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화
마른 비는 한 발 한 발 표금산에게 다가갔다.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감상하며.
표금산은 예기치 못한 상황을 맞아 말도 제대로 잇지 못했다.
“자, 잠깐! 설마 여기서?! 미친…! 폐하와 군부의 장군들이 보이지 않는단 말이냐?!”
표금산의 앞까지 다가간 마른 비는 우뚝 멈췄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살기에 반응한 장수들 몇 명이 칼자루를 움켜쥐고 있었다.
마른 비가 멈추는 걸 보고서야 표금산은 원래의 안색을 되찾았고,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으로 빠르게 외쳤다.
“야만인 놈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감히 폐하의 어전에서 살기를 드러내다니! 네가 이따위 짓을 벌이고도…!”
마른 비는 다시 표금산을 쳐다봤다.
그리고 웃었다.
“역시 그걸 믿었던 거네. 근데 어떡하지? 오늘은 네 계산이 틀린 것 같은데.”
콰악!
마른 비는 왼손으로 표금산의 목을 움켜쥐고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고 컥컥 대며 버둥대는 그에게 말했다.
“내 목숨을 노린 대가는 치러야지?”
콰쾅!
너무 빨라서 보이지도 않는 주먹이 표금산의 양어깨를 으스러뜨렸다.
“끄, 끄아아악! 미친…! 네가, 네가 이런 짓을 벌이고도…!”
“벌이고도 뭐? 어쩔 건데?”
슈아아악―!
표금산은 내공을 끌어 모아 발차기를 날렸다.
그의 정강이가 마른 비의 팔뚝을 후려쳤다.
하지만 수왕은 끄떡도 없었다.
“쳤어? 한 대씩 주고받을까?”
빠아아악!
“크아아아아!”
표금산의 왼쪽 허벅지 뼈가 부서졌다.
그는 짐승처럼 울부짖으며 주원장을 바라봤다.
“폐, 폐하! 이걸 보고만 계실…!”
그 순간, 주원장의 표정을 본 표금산은 깨달았다.
그가 끼어들지 않으리란 것을.
모두가 보는 앞에서 마른 비에게 약속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이든, 원하는 것 한 가지를 들어주겠다고.
더군다나 주원장은 표금산이 마른 비를 암습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나, 날 버린다고?!’
표금산은 뛰어난 사냥개였고, 주원장은 어지간하면 그를 살려서 쓰고 싶었다.
하지만 상황이 여기까지 온 이상 어쩔 수 없다.
아무리 우수한 개라도 수왕과 비교할 순 없으니까.
명분이든 실리적인 측면이든 지금 마른 비를 막는 건 현명한 행동이 아니었다.
“빌어먹을! 보고만 있을 거요?! 야만인이 황제의 신하를 건드는데 가만히 놔둔단 말인가?!”
주원장이 방관하리란 걸 깨달은 표금산이 주위를 둘러보며 필사적으로 외쳤다.
그러자 앞뒤 사정을 모르는 장수들이 입술을 깨물었다.
어전에서 살기를 드러내는 것도 있을 수 없는 일인데,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사람을 해친다?
그것도 황제의 신하를?
마른 비의 행동은 주원장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게 무슨 짓인가! 당장 그를 내려놓게!”
차차창!
군부의 장수들이 칼을 빼드는 순간!
“멈춰라! 전부 뒤로 물러나! 그냥 지켜봐라!”
서달이었다.
뒷감당을 해주겠다는 약속.
그는 기주 평야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지켰다.
서달의 명령에 군부의 장수들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생각대로 안 되지? 또 시도해볼 건 없어?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다 해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마른 비가 여유롭게 웃으며 말했다.
표금산의 얼굴에 절망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는 핏발 선 눈으로 최후의 발악을 했다.
“으아아아아!”
빠바바바박!
표금산은 멀쩡한 오른 다리로 미친 듯이 각법을 쏟아냈다.
바위도 가루로 만들 발차기가 마른 비를 두드렸지만, 교룡갑을 펼친 수왕의 육신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 대장…!”
보다 못한 표금산의 수하들이 나섰지만, 그들은 검을 뽑기도 전에 덜컥 멈췄다.
마른 비의 뒤.
시퍼렇게 빛나는 야수의 안광이 그들을 노려봤기 때문이다.
“크르르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마라.
먼저 움직이는 놈부터 갈기갈기 찢어줄 테니까.
별비와 눈이 마주친 자들은 등줄기를 훑는 공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다 한 거야? 이 정도 실력으로 사냥꾼 운운했단 말이지?”
마른 비가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표금산의 발차기가 온몸을 두드려 대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미리 짜고 연극을 하는 게 아닐까 싶을 만큼 믿기 어려운 광경이었다.
“봐. 넌 사냥꾼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어. 넌 그냥 사람을 해치면서 즐거워하는 쓰레기일 뿐이야.”
후아아악―!
자연기가 집중되고, 응징의 철퇴가 내린다.
점점 확대되는 주먹을 보며 표금산은 미친 듯이 소리 질렀다.
“카아아악! 죽어서라도 널 가만두지 않을 거다! 이 야만인 새끼야아아아!”
퍼어억!
비명은 언제 그랬냐는 듯 뚝 끊겼다.
손아귀의 힘을 풀자 표금산의 육체가 툭 떨어져 내렸다.
“그러던가 말던가.”
마른 비는 표금산이 남긴 저주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더러운 살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 가만히 있는 자신을 암습한 자.
마른 비는 일말의 사정도 두지 않고 표금산을 처리했다.
“맙소사…….”
“이, 이게 무슨…….”
군중은 경악에 휩싸여 침묵할 뿐이었다.
마른 비는 발밑에 쓰러진 표금산을 내려다보다가 주원장에게 시선을 옮겼다.
“다 됐어, 아저씨. 내가 바라는 건 이루어졌어.”
“음……….”
마른 비는 바라봤고, 주원장은 침음했다.
그는 마른 비가 포상을 이런 용도로 사용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언젠가 표금산을 찾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설마 이 자리에서 손을 쓸 줄이야.
심지어 모든 걸 얻을 수 있는 기회와 맞바꿔서 말이다.
“그게 자네의 선택이란 말이지…….”
원래라면 당장 목을 쳐도 모자란 행동이다.
황제의 권위를 심각하게 실추시켰기 때문이다.
허나 원하는 건 무엇이든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솔직히 자신도 표금산이 마른 비의 목숨을 노렸다는 걸 확신한다.
‘이건… 눈감아줄 수밖에 없겠군.’
주원장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언짢은 기색을 숨길 순 없었다.
그걸 가만히 지켜보던 마른 비가 말했다.
“기분 나빠하지 마, 아저씨. 앞뒤 사정을 알잖아.”
아무 이유 없이 내 목숨을 노린 자.
자신이라도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복수했을 터다.
그리고 사실 마음만 먹으면 정황 증거 따위 무시하고 표금산을 처벌할 수도 있었다.
편리한 칼이기에 가급적 살려두려 했는데, 자신이 손을 쓰지 않자 마른 비는 과감하게 직접 해치워 버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손으로 잘라버릴 걸 그랬군.’
따지고 보면 이건 자신이 미안해야 할 상황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주원장은 굳었던 표정을 풀 수밖에 없었다.
마른 비는 주원장의 심경 변화를 지켜보다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럼 정리된 거지? 오늘 연회라며? 나 배고파. 밥 줘, 아저씨.”
공석에서야 어쩔 수 없이 나누어졌지만, 사석에서까지 그럴 필요는 없다.
마른 비 일행은 연회가 시작되자마자 한곳에 뭉쳤다.
여규와 철중구도 소속만 정파, 사파일 뿐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언제나 수다의 시작은 철중구였다.
“와 씨, 심장 쫄려 뒈지는 줄 알았네. 황제 앞에서 신하를 조져 부러? 하여튼 이 새끼가 나보다 더 하다니까? 평소에는 멀쩡한 놈이 꼭지 돌면 뵈는 게 없어요! 비아 너, 걱정 안 되냐?”
철중구는 욕설 섞인 감탄을 늘어놓더니, 서달과 술잔을 기울이는 주원장을 힐끔거렸다.
나중에 앙갚음이라도 할까 봐 걱정하는 눈치였다.
마른 비는 염려 말라는 듯 웃었다.
“괜찮아. 일을 낼 생각이면 아까 냈을 거야. 수긍하고 넘어간 이상 아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철중구는 그래도 못 미더운 눈치였다.
“겁나 빡쳤는데 보는 눈이 많아서 참고 있는 거면? 저 인간이 천하를 담을 그릇인지는 몰라도 지 심기 건드린 놈을 가만 놔둘 성격은 절대 아니여.”
주원장을 이토록 원색적으로 표현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마른 비는 철중구의 말이 웃겨서 킥킥댔다.
“그건 중구 네 말이 맞는데, 그래도 괜찮을 거야. 느낌이 그래. 아저씨가 이상하게 나한테는 호의적이더라고. 그리고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인데 보복을 하려고 들면 어쩔 수 없지, 뭐. 싸울 수밖에.”
마른 비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고, 철중구는 입을 떡 벌렸다.
“싸운다고? 누구랑? 황제랑? 시벌… 존나 오늘만 사는 남자여. 만약 그렇게 되면 난 빼줘라. 개죽음은 싫다.”
철중구의 너스레에 마른 비와 여규가 웃을 때였다.
이 셋 말고는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또 다른 일행이 찾아왔다.
“오라버니! 미쳤어, 진짜? 복수를 하고 싶은 건 알겠는데, 나중에 해도 되잖아? 황제 체면 깎아 먹고 살아 있는 게 기적이다!”
영령이었다.
그녀는 나타나자마자 허리에 손을 짚고 바가지를 긁었다.
전룡도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했다.
“조마조마했다. 황제가 약속을 뒤집으면 손도 못 쓰고 죽을 상황이었어. 이번엔 너무 무모했다, 비아야.”
고개를 들어보니 군부의 인물이고 무림인이고 가릴 것 없이 전부 마른 비를 곁눈질하며 수군대고 있었다.
연회가 시작됐지만 흥이 나지 않는 이유였다.
황제 앞에서 표금산을 살해한 마른 비의 행동에 충격을 받은 것이다.
사정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아무리 약속이라지만 황제의 권위에 손상을 입힌 마른 비를 놔두는 이유를 알 수 없었고, 당장이라도 난리가 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이런……. 즐거운 날인데 나 때문에 다들 얼어 있구나. 이건 좀 미안한걸.”
마른 비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댔다.
영령은 한숨을 푹 쉬더니 그의 옆에 털퍼덕 앉았다.
“하여튼 진짜 특이한 인간이야. 살다 살다 오라버니 같은 사람은 처음 봐.”
“네가 살아봤자 얼마나 살았다고? 쥐똥만 한 게 살다 살다는 무슨….”
철중구가 술을 쭉 들이켜며 말했다.
영령은 쌍심지를 켜고 그를 노려봤다.
“아저씨. 왜 또 시비야? 죽을래?”
“아저씨이~? 비아랑 규는 오라버닌데 왜 난 아저씨냐! 네가 뭘 모르나 본데, 내가 장사 거리에 나타나면 여자들이 ‘오라버니잉~!’ 하고 콧소리를 내면서 줄을 쫙 섰다, 인마!”
영령은 웃기지 말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이 아저씨 또 이빨 털고 앉아 있네. 솔직히 말해. 여자 손목도 못 잡아봤지? 허우대만 멀쩡한 사람을 누가 좋아해? 규 오라버니처럼 매력덩어리면 모를까. 여자로서 말하건대 아저씨는 인류 역사상 최악이야.”
언제 시작됐는지는 몰라도, 백원 의원에 있을 때부터 철중구와 영령은 만나기만 하면 티격태격했다.
격의 없고 시원시원한 면이 비슷해서 잘 맞는 것 같았다.
물론 ‘비슷하다’고 하면 둘 다 거품을 물겠지만.
아무튼 띠 동갑도 넘는 둘이 으르렁대는 건 우스운 광경이었고, 그 덕분에 일행의 분위기는 밝아졌다.
“와~! 드디어 나왔다!”
음식이 나오자 일행은 더욱 신이 났다.
나흘 내내 잠만 자느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마른 비 일행은 걸신 들린 것처럼 음식을 쑤셔 넣었는데, 심지어 주원장이 준비한 만찬은 오리구이였다.
응천부에 있을 때 그 맛에 감탄한 주원장이 숙수들을 여기까지 데려온 것이다.
훗날 북경고압(北京烤鴨)이라고 널리 알려질 요리가 장강을 넘어 북쪽에 전해진 순간이었다.
“미쳤어! 이건 혁명이야!”
어디서 그런 단어를 배웠는지 마른 비는 혁명이라는 말까지 써가며 감탄을 연발했다.
셋 중 가장 교양 있는 여규조차 체면이고 뭐고 신경 쓰지 않고 먹어댔으니, 그들이 식사하는 광경은 썩 보기 좋은 모습은 아니었다.
일행을 주시하던 자들이 눈살을 찌푸렸으나, 그들은 그런 시선 따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나흘 동안 아무것도 못 먹어서 당장이라도 죽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체하겠다. 천천히들 먹어.”
맏형 격인 전룡이 느긋하게 술을 마시며 일행을 챙겼다.
그는 영령이 누군가와 어울리는 게 좋았고, 마른 비 일행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입가엔 보기 드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음?”
양손에 고기를 들고 입에 욱여넣던 마른 비가 흠칫 멈췄다.
신경을 건드리는 기운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엔 마교의 인물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앞에 놓인 음식과 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특히 천진운은 착 가라앉은 표정으로 주원장을 노려보고 있었다.
“뭐야? 왜 저러지?”
일행의 눈길도 그리로 향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고, 무언가를 알아챈 듯 여규가 탄성을 흘렸다.
“아, 맞다! 그러고 보니…!”