어왔다.

“너야말로 대단했다고 들었다. 바투에 이어 무칼리까지 쓰러뜨렸다면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솔직히 나도 자신이 없는데 말이야.”

말은 그렇게 하지만, 마른 비는 천진운의 표정에서 자신감을 읽었다.

그가 북벌에 참가했다면, 방법은 다를지언정 그도 같은 일을 해냈으리라.

무림사에 길이 남을 위업을 달성한 두 사람은 서로의 노고를 헤아리며 칭찬을 주고받았다.

“우리 쪽은 병력이 압도적으로 유리했어. 내가 없어도 이겼을 거야. 피해를 줄이고 승리를 조금 앞당긴 것뿐인데 뭘. 그리고 그 둘을 쓰러뜨린 건 순수한 내 힘이 아냐. 한 번은 별비가 도왔고, 한 번은 술법의 힘을 빌렸거든.”

마른 비는 솔직하게 말했다.

전투화장을 모르는 세인들의 평가와 달리 아직 자신의 힘이 십좌에 못 미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술법이라. 그런 게 있었군. 그래도 엄청나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근데 그런 걸 막 말해도 되는 거냐? 우린 오늘 두 번째 보는 건데?”

천진운이 너무 안이한 거 아니냐는 표정을 지었다.

마른 비는 웃으며 손을 휘휘 저었다.

“당신한테는 말해도 괜찮아. 느낌이 그래. 아까는 친구라면서?”

“친구? 아… 내가 그랬나?”

천진운은 순간 멍한 표정이 됐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것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처음으로 만난,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사내.

마른 비는 몰랐지만 그는 지금 난생처음 친구라는 말을 입에 담은 거였다.

“사영은? 혹시 영이 소식 들은 거 있어?”

마른 비가 마교 쪽으로 온 가장 큰 이유였다.

황성 침공 때 사영이 죽지 않고 몸을 빼냈다는 말만 들었을 뿐 그 이후의 소식은 들을 길이 없었다.

천진운이라면 알 것 같아서 왔는데, 짐작이 맞았다.

“염려하지 않아도 돼. 잘 있으니까. 카안의 암살을 시도하다가 중상을 입었는데, 그 몸으로 추격대를 뿌리치고 대도를 탈출했지. 그리고 몸을 회복하고 우리를 도우러 왔다. 무칼리의 발을 묶을 수 있었던 데는 그의 역할이 지대했어.”

“다행이야! 무사했구나! 어… 근데 같이 안 왔어?”

천진운의 안색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그는 한동안 고민에 잠겨 있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는 날 돕기 위해 천산으로 갔다.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천산에 침투할 수 있는 게 사영뿐이라 혼자 보낼 수밖에 없었지. 기밀이라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는 걸 이해해주기 바란다.”

착잡함이 묻어나는 얼굴.

천진운은 사영에게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 게 분명했다.

궁금해 죽겠지만, 기밀이라고 해서 마른 비는 더 이상 묻지 못했다.

그들이 이야기를 주고받고, 중원의 무림인들이 충격에 빠져 있는 사이, 굳게 닫혔던 숭천문이 열렸다.

끼이이익―

더 올 사람이 있었던가?

출입 허가를 받은 자들은 모두 들어와 있을 텐데?

군중의 시선을 받으며 광장에 들어선 건 이백에 달하는 사내들이었다.

저벅, 저벅.

그들은 하나같이 피에 절어 있었다.

몸에 걸친 갑주는 부서지고 깨져서 엉망진창이었지만, 눈빛에선 수라장을 헤친 자의 관록이 묻어났다.

사납게 타오르는 투기.

숭천문을 통과한 그들은 야생의 늑대 무리처럼 단단히 뭉쳐서 움직이지 않았다.

“저… 혹시 대표의 성함이나 별호를 말씀해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른 비 일행이 입장할 때 환영 인사를 했던 사내가 황급히 다가오며 물었다.

문지기들이 통과시킨 걸로 봐서 초대받은 자들일 텐데 전부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들은 얼굴에도 피가 묻어 있어서 아는 사람이었어도 구별하기가 힘들 것 같았다.

“패문강.”

무리의 맨 앞에서 창과 방패를 장비한 채 서 있던 사내가 입을 열었다.

잠시 뜸을 들인 그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별호는 북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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