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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세록 남천제-302화 (302/463)

302화

십좌의 일인이자 점창의 장로이며, 원 황실을 대표하는 세 명의 무장 중 하나였던 남자.

여휘의 죽음을 전해 들은 사람들은 말을 잃었다.

주원장은 그들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준 뒤에 말했다.

“여휘에 대해 오해한 바가 있다면 풀어라. 그는 한의 백성을 위해 오욕의 세월을 감내했던 열사였다.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다가 적의 수괴 대신 목숨을 잃은 그의 심정이 어떨지 짐작이 되질 않는구나.”

마른 비는 주원장의 뒷말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정신없이 눈을 움직여서 친구를 찾았다.

저 멀리 정파의 진영 외곽에 넋을 놓은 채 주저앉은 여규가 보였다.

주변 사람들이 위로를 건네는 가운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그러다가 정신을 놓은 것처럼 푹 고꾸라졌다.

마른 비는 곧바로 그에게 달려갔다.

“규야! 정신 차려! 규야!”

여휘는 카안의 총애를 받는 무장이었고, 몸을 날려서 대신 칼을 맞은 그를 카안이 죽게 놔둘 리 없었다.

모든 수단을 동원해 치료할 것이고, 부상을 회복하면 머지않아 점창으로 돌아올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그런데 이렇게 되다니.

마른 비는 오열하는 여규를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사정이 어떻든 결국은 사영이 아저씨를 살해한 거잖아!’

연을 맺은 친구의 칼에 아버지가 목숨을 잃었다.

머리로는 사영의 잘못이 아니란 걸 알지만, 감정까지 이성을 따르긴 쉽지 않다.

마른 비는 여규의 마음이 어떨지 짐작할 수도 없었다.

‘아저씨가 원했던 세상이 이제야 왔는데, 그걸 보지도 못하고…….’

이날을 위해 그토록 힘겨운 길을 걸었는데, 여휘는 그 결과를 보지도 못하고 아들과 재회하지도 못한 채 숨을 거뒀다.

광장 전체가 침통한 분위기에 휩싸였다.

“카안은 여휘가 자신의 휘하에 들어온 이유를 이해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래서 더욱 그를 아꼈던 거겠지. 카안은 그가 가족의 품에서 잠들 수 있도록 우리 측에 시신을 보내왔다. 여휘의 아들, 여규. 앞으로 나오라.”

서달이었다.

주원장이 직접 공로를 치하하는 건 황성 침공에 가담한 세 명까지고, 그 뒤부터는 서달이 대신하는 듯했다.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던 여규가 비척대며 앞으로 나왔다.

서달은 안타까운 얼굴로 직접 마중 나와 그의 앞에 섰다.

“여휘가 백성들을 위해 힘쓴 공로. 그리고 이번 전쟁에서 여규 그대가 올린 전공을 치하하는 바이다. 점창의 제자 여규는 응천부에서부터…….”

서달은 여규의 공을 소상히 밝혔다.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허나 아버지를 잃은 여규는 웃지 못했고,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앉았다.

“철중구는 앞으로 나오라.”

철중구에 대한 포상도 빠질 리 없었다.

평소 같으면 요란하게 난리를 쳤을 그가 입을 꾹 다문 채 걸어 나왔다.

비보를 접한 철중구는 친구의 심정을 헤아렸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여규를 힐끔거렸다.

“소림의 일각. 앞으로 나오시오.”

편수 대사의 법명(法名)이었다.

여규와 철중구는 편수 대사보다도 앞서서 호명이 되었으며, 그건 정말 대단한 일이었다.

무인으로서 이름을 떨친 날이 가장 비통한 하루가 됐다는 사실에 가슴이 저려왔다.

“편수 대사는 좌익의 사기를 고취시켰고……. 몸을 아끼지 않고 싸워 아군의 생명을 구했으며, 전선을 유지시켜……. 또한 북벌에 가담하기 전부터 천하를 돌며…….”

논공행상은 객관적이고 엄격했다.

출신과 명성, 세력을 따지지 않고 실제로 열심히 싸운 자들에게 그만한 보상이 주어졌다.

그건 군웅들의 대다수가 고개를 끄덕일 만큼 합리적이었다.

“패문강. 앞으로 나오게.”

북벽이 편수 대사 다음으로 불린 건 의외였다.

사람들은 북벌에 가담하지 않은 그가 이토록 빨리 호명되자 놀랐는데, 서달의 설명은 고개를 끄덕이게 해주었다.

“그는 북벌에 앞서 원의 주요 시설들을 급습하여 심대한 타격을 주었으며, 초원으로 도망치는 적들을 추격하여 이천이 넘는 기마대를 베었다. 또한…….”

패문강이 다른 무림인과 차별되는 건 그에게 관직이 주어졌다는 점이었다.

북벽이란 별호처럼 그는 중원의 북쪽에 세워진 장성의 수비를 담당하게 됐는데, 차후 있을 원 잔당 토벌에서 일익을 맡게 될 거라고 했다.

그건 명이 중원을 회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장성을 넘어 초원으로 북진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 것이었다.

“전룡. 앞으로 나오라.”

영령과 둘이서 산동성을 헤집었고, 기주 평야 대회전에서 원의 진형을 돌파했던 전룡도 호명됐다.

서달은 정식으로 수라라는 별호까지 언급하며 그의 무위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전룡에게 동료를 잃었던 군부의 인물들도 전과는 달라진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한편 정사지간의 인물들이 모인 곳에서 전룡과 영령을 탐색하는 은밀한 눈빛들도 있었다.

“가만. 앞쪽에 호명된 자들이 편수 대사를 제외하면 전부 신진고수들이야. 놀라운 일이로군.”

“심지어 점창의 여규를 제외하면 나머진 어떤 세력에도 속해 있지 않은 자들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무림인들, 특히 사파의 방파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연회가 시작되면 곧바로 저들에게 접근해라. 한 명만 섭외해도 본방은 날개를 달게 될 것이야.”

“최대 직급은 장로. 봉록은 원하는 대로 준다고 해. 신병이기를 원한다면 천하를 뒤져서라도 구해주겠다. 전권을 위임할 테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본방으로 끌어들여라.”

지금 대도에는 차기 강호 무림을 진동시킬 신성들이 집결해 있었고, 인재가 절실한 세력들에게 이보다 좋은 기회는 없었다.

물 밑에서 영입 전쟁이 불붙고 있었다.

“그럼 끝으로, 백원 의원의 화인걸 원주. 앞으로 나오시오.”

무림인들이 저마다의 계획으로 술렁이는 동안 몇 명의 이름이 더 호명되고, 공을 세운 세력에 포상이 주어졌다.

서달이 마지막으로 언급한 건 백원 의원이었다.

“북벌에 참전한 백원 의원은 신묘한 의술로 수많은 장병의 목숨을 살렸소. 전선에 뛰어들어 응급처치를 행하는 전의들은 차후 전쟁의 판도를 뒤바꿀 귀중한 전력이라는 걸 깨달았지. 황실에선 앞으로도 그대들이 군부에 협력해주길 바라오. 잘 부탁하겠소, 화 원주.”

백원 의원을 노리는 세력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참전한 북벌에서, 전의들은 예상을 뒤엎는 활약을 펼쳤다.

군부의 비호를 받게 된 화인걸은 안도했으나, 그는 모르고 있었다.

탐심으로 가득 찬 눈초리들이 사방에서 그의 뒤통수를 훑고 있다는 것을.

“어? 잠깐만! 수왕은? 수왕이 언급이 안 됐잖아?”

논공행상을 지켜보던 이들은 문득 깨달았다.

가장 먼저 불릴 줄 알았던 마른 비가 여태껏 호명되지 않았다는 것을.

모두의 시선이 여규를 위로하고 있는 마른 비에게 향했다.

군중이 의아함을 느낄 때, 서달이 씩 웃으며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화려한 의자에 앉아 있던 주원장이 일어났다.

“천하의 영웅들이 집결한 자리에서 모두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내가 있다.”

미리 언질을 받은 서달을 제외한 자들이 눈을 커다랗게 떴다.

황제가 특별한 순서를 마련해 소개할 만한 사람은 한 명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응천부에서 짐의 목숨을 구했으며, 경천의 무력으로 전장을 휘저었다. 바투와 무칼리, 천하 최강으로 거론되는 무장들을 패퇴시켰지. 또한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는 선행으로 민초들의 신망을 얻었다. 이제 와서 생각건대, 그와 연이 닿은 것은 하늘이 준 선물이라고 느껴질 정도구나.”

철혈의 황제로 하여금 저런 극찬을 늘어놓게 만든 남자.

수만 개의 눈길이 당당하게 가슴을 편 이족의 사내에게 집중됐다.

“건우. 아니, 본래의 이름은 마른 비라고 했던가? 오래 기다리게 해서 섭섭한 건 아니겠지?”

주원장이 짙게 웃으며 말했다.

마른 비는 잠시 그를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천하의 주인 앞에서도 밀리지 않는 존재감을 뿜어내는 사내.

마른 비가 주원장과 마주 선 순간, 군중들은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친구는 어디에 있지? 데려오지 않았나?”

주원장의 물음에 마른 비는 말없이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스르륵 풍경이 갈라지며 신령한 영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푸른 눈을 가진 백호는 마른 비의 오른손에 머리를 부비더니 군중을 오연한 눈으로 둘러봤다.

“커허헝!”

푸르른 하늘 아래, 시대의 교체를 상징하듯 불에 탄 대명전이 서글픈 위용을 드러낸다.

금빛의 황포를 두른 절대자마저 그를 위한 배경으로 전락해 버릴지니.

별비와 나란히 선 마른 비는 광장에 집결한 이들에게 잊지 못할 광경을 선사했다.

“진심으로 고맙단 말을 전하네. 자네가 아니었다면 많은 부분에서 어려움을 겪었을 거야. 내 마음을 표현하고 싶은데…….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도통 모르겠더군. 자네에게 필요한 게 무엇인지.”

주원장은 잠시 시간차를 두고 말했다.

“보물, 영약, 권력, 지위……. 원하는 게 있다면 말해보게. 그게 무엇이든 한 가지는 들어주지. 아, 물론 예전에 내 목숨 값으로 달아둔 것과는 별개일세.”

주원장은 황제가 되고도 여전히 계산에 철저했다.

마른 비는 그게 재밌게 느껴져서 피식 웃었고, 천천히 입술을 뗐다.

“우선 축하해. 결국 여기까지 왔구나. 정말 대단해, 아저씨. 아저씨가 만들 세상은 다르길 바라겠어.”

인사를 건넨 마른 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원하는 것이라…….

그런 게 있었나?

아, 있다. 정산해야 할 한 가지가.

마른 비는 주원장과 눈을 맞추며 말했다.

“원하는 걸 말하랬지? 그럼 이제부터 내가 무슨 짓을 하든 그냥 지켜봐 줘. 그게 내가 바라는 거야.”

“……지켜보라고? 그게 무슨….”

마른 비는 주원장의 대답도 듣지 않고 몸을 돌렸다.

그리고 군부의 인물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천 명이 넘는 사람 중 구석진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자.

눈에 띄지 않게 기척을 숨기고 있지만, 마른 비가 그 더러운 기질을 놓칠 리 없었다.

“와 있을 줄 알았지. 이리 나와.”

마른 비는 대열의 바깥에 서서 말했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엔 동요하는 표금산이 있었다.

“배짱 좋네. 죽어라 도망 다녀도 모자랄 판에 이런 곳엘 다 오고. 일부러 나온 거겠지? 너 같은 놈은 이런 걸로 희열을 느낄 테니까.”

정확한 추측이었다.

표금산은 마른 비가 강해지고 명성이 높아질수록 짜릿한 흥분에 휩싸였다.

일전의 암습으로 숨을 끊지는 못했지만, 마른 비가 강자들을 거꾸러뜨리고 거물이 될수록 그를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은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꼈다.

그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마른 비가 더욱 무르익었을 때 잡아먹기 위해서.

표금산은 자신의 검이 마른 비의 복부를 관통할 때의 손맛을 잊지 못하고 있었다.

“나를 관찰하러 온 거겠지? 설령 마주치더라도 내가 손을 못 댈 거라고 확신하고.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자들이 마른 비의 앞에서 비켰다.

서서히 끓어오르는 야생의 살기.

수왕의 진노가 타오르고 있었다.

“날 너무 만만히 봤네. 내가 널 그냥 놔둘 거라고 생각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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