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혼세록 남천제-301화 (301/463)

301화

“북벽?”

사내에게 관심을 기울였던 자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듣는 별호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명한 무인은 아니란 말인데…….

그럼에도 무림인들이 사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였다.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무지막지한 기운.

그는 칼 한 자루에 의지해 사선을 돌파해본 자만이 지닐 수 있는 전장의 냄새를 풍겼고, 숨 막힐 듯한 패력을 뿜어내고 있었다.

‘저건 마치…!’

바투. 혹은 무칼리.

저절로 그들의 모습이 겹쳐 보인다.

무인이라기보다는 무장의 색이 진하게 드러나는 남자였다.

실제 무력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보기 드문 자라는 건 확실하며,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군인이 틀림없었다.

‘뒤에 있는 자들은 수하인가? 저들도 하나하나가…!’

최정예.

사내를 따르는 자들은 명의 군세를 파죽지세로 휩쓸었던 지구르를 떠올리게 할 만큼 정련된 병사들이었다.

“북벽? 방금 북벽이라고 했나?”

그의 별호에 반응한 건 무림인이 아니라 군부 쪽이었다.

마른 비가 등장했을 때도 조용히 지켜보기만 했던 명의 장수들이 놀라워하며 몸을 일으켰다.

“음…! 정말 그가 왔는가!”

서달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림인들은 새삼스런 눈으로 패문강을 바라봤다.

“대장군께서 저런 반응을 보이다니……. 누구냐, 저자가?”

“북벽? 아무리 생각해도 들어본 적이 없는데…….”

“알려지지 않은 명의 장군인가?”

무림인 중 패문강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는 건 개방뿐이었다.

“북벽? 장성을 지키던 원의 장수 중에 그렇게 불린 자가 있었던 것 같은데…….”

“맞습니다. 굉장한 실력을 지녔지만, 한족이라는 출생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들었어요.”

“정확한 정보는 아닙니다만, 장성 너머에서 기묘한 일들이 벌어져서 그걸 확인하기 위해 한족 병사들을 차출하여 내보낸 적이 있다고 합니다. 그 수색대의 지휘자가 북벽이라 불리는 장수였다고….”

개방이 정보를 취합하는 방식이었다.

풍문이든, 정보원에게 들었든, 보고서에서 읽었든지 간에 자잘한 소식 하나까지 전부 토해놓고 그중에 옥석을 가린다.

패문강이란 사내에 대한 정보가 하나둘 모이기 시작했다.

“북벽이란 별호는 무림인들이 붙여준 게 아닐 겁니다. 저자가 지키는 곳은 개미새끼 한 마리 통과할 수 없는 철옹성이 된다고 해서 원의 병사들이 경외를 담아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이유는 모르겠지만, 탈영을 해서 수배가 붙었다고……. 보고서에서 그렇게 읽은 것 같네요.”

중구난방으로 떠들어대는 개방의 거지들 틈에는 구칠도 있었다.

“원의 치세 기간 동안 장성은 본방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어. 그래서인지 전부 단편적인 내용뿐이군. 나도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는데…… 악 대협이 의기충천의 깃발을 내건 후에 산동성에 진입한 정체불명의 기마대. 느낌상 그게 저들이 아닐까 싶은데?”

단편적인 정보지만, 그것들이 모이니 제법 실체에 다가가고 있었다.

그리고 구칠이 내놓은 추측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세간에 알려지지 않았을 뿐, 패문강이 이끄는 기마대는 산동성에 진입하여 원의 병사들을 학살하고 병량고를 불태우는 등 혁혁한 전공을 올린 바 있었다.

명 군부에서는 북방에 대한 공작을 시행할 때부터 그를 눈여겨봤고, 패문강이 장성을 넘어 남하하자마자 적극적인 영입 제의를 건넸다.

하지만 답변을 주지 않고 독자적으로 움직이던 그가 마침내 초청에 응한 것이었다.

피 칠갑을 하고 나타난 걸로 볼 때, 그들은 여태껏 어딘가에서 싸우다가 온 모양이었다.

“북벽?”

천진운과의 대화에 빠져 있던 마른 비도 그를 보았다.

좌중을 훑던 패문강의 눈길도 마른 비에게 닿았다.

둘의 눈에 이채가 떠오르는 찰나,

“황제 폐하, 납시오!”

천하의 주인으로 등극한 사내가 등장했다.

혈혈단신 맨몸으로 황제의 위에 오른 자.

금빛 찬란한 황포(黃袍)를 걸친 주원장은 제왕의 위엄을 만천하에 떨치며 단상에 올랐고, 수만의 군상을 굽어봤다.

광장에 모인 자들이 일시에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렸다.

“음…….”

주원장은 옅은 미소를 띠며 부복한 자들을 훑었다.

험난했던 여정이 스치며 헤아릴 수 없는 상념이 휘몰아친다.

한 번만 삐끗해도 나락으로 떨어질, 살얼음판 같던 나날들.

주원장이 지금 어떤 심정일지는 그 자리에 선 자가 아니고선 짐작하기 힘든 일이었다.

“……?”

만족스러운 눈으로 광장을 내려다보던 주원장이 흠칫 멈췄다.

모두가 엎드린 가운데 꼿꼿이 서 있는 자들.

황성으로 들어서는 입구에 모여 있는 일단의 무리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한 명의 사내와 하나의 무리였다.

‘결국 해냈네. 축하해, 아저씨.’

한 명은 마른 비였다.

그는 와족식 포권을 취한 채 주원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른 비는 한족이 아니었으며, 주원장의 권속에 든 명의 백성이 아니다.

그는 조력자였고, 손님이었으며, 황제의 목숨을 구한 은인이었다.

무엇보다 마른 비는 다른 자들처럼 주원장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조아릴 생각이 없었다.

험난한 여정을 거쳐 위업을 이룬 사내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전할 뿐.

‘뜻한 대로 천하의 지배자가 된 것을 축하하오.’

오체투지하지 않은 하나의 무리는 천진운을 필두로 한 마교의 인원들이었다.

천마신교.

그들은 천마를 교주이자 인신으로 받드는 종교 집단이다.

마교는 천 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신강의 끝자락에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했고, 무수한 제국이 명멸할 동안 독자적인 세력으로 명맥을 이어 왔다.

교리를 전파할 목적으로, 때로는 당대 천마의 패도적인 성향으로 말미암아 중원 무림을 도모한 적은 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특정 국가의 백성이란 생각을 버린 지 오래였다.

중원의 지배자에게 예를 표할 수는 있으나 천마의 후예들이 무릎을 꿇고 굴종을 드러낼 대상은 오직 당대의 천마뿐인 것이다.

마교의 인원들은 정중한 포권과 함께 깊숙이 고개를 숙였지만, 그들의 허리는 꼿꼿하게 서 있었다.

“폐하! 명만 내려 주시옵소서. 저 불손한 것들을 단칼에…!”

주원장을 호위하는 무사들이 눈을 부릅뜨며 칼자루를 움켜쥐었다.

그들은 마치 자신이 크나큰 모욕을 받은 것처럼 온몸을 푸들푸들 떨었다.

주원장의 눈이 순간 가늘어졌으나, 그는 손을 뻗어 호위 무사들을 제지했다.

‘난 약조를 지켰소. 이제 그대가 약속을 지킬 차례요.’

천진운은 눈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둘의 적은 같았으며, 천진운은 동등한 입장에서 주원장에게 협력했다.

강대한 적에게서 살아남기 위해 주원장과 함께 북벌의 밑그림을 완성한 것이다.

황제가 된 이상, 주원장은 이제 ‘그자’도 건드릴 수 없는 존재가 돼버렸다.

사영을 설득하고, 목숨을 걸고 싸워서 북벌을 성공시켰으니 이제는 주원장이 천진운을 도울 차례였다.

“그냥 둬라. 저들은 그래도 된다.”

주원장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려는 호위무사들을 뒤로 물렸다.

그리고 마른 비, 천진운과 한 번씩 눈을 맞췄다.

착각일까?

두 사람을 보는 주원장의 눈빛이 왠지 다른 것만 같았다.

“모두 고개를 들라.”

황제는 납작 엎드린 군중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말했다.

“새 시대가 열렸다. 영원할 것만 같던 원의 치세를 끝낸 건 모두 그대들과 같은 영웅이 있었기 때문이다. 짐은 그대들이 흘린 피와 땀을, 그리고 눈물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바늘 떨어지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정적.

하지만 광장에 밀집한 수만 명의 가슴은 격동하고 있었다.

“스러져간 동지들을 추모하라. 새 시대를 열었다는 자부심을 새겨라. 지금 이 순간, 세차게 뛰는 심장의 박동을 기억하라. 그대들이 세운 한족의 제국은 영원불멸하리라.”

폭발적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광장에 모인 이들은 자신의 손으로 새 역사를 썼다는 사실에 감격하고 있었다.

주원장은 열광하는 군중을 둘러본 후 미소를 띠며 말했다.

“오늘만큼은 마음껏 즐겨라. 짐이 모든 것을 다해 영웅들을 대접하리라.”

그는 함성이 잦아들기를 기다렸다가 힘주어 호명했다.

“서달. 앞으로 나오라.”

“예! 폐하!”

주원장과 일생을 함께한 개국공신.

명의 제일 무관 자리를 차지할 남자는 서달 외에 있을 수 없었다.

“상우춘.”

“네! 폐하!”

서달의 뒤를 이어 호명될 무장 또한 정해져 있었다.

주원장은 군부의 인물들을 차례로 부르며 고락을 함께한 장수들에게 후한 상을 내렸다.

야투를 포함하여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첩보와 공작, 인재 등용에 힘쓴 강무재 또한 공로에 상응하는 대우를 받은 건 물론이었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영웅이 있다.”

군부의 논공행상이 끝나자 다음 차례는 무림인들이었다.

그리고 주원장은 가장 먼저 악경을 언급했다.

“짐은 검 한 자루에 의지해 제국에 대항한 그의 의기를 잊을 수 없다. 협검이 저 숭천문을 깨부수고 광장에 돌입했을 때, 무도한 오랑캐들이 전율했을 광경을 상상하면 가슴이 끓어오른다. 그가 살린 목숨이 몇이며, 그에게 감화된 자들이 얼마인가. 짐의 제안을 수락하고 북벌의 전초전을 장식해준 그에게 무한한 영광을 바친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위업.

중원의 혼을 보여준 악경을 추모하며 군중들은 고개를 숙였다.

“십 년 전, 모두가 외면하고 불가능한 꿈을 꾼다며 비웃을 때, 짐의 곁에 서준 이들이 있다. 그들은 중원 무림에서 손가락질받고 멸시받는 가문이었다. 허나 그들은 용감하게 나섰으며, 그들의 가주는 협검과 함께 황성에 돌입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멸문의 위협을 감수하고 대의를 위해 나서준 당씨세가에게 개국공신에 준하는 지위를 허하노라.”

당가의 입지가 완전히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당천기의 도박은 성공했고, 노가주는 자신의 목숨과 가문의 미래를 맞바꿨다.

오욕의 세월을 견뎌낸 당가가 힘과 명성을 양손에 쥔 채 비상하려 하고 있었다.

“황성을 침공하여 카안의 등골을 서늘하게 한 세 명의 영웅 중 살아 있는 이가 있다.”

광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추측만 무성했던 암습자의 실체가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천마신교에서 파견한 그는 원의 정예를 뚫고 카안에게 칼을 들이밀었다. 그 결과 카안의 진노를 유발해 4만의 병력을 대도에서 빼내는 데 성공했지. 또한 그는 황실 삼대 무장 중 하나인 여휘를 중태에 빠지게 해 북벌에 일조했다.”

무림인들의 고개가 일시에 돌아갔다.

사영의 정체는 둘째치고, 마교에 살수가 존재한다는 사실도 모르던 자들은 소교주를 바라보며 경악을 토했다.

“불가능해 보였던 임무를 완수해 낸 사영에게 영살(影殺)의 호칭을 하사하고, 그가 천하제일살수임을 공언하노라.”

마교와의 협력을 인정하고, 일개 살수를 영웅의 반열에 올려놓는 것.

대단히 이례적이며 파격적인 조치였다.

주원장은 출신과 소속을 불문하고 공을 세운 자들에게 아낌없는 포상을 베풀었다.

술렁이는 군중을 둘러보던 그가 한층 가라앉은 어조로 말했다.

“그리고… 이건 꼭 언급해야겠군. 전쟁에 앞서 공언한 바 있지만, 원에 협력했던 점창의 장로 여휘는 방법이 다를지언정 한의 백성을 위해 쇄신했다. 그가 바라던 세상이 도래했으니, 짐은 연이 닿는다면 과거를 묻고 그를 중용할 계획이었다. 허나… 그럴 기회가 사라진 것에 통탄한 심정을 금치 못하겠구나.”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였다.

주원장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

“금일 새벽, 그가 유명을 달리한 것을 확인했다.”

“뭐, 뭐라고?!”

주원장의 말을 경청하던 마른 비가 깜짝 놀라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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